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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 난 그리고 인조의 몽진 이야기
아들아, 이번에는 공산성에서 만난 역사와 인물 마지막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아빠가 앞에서 고려시대 현종대왕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더냐.
이번엔 거기서 또 세월이 흐르고 흘러 시대가 바뀐 조선 중기..인조의 이야기란다.
쌍수정 사적비
공산성의 또다른 이름은 쌍수산성(雙樹山城), 공산성에는 쌍수정이란 정자가 있는데
특히 인조(仁祖,1595~1649, 재위1623~1649)와 인연이 깊은 곳이었단다.
아들아, 인조하면..역사에서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무능하고 나쁜 임금으로 선조와
쌍벽을 이루며, 참 욕을 많이 먹고 있지.
인조 (드라마 일지매 中), 아빠가 생각한 인조의 이미지에 의외로 가장 잘 어울렸던 김창환씨
인조가 우리 역사 속에서 가진 신기록이 있는데..아주 불명예스런 기록이지..
아들아, 그건 바로..서울을 버리고 몽진길에 오른 최다 기록 보유자라는 것이다.
첫번째는 이괄의 난 때, 두번째는 정묘호란 때, 세번 째는 병자호란 때였고,
아주 전무후무한 기록이지. 참 대~단하신 분이야.
인조와 공산성의 인연은..인조가 이괄의 난을 당하여 공주로 몽진을 해와서
공산성에서 머물렀고, 이곳에서 이괄의 난 평정소식을 들었다고 해.
그래서 말인데..아들아, 이번에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대규모 반란사건이자,
반란군이 서울을 점령한 유일한 사건인..그 이괄의 난(李适의 亂)을 한번
들여다 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한다.
먼저..이괄의 난을 제대로 보려면 시계바늘을 뒤로 돌려 1623년 3월 12일,
인조반정(仁祖反正) 때로 돌아가야 한다.
광해군(光海君)이 명과 후금 사이 중립외교를 펼치는 것에 대한 불만,
명을 받드는 사대의식과 광해군이 ~~형인 임해군과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왕후를 폐하고 서궁에 유폐시킨 패륜에 대한 행위를 벌한다는 명분으로
김류(金瑬,1571~1648), 이귀(李貴,1557~1633), 신경진(申景縝,1575~1643),
김자점(金自點,1588~1651), 심기원(沈器遠,?~1644), 최명길(崔鳴吉,1586~1647)
등 서인세력이 능양군 이종을 받들어 반정을 일으켰지.
능양군과 서인세력의 모반 조짐을 미리 알았으나, 광해군은 어쩐 일인지..
무방비 상태로 가만히 있다가 반정군이 대궐의 대문을 깨고 쳐들어오자
도주했다가 잡혀, 왕위를 내어놓고 유배길에 오르게 되고,
능양군 이종은 인목왕후의 재가를 받아 왕위에 오르니 이자가 바로..
조선 16대 왕인 인조다.
세검정 (인조반정 때 반정군 집결지)
아들아, 그런데 인조반정의 그날에 있었던 일이었다.
반정세력 중에 이괄(李适, 1587~1624)이 있었는데, 그는 함경도 병마사..
반정군을 지휘하고 이끄는 실질적인 최고 실력자였다.
반정을 일으키는 그날에 이이반이란 자가 역모를 고변하자, 반정에 참여한 자들은
위협을 느껴 반정을 앞당겼는데, 반정군의 총대장을 맡은 김류가 두문불출하며
나타나지 않는거야..
반정공신 김류
김류는 역모 고변을 알고, 그는 반정에 무관하다는 걸 보이려는 의도에서 그랬던거지.
그래서 이괄이 임시대장으로 반정군을 지휘하여 성공시킬 때 쯤에서야 김류가 나타나
반정군의 앞에 섰단다.
이괄은 노해서 김류를 그 자리에서 베려했고, 이귀가 만류하며 이런 험악한 상황은
정리되었다.
반정공신 이귀
일단, 반정을 성공시켰지만..
이괄은 이때부터 김류, 이귀 같은 자들에게 환멸을 느꼈지.
비겁한 자들, 기회주의자들, 무늬만 선비, 썩은 자들..
이괄의 눈에 비친 김류, 이귀의 모습이 딱 그랬을 거야.
아들아, 그런데 또 웃긴건..이괄의 시각에서 한번 얘기해볼까?
정작 그 반정에 나서 가장 주도적으로 이끌어 성공시킨 이괄 자신은 2등 공신으로 자리맥임 됬어
정작, 위험할 땐 뒤로 숨었다가 뒤늦게 나선 김류, 이귀 같은 자는 1등 공신이 되었고..
항상 자신보다 윗서열에서, 왕의 가까이에 자리했지.
그러니 인조의 잘못된 논공행상에 당연히 불만을 가질만 했지.
아마, 김류와 이귀도 이괄의 그런 시선을 느꼈겠지.
김류와 이귀는 감히 무부(武夫) 따위가 자신들과 맞먹으려 들고,
감히 자신들을 무시한다며..고깝게 여겼겠지.
그래서 이괄을 멀리하고 견제해야 겠다 마음 먹었을거야.
그렇게 그들 사이엔 금이 가기 시작해.
어쨌든..반정은 성공했고, 광해군을 몰아내고..
그 주위에 있던 북인세력에 대한 유례없는 잔인한 숙청
7년 조일전쟁, 3년전 선비 수천명이 죽어 나갔던 기축옥사의 재판이라 할까..
왜 그랬는가.
그것은 그 반정도 그렇고 능양군 이종도 반정의 명분이 약했고,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그들의 정권도 늘 불안했거든.
그래서 인조와 그를 둘러싼 반정공신들이..그렇게 반대파를 잔인하게 숙청하고
감시하며 뒷조사를 했지. 왜냐면..불안하니까.
아들아, 이괄은 그래도 처음엔 인조의 신임을 받았던 것 같아.
포도대장이 되고 인조의 그 기찰정치(감시)의 중심에 있었어.
이때는 하루 자고나면 고변이 넘치고 또 하루 아침에 끌려가고 죽고..
세상에 이런 나라가 또 있을까.
그런데..인조의 신임을 받는 심복으로 기찰정치의 중심에 있었던 이괄이
그 기찰정치의 표적이 되다니..이런 기막힌 반전이 또 있었을까.
1623년, 이괄은 평안도병마사 겸 부원수가 되어 영변(寧邊)으로 갔단다.
물론, 북방 후금이 심상치 않았던 상황이기도 했고..
최전방인 평안도에 능력있는 무장이 가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이는데,
하지만 이괄의 갑작스런 변방행은 아마도 김류와 이귀가 그 뒤에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이괄은 영변에 도착해서 어쨌든..평안도 병마사에 부원수니까 성을 새로 수축하고
군사를 조련하는 등 나름 제 할일은 했는데, 이괄이 기찰정치의 표적이 되어있고..
마침내 이괄이 역모를 꾀한다는 고변이 올라가기까지 했지.
정확히는 이괄이 아니라 그의 외아들 이전이 고변의 대상이었단다.
1624년 1월의 일이었는데 문회, 허통, 이우 등이 이괄의 아들 이전을 비롯해
한명련, 정충신,기자헌, 이시언 등을 역모로 고변한 사건이었다.
억울하게 생사람 많이 잡았지.
7년 조일전쟁 때 북관대첩의 영웅 충의공 정문부 선생(忠毅公 鄭文孚)도,
7년 조일전쟁에 공이 있었던 이시언 장군(李時言,?~1624)도,
전 영의정 기자헌(奇自獻,1567~1624)도 억울하게 연루되어 희생되고
충무공 정충신 장군은 풀려났으나..아까운 인재를 잃을뻔 하였다.
사실 이전은 지식인들과 어울리고, 반정공신의 횡포를 논하며 국정이 문란함을
한탄한것 뿐인데 이게 그렇게 일이 커져서 역모가 되어 버린 것이었지.
한마디로..정치에 불만 좀 얘기했다고 한마디 한 것을 시국사범으로 만들고,
반역죄인으로 몰아버린 것이지.
인조는 그래도 이괄은 믿었던 것 같지만, 그럼에도 이괄은 그냥 두고
아들 이전만 압송하라 명했어.
이괄은 전방에서 이를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어.
드디어 그의 아들을 잡아 들이라는 명을 받은 금부도사가 도착하자,
이괄의 분노가 폭발해 버렸지.
'나에겐 외아들 밖에 없는데, 이 아이가 잡혀가서 장차 죽음을 당할 것이고..
아들이 역모로 죽음을 받는데 그 아비가 온전할 수 있는가?'하며
금부도사를 베고, 바로 반란의 칼을 뽑아 들었단다.
평안도 병마사이자 부원수인 이괄은 1만2천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아들아,평안도의 병력은 당시 조선군 최정예였고, 또 그 선봉에는 항왜부대가 있었지.
아들아, 이전에 달성의 녹동서원 갔을때 김충선 얘기를 하면서 항왜 얘기를 했던 것을
기억하느냐..그들중 상당수가 이괄의 부대에 소속된 것 같아.
김충선도 이괄의 난을 평정할때 참여하여 이괄의 휘하에 있던 항왜 서아지(徐牙之)를
처단하는 공을 세웠었단다.
1624년 3월 11일, 이괄과 의병장 출신으로 구성부사인 한명련(韓明璉)이 이끄는
반란군은 빠른 속도로 남하하였고, 이 소식이 전해지자 인조는 이괄의 난에 내응할 것을 염려하여
관련자들과 이괄의 가솔 등을 처형했다.
도원수 장만(1566~1629), 이괄의 난 진압과 정묘호란 참전한 당대의 국방전문가
아들아, 이괄의 1만2천 반란군은 과연 조선 최정예군 다왔단다.
도원수 장만이 있는 굳건한 평양성을 우회하여 빠른 속도로 남하하며,
황주 신교에서는 정충신, 남이흥이 이끄는 군대를 격파하고,
마탄에서 부체찰사 이시발을 패배시키며 황해도방어사 이중로, 우방어사 이성부를
전사시켰으며..그 기세로 개성을 지나 3월26일, 임진강을 건넜고..
3월 29일 드디어 도성인 한성에 입성하였지.
충무공 만운 정충신(1576~1636),이괄의 난 진압과 정묘호란 참전, 청과의 단교 반대 후 유배
인조는 이괄의 반란군이 개성을 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황망히 몽진길에 나섰단다.
인조가 얼마나 인심을 잃었느냐 하면은..인조가 피란길에 나서 강을 건너려는데
사공들이 숨어버리고, 배 한척을 겨우 구했더니 왕은 제쳐두고 신하들이 서로 살려고
먼저 타기 위해 난리가 난 웃지 못할 현실.
또 반란군이 도성에 입성했는데 비분강개하는 백성들이 아니라
길을 닦고, 황토를 깔며..입성한 반란군을 환영하고 있는 모습.
백성들 입장에서는 누가 왕이 된들..상관없다는 이런 모습을 보면
인조가 그 얼마나 인심을 얻지 못한 불안한 임금이었는지 잘 알 수 있지.
충장공 남이흥(1576~1627), 이괄의 난 진압과 정묘호란 참전..안주성에서 장렬하게 전사함.
반란군이 도성을 함락한 조선 역사상 유일한 사례인 이괄의 난. 그 충격은 엄청났다.
인조는 반란군을 피해 수원을 지나 천안에 이르렀고, 천안에서 이괄의 난 평정 소식을
들었지만 패잔병이 경기 광주로 후퇴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남하하여 최종적으로는
공주에 이르렀지.
인조는 이때 5일 정도 공주 공산성에서 머물렀단다.
그런데 도성에 입성한 이괄.
장수로 뛰어나긴 했지만 넓고 긴 안목이 없는..딱 그정도의 인물에 지나지 않았던가.
이괄은 도성에 입성한 후에 실책을 범했어.
따지고 보면 1만2천도 많은 병력이 아니라..반정을 성사시키려면 인조를 사로 잡거나
해야 하니 급히 추격해야 하는데..한성에 주저앉아 며칠을 지체했어.
그리고 한성을 버리고 도주한 인조 대신에 흥안군 이제(興安君 李瑅, 1598~1624)를
새로운 왕으로 세웠어. 흥안군 이제는 원래 인조와 더불어 몽진하다가 도중에 도망쳐
반군에 합류하여 왕으로 추대되는데..
아마도 미리 이괄과 내통하고 있었거나, 그도 아니면 분에 넘치는 왕위에 대한 욕심에
눈먼 사람이었던 모양이야. 머지않아 그 선택의 대가를 값비싸게 치르게 되지만.
그런데 이 흥안군 이제..인조실록에 보면 사람됨이 용렬하고 패악스런 행실이 있다는
기록이 있고, 연려실기술에 기록된 백성들이 이괄이 흥안군을 왕으로 세운 걸 보면..
오래 못가겠구나 하고 말했다는 대목을 보면..
흥안군은 인조만큼이나 왕재가 한참이나 모자란 인물이었겠지.
백성들의 예상은 그대로 들어맞게 되지.
아들아, 한성에서 이괄과 흥안군이 머무른 것은 단 3일, 3일 천하(三日天下) 였다.
도원수 장만(張晩), 정충신(鄭忠信)과 남이흥(南以興)이 이끄는 관군이 도성밖
안산(鞍山)을 점령하자, 이괄은 자신있게 이들과 싸우러 출전하고..
백성들은 멀리서 그들의 전투를 구경하고 있었지. 역사상 다시없을 진풍경이었을 거야.
드라마 화정 속 이괄의 최후
치열한 전투 끝에 이괄은 패전하고..그 기세가 크게 꺾이고 군이 흩어져 버렸지.
그리고 한성에서 빠져나와 경기 이천에 이르렀지만,
그곳에서 부하인 기익헌, 이수백의 배신으로 한명련 등과 죽음을 당하며..
이괄의 난은 그렇게 막을 내렸단다.
끝은 허무했지.
인조는 공산성에서 이괄의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서 공산성의 두 거목에
고위 관직을 내렸고, 공산성을 쌍수산성이라 이름했다고 해.
그 자리엔 지금 쌍수정이란 정자가 서있고, 그 아래엔 그 내력을 전하는 쌍수정사적비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아들아, 이괄의 난과 인조의 공주 몽진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 된다.
그러나..아들아,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몽진길에 공산성에 머물다간 두명의 국왕인 조선의 인조와 고려 현종대왕.
이후 이들의 처신은 크게 달랐다.
고려 현종대왕은 그를 홀대하고 버리고 간 이들도 용서하고 포용한 반면에,
인조는 이괄의 일족과 관련자들에 대한 피비린내나는..보복을 했지.
그뿐인가. 현종대왕과는 달리 인조는 그의 잘못에 대해 돌아보지도 않았던 모양..
마지막까지 반성을 할 줄 몰랐으니..변하지도 않았다.
인조의 기찰정치
민심을 다독이는 그 어떤 조치도 없이..오직 감시와 위협(기찰정치)에만 매달렸어.
그놈의 기찰정치 때문에 적과 대치하고 있는 최전방의 장수들도 의심받을까
무서워서 군사훈련도 제대로 못하고, 성도 고쳐쌓지 못하고..
도대체 인조, 그리고 그를 둘러싼 측근들은 왜 그러했는가?
왜 그들은 고려 현종대왕의 길을 보고 따라 배우지 못하고 이렇게 한심한 모습만을
백성과 후손들에게 자꾸 보이며, 실망시키는 것일까.
아들아, 이괄의 난은 이괄의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단다.
무슨 말인가 하면..이괄이 이끄는 반란군은 후금과 맞닿은 국경을 지키는
조선의 최전선을 지키는 조선의 최정예군이었는데 이들이 다 죽고 흩어졌으니
그 공백을 무엇으로 채우고, 어떻게 나라를 지켜야 할까.
거기에 이괄의 난, 반란자들 중 살아남은 한윤(韓潤)이
압록강을 건너 후금으로 갔단다.
한윤은 후금에 귀부해서 후금황제 홍타이지(皇太極)에게 조선을 치라고
끊임없이 충돌질하고, 결국은 그는 1627년 후금의 3만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는 향도가 되어 돌아왔지.
아들아, 1627년 1월..후금의 3만 기마병들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말달려 건너
쳐들어왔단다. 그러나 평안도 일대를 지켜야 할 주력군이 죽고 흩어졌으니
무슨 힘으로 그들을 막아낼 수 있을까.
그나마 남아 있는 평안도의 군사들을 이끄는 장수들도 그 인조와 측근세력의
기찰정치(감시정치) 때문에 의심의 표적이 되지 않으려고 제대로된 군사훈련도 못하고
군비도 갖추지 못했는데.. 어떻게 강한 적을 맞아 싸워 이길 수 있을까.
그렇게 우리는 정묘호란에서 패전하고, 뒤이어 병자호란에서도 패하며
인조는 역사상 유례없는 항복의식을 행하는 수치를 받아야 했다.
대사간 충경공 유백증(兪伯曾, 1587~1646)
유백종이 인조에게 올린 상소가 있더구나. 명문장이었지.
'전하(인조)는 광해의 죄를 성토하고 반정을 일으켜 왕위에 등극했습니다.
그러나 광해보다 100배 이상 치욕(이괄의 난·정묘호란·병자호란)을 당했습니다.
전하가 광해의 잘못을 도리어 더 심하게 답습하고 있으며,
신하들의 탐욕도 광해 치하의 신하들과 다를바 없습니다.'
'지금 천재(天災)도 광해에 비해 더욱 많고, 흉년도 광해에 비하여 더욱 심하며,
인심이 원망하고 능멸하는 일도 광해보다 더욱 깊습니다.
또 광해는 전쟁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하는 세 번이나 환란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유백증은 인조에게 결정적인 한마디를 던졌다.
'이 지경이라면 애초에 왜 반정(反正)을 일으켰습니까.'
그랬다.
아들아, 유백증 선생이 인조에게 던진 그 한마디가 바로 아빠가 인조에게
묻고 싶었던 말이었다.
같이 몽진을 했지만 고려 현종은 명군(明君)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조선 인조는 대표적인 암군(暗君)으로 역사에 낙인이 찍혔다.
아들아, 너는 이 역사에서 마땅히 그 교훈을 취하고..
인조의 길을 버리고, 고려 현종의 길을 따라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란다.
------ 작성자:방랑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