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암당(寒闇堂) 이유립 선생은.
1907년 평북 삭주군 구곡면 안풍동 구령포 청계령산 아래
청계곡에서 독립운동가 단해(檀海) 이관집(李觀 ) 선생의 4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철성(鐵城)으로 이암의 후손.
자는 채영(采英) 또는 중정(中正) 호는 한암당(寒闇堂) 또는 정산초인(靜山樵人).
세 살부터 어머니로부터 천자문을 배우고
6세에《동몽선습童蒙先習》을 읽다가「한무제토멸지(漢武帝討滅之)하시고」라는
구절에 이르러 "위만조선이 우리 나라면서 우리나라를 토멸한 한무제는 분명 우리나라 원수인데, '하시고'라는 토씨를 붙여 읽는 것은 나는 싫다"하여
끝내《동몽선습》을 읽지 않았다.
13세 때인
1919년 4월 7일 신안동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63세인 1969년
이석영씨의 재정 후원으로 강화도 마리산 단학동에 커발한 개천각을 세워
신시개천의 창시자 한웅천왕을 비롯하여 치우천왕. 단군왕검을 봉안하고
매년
- 대영절(大迎節. 음 3월 18일).
- 개천절(음 10월 3일) 두 차례 제천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현재 마리산 단군성전에는 이유립 선생의 부인이 생존해 계신다.
계연수 선생은 호를 운초라고도 하고 일시당(一始堂)이라고도 하는데.
한암당 선생 아버지와는 광복운동을 함께한 관계로 어릴 때부터 가까이서 자주 접해온 사이였다.
그러던 1920년 어느날.
계연수 선생이 집으로 찾아와서 어린 이유립을 부르더니
"너는 머리가 좋고 하니 네가 우리 역사를 공부해라"고 부탁 겸 타이르셨다.
그러나 독립운동과 정치에 더 관심이 있던 이유립은 듣는 둥 마는 둥 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3일 후 목이 잘린 계연수 선생의 시신이 대동강변에서 발견되었다.
1920년 계연수 선생은 일본인 스파이에 의하여 피살되었다.
불과 몇일전에 자신에게 일렀던 말들이 선생의 유언처럼 들리고.
마침내 운명처럼 '우리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이전에 틈틈이 계연수 선생에게 들었던 이야기에다
신채호. 이덕수 선생들과 교류하면서 전해 듣는 이야기가 차곡차곡 쌓여가기 시작하였다.
한암당 이유립 선생의 일생을 통털어 최대의 민족사적인 사건은
【한단고기(桓檀古記)】와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우리 민족사를 논할 때 불가분『한단고기』와의 관련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럴 때마다 한암당선생은 그 중심에 선 인물이 되고 만다.
『한단고기』의 탄생은 운초 계연수 선생이
- '삼성기전 상편'. '삼성기전 하편'.
- '단군세기'.
- '북부여기' 상. 하.
- '태백일사'를 한데 묶어
『한단고기』라는 제목으로 30부를 발간한 데서 비롯된다.
그 가운데 1부가 한암당 선생에게 전해져 칠십년 대 초반까지 보관하고 있었다.
당시 한암당 선생은 의정부에서 셋방을 얻어 있다가
너무나 어려워 군산으로 잠깐 내려가 있었다.
그 사이 주인은.
방세도 못내는 노인이 어디 갔는지 나타나지도 않자 책을 내다 팔아 버렸다.
이때 그『한단고기』도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한암당 선생은【한단고기】1권 정도는 이병도씨 집에 있을 것으로 추측하였음)
급기야 기억을 되살려【한단고기】를 다시 써야 했다.
워낙 공부를 많이 하고 어려서 전령으로 활동할 때 문건보다는 외워 전달했던 것이나
속독으로 훈련된 탓에 새로이 한단고기 내용을 기억하여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 후 잘못된 부분이 몇 군데 제자들에 의해 발견되기도 하였으나
'거의 맞을 거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던
선생의 인품을 의심하는 사람은(식민사학자들을 제외하곤) 거의 없다.
이렇게 해서 정리된 문건은
1970년대 후반〈한단고기 정해〉라는 제목으로
서문까지 완성된 상태에서 출판사 선정을 위한 협의 도중
당시 월간《자유》의 발행인인 박창암으로부터
'출판에 도움이 될 재일교포가 있으니 원고를 달라'는 요청을 받고 건네졌으며.
불과 3일이 지나지 않아 박창암으로부터 아무런 말도 없이 원고를 돌려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일본에서『한단고기』초판이 나왔는데,
일부 내용의 해설이 임의로 바꾸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 초판은 우리나라에 전해져 제일 먼저 김은수 선생의 번역판이 나왔고.
이유립 선생의 '한단고기정해'가 대배달 민족사에 실리게 되었으며
이어서 임승국선생의 한단고기.
강수원 선생의 한단고기.
85년 배달문화원에서 발행한 한단고기,
오정윤 선생의 한단고기(도서출판 창해 刊) 등이 연이어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 이 외에도
-『배달의숙(倍達義塾)』에서 83년에 발행한 '한단고기' 필사본.
- 1979년 조병윤씨가 오형기씨에게 부탁하여 필사한 '한단고기'
(광오이해사 발행. 100부 한정판. 이 내용이 일본인 '녹도 승'에게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음).
- 일본인 '녹도 승'이 쓴 '한반도의 우가야왕조사-한단고기'등이
한배달 자료실에 보관되어 있다.
치우학회장 박정학씨의 증언에 의하면 이유립 선생이 돌아가시기 바로 전해인 1985년의 선생의 생활을 이렇게 적고 있다.
"새로 지은 집이었는데 조그만 별채로 방 하나, 부엌 하나였으며,
혼자서 연탄도 반찬도 없이, 그야말로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고'하는 처지였다.
그나마 몇몇 제자들이 가져다주는 라면을 한꺼번에 3개를 삶아 놓고
소금이나 간장을 반찬 삼아 아침, 점심으로 조금씩 끼니를 들고 있던 때였다.
당시 한암당 선생은 김포에, 부인은 군산에, 시집 안간 막내 딸은 대전에 각각 흩어진 이산가족이 되어 있었다.
이런 선생께 1200만원을 마련하여 화곡동에 전셋집을 마련해드리고
흩어진 가족들이 모여살도록 터전을 구해 드렸다."
이유립 선생이 월남에 성공함으로서
단단학회를 세워 계연수 선생의 한단고기는 다시 세상에 전해질 계기가 생겨났다.
작고하신 이유립선생은 1979년 한단고기를 세상에 펴낸다.
그러나 1982년 이 이유립선생의 한단고기가 한글로 번역이 되기도 전에
천만뜻밖에도 일본의 가지마가 일본어로 번역하여 발행을 해서 세상에 펴내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구한말과 일제시대라는 배달Baedal 민족 최대의 암흑기에도
위대한 인물들이 마치 릴레이를 하듯 서로 이어받고
그 가난했던 시기에도 자금을 대고해서 전해진 한단고기가 해방된 조국에서
그것도 소위 단군이래 가장 잘 살게되었다는 1980년대초에 어이없게도 일어로 먼저 번역된 것이다.
자손만대를 위한 소중한 민족적 지적재산이 국내에서 출판되지 못하고
일본에서 먼저 출판되는 수모를 우리 모두는 당한 것이다.
그 시대의 우리는 진정 중요한 일을 하는 인물들이 단돈 몇푼의 출판자금이 없어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할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초를 살았던 한국인중 한사람으로
당시에 한단고기의 존재를 몰랐다해도 한없는 부끄러움을 가지게 만드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