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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시편 23편 1-6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편 23편은 “다윗의 시”로, 신앙 생활을 어느 정도 했다면 시편 안에서는 1편과 함께 가장 많이 알고 있는 내용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게 긴 내용은 아니기 때문에 암송하는 성도들도 있는데,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신과 감사를 노래합니다. 즉 부족함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신과 감사가 있으며, 쉼을 주시기 위해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신과 감사가 있습니다. 그러한 인도하심 가운데 어렵고 힘든 일이 없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은 어렵고 힘든 길로도 우리는 인도하십니다. 다만 그때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는 지켜 보호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신과 감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은혜와 교제 가운데서 영원히 거하게 하신다고까지 고백합니다.
이런 전반적인 내용 때문에 칼빈은 시편 23편의 작성 배경을 다윗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그 나라를 평화롭게 다스리고, 번영과 바랄 수 있는 모든 즐거움을 누리고 살 때라고 주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크게 번영하고 있는 동안 세상 사람들처럼 자신들에게 행운이 따르는 것같이 보일 때 하나님을 망각하고 자신의 쾌락에 푹 빠져버리지 않으려고 하나님을 자신이 누리는 모든 축복의 주인공으로 여기며 즐거워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살아가는 평온한 상태와 모든 불편함과 고통스러움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하나님의 선하심 덕분으로 돌릴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서 자신의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행복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믿고 있으며, 바로 이 목적이 그로 하여금 순수한 예배에 전념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화와 번영의 시기, 소위 평안하다고 하는 시기에 하나님을 망각하지 않도록, 자신의 쾌락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사사기의 반복되는 역사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범죄,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그런 진노의 도구로 대적의 압제가 있게 하십니다. 이때 이스라엘은 대적의 압제로 인해 하나님을 부르짖게 됩니다. 그런 부르짖음에 하나님은 응답하셔서 사사를 통하여 구원하시고 평안을 주시는데, 그런 평안의 시기가 되면 다시금 범죄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볼 수가 있습니다. 왜 평안하게 되면 범죄를 하는가? 평안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망각하고, 도리어 거기에 인간의 교만을 싹트게 하기 때문입니다. 좀 더 직접적으로 평안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음으로 말씀에서 멀어지고, 그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거기에 외적 종교 행위가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외적 종교 행위는 있을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칼빈은 “번영은 많은 사람들을 취하게 하여 모든 한계를 벗어나 오만함을 낳아 이것 때문에 그들은 교만하게도 하나님께 대항하게 되고 마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지난 시간까지 우리가 시편 22편을 봤지만, 시편 22편의 전반부의 내용처럼 고난과 어려움의 때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시편 23편의 배경일 수 있는 평화와 번영의 때라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어떠한 경우일지라도 하나님을 기억하되, 시편 23편을 통해 고백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주체요, 그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일하시는 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을 기억하도록 우리는 하나님 자신과 그분의 일하심을 계시하신 이 말씀을 늘 가까이 해야 합니다.
이제 1절을 보시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시편이 다윗의 평화와 번영의 시기요, 그런 점에서 그의 말년쯤 작성한 것이라고 한다면, 모든 고난의 시기를 벗어나 그의 왕권이 강화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올랐고, 그런 만큼 명예와 재물 또한 많은 시기입니다. 주변 나라들로부터 좋은 것들을 받아 부족함이라곤 전혀 없는 그런 시기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자신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은 세상의 어떤 것보다 하나님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이고, 나아가 이후 고백하는 내용들을 통해 그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여러 가지 혜택들을 상기하면서 더욱 하나님으로 채워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바울의 고백을 다시금 새겨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9) 성도에게 있어 가장 복되고 선한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성도라 할지라도 이 세상 삶을 위하여 많은 것들을 배우며, 또한 배워야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면 우리는 다윗이나 바울의 자세를 분명히 배워야 합니다. 세상에서 배우는 것은 분명 우리의 육체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을 위한 것은 하나님 자신, 자신을 계시하신 말씀 외에는 없습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하나님을 목자로 소개하고 있는데, 어쩌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자신이 양을 치든 때를 떠올리면서 고백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어릴 때 자신을 목자로 있게 하신 것과 지금 자신이 하나님을 목자라고 고백하는 내용 안에는 어느 정도 유사점이 있을 수 있지만, 결코 같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창조주와 피조물만큼의 차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양을 치는 인간 목자와 모든 사람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자신이 택한 백성을 다스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목자라고 말하도록 한 것은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자신을 낮추어 설명하고 계신 것은 분명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어떤 분으로 있는가를 알리기 위해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 자신을 목자로 소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시기 위해 자신을 낮추어 설명하는 방식은 성경 자체가 그러한 방식을 따릅니다. 그래서 이 성경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적응하여 계시하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방식에 있어 가장 극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분이 인간이 되셔서 친히 우리 가운데 나타나신 것입니다.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렇게 창조하신 모든 만물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를 취하여 오셔서 친히 하나님의 뜻을 전하시되, 구약과 비교하자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셨습니다. 또한 친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희생제물로 자신을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왕이 되셔서 친히 다스리고 보호하십니다. 이것보다 우리가 어떻게 더 하나님을 더 분명하게 깨달아 알 수 있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요한복음 1장 18절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어 설명하시는데 그 극치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내신 것입니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다윗이 하나님을 목자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역으로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자신을 목자라고 알리시기를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목자로 있을 때 양을 치면서 그들을 보살핀 것처럼 하나님 역시 자신을 보살핀다는 것을 목자라는 말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 것입니다. 실제로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을 나가기에 앞서 자신을 보내주십사 사울에게 부탁할 때 다음과 같이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삼상17:34-35)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양에 대한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사자나 곰은 맹수입니다. 사납고 무서운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목자인 다윗은 그런 사자나 곰이 양의 새끼를 물어가면 따라가서 건져낼 정도로 보살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말을 하는 목적은 자신이 어떤 자인지를 드러내기 위해 한 말은 아닙니다. 사울에게 이 말을 하는 핵심은 이후에 곧바로 나타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다윗 자신을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다는 것입니다(삼상17:37). 사납고 무서운 곰과 사자이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키시고 보호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목자로서 양을 지키고 보호할 때 도리어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 보호하신 것을 깨달아 알게 하심으로 다윗은 하나님을 목자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이러한 유사점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친히 다윗을 통해 목자로 계시하도록 하셨다면 그것은 자신을 낮추어 소개하고 있을 뿐입니다. 즉 하나님의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은혜는 단지 사자의 발톱이나 곰의 발톱에서 견져 내시는 것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목자라고 할 때 단지 사자의 발톱, 곰의 발톱에서 건져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좀 더 높은 곳을 바라봐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으로서 일용할 양식을 채워주시기도 하십니다. 어려운 사람을 돕기도 하시고, 연약한 자를 붙드시기도 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는 사람을 통해 그런 일을 하십니다. 다윗의 경우를 보면 사울이 그의 대적자로 있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이 압살롬이 그의 대적자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대적자로부터 자신을 지키시고 보호하셨습니다. 그래서 목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시되, 때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어 목자로서 알리신다고 할 때 거기에는 단지 육체의 일 정도가 아니라, 영적인 일과도 분명히 관련되어 있습니다. 짐승으로부터 보호하시고 지키시는, 그리고 그런 짐승과 같은 사람으로부터 보호하시고 지키시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할 때(벧5:8), 그런 대상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목자되심이 있습니다.
더불어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신다고 할 때 우리는 마땅히 그분의 양으로 있어야 합니다. 그가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확신 속에서 하나님만을 따라 가야 합니다. 이사야 53장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사53:6) 가는 양이 아니라,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 근처에 머물면서 오직 그분만을 따라가는 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목자로 소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면, 더욱 하나님께서 자신의 양으로 부르신 자들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 근처에 머물면서 그분의 보살핌 가운데서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른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난주에도 언급했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안과 밖으로 하나님 자신을 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롬1:19-20 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목자가 되시면서 양으로 부르시는 자들은 자신의 연약함과 빈곤을 절감하는 자들, 그래서 스스로는 자신을 보호할 수 없고 하나님만이 자신을 보호하실 수 있는 분으로 여기는 사람들 외에는 없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십니다. 그가 치는 대로 따라가면서 그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이런 점에서 자기 마음대로 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결코 그분의 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이 하나님을 목자라고 고백할 때는 이사야 53장의 말씀처럼 양처럼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만 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목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우리를 양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목자 되신 하나님만 따르겠다는 무언의 고백까지 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살피시지만, 그런 보살핌 안에서 나타나는 열매는 하나님만 따라가겠다는 고백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여기에는 목자를 벗어난 결과 비참함 외에 없다는 경고가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처럼 왕의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그리고 아무리 왕위가 견고하더라도, 또한 명예를 가지고 있고 그런 명예에 따른 재물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목자 되신 하나님을 벗어난다면 거기에는 비참함 외에 없다는 것입니다. 참된 행복은 어디에만 있는가? 목자 되신 하나님 안에만 있습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다윗은 1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비록 자신이 평화와 번영의 시기를 누리고 있지만,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세상적인 면에서 전혀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지만, 그런 것 때문에 부족함이 없는 게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께 속해 있고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전혀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외형적으로 좋은 것을 제아무리 풍성하게 누리는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목자가 아니라면 그들은 빈털터리요, 기아 상태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듯이 하나님께서 그의 책임 아래 두기로 한 자들이야말로 모든 좋은 것에 대한 부족을 전혀 느끼지 못할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나위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요, 우리가 그의 양이라면 우리는 결코 세상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그러나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부요함을 채우시기 때문에 거기에 세상의 부족함은 부족함으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의 고백과 다르지 않는 말씀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셨는데, 창세기 15장 1절입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힘과 권력, 물질 이런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합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결 같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내가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어떤 것도 하나님 자신보다 큰 상급은 없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라고 말씀하시지만, 사실은 천국이라는 상급도 하나님 자신보다 큰 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조차 피조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보다 클 수 있겠습니까?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부요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은과 금은 다 사라질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 천국에서의 상급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부요함이 될 수 있는가? 비교하자면 이 세상 것에 비해서는 부요함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부요함은 그 모든 것을 만드시고 때라 따라 주시는 하나님 자신에게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만이 진정 우리의 부요함으로 계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다윗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늘 고백해야 합니다. 이 고백이 우리 인생의 전체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계속해서 2절과 3절에 보시면 목자 되신 여호와로 인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어떻게 역사하셨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여기서 ‘푸른 풀밭’이라고 한 것은 푸른 풀이 많고 기름진 땅을 의미합니다. ‘쉴 만한 물가’ 역시 마실 수 있는 물이 있고, 그러한 물을 편하게 마실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을 통해 다윗은 목자이신 하나님이 양인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충분히 공급하시는 분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런 공급을 통해 쉼을 주시며, 나아가 좋은 곳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밝힙니다.
물론 푸른 풀밭에서 먹고 쉴 만한 물 가에서 마시게 하실 때 앞서 말한 것처럼 단지 육적인 일로 있지 않고 영적인 일로 나타난다면, 그 일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다윗은 결코 외적인 것만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자신의 인생을 통틀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떤 쉼을 허락하시고, 어떻게 인도하셨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특성상 외적인 것을 통해 교훈하시지만, 그의 인생을 통해 그의 인생만이 아니라 좀 더 멀리까지 내다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쉼과 인도하심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요한복음 10장에서는 친히 자신을 양의 목자로 알리시면서 이렇게 말씀하기도 하십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요10:3-4) 그러므로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고 할 때, 우리는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만을 듣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가 우리를 인도하는 대로 가야 합니다. 거기에 쉼이 있고, 거기에 진정한 안식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푸른 풀밭과 술 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라는 안식처보다 더 좋은 곳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안식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아야 합니다. 그분만을 먹고 마셔야 합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만이 생명의 떡임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을 먹고 마셔야 합니다(요6:35). 거기에 무엇이 있는가? 우리 영혼의 소생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거듭남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그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씻겨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성령을 통하여 새롭게 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디도서 3장은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라고 말합니다(딛3:5). 이때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단지 한번 소생하면 끝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 우리의 중생은 한번이지만, 그렇게 중생했다 할지라도 계속해서 새롭게 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사야 53장의 말씀과 같이 우리의 본성은 ‘그릇 행하여 각게 제 길로’(사53:6) 가고자 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자 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앞에 계시지만, 목자의 음성보다 다른 음성을 듣기를 원하여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은 어떠한 길인가?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는 길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죽이는 길입니다. 시편 1편의 내용으로 말하자면 악인들의 꾀를 따르는 길이요, 죄인들의 길에 서는 길이며, 결국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게 되는 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를 씻기신 사람들은 중생의 씻음만 있게 하지 않고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계속해서 베푸십니다. 말씀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지만(벧전1:23), 동일한 말씀으로 우리를 교훈하시고 책망하기도 하십니다(딤후3:16). 거기에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여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는가?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본성은 의의 길이 아니라 죄의 길을 가고자 하는 마음이 끊임없이 나타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으로 죄가 아닌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이기 때문에 지금 다윗은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셔서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려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가서는 안 됩니다. 내 소견에 옳은 대로 가서는 안 됩니다. 목자되신 하나님만을 따라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육신을 취하여 오셔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그 본을 따라 가야 합니다. 그 길은 어떠한 길입니까? 시편 1편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1:1-2)
물론 말씀을 묵상하고 따르고자 한다고 해서 따라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이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양들에게 성령까지 약속하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26)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따르고자 해야 합니다. 거기에 영혼의 소생이 있으며, 바로 그 길만이 의의 길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3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결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기적인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이 일을 행하신다고 말씀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의 길이 아니라 의의 길로 인도하시되, 우리의 본성은 죄의 길로 가고자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이름을 걸고서라도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고야 말겠다는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겁니다. 이것을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몸된 교회로 비유해서 설명하는 것이 에베소서 1장 23절입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 자체만으로 충만하지만, 그리고 그런 충만으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지만, 몸 된 교회 없이는 충만하지 않기로 하신 것을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향한 뜻으로 밝히셨습니다. 문제는 그리스도가 충분하지 않은 채로 있을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반드시 교회로 하여금 충만하게 하시고야 말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이름을 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창조주로서 피조물을 압박하는 게 아닙니다. 갈취하듯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고 가르침으로 우리를 자신의 수준에까지 끌고 올라가고자 하는 사실을 드러내고 계신 겁니다. 어떻게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의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도록 만드셨고, 지금도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가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거셨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거셨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가능하신 하나님은 반드시 해내고야 마십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9:7) 이런 하나님이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4절을 보시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의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지만 거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숱한 위험이 우리 인생 길에는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어려움과 위험은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간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죄의 결과로서 고난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아닌 의를 위한 고난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때문에 고난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도 하나님의 섭리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때문에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자신과 함께 하시기 때문이요,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자신을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혹 우리가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갈 수도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양 무리로 있었지만, 그런 양 무리로부터 이탈하여 의의 길이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리로 다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15장의 비유처럼 주인이 길 잃은 양을 찾으러 오십니다. 우리가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도 갈 수 있지만, 때로는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왜 이 길로 가야 하는가 불평하게 되지만, 광야 40년을 왜 허락하셨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신명기 8장 3절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즉 하나님은 그때도 자기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니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위한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고생해봐라!” 여기에 있지 않고, 그런 고생을 통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이 선한 목자이심을 알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선한 목자이기 때문에 양들에 대하여 늘 선한 목적을 가지신다는 것을 알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때도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며, 혹 내가 목자로부터 떨어져 나갈지라도 그가 우리를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목자이시기 때문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게 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자라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좀 더 튼튼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길을 지나 우리로 참된 안식으로 이끄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지팡이와 막대기는 이런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의 상징을 나타냅니다. 양무리를 인도하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수 있지만, 그래서 어떤 위협 요소들이 나타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지팡이와 막대기를 사용하여 그들을 물리치시고 안전하게 인도하신다는 겁니다.
심지어 5절에서는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까지 고백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의 한 예로 주께서 우리의 원수를 보내실 수도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다윗의 예를 들자면, 사울을 대적자로 있게 하실 수 있고 또 자신의 아들인 압살롬을 대적자로 세우실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원수는 영적인 의미에서 마귀가 대적자요, 마귀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말씀에서 떠나 죄를 짓도록 하는 것이 주된 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는 평생 원수와 전쟁을 해야 합니다. 지상 교회를 전투하는 교회라고 칭하는 것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원수가 있어 싸워야 할 수도 있습니다. 원수 때문에 힘들 수 있고, 때로는 지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교회가 전투한다고 할 때 늘 승리만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승리하셨지만, 우리의 승리는 너무나도 먼 것처럼 있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런 원수 앞에서조차 상을 차려 주셔서 먹고 마시게 하십니다.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공급해 주시되, 풍성하게 채워주시기까지 하십니다. 잔이 넘칠 정도로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힘을 공급하십니다. 여기에 기름을 머리에 부어 잔이 넘칠 정도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자신의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이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다윗은 6절로 고백합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결국 다윗이 고백하는 것은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자신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없는 게 아닙니다. 여기에 원수가 없는 게 아닙니다. 어렵고 힘든 길일 수 있고, 때로는 고난 가운데 있을 수도 있습니다. 원수 같은 사람을 만나기도 합니다. 가족이라고 해서 좋기만 한가? 가족이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고백하는 것처럼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자신의 양으로 삼으신 하나님은 평생토록 자신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나타내십니다. 때로는 죄에 대하여 징계하기도 하시지만, 그런 징계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거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 양을 향한 하나님의 징계는 늘 선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게 하시는데, 다윗은 6절 마지막 부분에서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게 될 것을 소망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당연히 이 땅에서의 영원한 삶은 아닙니다. 다윗도 결국 이 세상 삶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시편 23편을 통해 소망한 바는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그는 지금 전투하는 교회가 아니라 승리의 교회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우리의 목적지가 이 땅에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하늘에 있습니다. 이 땅에서 전투하는 교회로 살아가지만, 그리고 그런 전투 가운데 원수가 있고, 사망의 음침할 골짜기를 다니게 되기도 하지만,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인도하여 결국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시고, 목자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전혀 부족함이 없는 분으로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하여 다윗은 시편 144편 15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