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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25일 (토)
3월 들어 처음 행하는 성지 순례다. 오늘 찾을 곳은 전주교구에 속한 여산 성지와 천호 성지, 그리고 나바위 성지이다. 참여자는 김 요한, 장 라파엘, 문 베드로, 이 안토니오. 함께 하기로 했던 이 에릭 형제가 사정이 생겨 불참. 3.25(토) 08시. 성당 출발. 차량 봉사는 장 라파엘이다.
자비로우신 주님,
약속의 땅을 향하여 떠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친척 엘리사벳을 돕기 위하여 길을 나선
겸손과 순명의 여인 마리아의 발걸음을 인도하셨듯이
지금 길을 떠나는 저희를 돌보시고 안전하게 지켜 주시어
목적지까지 잘 도착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또한 주님께서 언제나 저희와 함께 계심을 깨닫게 하시고
길에서 얻는 기쁨과 어려움을 이웃과 함께 나누게 하시며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과 믿음, 사랑의 생활로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경로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경부고속도로로 대전을 경유하는 것과 88고속도로로 함양을 거쳐 작년 9월 21일자로 완전 개통된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네비게이션으로 확인해 보니 소요시간은 어느 경로든 비슷하기에 후자를 이용하기로 했다. 라파엘 운전자가 선호하기도 했지만, 산간지대를 통과하기에 경치도 수려하고 차량 소통면도 좋을 것 같아서다.
88 고속도로 논공 휴게소에서 가락국수 한 그릇으로 아침을 때우고 함양 분기점에서 대전 - 통영 고속도로에 올렸다. 예상대로 높은 산과 산간 마을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처음 가는 길이라 새롭고 신선한 감이 든다. 아쉬운 것은 날씨가 흐린데다가 황사현상이 있어 산뜻함이 반감되는 점이다. 하지만 나무의 가느다란 실가지 색깔이 약간 다르게 느껴지고 먼 산에는 산목련 떨기들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봄 치장을 서두르는 모습들이 보인다.
비쭉이 솟은 두 개의 바위산 모습이 보이는 데서 한 번 더 휴식을 취했다. 진안 마이산(馬耳山) 휴게소. 언제 봐도 기이한 모습이다. 봄이 오는 소리를 들으려 두 귀를 세우는 것일까? 아니면 봄이 오든지 말든지 마이동풍(馬耳東風)일까?
네비게이션으로는 소요 시간이 3시간이었으나 중간에 식사도 한데다가 2번의 휴게소를 들렀기에 12시가 되어서 도착했다.
도착 30분 전에 여산 성지를 해설해 줄 여산 성당 교우분과 통화를 하여 성당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도착해 보니 보이지 않는다. 성당 주차장에 만나서 식당으로 이동하여 식사를 함께 하고 오후 일정을 하기로 한 것이다.
통화를 하니 좀 늦다는 말 대신 식당 위치를 가르쳐 준다. 그 사이에 이미 다른 일행 형제들은 성전 안에 들어가 버렸다. 그래서 성전 뒷문을 살짝 열고 보니 막 성시간이 시작되었다. 해설자를 기다리게 할 수 없어 일행을 중간에 불러내어 식당으로 가니 해설자는 거기서도 보이지 않는다. 다시 전화를 하니 우리끼리 식사를 하고 성당 휴게실에서 만나자는 것이다. 몇 번을 통화하고서도 이처럼 서로 생각이 어긋났다. 상대를 제쳐놓고 자신의 의중으로 듣고 싶은 것만 들은 결과이다.
성당에서 소개해 준 식당은 영너머 가든. 교우분이 운영하는 업소인데 참 친절하다. 메뉴는 돼지고기를 듬성듬성 썰어 넣은 김치찌개. 특히 ‘머위잎 무침’을 자랑하면서 시장에서 산 것이 아니라 지신이 직접 재배한 재료로 만들었단다. 그리고 다 먹지도 않았는데 한 접시 더 가져다준다.
식사 후 주차장에서 교우 해설자를 만났다. 그는 이 지역 출신으로 해설 봉사만 15년 간 했다고 한다. 이름은 이승복 토마스아퀴나스. 50대 후반 정도 되는 나이다.
우선 여산 자랑으로 시작한다. 여산은 행정구역이 조선시대 때는 도호부로 일반 현이나 군과는 달리 종3품 부사가 다스리는 고을이라고 한다. 그리고 여산이 배출한 인물로는 국문학자요 시조 시인인 가람 이병기 선생이 있다고 한다. 인근에 가람 이병기 생가가 조성이 되어 있는데 나도 오래 전에 간 본 적이 있다. 배롱나무 고목에 붉은 꽃이 만발했던 모습이 아직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논산 연무대와도 가깝고 특히 여산면에 육군 부사관학교가 있어 호국의 성지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어서 여산 지역의 천주교 전래와 박해, 그리고 성지 지정 과정과 성당의 역사에 대한 해설을 하였다.
여산 성지 -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문 |
전주교구는 우리나라 교구 중 우리나라 사람에 의한 자치가 최초로 실시된 교구라고 하는데 이는 전주 지방의 신앙의 뿌리가 깊음을 말해준다. 호남 지역에서 최대의 신앙 산맥을 이루는 것은 대둔산과 천호산을 기점으로 한다. 박해와 함께 퍼진 복음의 전파는 일찍이 이 두 산의 줄기 아래에 있는 산골짜기에 수많은 교우촌들이 형성됐다.
여산(礪山)은 천호산 인근 충청도와 전라도의 경계에 있으며 이 지역의 학문과 행정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호남의 북쪽 관문이기에 천주교 복음의 전래도 타 지역보다 앞섰다. 따라서 박해 기간도 길었고 이에 따라 피해도 엄청나게 컸다.
한자 ‘礪’ 자는 ‘숫돌 려’자인데 일반적으로 천호산에 질 좋은 숫돌이 많이 나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하지만 한자어에 河山帶礪(하산대려)라는 말이 있다. 이는 황하(黃河)가 허리띠같이 가늘어지고, 태산(泰山)이 숫돌만큼 작아진다 할지라도 변하지 않겠다는 선비의 굳은 지조를 뜻한다고 본다면 지명의 어원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하지 않나 한다. 어쩌면 강철 같은 순교정신이 스며있는 말이 아닌가 한다.
여산 지역에 순교자가 나온 때는 1866년 병인박해의 여진인 무진박해(戊辰迫害, 1868) 때였다. 당시 여산부(礪山府)의 속현인 금산(錦山), 진산(珍山), 고산(高山) 지역에서 이곳 여산 관아로 잡혀와 순교한 신자는 ‘치명일기(致命日記)’ 등 기록에 남아 있는 수만 해도 25명에 이른다. 이밖에도 이름을 알 수 없는 신자 수도 많았음은 불문가지다. 전주교구의의 순교자의 반은 여산 지역에서 순교했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이는 여산 지역을 전주 교구의 제2의 성지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리고 여산은 다른 어느 지역의 박해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가혹한 처형 방법으로 악명이 높다. 그 결과 수장형(水葬刑)을 당한 배다리는 ‘물의 순교지’, 참수형을 당한 숲정이는 ‘불의 순교지’, 백지사형(白紙死刑)을 당한 백지사터는 ‘바람의 순교지’라고 부른다.
백지사형(白紙死刑)이란 죄수를 말뚝에 묶은 후 손을 뒤로 결박하고 얼굴에 물 묻은 백지를 한 장, 한 장 여러 겹 붙여 질식시켜 죽이는 방법이다. 일명 도모지사(途貌紙死)라고도 한다.
해설자는 이 방법은 옛날 양반가에서 가문을 더럽힌 가족을 남모르게 죽이는 법이라고 했다. 예컨대 아들 죽은 다음 미망인 며느리가 불륜을 저지르면 밖으로 드러내지 않게 이처럼 죽여서 가문의 명예를 지킨다는 것이다. 이런 끔찍한 방법을 천주교 탄압에 등장시킨 것이다.
여산 성지 안에 분포된 개별 성지는 ‘여산 하늘의 문 성당’을 중심으로 인근에 여산 숲정이, 여산 동헌과 백지사터, 감옥터, 배다리, 뒷말 치명터, 장터, 기금터 등이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여산 지역 전체가 순교성지라 할 만하다.
여산 하늘의 문 성당
안내문에 의하면 전주교구는 1951년 여산 지역 순교의 거룩한 자취를 기념하기 위해 이 지역을 제2성지로 지정하고 본당 건립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58년 나바위 성당에서 분리하여 10월 21일 ‘여산 숲정이 순교성지’ 안에 성당을 건립하였다. ‘여산 하늘의 문 성당’은 이듬해 1959년 1월 17일 본당으로 승격하였고, 초대 주임으로 권영균(안토니오) 신부가 부임하였다. 이후 성당 증개축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성당 주변 순교성지 개발도 함께 추진되어 오늘에 이른다.
주차장에서 차에서 내리면 바로 성당을 오르는 계단을 오르기 전 왼쪽으로는 ‘십자가의 길 정원’이 있고, 한쪽에는 ‘돌무덤’이 있다.
계단을 오르면 정면에 고딕 첨탑이 있는 붉은 벽돌 성전이 나타난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수녀원 회색 건물이 있고 그 앞에 성모상이 있는 아담한 정원이 있다. 소나무 정원수가 좌우에 서있는 가운데 작은 수녀님이 절대 순명의 자세로 꿇어 앉아 기도를 바치는 상이 있다.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바로 하늘의 문이다. 문 안에 들어서면 입구 통로를 막고 있는 것은 매우 독특한 성수대이다. 예수님께서 옷을 벗긴 채 물고기 모양의 두 조각 천으로 하체를 가리고 있는 상으로 검은 색인데 자기 가슴을 안고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이다. 성당 내 14처 중 10처의 상을 조각으로 만든 것이다.
제대는 설립초기의 트리엔트식 제대가 벽에 붙어 있고 그 앞에 오늘날 쓰는 제대가 따로 교우석을 향해 놓였다. 초기 제대가 매우 특이하다. 마치 동유럽의 어느 정교회 에 온 듯하다. 해설자는 이 제대는 성모님 중심의 제대라고 설명한다. 예수님 대신 성모님이 자리하고 있다는 뜻이다.
전체가 4단으로 되어 있는데, 맨 꼭대기 단에는 가슴에 성령의 비둘기를 품은 더부룩한 수염의 하느님께서 양쪽에 천사를 거느리시고 앉아 계신다. 그 아랫단에는 어여쁜 성모님께서 우아한 복장으로 S라인의 자세로 서 계신다. 성모님의 왼쪽에는 칼을 든 바오로와 열쇄를 든 베드로가 시립하고 있다. 그 아래 단에는 성모님의 칠고상(七苦像)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맨 아랫단에는 김대건 신부의 무릎뼈가 봉안된 감실이 있다.
성모님의 칠고(七苦)는 성모님 생애 동안 일어났던 일곱 가지 슬픔 또는 고통스러웠던 사건을 가리킨다. 대중적으로 칠고에 대한 신심을 가진 이들이 많으며, 미술계에서도 자주 소재로 삼고 있다
1.시메온이 아기 예수를 보면서 훗날 마리아가 예리한 칼에 찔리듯 마음이 아플 것 이라고 예언한 일
2. 헤로데의 눈을 피해 온갖 고생을 하며 이집트로 피난 간 일
3.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갔다가 소년 예수를 잃어버린 일
4. 십자가 지고 가는 아들 예수를 만난 고통
5. 아들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숨을 거둔 것을 본 고통
6. 아들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린 고통
7. 아들 예수를 무덤에 묻은 고통
벽에는 길다란 스테인 그라스가 길게 늘여져 있고 그 사이에 묵화로 그린 검은 색 14처가 있다.
여산 성당 안과 밖에서 여산 성지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 해설을 끝냈다. ‘하늘의 문’을 나오면서 해설자는 말한다. 옛날에는 이 문에서 내려다보면 순교의 자취들이 모두 한 눈에 보였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당시의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여기서 교우의 해설은 끝나고 나머지 신앙 유적지는 우리가 직접 찾아나서야 한다. 실제 진복팔단길이라 하여 8곳의 신앙유적지를 연결하는 길이 있다.
여산성당(1처) - 숲정이(2처) - 뒷말(3처) - 배다리(4처) - 장터(5처) - 가금터 (6처) - 옥터(7처) - 백지사터(8처)
안내 표지판을 보니 가깝게는 200-300m, 멀어도 500-600m 정도라 찾아가며 걸어볼 수도 있는 거리지만 멀리서 온데다가 앞으로의 일정을 고려하여 당시의 자취가 뚜렷한 곳만 가기로 하였다. 그런데 예수살렘 8,000km, 로마 베드로대성전 9,000km가 재미있다. 먼저 걸어서도 쉽게 갈 수 있는 백지사터와 여산 동헌 향했다.
백지사터 - 바람의 순교지
백지사(白紙死) 터는 여산 동헌 아래에 있다. 동헌(東軒)은 지방 수령의 행정 집무실이고 백지사터는 당시에는 부사(府使)의 살림집이 있었던 터다. 1983년 성당에서 이 터를 매입하여 순교성지로 조성한 것이다.
얼굴에 백지를 붙여 죽이는 이 사형 방법을 천주교도들에게 가하여 수많은 교우들의 생명을 거두었다. 차라리 목을 자르면 순간적 고통만 겪으면 될 일을 이렇게 시간을 끌며 고통스럽게 죽어갔으니 천국 복락이 얼마나 컸으면 이를 참아내었는가?
지금 백지사터에는 백지사형 당하는 얼굴 모습이 화강암으로 조각되어 있고, 예수성심상과 십자가의 길 등이 조성되어 박해 당시의 처절함을 느끼며 기도할 수 있다.
여산 동헌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3호)과 감옥터
앞서 해설사가 말했듯 여산(礪山)은 일반 현이나 군보다 격이 높은 부라서 부사가 다스리는 고을이다. 따라서 수령도 품계가 높다.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수령은 현감(종6품), 현령(종5품), 군수(종4품), 도호부사(종3품), 대도호부사(정3품), 목사(정3품), 부윤(종2품) 순으로 품계가 달랐다. 고을의 격이 높거나 큰 고을일수로 품계가 높은 것이다.
여산은 원래 현이었는데 태종의 비인 원경왕후의 외향(외가가 있는 곳)이라서 세종 때 군(郡)으로 승격되었으며, 숙종 때 단종 비 정순왕후 송씨의 관향(貫鄕)이기도 하여 부(府)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백지사터 바로 위가 여산 관아가 있었던 곳이다. 정문으로 갈려면 한참을 둘러가야겠기에 사람들이 많이 오르는 지름길 같은 것이 있어 그길로 올랐다. 주변에는 수백 년 된 아름드리 느티나무 등 고목이 있어 깊은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막상 올라보니 정문이 잠겼기에 정문으로 갔다고 하더라도 다시 이 길이 아니면 들어올 수가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큰 건물 하나만 달랑 있을 뿐 부속 건물은 아무것도 없다. 이 건물은 여산 관아의 여러 건물 중 가장 중심 건물인 동헌(東軒)으로 고을의 수령이 업무를 보던 정청이다. 따라서 3단의 계단식 건물터 중 가장 높은 상단부에 들어서 있다. 이 관아터 주위에 오늘날의 초등하교, 면사무소, 농협 등 많은 관공서가 당시는 모두 관아였다고 하니 이 정도라도 보존된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건물 형태는 정면 4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이 건물은 조선말기에 건립되었다고 추정한다. 따라서 당시의 건축양식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오른쪽 3칸은 넓은 대청마루이고, 왼쪽 2칸에는 온돌방이 있다. 기둥은 우람하고 부재들이 굵직하다. 천장은 서까래가 다 드러나는 연등천징((椽燈天障)이어서 목조건물의 아름다움과 당당함을 갖추고 있다. 이마 이 건물 마당에 천주교도들이 잡혀와 혹독한 문초를 받았을 것이다. 우람한 이 건물은 추상 같은 관부의 권위를 나타낸다. 건물만으로도 죄인들에게 위압이 되기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위압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순교자들의 하느님을 향한 의지와 기백은 꺾이지 않았으니 참으로 대단하다 아니할 수가 없다.
뜰에는 관내 지역에서 모은 공덕비 8기가 검은 이끼에 덮여 남아 있다. 이런 비석을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라고도 부르지만 지금은 상태로는 이름 석 자도 식별하기 어렵고 식별된다 하더라도 주목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석에 공적을 새긴다는 게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옛 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평생에 남이 눈살 찌푸릴 하지 않으면
세상에 나를 두고 이를 갈 사람이 없으리니
큰 이름을 어찌 무딘 돌에 새길 것인가?
길가는 사람의 입이 돌보다 낫다.
(平生不作皺眉事 世上應無切齒人 大名豈有鐫頑石 路上行人口勝碑)
한쪽에는 대원군 때 세운 척화비가 있다. 척화비는 물론 천주교 박해와도 관련이 있다. 병인박해(1866) 중 독일 상인 오페르트에 의한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 도굴사건(1868)이 대원군의 분노를 촉발하여 무진박해(1868) 등 더 가혹한 박해로 이어졌다. 서양 오랑캐와 연계된 사학 천주교는 악의 축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척화비는 전국 각지에 많이 세웠으나 지금은 약 30기 정도만 남아있다고 한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매 싸우지 않으면 회친함이요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우리 자손 만대에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만들고 신미년에 세운다.)
병인년은 병인양요가 일어난 1866년이요, 신미년은 신미양요가 일어난 1871년이다.
다시 관아 터를 나와 잠긴 정문에 이르니 바로 옆이 여산초등학교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초등학교 주차장이 바로 여산 감옥터라고 한다. 처형되기 전에 수많은 교우들이 이 곳에 수용되어 재판이나 죽음을 기다렸을 것이다. 당시 교우들의 신음소리, 기도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여산초등학교 정문 부근에는 개교 100주년 기념비가 있는데 가람 이병기의 시조 ‘별’이 새겨져 있다. 이 학교 안에 보이는 것은 가람 이병기 흉상와 관련된 기념물이 다수다. 아마 학교를 빛낸 최고의 인물인 것 같다. 그밖에 여산 독립만세 운동 기념비도 있다.
초등학교를 뒤로 하고 다시 여산 성당으로 와서 순례자 쉼터에서 레몬차 한 잔을 마시고 성물방도 구경했다. 성전 주벽의 성모상을 모작한 채색과 백색의 성모상이 대표작이었다. 해설자와 기념촬영을 한 후 해설자가 가리켜 주는 대로 차를 타고 배다리, 숲정이 성지를 향했다.
배다리 - 물의 순교지
해설자의 설명에 의하면 옛날에는 이곳까지 강경천 물이 들어와 배를 띄워 다리를 삼았는데 이런 다리를 부교(浮橋) 또는 주교(舟橋)라 했다. ‘주교(舟橋)’가 ‘배다리’인 것이다. 이곳서도 많은 천주교 무명 순교자들이 순교했다. 손발이 묶인 강물에 던져져 채 수장(水葬)되었다. 그래서 물의 순교지다. 장례를 지내기 위해 가족들이 미나리꽝으로 내던져진 시신을 건져내어 옷을 벗겨보았더니 솜 옷 안에 솜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이유는 배가 하도 고파 솜을 빼내어 먹었기 때문이라고 하니 오늘로서는 도저히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지금은 배도 미나리꽝도 간 곳 없고 시멘트 다리만 강에 걸렸다.
숲정이 순교성지 (전라북도 기념물 제125호) - 불의 순교지
여산 숲정이는 병인, 무진 박해 당시 여산 성지 안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낸 곳이다.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순교자는 부지기수였겠지만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만도 23명이나 되니 여산 성지에서 순교한 신자의 대부분은 여기서 순교했다.
그뿐만 아니라 박해가 말할 수 없이 가혹했던 점도 이 순교지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교우들이 관아에서 문초를 받고 형이 확정되자 칼을 쓴 채로 이곳에 끌려왔는데 풀밭에 풀어놓자말자 짐승처럼 풀을 뜯어 먹었다고 한다.
지금은 전부 논밭으로 바뀌어 숲정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되었지만 당시는 이름 그대로 울창한 숲이었다. 숲이었기에 시각적으로 은폐가 되어 박해가 더 참혹했으리라 짐작된다.
이곳을 성지로 조성하려는 노력은 1980년대 초부터 있었다. 여산 본당에서 이곳 전탑 4,000평을 사들여 성지 개발의 기초를 닦은 것이다. 2007년 10월 19일, 성지로 지정된 여산 숲정이는 익산시의 지원으로 2008년부터 본격적인 성지 개발을 추진했다. 숲정이 일대 약 3만 3000㎡(약 1만 평)에 탐방로와 주차장, 분수대, 야외 성지, 체험장, 피정의 집 등 공원화 사업을 순차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2009년 말 야외 제대 및 중앙 광장 등을 새롭게 단장했고, 2014년 성지 입구 주차장과 화장실, 십자가의 길 등을 마련하는 등 순례자들을 위한 시설 확충에 힘쓰고 있다.
입구에는 여산 순교성지 조형물이 있다. 옛날에 세운 돌비석도 있다. 활짝 핀 벚꽃 그늘 아래 진복팔단 순례길 2처 표지판이 서있다.
숲정이 성지를 대표하는 가장 큰 시설은 야외제단이다. 수천 명이 모여도 될 큰 광장이 조성되고 입구에는 커다란 피에타 상이 있고, 맨 앞에 제단이 있다. 제단 뒤 붉은 벽돌로 된 반원형 벽에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제대 좌우에는 커다란 예수성심상과 승리의 월계수에 떠받쳐진 십자가가 서있다.
피에타(pieta)는 이탈리아어로 '경외', '연민', '공경심' 을 의미한다. 예술의 주제 중 하나로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내려 안고 슬퍼하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피에타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성 베드로 성당의 미켈란젤로가 만든 것을 최고의 걸작으로 친다. 우리나라의 피에타는 대부분 이의 모작이다.
세상에 자식의 죽음보다 더한 슬픔과 아픔이 있을까?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다. 아버지의 죽음을 ‘천붕지통(天崩之痛)’이라 하지만 이는 자식으로서 언제 겪어도 겪을 일이다. 하지만 자식의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느닷없이 찾아오는 것이다. 자식의 죽음을 ‘참척지통(慘慽之痛)’이라 하는데 그야말로 참혹한 슬픔이며 처참한 아픔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보다 오히려 더한 슬픔이요 고통이다.
소설가 박완서(정혜 엘리사벳)은 스물여섯 전공의(專攻醫) 아들의 죽음을 겪고 쓴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참척의 글에서 자식을 데려간 하느님에 대해, 원망과 분노에서 더 나아가 저주, 그보다 더한 섬뜩한 살기를 느낀다고 했다. 자녀의 죽음은 이처럼 선량한 교우 여류작가로 하여금 하느님에게 맹렬한 패악감을 유발했다. 하지만 성모님은 절대 순명으로 아픔을 숭고함으로 승화시키신 분이시다.
숲정이의 순교자
기록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여산 숲정이의 순교자들 23명 중에서 17명은 고산현 광암(廣岩, 넓은바위) 교우촌(현 완주군 동산면 광암리)에 살던 신자들이었다. 1868년(무진년) 이 마을에서는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심지어 젖먹이를 둔 여인까지 수십 명이 여산으로 끌려가 그 중 16명이 순교했다.
그중 지도적인 인물이 김성첨(토마스)였다. 김성첨은 다른 신도들과 여산으로 압송되어 와서 영장(營將)으로부터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김성첨과 함께 갇힌 신도들 중 다섯 명은 그의 종질과 재종손 등 가족이었다. 그는 혹형과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며 신음하는 신도들에게 위로하며 격려하였다. 그는 신도들과 함께 아침저녁 기도 등을 공동으로 합송하며 기도의 힘으로 고통을 견디었다. 그는 “우리는 이때를 기다려 왔으니 천당 진복을 누리려 하는 사람이 이만한 괴로움도 이겨 내지 못하겠느냐. 부디 감심으로 참아 받자.”며 가족과 마을 사람들을 위로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그해 11월 10일(양력 12. 23) 교수형을 받았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62세였다.
순교 그 다음은 ....
이곳 여산 숲정이에서 치명한 이들 가운데 10명의 시신은 신도들이 몰래 숨어 있다가 자루에 담아서 야음에 천호산으로 짊어지고 와서 안장시켰다고 한다. 천호 성지에 순교성인의 묘역에 가면 무명 순교인 10명이 묻혀있는데 바로 숲정이에서 순교하신 분들이다. 따라서 이곳 여산 성지와 천호 성지는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다.
1983년 5월 10일. 여산 순교자들의 유해를 천호산에서 발굴하였을 때 순교자들의 두개골은 한결같이 얼굴 쪽이 땅에 엎어져 있었다. 이런 현상은 다른 순교자의 유해 발굴에서도 나타났던 현상이다. 예컨대 연풍 성지에 묻혀 있는 황석두(루카) 성인도 그러했다. 이러한 현상은 역적의 죄명으로 죽은 사람은 하늘을 보고 누워 있을 수 없다 해서 얼굴을 지면에 엎어놓은 것이다. 임금의 명을 어긴 것은 하늘의 명을 어긴 것이니, 죽어선들 하늘을 보고 누워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여산 지역에서는 이후 100여 년 동안 참혹했던 당시의 정황이 계속 구전되어 오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참상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그 지역의 신앙으로 승화되어 왔으며, 순교 터의 흔적이 사라졌지만 숭고한 순교자들의 피는 언제나 신앙 후손들의 마음 안에 간직되어 있다
이밖에 뒷말 치명터에서는 큰 나뭇가지를 휘어 늘여뜨려 신자들의 목에 걸고 나뭇가지를 놓아서 매달아 죽이는 방법을 썼다고 하며, 장터에서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날 형을 집행했다고 하며, 가금터는 옛 수령의 휴식공간인 정원이었다고 하나 가보지는 못했다. 가봐야 현재는 집이나 아파트, 시장 건물 등으로 바뀌어 당시 흔적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오후 3시. 여산 성지를 떠나 천호 성지를 향하면서 진복팔단길 안내판에 기록되었던 다음 구절이 뜨겁게 마음에 남는다.
여기서 흘리신 피 내(川)를 타고 흘러흘러 여산, 황화. 망성, 강경으로, 저 멀리 군산까지 끊일 줄도 모르더니, 간 곳마다 복음씨 되어 수천 신자 이뤄놓고 성당 팔처(八處) 이루었네.
천호 성지 - 순교자들의 영원한 고향 |
해발 500m 천호산(天壺山) 기슭에 위치한 천호(天呼) 마을(현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은 본래 ‘다리실’ 혹은 ‘용추네’로 불리던 전통적인 교우촌이었다. 마을 이름으로 壺(병 호)에서 呼(부를 호)로 바뀐 것은 박해를 받던 신앙 선조들이 이곳에서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하느님을 부르며 살던 곳’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또 하나 이곳이 성지로 개발된 것은 이곳에 인근 지역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장된 까닭이다. 지금 이곳에는 1866년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이명서, 손선지, 정문호, 한재권 등 4명의 성인과 공주에서 순교한 김영오(아우구스티노), 그리고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한 10명의 무명 순교자 등 도합 15명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그 밖에도 밝혀져 있지 않은 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어디엔가 묻혀 있다. 결과적으로 천호산(天壺山)이라는 원래의 이름도 이곳이 ‘순교자들의 피를 담은 병’의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지개발 과정
본래 순교자들이 묻힌 이곳은 조선시대 고흥 유씨(高興柳氏)의 사패지(賜牌地)였다. 사패지란 조성에서 나라에 공을 세운 가문에 하사한 땅이다. 그러기에 이곳에 사는 신자들은 자기 땅이 아니기에 언제든지 쫓겨날 처지였고 동시에 순교자들의 무덤도 이장해야 할 형편이었다.
그런데 1909년 뜻하지 않게 당시 되재 본당(현 고산 본당)의 베르몽(Bermond, 한국명 목세영) 신부와 12명의 신자들이 어렵사리 돈을 마련하여 150정보의 임야를 매입했다. 이렇게 해서 공소 신자들은 생활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고, 이미 모셔진 순교자들의 묘소들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그후 1941년경 150정보 중에서 순교자들이 묻혀 있을 것으로 예상 되는 땅 75정보를 교회에 봉헌했다.
이 땅을 봉헌한 사람들 중 이름이 밝혀진 사람은 목세영(베르몽)신부, 김여선(金汝先), 이만보(李萬甫), 장정운(張正云), 김현구(金顯九), 박준호(朴準鎬), 민감룡(閔甘龍), 송예용(宋禮用) 등 8명이며, 이들은 오늘의 성지를 있게 한 공로자들이다.
1983년까지만 해도 천호 성지는 제대로 조성되지 않았으며, 천호 공소와 고산 본당 신자들에 의해 관리되었다. 게다가 손선지의 묘 외에 다른 순교자들의 묘는 구체적으로 확인도 되지 않았었다. 1983년 5월 호남 교회사연구소 주관으로 순교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12월 18일 당시 복자였던 정문호, 한재권의 묘를 새로 조성하고, 1868년 무진박해 시에 여산에서 순교한 10명의 순교자가 이곳ㅇ[ 안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이들 순교자들의 천묘식을 거행하였다.
전주교구는 순교 복자들에 대한 시성식(1984년 5월 6일)이 끝난 1984년 10월부터 성지 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여 1985년 11월 30일 자치교구 설정 50주년 기념 선포일에 맞추어 새롭게 단장한 순교성인 묘역을 축성하였다. 또한 1987년 8월 31일, 선조들의 순교정신을 이어받기 위한 신앙의 수련장으로 피정의 집을 완공하였다.
1988년 9월 30일 고산 본당 수청리 공소와 석장리 공소 중간 길가에 있던 병인박해시 순교자 김영오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였고, 그 다음날인 10월 1일 이명서 성인의 유해 일부를 절두산에서 가져와 순교성인 묘역에 모셨다.
1992년 3월 31일 성모상을 제작하여 성지에 설치하였고, 1993년 9월 15일에는 이춘만 조각가에 의해 제작된 십자가의 길 14처를 설치하였다.
2006년 5월 20일 기존의 협소한 성당을 대신할 새 성당 신축 기공식을 갖고 1년 후인 2007년 5월 19일 천호 부활성당을 완공해 봉헌식을 거행했다. 부활성당은 연면적 521평, 지하 1층, 지상 1층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지상 1층은 500여 석의 성당이고, 지하 1층은 8,000여 명의 유해를 보실 수 있는 봉안경당으로 순교자와과 교우들의 유해를 모셔서 산 자와 죽은 자의 통공을 이루게 하였다.
2008년 5월 17일에는 경당과 사제관 두 채로 이루어진 천호 공소의 새 경당을 전통 한옥 구조로 지어 축성식을 가졌다. 원래 천호 공소는 박해가 끝난 후 1913년 지어진 건물이 있었으나, 허물고 1953년에 다시 지었으나, 이 역시 세월이 흘러 건물이 낡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2005년 공소 건물을 철거한 후 새 경당과 사제관을 지었다. 전주교구는 2011년 1월 고산 본당 관할 천호 공소를 준본당으로 승격해 호남의 첫 본당 사목지로서의 모습을 다시 찾고 지속적으로 성지를 보존하고 가꾸어 나가도록 했다. 2013년 12월 14일에는 '천호 가톨릭 성물박물관' 개관식 및 축복식을 가졌다.
네비게이션 안내에 따라 오후 3시 20분 경 천호성지에 도착하니 길이 두 갈래다. 그대로 골짜기로 들어가면 교우촌 다리실 마을과 천호 공소로 가고 오른쪽 산길을 오르면 새로 조성된 천호성지로 간다. 다리실 마을은 나갈 때 가기로 하고 오르막길을 올랐다.
작은 못이 하나 나타난다. 예수님께서 시각장애인에게 광명을 찾아주신 실로암 못이다. 이 물을 눈에 바르면 신앙의 맹목(盲目)이 떠질까? 가능만 하다면 발라보고 싶다.
성지로 오르는 돌담길이 정겹고 노란 꽃잎을 터뜨리는 앉은뱅이 수선화의 행렬이 이어지려고 하는데 노란 산수유와 개나리가 샘을 내는 듯 황색을 선점하려 든다. 이처럼 천호 성지는 오솔길을 걸으면서 천호(天呼), 곧 하느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 좋다. 먼저 간 곳은 가톨릭 성물 박물관이다.
천호 가톨릭성물 박물관
2013년 한국교회에서 최초로 건립된 천호 성물박물관은 2008년 세계 희귀 성물을 소장해 온 오문옥 루치아가 성물 1,000여 점을 기증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세계 각국의 다양한 성물과 오래된 신앙 서적, 성인들의 유해를 담은 성광(聖光)도 있어서 성물에 대해 공부하며 기도할 수 있다. 안내 표지판에는 ‘야훼 이레’라는 구절이 쓰여 있는데 이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느님께 번제물로 바치려 한 곳으로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다’는 뜻이다.
두 층으로 되었는데 위층은 성 바오로 관이고 아래층은 성 베드로관이다. 성 바오로관에는 예수님의 강생과 수난, 부활에 관한 성물이 전시되어 있다.
아래층 성 베드로관에는 교회의 일곱 성사와 순교자 관련 자료, 영상실과 소성당이 있다.
순교성인 묘역
순교성인 묘역에 가기 위해서는 103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물론 103은 1984년 성인품에 오른 103위를 뜻한다. 계단 옆으로는 편백나무가 도열하여 우리를 맞아준다. 숨을 몰아쉬며 묘역에 이르자 대형 십자가 아래 15기의 묘가 조성되어 있다. 2단으로 되었는데 위에는 4분 성인을 모셨으며 아래는 무명 순교자 10분을 모셨다.
윗단의 4기의 주인공은 성 정문호(바돌로메오, 66세), 성 손선지(베드로, 47세), 성 한재권(요셉, 33세). 성 이명서(베드로, 47세)이시다. 이들은 완주군 소양면에서 살다가 1866년 12월 5일, 잡히여 8일만인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 순교하였다.
순교자 김영오(아우구스티노, 62세)는 1866년 완주군 운주면 빼재에 살다가 그해 8월 28일 충청도 공주에서 순교하였다. 무명 순교자 10명은 1868년 무진박해 때 여산에서 순교한 분들이다. 죄인으로 처형된 후 미나리꽝에 버려져 있는 것을 신자들이 밤을 타서 죽음을 무릅쓰고 건져다가 이 산에 모셨다. 하늘의 부름을 받은 이들 순교자들이 함께 고이 잠들어 수많은 순례객의 축복을 받으니 참으로 행복하다고 여겨진다.
부활성당
부활성당은 순교성인의 묘역 아래 넓은 잔디밭 끝자락에 위치한다. 마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골고다 언덕 돌무덤을 연상하듯 회색 콘크리트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짓다 만 감옥 같은 모습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삼각형을 기조로 한 다면체 구조로 보는 방향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들머리에는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겠다" 라는 에페소 31장 3절의 말씀이 돌에 새겨져 있다.
부활성당과 종탑
종탑은 본전에서 분리되어 따로 높이 솟아 있다. 이 종탑에는 전주교구 설정 50주년 기념종이 있다.
성당 내부는 더 특이했다. 창문이 극도로 제한되어 침묵과 어둠의 세계인 듯하다. 우리가 들어갔을 때는 마침 아무도 없어서 침묵만이 가득했다. 전원 스위치를 올려야 형태가 나타난다. 완전히 무덤 속과 같다. 이름 그대로 부활의 동굴이다.
성당 내부 전체가 소나무 목재 각목을 붙여 마감되었다. 피톤치드인지 순교의 향기가 풍긴다. 그리고 벽과 천장 모두가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듯 삼각형을 기본 형태로 하고 있다. 천호 성지 전체가 소나무와 편백 숲으로 이루어졌기에 성전 내부도 ‘숲정이’로 만든 것 같다.
제대 후벽에는 손발에 못 자국이 선명한 예수성심상이 십자가 형태로 보는 사람의 마음에 고통의 의미를 새겨주고 있다. 어쨌든 처음 보는 독특한 성전이라 마음에 충격을 던진다.
이처럼 특이한 성당의 설계자는 서울대 건축과 교수라고 한다. 그는 성당을 ‘돌로 만든 기도서’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다고 한다. 그만큼 성당은 세상과 하늘나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을 구실을 하는 통로이며 염원인 것이 아닌가 한다. 지금까지 본 성당의 건물 중 가장 이색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봉안경당
봉안경당은 부활성당의 지하층에 있다. 봉안경당으로 가는 통로 벽에는 시 두 편이 걸려 있다.
해지는 곳과 해 뜨는 곳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
나는 거기 없고 잠들지 않았습니다.
나는 천 갈래 만 갈래로 부는 바람이며
금강석처럼 반짝이는 눈이며
무르익은 곡식을 비추는 햇빛이며
촉촉이 내리는 가을비입니다.
당신이 숨죽인 듯 고요한 아침에 깨면
나는 원을 그리며 포르르
말없이 날아오르는 새들이고
밤에 부드럽게 빛나는 별입니다.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
나는 거기 없습니다. 죽지 않았으니까요.
(해지는 곳에서 어느 인디언)
어제와 이제가 만나는 곳
사랑하는 그대여
좀 더 가까이 귀에 대고 말하자면
바람, 눈, 햇빛, 비
그 어느 것도 나는 아니요
그들 속에 나는 없답니다.
뺨을 스치는 바람에서 살아 있음의
환희를 느끼고
온몸 가득히 햇살을 받으며
자신을 따뜻하게
감싸준 모든 사람들을 생각하고
어림없는 날갯짓으로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새와 반짝이는 눈으로
무한을 바라보고
영원을 꿈꾸는 그대의
마음속에 나는 살아 있답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네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말세요.
거기 서서 지난날을 돌아보며
우리가 함께 했던 기쁨과 슬픔
위로와 상처를 불러 모아
연금술사처럼 모든 것을
사랑으로 바꾸고 있는
그대의 가슴속에
나는 이렇게 살아있으니까요.
(해뜨는 곳에서 어느 코리언)
앞의 시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구전되어 내려온 시라고 한다. 그러나 영문학자 장영희(마리아)는 ‘영미시 산책’에서 미국의 주부 시인 매리 프라이(Mary Frye)의 내 ‘무덤에 서서 울지 말아요‘(Do not stand at my grave and weep)라는 시라는 설이 우세하다고 했다.
뒤의 시는 이 부활성당 축성 미사를 집전한 이병호 빈첸시오 전주교구 주교님이 앞의 시를 풀어 쓴 것이다. 이처럼 부활신앙을 믿는 우리들은 죽어도 무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되고, 햇빛이 되고, 새가 되고 꽃이 되어 항상 당신 곁에 있다. 따라서 무덤 앞에서 울 일이 아니다.
출입문을 열고 문간에 들어가니, 좌우에는 임종자의 수호자이신 요셉 성인과, 죽은 이들이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뵙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두 천사 상이 있다.
봉안함은 벽면에 가지런하게 배치되어 있는데 성인의 유해는 좀 특별하게 봉안되어 있다. 여기서도 피에타 상이 있어 가족의 슬픔을 대변해 주고 있다.
천호 성지가 갖는 또 하나의 장점은 최적의 도보 순례길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성지에 안장되어 있는 순교성지 여산 성지에서 천호 성지까지 8km 남짓한 순례길, 천호 성지에서 천호산 자락을 타고 문수사 옆길로 해서 여산 성지로 넘어가는 순례길, 그리고 천호 성지 인근 신앙 선조들의 삶의 자리를 다시 걸으며 선조들의 신앙을 배우는 품안길 순례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2009년 10월 31일 천주교를 비롯해 불교, 원불교, 개신교 등 전북 지역 4대 종교의 성지를 걸어서 여행할 수 있는 ‘아름다운 순례길’도 마련되었다. 천주교의 나바위 성지와 천호 성지, 불교의 송광사와 미륵사지 석탑, 원불교의 만덕산과 원불교 수련원, 개신교의 서문 교회 등 전주와 완주, 익산 지역에 있는 4대 종교의 성지 180km를 연결한 것이다. 이 아름다운 순례길은 문화재청으로부터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길’로 선정되기도 했다고 한다. 타종교 신자들끼리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오순도순 이 길을 걷는 모습을 보고 싶다.
다리실 교우촌과 천호공소 - 호남 첫 성당
이제 다리실 교우촌과 공소를 갈 차례다. 천호성지 입구까지 나와서 다리실 교우촌을 행했는데 이정표도 없고 하여 길가 옆집에 들어가 물으니 바로 직진하란다. 조금 가니 한옥 집 한 채가 나타나길래 차에서 내렸더니 공소가 아니었다. 길을 잘못 들였다고 생각되어 다시 가까운 집에 들어가서 물으니 계속 가면 성당이 나오기는 한데 지금은 아무도 없을 거란다. 연간 12만 명이 다녀간다는 곳에 안내 표지판도 좀 더 세울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했다.
얼마를 올라가니 종탑이 나타나고 두 채의 큼직한 전통가옥이 나타난다. 천호 공소(지금은 성당)였다. 그때 한 자매님이 검은 승용차를 운전하여 와서 우리가 도착한 것을 확인하고 다시 내려가는데 자세히 보니 처음 마을에 들어서서 공소로 가는 길을 가르쳐준 자매님이었다. 다니다 보면 이렇게 친절한 사람도 있다
천호 공소가 있는 다리실 교우촌은 ‘월곡(月谷)’이라고도 한자명도 썼으며, ‘용추네’ 라고도 불렀다. 용추네는 본래 용이 등천한 내(川)가 있다 해서 불린 용천내가 변용된 이름이다.
이곳에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아마도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로 추정된다. 주로 충청도로부터 박해를 피해 이곳 천호산 산간지대로 모여든 것이 계가가 되었다.
박해시대에 천호산 기슭에는 다리실, 산수골, 어름골, 낙수골, 불당골, 성채골, 시목동 등 7개의 공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리실, 성채골, 그리고 후대에 터를 옮겨 새로이 시작한 산수골 공소만 남아있는데 이들 공소 중 다리실 공소는 예나 지금이나 가장 큰 공소다.
1877년 한국천주교회에는 블랑 신부와 드게트 신부 뿐이었는데, 블랑신부는 이 무렵 어름골을 사목활동의 거점지로 정착한 후, 리우빌 신부와 라푸르카드 신부등 3명의 선교사가 10여 년 동안 이 지역에서 지냈다. 이들 선교사들이 주로 머문 곳은 천호공소였다.
전주교구에서 첫 본당은 1889년 되재 본당(현 고산 본당 전신)이라고 하는데, 이보다 훨씬 앞선 1877년 이미 11월 가을 판공이 시작되기 전에 블랑(白三圭) 신부가 인근 어름골에 정착하여 5년 정도 계섰다는 기록이 있다. 블랑 신부는 다리실에도 있었기에 천호 공소는 전주교구 뿐만 아니라 호남에서 가장 먼저 생긴 본당 중의 하나이다.
교우촌 초창기 교우들은 공소집을 마련하고 신앙교육과 기도생활을 하다가 박해가 끝나고 1913년 현재 경당이 신축된 자리에 기와로 된 공소 경당과 사제 숙소를 지었다. 전쟁이 끝난 1953년 화재로 전소된 공소 건물의 신축이 불가피하여 지금 공소 아래 마당 쪽에 초가 형태의 경당을 새로 지어 봉헌하였으나 2003년 오랜 세월에 지붕이 무너지고 건물 자체가 주저앉아 천호공소 경당의 신축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2005년 공소건물을 철거하고 2006년 기공식을 갖고 공사에 들어가 2008년 5월 드디어 새로운 공소 경당을 완공하게 되었다.
전주교구는 2011년 1월 고산 본당 관할 천호 공소를 준본당으로 승격해 호남의 첫 본당 사목지로서의 모습을 다시 찾고 지속적으로 성지를 보존하고 가꾸어가도록 했다.
이처럼 천호(天呼)공소는 천호산 기슭에 자리하여 그 이름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백성들이 하느님을 부르며 사는 신앙 공동체로서 43가구 108명이 모두 신자인 현존하는 가장 큰 규모의 교우촌으로 교회사적인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입구에는 박해시기 고산지역 교우촌(58개소) 기념 천호성당이라는 2008년 5월에 세운 돌 비석이 서 있다. 비석에 당시 천호 지역에 58개 교우촌이 있었다고 하니 골짜기 마다 교우촌인 셈이었다. 장중한 두 채의 기와집인데 하나는 성전 경당이요, 하나는 사제관 겸 관리실인 듯하다.
벌써 오후 5시 오늘 일정은 마쳤다. 이제 내일 일정인 나바위 성당이 있는 익산으로 다시 이동. 함열역 부근 태양장이라는 모텔에 짐을 풀고 인근 식당에 가서 식사를 했다. 지역 신문이 익산맛집이라고 지정한 홍보물이 벽에 붙어있는데 시장을 반찬 삼아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을 곁들이는데 무슨 맛집이 아닌들 어떠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