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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천의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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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만들기위원회 스크랩 일본 유후인의 마을 만들기 견학보고
사무국장박종아 추천 0 조회 181 11.01.19 22: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일본 마을 만들기 현장 견학 보고


유후인(由布院)市에서 본 마을 만들기 사례


김일식 진주YMCA 사무총장

  

1. 들어가면서

주민자치연구 모임이 만들어 지고 4년이 넘게 공부를 해오던 차에 외국의 마을 만들기 운동 현장 견학을 가보자는 목표를 설정하고 이런 저런 공부를 시작하여 떠나게 된 이번 연수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이번에 견학하는 코스가 우리들이 책속에서 접한 대중적인 사례이면서 다양한 현장을 견학할 수 있고, 첫 해외 견학인지라 실수나 어려움, 위험을 줄이고자 선택한 곳이 규수 북부의 마을 만들기 운동 사례였다.


 개인적으로는 지난 10월 한중일YMCA 연락협의회 참석하였다가 잠시 짬이 나서 연맹의 이학영 총장님 소개로 방문을 하게 되었다. 4시간정도의 시간으로 많이 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반나절을 보고도 부족하여 아예 일정을 취소하고 하루를 통째로 보는 시간을 마련하였다. 우리 견학 일행도 흔쾌히 응하고 하루 종일 자전거 트래킹을 하면서 본 내용과 유후인시의 공무원의 설명을 토대로 기록하고자 한다.

 참고로 이곳을 우리 일행보다 3일 늦게 도착하여 똑같은 설명을 경청하고 유후인에서 하루를 주무신1) 광주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이용교 교수님의 글을 참고하였음을 밝힌다. 


2. 유후인의 마을 만들기 운동 배경과 관점     

 하카다 항에서 간단한 점심식사를 하고 1시간 30분을 달려 도착한 유후인은 그야 말로 온통 산으로 둘러진 산촌 풍경이다. 유후인 시청에 도착하여 상공관광과장의 인사말과 상공과장보좌역인 에토우씨로부터 유후인의 마을 만들기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에토우씨는 유후인이 한국방송에 소개되어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오는데 연수 목적의 방문단 중 우리 모임이 가장 젊은 층으로 구성되어 있어 책임감이 앞선다고 하였다.


  유후인시는 1960년대까지는 매우 낙후된 지역으로 농업이 주요산업이었고 분지형의 지역적 특색으로 매우 춥고 일조 시간이 짧고 주변이 호수가 많이 있어 농사에 큰 어려움이 있었고, 수확량도 평균적으로 일본 농촌의 1/2 밖에 안 된다. 이렇게 낙후한 유후인이 지금 일본인들이 평생에 한번은 가보고 싶은 명소로 변화된 것은 지도자의 결단과 지역의 특색을 살리는 철학이 주요했다. 1950년대 댐 건설 반대운동가던 이와우 히데카시가 36세의 나이로 유후인정청장(시장)이 되면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그는 “산업, 온천, 자연을 다이나믹하게 활용하자”는 캐치프레이즈를 내 걸었고, 그 후 3명의 정청장이 같은 정책을 폈다.


 1952년 이 지역에 댐 건설을 반대하는 운동이 전개되면서 자연환경과 관광을 연계하는 발전 방안이 마련되었다. 이 당시 관광은 자연 경관을 구경하고 남성위주의 유흥 관광이 주류를 이루었다. 남성위주의 유흥 관광은 풍속영업을 하게 되었고 자연적으로 폭력배가 개입되게 되었고 이러한 방식은 인근 온천 관광 도시인 벳부와 똑같은 형태의 더 이상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러한 유후인 만들기 철학은 1973년 유후다케 주변 아프리카 사파리처럼 조성 계획에 대한 주민 반대, 1970년 이노세 골프장 건설 반대 운동 등에 잘 나타나고 있다.

 

 유후인의 만의 독특한 마을 만들기 성공 요건으로 첫째, 자원의 독특함. 즉, 유후산(유후다케)이라는 자연자원. 둘째, 지역의 독특함. 즉, 분지형의 지역으로 주변지역과 격리됨. 셋째, 주민참여 적정 인구수. 즉 주민의 참여를 보장하고 여론을 만들 수 있는 적절한 인구(12,000명)가 그것이다. 이러한 성공요건에 따라 독특한 유후인을 만들기 위해 3명의 리더는 독일의 반덴바덴을 견학하고 와서 유후인 만들기의 관점은 다음과 같이 설정하였다..2)


 첫째로, 자연이 주는 편안함과 천천히 즐기면서 편하게 쉴 수 있는 관광지여야 한다. 그래서 자연의 미를 충분히 살리면서도 소박한 동네 만들기에 주력하고 옛것을 버리지 않고 살리려고 하였고 충분히 쉬면서 즐기는 관광에 초점을 두었다. 


 둘째, 안전 안심한 관광지이어야 한다. 안전 안심한 관광과 관련하여 중요한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1970년 야쿠자 조직의 실력자 출소 기념 파티를 유후인에서 개최하려고 하였으나 유후인 주민들이 반대운동을 벌였지만 결국 기념 파티가 열리게 되었다. 유후인 주민들은 이에 항의하기 위하여 기념파티가 있는 날 전 상점이 문을 닫고 철시 운동을 전개했고 이 운동이 전국 뉴스로 방영되어 이후 젊은 여자가 혼자 돌아다니고, 머물러도 안전하게 관광할 수 있는 지역으로 부각이 되었다.


 셋째, 경관을 만드는데 가슴 속에 깊이 남고, 철학이 있는 경관을 만드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유후인은 환경친화적인 소도시로 느낄 수 있도록 골목길을 살리고 담장은 가급적 살아있는 나무 울타리나 대나무로 처리했다. 자전거 트래킹을 통해서 확인한 결과 집마다 마을마다 독특한 담과 나무, 꽃을 가꾸고 사람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넷째, 관광수입 지역 주민 환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발리의 경우 세계에서 으뜸가는 관광지이지만 대부분의 소득이 대기업이나, 다국적 기업의 이윤이 되지 지역민의 소득으로 연결되지 못해 지역주민에게 공헌하고 있지 못하다. 유후인의 대부분의 여관은 소규모이다. 규모가 작기 때문에 지역민 누구나 여관을 열 수 있는 기회가 있고, 이것이 소득으로 이어지고 있다.


 다섯째, 유후인만의 관점에서 옛것을 되살리는 것에 총력을 기울이고 이를 유후인 만들기의 철학으로 삼았다. 어떤 내용으로도 유후인이 열심히 한다고 해도  벳부나 도쿄를 이길 수는 없다. 우리만의 독특함, 유후인의 옛것과 소박한 것에 대한 이미지 홍보가 더욱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곳에 집중을 하게 되었다.


3. 유후인의 위기 극복 사례

 농업인구의 감소와 소득의 감소는 지역 농산물을 지역내에서 전량 소비하는 방법에서 문제극복을 하였다. 유후인의 산업별 인구 중에서 가장 큰 변화는 농가와 농업인구가 꾸준히 줄어든다는 것이다. 2000년 유후인의 농업인구는 2,633명이고 농가는 646가구이다. 이는 1990년 3,263명과 774가구에 비교하여 상당히 줄었고, 1980년의 3,992명 961가구에 비교하면 크게 축소된 것이다. 1970년에는 농업인구가 6,169명이고 농가수가 1,131가구이었는데 30여년만에 약 1/2로 축소되었다. 관광지와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유후인의 농가는 판매농가인 경우가 많은데, 2000년의 경우 전체 농가 646가구 중에서 판매농가가 453가구로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판매농가의 구성을 보면, 전업은 72가구, 제1종겸업은 46가구, 제2종겸업은 335가구이다. 이는 유후인에서 생산되는 모든 농산물은 지역내에서 100% 소비되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1975년 오이타현 중부지방에 지진의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큰 호텔이 무너지면서 유후인은 이제 끝났다는 인식 팽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위기를 기회로 삼고 유후인 만이 할 수 있는 음악제, 영화제, 문학제, 소고기 먹고 소리 지르기 대회 등 끊임없는 이벤트와 행사 등을 개최하였다. 물론 사람들을 모으기 위한 방법이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유후인 음악제의 경우 1975년 1회를 별과 소라를 주제로 하는 소규모 음악회를 시작하였는데, 올해 32회째를 마쳤다. 유후인의 경우 음향이 반향 효과가 없어 일류의 연주가가 아니면 어려운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수제 음악제로서 최고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음악제에 참여하는 음악가를 귀빈처럼 모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무나 편안하게 연주를 할 수 있게 배려하기 때문에 이제는 전국적으로 유후인 음악제 연주를 하지 않으면 유명한 음악가가 될 수 없다는 등식이 성립되었다. 이 음악제는 전체 예산이 450만 엔 이지만 보조금은 45만 엔이며 이중 일류급 음악가 20명에게 51만엔의 출연료 밖에 주고 있지 못하지만, 챙발로(피아노 전신)의 세계 최고 연주가인 고바야시 미찌오 씨 같은 경우 그의 분이 의자를 나르는 등 참여하는 음악가들이 즐기고 있다.


 대기업과 대형 매장의 진출로 차별성이 떨어지고 있으며, 지역의 정체성이 상실되고 있다.이로 인해 고이즈미 정권이후 내수 관광객이 줄어들고 있다. 문제는 지역의 차별성을 살려내야 하지만 이의 정체성 상실이 가장 큰 해결과제인데 이는 자본주의적 방식의 경제구조를 극복할 방안을 찾는데 중심을 두어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관광객이 감소를 걱정한다. 그러나 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앞으로 관광 형태의 변화에 맞추어 준비하면 된다. 이런 준비 정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관광객이 감소한 것이도 충분히 이런 시대 변화에 맞추어 대비하고 있다. 예를 들면 앞으로 관광형태가 버스 관광에서 1box car 시대를 맞는다. 퇴직을 맞는 세대에게 맞춤형 관광 필요하다. 우리는 시니세(아주 오래된 백화점, 회사, 음식점, 집)처럼 지역민이 공동 협력하여 유후인을 지켜갈 것이다. 유후인은 오래된 가게인 ‘시니세’가 되고 싶다. 전통을 가지고 있으면서 새로움을 이어가려는 것이다. 시니세의 지혜를 이어가고 싶다. 유후인에는 다른 지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공동체 문화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대개 호텔이나 여관은 독창적인 음식을 외부에 알려주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유후인에서는 유명한 요리사가 주변 작은 여관의 요리사를 불러서 가르치고 있다. 배운 사람들이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때, 요리사가 “저야 말로 전수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정신으로 과제를 극복할 것이다.


4. 유후인에서 마을만들기 운동 성공요인 분석

 유후인시 공무원의 설명과 트래킹을 통해서 본 유후인 마을 만들기는 지도자와 자원, 그리고 창의적 사고로 요약할 수 있다.

 

 유후인의 성공요인을 분석해보면 첫째, 무엇보다도 일본에서 두 번째로 많은 온천수가 나온다는 천연적인 장점과 유후산을 비롯하여 하천, 호수(金鱗湖- 긴린코) 등 자연적인 조건을 잘 활용하였다.

 둘째, 자연환경을 잘 활용하는 데는 지도력과 주민의 협력이 매우 중요했다. 외부자원을 끌어들여서 대형 사업을 하기보다는 토착민이 중심이 되어 외부세력을 적절히 제어하여 개발했다는 점이 돋보인다.

 셋째, 유후인은 긴린코, 역, 마차, 인력거, 족탕 등 분위기를 살릴 수 있는 다양한 체험활동을 개발하고, 음악제, 영화제, 쇠고기 먹고 소리지르기 등 각종 이벤트를 만들어서 관광객을 유치하는데 성공했다. 일시에 많은 사람을 불러들이기보다는 가족단위, 작은 모임단위로 사람들이 푹 쉬고 갈 수 있는 곳으로 만들었다.

 넷째, 이미지 작업에 충실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긴린코는 평범한 작은 호수일 수도 있지만, “옛날에 석양에 뛰는 물고기의 비늘이 금빛과 같아서 금린호(金鱗湖- 긴린코)”라고 불린다는 전설을 갖고 있어서 유후인의 상징이 되었다. 유후인을 방문하는 모든 관광객은 반드시 구경하는 곳이고 근처에는 기념품가게와 식당 그리고 호텔이 즐비했다.


 무엇보다도 이틀간의 견학을 통해 느낀 것은 마을 만들기 운동은 시간의 여유와 조급함을 극복할 용기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고, 내가 살고 있는 고장에 개발할 자원을 발굴할 안목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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