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36. 인도 라닥지방
히말라야 산중의 살아있는 불교
<경전을 보고 있는 스피툭사원의 주지스님.>
2002년 4월11일 델리에서 레(Leh. 라닥지방 중심도시)로 가는 새벽 5시45분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스리나가르에서 델리로 돌아온 ‘한국불교 원류를 찾아’ 취재팀이 히말라야 산중의 살아있는 불교를 보기 해 다시 북인도 라닥(Ladakh)지방으로 날아간 것이다. 비행기가 북쪽으로 갈수록 ‘뜨거운 공기’는 ‘차가운 공기’로 변했다. 눈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비행기는 어느 새 히말라야 산맥 위를 날고, 눈 아래로는 장관(壯觀)이 펼쳐져 있었다.
겹겹이 쌓인 산과 깊은 계곡엔 흰 눈과 작은 길, 나무들 그리고 강이 보였다. 눈 덮인 히말라야 산맥은 과연 보는 사람을 압도했다. 절로 감탄이 나왔다. “저런 곳에도 사람이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있는데, “레에 도착했다”는 기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
<죽은 이를 위해 악기를 연주하는 라닥의 스님들> |
레공항에 내리니 7시10분. 간단한 수속을 마치고 공항을 빠져 나왔다. 아주 한랭한 공기가 몸속에 스며들었다. 델리가 ‘열대’라면 레는 ‘냉대’였다. 저절로 몸이 떨렸다. 시간이 지나자 머리마저 조금씩 아파왔다. “비행기에서 금방 내려 그런가”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해발이 높이 나타나는 ‘고산병’ 징후임을 안내인의 설명을 듣고 비로소 알게 됐다. 이곳의 해발은 3,600m. 점점 어질어질했다. 모든 행동이 자연스레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말도 걸음걸이도 심지어 호흡마저도. 3박4일 일정을 어떻게 소화할까 걱정됐다. “하루정도 지나면 적응된다”는 안내인의 설명에 안도했다. 호텔에 도착해 짐을 풀고 잤다. 자다가 일어나 점심 먹고 다시 잠을 잤다. 어질어질한 현상은 다소 사라진 것 같았다.
차를 타고 레 뒷산으로 올라갔다. 뒷산에서 내려다 본 레는 한 폭의 풍경화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직 봄이 오지 않아 그런지 황량함 삭막함의 극치였다. 풀이라고는 한 포기도 보이지 않고, 몇몇 백양나무에서만 파란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그런 삭막함 사이로 왕궁과 사찰들(곤파나 곰파로 불린다)이 그나마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해발 3600m의 도시…고산병 고통
라닥지방 영광의 상징이었던 왕궁은 그러나 펀잡지방의 도브라 군대가 라닥을 점령한 19세기부터 폐허로 변했다. 외양은 여전히 위압적이지만 내부는 파괴된 채 그대로 있다고 안내인이 설명했다. 맞은 편 저 멀리 산 정산에 라마 사원이 보였다. ‘스피툭 곤파’라고 했다. 인도 대륙에서 사라진 불교가 이곳에서는 여전히 위용을 떨치고 있는 것 같았다.
|
<라닥지방 레에 있는 스피툭 곤파(사원).> |
이곳엔 언제 불교가 전래됐을까. 자연스레 ‘직업적인 상상’이 뻗쳐 나왔다. 서쪽으로는 파키스탄, 동쪽으로는 중국에 접해있는 라닥지방은 통상 6개 구역으로 구분된다. 중앙 라닥 지역, 롱 지역, 룹소 지역, 탕체 지역, 누브라 지역, 잔스카르 지역 등이 그 것. 라닥 지역의 중심도시가 레이며, 인구는 3000여명 정도. 잠무캐시미르주에 소속된 라닥은 매년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유명한 명소이자, 불교 성지로 유명하다. 산야엔 수많은 스투파와 사찰들이 즐비하며, 과거의 불교의식이 그대로 살아있는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라닥지역 불교를 논하려면 캐시미르 불교를 이야기 할 수밖에 없다. 〈마하밤사〉 등에 의하면 아쇼카왕(기원전 268~232 재위) 당시 마우리아 왕조 수도 파탈리푸트라(현재의 인도 파트나)의 쿡쿠다 아라마(계원) 승가엔 많은 이단자들이 들어와 부처님 가르침을 손상시키고 있었다. 아쇼카왕 왕사인 목갈리풋타 팃사 장로는 천 명의 비구스님들을 모아 이설을 배척하고 정법을 바로 세웠다. 이것이 소위 제3결집이며, 그 때 저술된 것이 바로 ‘논사’(論事. 카타밧투)다. 결집을 통해 정법을 다시 일으킨 목갈리풋타 팃사 장로는 아쇼카왕에게 권하여 9개 지방에 전법사를 파견했다고 한다.
고승 법현·현장스님도 다녀가
캐시미르와 간다라 지방 등 북서인도엔 맛잔티카 스님이, 싱할라(스리랑카)에는 마힌다와 4명의 스님, 히말라야 지방엔 캇사파고타와 맛자마 등 5명의 스님이 각각 파견됐다. 이 때 불교를 받아들인 캐시미르와 라닥지역은 불교로 개종했다고 〈마하밤사〉엔 기록돼 있다. 북서인도에 전파된 불교는 쿠샨왕조(1세기~5세기) 3대왕 카니쉬카 대제(재위 132∼152) 당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캐시미르와 라닥지역 불교도 따라서 발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저간의 사정은 동진의 고승 법현스님(317~419. 인도 순례 399~412)이 남긴 〈불국기〉에 남아있다. “총령을 지나 북천국에 들어가자마자 타력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소국이 있다. 역시 많은 스님들이 있었으며 모두 소승을 배우고 있었다. …(중략)… 재일(齋日)이면 항상 광명을 나투어 여러 나라 왕들이 다투어 공양을 올렸는데, 이런 것은 현재에도 볼 수 있다.” 물론 현장스님의 〈대당서역기〉에도 이 지역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러다 8세기경 티벳불교가 라닥지역에 전래됐지만, 14세기경 캐시미르 지역이 이슬람으로 변하자 라닥도 영향 받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슬람 세력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라닥에 이슬람을 전파시키려 노력했지만 성과는 극히 미미했다. 사원을 파괴하고, 스님들을 살해하는 등 잔혹한 방법도 피하지 않았다. 이 때부터 라닥지역 사원들은 산 정상에 성(城)처럼 건립됐다고 안내인은 설명했다.
|
<라닥중앙불학연구소의 학생들> |
다음날. 어제 본 스피툭 곤파에 올라갔다. 레 시내에서 차를 타고 40분 정도 달렸다. 산 정상에 위치한 스피툭 곤파는 사찰의 역대 스님들을 모신 조캉, 타라보살을 모신 하캉, 부처님을 모신 두캉, 티벳 전통 신을 모신 곤캉, 그리고 스투파로 구성된 거대한 사원이었다. 경사가 심한 계단을 따라 조캉 곤캉 두캉을 왔다 갔다 하며 라닥 불교를 살폈다. 다시 시내로 내려와 ‘라닥중앙불학연구소’(Central Institute of Buddhist Studies in Ladakh)를 찾았다. 1948년 라닥을 방문한 네루 수상이 ‘쿠쇽 바쿨라’ 스님을 만나 설립하기로 약속하고, 1953년 건립된 대학이었다.
한국인과 외모 비슷한 라닥 사람들
수업 중인 교실에도 가보고, 도서관에도 가 보았다. 구릿빛 얼굴을 한 남학생, 전혀 화장하지 않은 싱싱한 얼굴의 여대생들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우릴 쳐다보았다. 학생들은 여기서 불교철학, 팔리어, 산스크리트어, 영어, 힌디어, 수학, 물리, 의학 등을 배우고 있었다. 교실 입구마다 게시판이 있고 게시판 마다 격언이 적혀있었는데, “옷이나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구절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호텔로 돌아오다 곳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아침과 달리 오후가 돼 날씨가 풀리자, 일하러 나온 모양이었다. 안내인의 설명에 의하면 노동인구가 부족해 남녀 구분하지 않고 모두 밭일을 한다고 했다. 들판을 보니 사실이었다. 일하는 여자들이 오히려 많아 보였다. 힘든 일을 하는 그들의 얼굴은 상당히 밝았다. 화장하지 않은 맨 얼굴의 라닥 여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과 외모가 비슷했다.
|
<스피툭 사원 옆 어린이 학교> |
유심히 살피다 알게된 것인데, 라닥 여인들은 일하면서 입으로 뭔가 중얼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안내인에게 물으니 “옴마니파드매훔이라는 육자진언을 외우는 것”이라고 했다. 라닥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든지 항상 ‘옴마니파드메훔’을 외운다고 덧붙였다. 인도의 다른 지역에선 사라진 불교가 히말라야 산맥 속의 척박한 라닥에 살아있는 이유도 노동 때문일까. 불교 속에 살고, 육자진언을 외우기에 라닥사람들의 얼굴이 밝은 것일까. 일하면서도 항상 웃는 그들의 얼굴이 바로 부처님 상호(相好)처럼 보였다.
인도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목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