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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간: 2010년8월19일(목) -22(일)
2. 행선지: 백두산 (중국 길림성)
3. 산행경로: 서파관문-5호 경계비-청석봉-한허계곡-백운봉--차일봉-용문봉-장백폭포-주차장(소요시간: 9시간)
4. 날씨: 흐림-비-갬
제1일-8월19일(목): 출발 – 장춘 도착
작년 중반(?) 무렵 회장이 백두산 이야기를 한 것을 시작으로 올해 초에 산행계획이 구체화되었고 마침내 오늘 이 원행을 떠난다.
이렇게 모든 일은 말에서부터 비롯되고 사람의 의지와 결단에서 성패가 정해지는 것 같다.
어릴 제나 지금이나 여행을 떠나려고 하면 늘 가슴이 설렌다.
출발 전날 밤에 들뜬 기분으로 짐을 꾸리고 당일 이른 아침에 가볍게 흥분된 마음으로 공항버스에 오른다.
특히 이번 원행은 행선지가 행선지이니만큼 모든 회원들이 그러했으리라.
8월19일 목요일 아침. 날씨가 흐리지만 곧 맑아지리라고 기대해 본다.
회장과 PM이 거듭 당부한 대로 우리 일행은 전원 07:40까지 인천공항 13번 출구 M카운터 앞에 모였다.
아시아나항공의 체크인 카운터인 이곳은 우리를 포함한 단체여행객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조금 있다가 이번 원행을 안내할 여행사의 강종숙팀장이 나와 자기소개를 했다.
시종 웃음을 잃지 않고 또한 또박또박 힘주어 말을 하는 그녀의 단단한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호경은 동료들의 지팡이를 거두어 해체한 다음 함께 짐으로 부칠 준비를 했다.
(탑승전에)
이윽고 체크인이 시작되어 우리도 좌석을 배정 받은 다음 9시 반이 조금 지나 비행기에 올랐다.
우리를 태운 OZ 303편은 당초 출발시간(09:40)보다 1시간 이상 늦게 인천공항을 이륙했다.
오늘 서울에서 출발한 인원은 18명 (김상희, 김승기, 김인상, 김재윤, 김호경, 민경양, 박세훈, 박인철, 배진한, 서영준,
심달섭, 엄형섭, 윤용국, 이성열, 이정우, 이종원, 한택수, 윤신한)이다.
권중배,이대용,강신찬 회원은 회비까지 납부하고 나서 회사 일로 아쉽게도 함께 떠나지 못했다.
11시가 조금 넘어 이른 점심이 나왔는데 아침 일찍부터 부산을 떠느라고 시장했는지 모두들 맛있게 식사를 한다.
그때 날씨가 좋지 않은지 갑자기 기체가 덜덜거리며 아래 위로 흔들린다. 창 밖으로는 구름이 낮게 날아다닌다.
나도 모르게 자꾸 날씨에 신경이 쓰인다. 11:40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면서 구름 사이로 초록빛 육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중국 길림성의 상공을 날고 있다. (이제부터 1시간 늦은 중국의 표준시간으로 기록한다.-필자 주)
11:30 인천을 출발한 지 1시간 40분만에 장춘공항에 착륙했다.
비행기를 내려 출입국 심사를 받던 도중 종원은 영문도 모른 채 검사대 옆에서 한 동안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호경은 입국심사를 마친 뒤에 출입국관리가 내려와서 여권을 회수해 갔다.
강팀장이 출입국관리소로 올라갔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두 사람의 여권을 내어 주더라나.
아마도 무작위 샘플링 대상으로 뽑힌 때문인 듯하다.
(장춘도착 - 종기와의 만남)
밖으로 나오니 기온이 섭씨 27도라는데 그리 덥지는 않다.
조금 뒤, 어제 장춘에 도착하여 일행과 합류하러 공항에 나와 있던 이종기군과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11:50 여행사에서 주선한 버스에 오르자 강팀장이 현지 가이드인 조선족 이철우씨를 일행에게 소개했다.
비행기의 연착으로 시간이 모자라 공항 근처의 식당에서 점심을 했다.
중국요리와 한식이 절충된 듯한 식사였는데 그런대로 괜찮았다.
설화(雪花)라는 상표의 맥주도 나왔는데 미처 잔이 준비되지 않아 사발에 따라 마셨다.
12:30 부익이 도착했다. 일행의 도착시간에 맞춰 장춘에 닿으려고 애를 쓴 탓인지 얼굴이 핼쑥해 보였다.
만약 여기에서 일행과 합류하지 못할 경우 숙소인 송강하(松江河)의 호텔로 가는 교통편을 구할 길이 막막하다고 한다.
우리는 그를 만난 것을 기뻐하며 다시 한번 사발에 맥주를 따라 건배를 했다. 이제 참가자 전원이 모인 셈이다.
(부익이도 합류)
13:00 버스에 올라 송강하로 출발했다. 송강하까지는 450Km로 7-8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우리가 처음에 탔던 버스는 너무 낡고 덜덜거려서 도중에 다른 버스로 바꾸어 탔다.
도로 양 옆으로는 옥수수 밭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예전에 만주땅이 비옥하다는 말을 들은 것이 실감난다.
차창 밖의 풍경이 거의 똑같다 보니 마치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는 기분이다.
이철우씨가 앞으로의 일정과 내일 산행 시 주의사항을 설명했다.
그런데 차 안의 마이크시설이 부실해서 그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그도 그 점이 미안했던지 겸연쩍은 얼굴로 중국이 차이나(China)라서 대한민국과는 <차이나>는 점이 많다고 했다.
뒤에서 천자문(?) 읽는 소리가 들리기에 돌아다 보니 종원과 호경이 이백의 <夜思>라는 한시(漢詩)를 읽으면서 함께
그 뜻을 풀이하고 있다. 두 사람은 한시를 읽고 즐기는 단계에 와 있으니 앎의 길은 한도 끝도 없는 가 보다.
누군가의 제의로 인천공항에서 산 죠니워커 한 병을 풀었다.
황송하게도 호경이 통로를 오르내리며 일일이 술을 따라 권하는 수고를 했다.
이철우씨가 반쯤 말린 북한산 북어 두어 마리를 꺼내어 안주거리로 내어 놓았다.
술이 목 안으로 넘어갈 때 무언가 뜨거운 것이 밀려온다.
말은 없었지만 모두들 지금은 남의 손에 들어가 있는 우리의 옛 땅을 생각했을 게다.
이곳을 지나면서 이런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빗줄기가 차창을 때리니 마음이 더욱 스산해진다.
장춘 식당을 출발한지 5시간이 지난 18:25 오늘의 목적지인 송강하(松江河)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백두산까지는 74Km로 나와 있다. 오후 7시 무렵 우리가 오늘 저녁에 머물 장백산 가일(假日)호텔에 도착했다.
즉, <백두산 Holiday Inn>이다.
우리는 서둘러 2인1실로 숙소를 배정하고는 곧바로 버스 편으로 근처의 고려반점으로 가서 한식으로 저녁식사를 했다.
(송강하 도착 그리고 식사후)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하늘은 맑게 개었고 북두칠성이 맞은 편 산의 능선에 닿을 듯 낮게 걸려 있다.
내일 비가 오지 않기를 빌어본다. 다시 버스에 올라 호텔로 돌아오니 9시가 다 되었다.
내일 아침에 5시50분까지 버스에 승차하라는 강팀장의 당부도 있고 해서 일행은 모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나중에 들으니 그래도 몇 사람은 나가서 맥주를 한 잔하고 들어왔다고 한다)
제2일-8월20(금): 백두산 종주산행 –이도백하로 이동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깨었다. 04:00에 깨우기로 되어 있었는데 호텔직원이 잘못 알고 한 시간 일찍 신호를 보냈던 것 같다.
덕분에 일찍 잠을 깨어 창 밖을 내다보니 비가 내리고 있다.
어젯밤에 하늘이 그렇게 맑았는데 비가 오다니 고산지대의 날씨는 정말 헤아릴 수가 없다.
06:00 근처 중국식당에서 아침을 먹은 뒤 곧바로 버스에 올라 백두산으로 가는 서파관문으로 향했다 (06:30).
여행사에서는 산행 도중 먹을 자두와 능금을 준비하여 각자에게 나눠 주었다.
버스는 도중에 고려반점에 들러 점심 도시락을 실었는데 그곳에서 산행을 안내할 중국인 가이드 (전따꺼)가 합류했다.
서파관문으로 가는 왕복 2차선 도로의 양 옆으로는 침엽수들이 하늘을 찌를 듯 죽죽 뻗어 있다.
침엽수의 잎은 겨울철에 탄소동화작용을 하여 생태계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고 상희가 알려준다.
그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버스는 어느 새 서파관문에 도착했다 (07:10).
직원들이 늑장을 부리는지 예정시간이 한참 지나 매표소 문이 열렸고 일행은 흰 자작나무들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가
산행기점까지 일행을 싣고 갈 환승버스에 올랐다.
(장백산 입구에서)
08:20 그곳을 떠난 버스는 울창한 원시림 사이로 난 도로를 따라 고속으로 질주한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청나라는 백두산을 성산(聖山)으로 여겨 출입하거나 거주하는 것을 아예 금지하였다고 한다.
백두산을 둘러싸고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이 산의 생태계가 지금처럼 보존되고 있는 것은 일단은 고마운 일이다.
08:50 3거리에 도착했다. 오른쪽은 대협곡으로 가는 길이고 천지는 왼쪽 방향이다.
차가 검문소를 지나 고도 1,600미터에 이르자 삼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1,700미터 표지판을 통과할 때부터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들꽃들이 숨바꼭질 한다.
위로 올라갈수록 안개가 짙어지더니 바로 앞도 잘 보이지 않는다.
해발 1,900미터 정도에 있는 주차장에 도착(09:05)하니 안개는 이미 비로 변하여 버스에서 내리는 일행의 옷을 적신다.
이런 날씨에도 주차장은 천지를 보러 온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다.
(주차장에서 출발전)
10분 뒤, 우리 일행은 1,236개의 계단 밑에 2줄로 늘어섰다.
중국인 가이드가 일행 중 한 사람이 후미를 맡아야 한다고 하기에 필자가 후미에 서기로 했다.
일행은 끝없이 이어진 계단을 따라 5호 경계비를 향하여 출발했다.
(여기서부터 산행이 끝나는 소천지 주차장까지 필자는 행렬의 맨 뒤에 있었기 때문에 이후의 기록은
후미의 상황을 중심으로 기록한다-필자 주).
백두산은 들꽃의 보고이며 그 중 대표적인 식물이 노랑만병초(진달래과)라고 들었다.
옆에서 걷고 있는 강팀장에게 물었더니 그 꽃은 7월까지만 볼 수 있다고 한다.
그 대신 지금은 끝에 자줏빛이 돌고 온 몸이 엷은 노랑색인 우아한 산용담꽃이 온 산을 하얗게 수놓고 있다.
용담꽃은 원래 짙은 자줏빛인데 이곳에서는 일조시간이 짧아 탈색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백두 용담)
몸이 불편해 보이는 한 부인이 가마에 실려 계단을 올라가고 있다.
그녀는 정상이 아닐 정도로 체구가 컸는데 앞에서 가마를 든 가마꾼의 거친 숨소리가 내게까지 들리는 듯하다.
(서파 천지를 향하여)
09:25 마지막 계단을 올라서니 5호경계비가 있다.
이 비석은 북한과 중국 간에 천지를 반분하는 경계를 정한 것으로 해발 2,470미터인 곳에 서 있다.
날씨가 맑다면 천지가 바로 발 밑으로 보일 텐데 호수는 짙은 안개에 싸인 채 아무 말이 없다.
일행은 하릴없이 천지 표지판 앞에서 단체사진을 한 장 찍고는 앞으로 나아간다.
아까 그 부인을 태운 가마도 결국은 여기로 올라올 것이고 그녀는 꿈을 이루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기분이 좋아진다. 행복해 보이던 그 모습이 떠오른다.
(경계비 사진과 천지)
(서파 천지에서 잠간 선보인 천지)
안개는 쉽사리 걷힐 생각이 없는 것 같아 실망스럽다.
일행이 낙담하는 모양을 바라보던 강팀장이 천지를 볼 기회가 2-3번은 꼭 있다며 위로한다.
하긴 앞으로 5-6 시간을 계속 오른쪽으로 천지를 끼고 걸어야 하니 잠깐이라도 그 모습을 볼 기회가 있을 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 읽은 <Secret>의 말대로 그녀의 말을 믿고 반드시 보게 되리라고 스스로 다짐한다.
우리는 안개를 헤치며 앞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앞으로 나아간다.
마천루로 올라가는 길은 산의 경사면을 가로지르는 긴 코스이다.
행렬이 길어지면서 선두와 후미의 간격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행렬)
안개가 조금 엷어지면서 산비탈을 올라가는 선두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보이는 검은 실루엣은 마치 사구(砂丘)를 오르는 대상(隊商)의 모습처럼 아름답게 보인다.
하지만 지금쯤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가느라고 모두들 숨이 턱에 닿을 게다.
초록빛 산자락을 들꽃이 형형색색으로 물들여 마치 푹신한 양탄자 같다.
그 녀석들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잠시 피로를 잊는다.
우리가 천지만을 목표로 이 산에 든 것은 아닐 진대 이 귀여운 진객들도 우리의 관심과 사랑을 받아야 마땅하다.
생각이 정리되니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10:15 마천루를 우회하는 산허리에 후미가 도착하니 쉬고 있던 선두가 일어서서 출발한다.
늦게 도착한 산우들이 혹시 야속해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런 장거리 산행을 제시간에 마치기 어렵기 때문에 그것은 일종의 불문율과 같다.
우리 후미도 청석봉을 향하여 길을 떠난다.
등산로는 마치 칼등처럼 좁은데 오른쪽 천지방향은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이고 왼쪽은 아주 가파른 경사면이다.
게다가 비는 계속 뿌리고 바람까지 불기 때문에 자칫 추락할 위험이 있어서 여간 조심을 해야 하는 게 아니다.
강팀장이 일행에게 길의 왼쪽으로 붙어 걸으라고 주의를 준다.
초원지대가 잠시 끊기고 암벽 부스러기가 널려 있는 너덜지대가 나타난다.
누군가 길 옆에 돌로 작은 탑을 쌓아 놓았다. 마치 우리의 시골 서낭당에서 흔히 보는 돌탑과 비슷하다.
여기도 우리 동포들이 사는 곳이고 한국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이니 저 작은 돌탑이 이상할 게 없다.
청석봉까지는 계속 이런 자갈길이 이어진다.
길 오른쪽으로 흙이 드러난 곳에 샛노란 꽃을 피운풀이 한 그루 자라고 있다. 양귀비꽃을 닮은 두메양귀비이다.
척박한 땅에 홀로 꿋꿋하게 끈질긴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꽃을 피웠으니 그 삶을 마친 셈이고 머지 않아 스러져 갈 것이다. 만물은 이렇게 끝없이 변화하고 순환한다.
11:00 청석봉에 닿았다. 이름 그대로 바위가 푸른 색(靑石)을 띠고 있다.
조금 전에 선두의 뒷꼭지를 보았는데 올라와 보니 벌써 한허계곡을 향하여 내려가고 있다.
이곳에도 여전히 안개가 짙어 아무 것도 볼 수 없으니 잠시 숨을 돌리고는 우리도 아래로 내려간다.
내려다 보이는 한허계곡은 청석봉과 백운봉 사이에 형성된 깊은 계곡이다.
전체가 대체로 평탄한 구릉으로 지리산의 세석평전 같은 평원을 이루고 있다.
청석봉으로부터 내려가는 길은 거의 수직에 가까울 정도로 가파른 데다 부서진 암석 사이로 낸 길이라서
발을 잘못 디디면 돌덩이가 굴러 떨어진다. 강팀장도 아래에 있는 산우들에게 낙석에 주의하라고 소리친다.
우리는 서로 부축하면서 그 험한 낙석지대를 무사히 통과했다.
(휴식중)
다시 평탄한 초원지대가 이어진다.
선두는 구릉을 넘어가 보이지 않는데 후미에 선 우리 몇 사람이 안개에 싸인 벌판을 걸어가니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들꽃이 흐드러지게 핀 풀밭 위에 벌렁 드러눕고 싶다.
그러나 아름답게 보인다고 해서 전부 그렇기만 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필자도 그랬지만 그 속에 잘못 들어갔다가는 갈라진 돌 틈에 발이 끼일 수도 있고,
또한 뱀 등 무엇이 숨어 있을 지도 모른다.
고도가 낮아지면서 비가 그치고 안개가 산봉우리로 올라간다.
그러자 그 끝을 알 수 없는 광활한 계곡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계곡 하나만 해도 웬만한 1,400~1,500미터급의 산보다 그 면적이 넓을 것 같다.
높이로만 보면 백두산이 지리산보다 800 미터쯤 높지만 차지하는 면적은 몇 배나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런데 문득 <한허>라는 이름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혹시 한허(漢墟)로 표시하여 “한족이 여기서 살았거나 건국한 터”라고 우기려는 것일까?
(계곡에 구름이 걷히고)
12:50 한허계곡의 바닥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전원이 한 자리에 모였다.
천지로부터 흘러내리는 계곡물에 손을 담가본다. 안개가 계속해서 위로 올라가고 있으니 좋은 조짐이다.
잠시 동안의 휴식이 끝나고 일행은 중국 쪽의 최고봉인 백운봉(해발 2,691미터)을 향하여 올라간다.
이 구간이 이번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으로 보인다.
청석봉 (2,662 미터)에서 한 시간 넘게 내려왔으니 적어도 그 만큼은 올라가야 정상에 닿을 게다.
(한허계곡)
(백운봉을 향하여)
이곳은 능선 부근보다 따스해서 그런지 들꽃이 훨씬 다양하고 색깔도 더 화려하다.
그런 길을 10분 정도 걷고 나니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주차장에서부터 지금까지 3시간 넘게 걸었는데 다시 가파른 경사면을 올라가는 산우들의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진다.
K가 다리에 쥐가 난다고 하기에 풀섶에 뉘고 발목을 안으로 꺾어 뭉친 근육을 풀어 주었다.
그래도 오르막길에서는 한 동안 다리근육이 당기겠지만 잘 이겨내리라 믿는다.
계곡에서 출발한 지 한 시간 뒤 도중에서 잠시 쉬었다 (13:00). <3862>
(암벽길을 뚫고)
(후미의 휴식)
고도가 높아지자 간간히 비가 뿌리기 시작한다. 거기에 바람이 부니 이미 흠뻑 젖은 장갑을 낀 손이 시려온다.
물이 고인 등산화 속에서는 발가락이 물에 불어 오르는 모양이다.
장갑을 2개 준비하라던 가이드들의 충고가 허언이 아니었다. 13:55 드디어 백운봉에 도착했다.
앞서 도착한 선두는 삼삼오오 둘러앉아 도시락을 펼쳐놓고 식사 중이다.
우리도 강팀장과 함께 한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식사를 했다.
(백운봉 아래 점심)
14:30 백운봉을 출발했다. 청석봉에서 여기까지 올 때에는 천지와 거리를 두고 걸었는데 이제부터는
등산로가 천지를 오른쪽에 가까이 두고 달리게 된다. 백운봉을 떠난 지도 30분이 지났다.
주변은 여전히 안개에 뒤덮여 있다.
옆에서 걷던 강팀장이 지금까지 백두산을 오르내리며 산행이 거의 끝날 순간에야 천지를 보았던 경험을 들려준다.
그리고 그녀는 ‘신은 그 사람이 견뎌낼 수 있을 정도까지만 시련을 준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그 젊은 나이에 이런 깨달음이라니 놀라울 뿐이다.
공항에서 처음 보았을 때 받았던 강렬한 느낌을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금병봉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바로 그때 멀리서 흰 구름이 산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기압이 높아지고 있다는 뜻이다. 오른쪽으로 천지와 면한 다른 봉우리 주위에도 안개가 걷히고 있다(15:05).
강팀장을 바라보니 내가 그러지 않았느냐고 말하려는 듯이 웃기만 한다. 그렇다.
산은 지금까지 우리의 인내심과 기다림을 시험하고 있었던 게다.
자연 앞에 우리는 얼마나 작고 무기력한 지를 절감한다. 칼자루는 커녕 칼집의 끈도 쥐지 못한 힘 없는 미물인 게다.
갑자기 온 몸이 나른해진다.
(백두산이 벗는다)
(만주쪽은 벗었다)
15:10 마침내 천지가 우리의 알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전갈이 왔다.
우리의 시야를 가리고 있던 거대한 흰 장막이 소리 없이 수평으로 걷히더니
천지는 수백만 년 전에 태어난 모습 그대로 홀연히 우리 앞에 나타났다.
일행은 그 순간 너무나 놀랍고 황홀한 나머지 너나 할 것 없이 외마디소리 같은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모두들 말을 잃고 넋이 나간 듯 물결 하나 일지 않는 고요한 수면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필자의 눈 가에도 눈물이 고인다. 예서 무슨 말이 필요할 것인가?
(아 ! 천지 !)
호수 건너편으로 머리에 흰 구름을 이고 있는 장군봉이 눈에 들어왔다.
그 정상을 바라본 순간 머리 속에서는 반가움과 착잡함이 교차했다.
필자는 그 동안 백두산에 올 기회가 몇 번 있었지만 북한 땅을 통해서 오고 싶어 그만 두었다.
하지만 나이는 점점 더 먹고 굳게 닫힌 문은 언제 열릴 지 몰라 이번 산행에 참가신청을 했다.
그런데 마침 이 무렵에 해외출장 일정이 잡혀 애를 태웠는데 연기되는 바람에 다행히도 일행과 합류할 수 있었다.
천지를 배경으로 앉아 생각에 잠긴다. 여기에 올 수 있어서 그리고 천지를 볼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생각뿐이다.
다른 동료들도 다 마찬가지리라. 정신을 차리고 나니 모두 사진을 찍느라고 야단들이다.
필자도 사진기를 들고 천지의 모습을 담기 시작했다.
(천지에서)
이때부터 우리가 용문봉에 다다른 15:40까지 천지는 꼭 30분간 그 장엄한 모습을 일행에게 드러내었다.
우리가 너도나도 천지의 사진을 찍느라고 시간을 지체하자 이철우씨가 서두르지 않으면 막차를 놓친다면서
빨리 출발하라고 채근한다.
용문봉을 내려올 무렵 부근에 안개가 서리기 시작하더니 천지는 순식간에 짙은 안개 속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16:00).
한편으로는 너무도 감동스럽고 또 한편으로는 자연의 위대함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천지가 다시 신비의 장막속으로)
새우등 능선을 따라 내려오다가 희게 빛나는 만년빙을 보았다.
들꽃의 씨방이 벌어져 씨앗을 바람에 날릴 준비를 하고 있다.
씨앗 끝에 달린 긴 깃털들이 일제히 바람의 반대방향으로 날리고 있어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한다.
그 능선의 중간 부근에서 오른쪽으로 장백폭포의 거대한 물줄기가 하얗게 보인다.
그 아래로 흐르는 물도 온통 거품인지 새하얗게 빛난다.
조금 더 내려오니 왼쪽으로 규모는 그보다 작지만 옥벽폭포가 흘러내리고 있다 (16:50).
(만년빙,장백폭포,옥벽폭포)
저 아래 산 밑으로 흐르는 강을 따라 도로가 보이는 것을 보면 이 여정도 거의 끝나가는 가보다.
등산로가 숲 속으로 모습을 감춘 지점에 우리의 중국인 가이드가 후미를 기다리고 있다.
뒤에 오던 강팀장이 여기서 지름길로 해서 주차장으로 가야 한다고 한다.
그 지름길이 매우 가팔라 발이 내려가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가 그럴 것을 짐작하고 우리를 마중 나온 것이었다.
필자를 보더니 그가 먼저 내려가라고 손짓을 하기에 J와 함께 한발 앞서 걸었다.
그는 발목을 접질린 듯 힘들어하는 S를 안전하게 부축하며 뒷걸음질로 그 비탈길을 끝까지 내려왔다.
다른 것은 몰라도 철저한 서비스 자세만으로 보면 그는 진정한 프로였다.
밑으로 내려오니 몇몇 산우들이 쉬고 있다가 우리를 보자 함께 주차장으로 향했다.
원래는 이 부근에 있는 온천에 들를 예정이었는데 시간이 모자라 가지 않기로 했다.
주차장에 닿으니 막차가 떠나려고 붕붕거리고 있었다(18:00).
이렇게 9시간에 걸친 백두산 서파-북파종주는 20명 전원이 한 사람의 낙오자 없이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다시 우리의 버스로 갈아타고 백두산 아래 첫 도시인 이도백하로 내려오면서,
산우들은 이제 어딜 가더라도 백두산에 다녀왔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겠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등산을 하고 나면 온 몸의 노폐물을 모두 쏟아낸 뒤 느끼는 상쾌함 때문에 다른 경우보다 자신감이 배가되는 지도 모르겠다.
일행은 오늘의 이 원행을 위하여 수고한 강팀장과 그 동료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종주를 마치고)
19:00 이도백하의 신달(信達) 호텔에 도착했다. 어제와 같은 산우끼리 방을 쓰도록 숙소를 배정했다.
50분 뒤 1층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내일 아침은 용정-도문을 거쳐 연길로 이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모두 긴 산행에 지친 뒤라 22:00 무렵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필자도 물이 들어간 등산화에 신문지를 구겨 꽉 채워놓고 잠을 청했다.
제3일-8월21일(토): 용정/도문 관광-연길로 이동
제4일-8월22일(일): 장춘공항-인천공항
8/21(토) 아침 . 밖엔 가랑비가 내리고 있다. 호텔 주변에 곧은 적송들이 하늘을 향해 죽죽 솟아 있다.
마치 정선이나 울진에 와 있는 기분이다. 아침식사를 끝내고 오전 8시반에 호텔을 출발하여 용정으로 향했다.
오늘 일정은 용정과 도문을 둘러본 뒤 연길로 이동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용정까지 가는 데는 버스로 3시간 가량 걸린다고 한다.
일행이 무료할까 보아 강팀장과 이철우씨가 번갈아 마이크를 잡고 중국 동북3성의 현황과 히말라야 트레킹코스에 관하여
설명해 주었다. 연변자치구는 남한 면적의 1/2 크기이며 조선족의 인구가 80만 명으로 중국에서 가장 많이 산다고 한다.
가는 도중 10:30 화룡시라는 곳에서 잠시 쉬었다.
11:40 용정시 못미쳐 멀리 일송정각이 올려다 보이는 길가에서 잠시 버스를 내렸다.
저기가 바로 선구자에 나오는 <일송정>이 있던 곳이다.
일송정에 자리잡아 푸르름과 위상을 뽐내야 할 소나무는 간데가 없다.
일본인이 베어 버려 그자리에 정자만 남아 있다니...
그곳을 바라보던 우리는 이종기군의 제의로 <선구자>를 2절까지 소리 높여 불렀다.
몇몇 친구들은 그 옆에서 참외를 파는 아낙네로부터 참외를 사서 나누어 먹었다.
(일송정)
11:45 용정시 경계 안으로 들어섰고 조금 뒤에는 해란강을 건넜다. 가슴이 뭉클해진다.
시 단위로는 용정시에 조선족이 가장 많다고 한다.
맨 먼저 1946년에 그전에 세워진 6개 학교를 통합하여 새로 설립한 용정중학교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나서 점심을 먹은 뒤 시인 윤동주 등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대성중학교를 방문하여 우리의
아픈 과거 역사에 관한 설명을 듣고 그의 시집도 사고 그 학교에 조금씩 기부도 했다.
(대성중학교와 윤동주 시비)
13:20 버스는 용정을 출발하여 도문으로 향했다.
백두산 허리를 돌아 내려온 도로는 두만강을 따라 건설된 관광도로를 따라 달리는데
상류 부근의 두만강은 강이라기보다는 실개천에 가까웠다.
그 강을 오가며 풀을 뜯는 소들은 국경도 국적도 상관없이 자유로워 보였다.
국경을 잇는 철도다리에 중국 쪽은 검은 색으로, 북한 쪽은 흰 색으로 칠해져 있다.
14:25 북한의 남양시가 강 너머로 건너다 보이는 도문에 도착했다. 마침 그곳에서는 초등학교 운동회가 열리고 있었다.
강가에는 두 도시의 이름과 함께 두 나라의 경계임을 표시하는 표지판이 서 있고
강 위에는 중국 깃발을 단 유람선이 관광객을 태우고 운하하고 있다.
손에 닿을 듯 가까운 북한의 산들은 이곳 저곳을 파헤쳤는지 벌겋게 흙이 드러나 보인다.
강 건너편 남양시 쪽의 논밭에는 지금 한창 바쁜 농사철인데도 오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북한 땅을 바라보던 일행은 모두 마음이 처연해졌다.
몇 사람은 강상에 띄워놓은 배 위로 올라가 거기에서 파는 전통 막걸리를 벌컥벌컥 들이키기도 하고
유람선을 타고 강을 몇 바퀴씩 돌기도 했다. 특히 이북이 고향인 S는 감정이 받치는 듯 애써 고개를 외면하려고 했다.
(두만강에서)
성열이 필자에게 손짓을 하기에 바라보니 한 옆에서 허연 할머니들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있다.
간간히 들리는 노랫말은 분명 우리말이었고 돌아가는 춤사위 또한 우리의 것이었다.
그 중 울산이 고향이라는 한 분이 성열에게,”학생 때 이리로 왔는데 백발이 되도록 고향으로 가지 못한다”고 울먹였다고 한다.
15:15 일행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연길로 향했다. 연길까지는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였다.
조선족 자치구답게 상점 간판은 한글로 먼저 쓰고 그 아래 한자를 병기했고 요즈음 서울에서 흔히 보는 <OO방>의 간판도
심심찮게 보였다. 연길에는 꼬치요리가 유명하다는 가이드의 설명대로 그런 간판이 자주 눈에 띄었다.
(연길시)
16:20 연길의 대주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약 1시간 뒤에 부익의 사업을 보좌하는 중국인 네이밍(聶孟)의 안내로
약 20분 가량 버스를 타고 교외에 자리한 한식당인 <버드나무집>으로 갔다.
문안으로 들어서자 한글로 쓴 옥호도 그러려니와 커다란 옹기 항아리를 가지런히 엎어놓은 장식용 장독대하며
이제 막 피기 시작하는 뜰의 과꽃 등 어딜 보아도 서초동이나 개포동의 어느 한식집 같다.
안내를 받아 방안으로 들어서니 식탁마다 정갈한 음식과 요리가 그야말로 상다리가 휘도록, 그러나 법도 있게 차려져 있다.
모두 자리를 잡자 승기 대장이 일어나 먼저 오늘의 이 자리는 김부익군이 이번 원행에 참가한 동기들을 위하여
베푼 것임을 알렸고 모두 부익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그는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번의 행사,
특히 어제의 산행이 끝날 때까지 전원이 무사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면서 갑자기 목이 메이는 듯했다.
이어 이 행사를 위해 수고한 종원(PM)과 호경(사진촬영), 앞으로 산행일지를 쓸 종기와 필자를 일행에게 소개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참석한 네이밍의 친구 2 명에게 우리 모임에서 준비한 간단한 선물을 증정하는 것으로
모든 의전이 끝나고 식사에 들어갔다.
네이밍이 일어서서 분위기를 주도했는데 그는 유창한 우리말 실력은 제쳐두고 서울에서 유행하는
<우리 가~족같이> <¯r*, 오래오래/세게세게> 등 최신 건배구호를 제창하여 우리를 놀라게 했다.
술이 몇 바퀴를 돌고 일일이 그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산해진미가 계속 뒤를 이었다.
연 이틀 동안 사진을 찍느라고 피곤했는지 조용한 호경을 보자 필자는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긴급발언을 신청하여
호경의 호칭을 더 이상 (경망스럽게) <찍사>로 부르지 말고 그의 수고에 어울리는 <박사>로 부르자고 제안하여
즉석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그는 일어나 가문에서 처음으로 높은 학위를 받았다고 사의를 표했다.
(버드나무집)
(연길의 저녁식사)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부익이 미리 주선해 둔 노래방으로 옮겨갔다.
오늘 저녁에 수고한 네이밍은 집에 일이 있다고 일행에게 인사를 하고 먼저 자리를 떴다.
이어 우리들만의 연길가요제가 시작되었는데 우리 산우들은 학교만 괜찮은 데를 다닌 게 아니라
노래방도 자주 드나들었는지 하나같이 가수 뺨치게 노래를 잘 불렀다.
한 곡이 끝나면 또 시작되고 모두 나가 함께 춤을 추고 또 노래를 하고……
시간은 쉬지 않고 흘러갔고 몇 시에 호텔로 돌아왔는지 기억이 없다. 나중에 보니 수첩에도 그 뒤는 빈칸이다.
(하지만 그 다음날 아침 전원이 제시간에 버스에 올랐다)
(3 차는 호텔에서)
8/22(일) 새벽 3시.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 서울로 돌아가는 날이다.
어제 연락 받은 대로 03:40까지 방 열쇠를 반납하고 04:00에 대주호텔을 출발하여 장춘공항으로 향했다.
비행기 출발시간이 11:40이라서 9:30까지는 도착해야 한다고 한다. 다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조금 후 일행은 하나 둘 잠이 들고 차 안은 이내 조용해졌다.
버스의 앞쪽에 앉은 종기만이 앞으로 끝없이 뻗은 도로를 바라보며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다.
장춘공항에 닿기 전에 도로변에서 2번 쉬었다. 8시경 아침식사로 도시락이 나왔는데 입안이 깔깔하여 별로 먹지 못했다.
공항에 도착하니 09:30 그제서야 강팀장의 얼굴이 밝아진다.
이곳에서는 고속도로에 교통사고라도 나면 몇 시간씩 길이 막힌다고 한다.
11:30 우리를 태운 비행기는 제시간에 장춘을 출발하여 예정대로 14:40 경 인천공항에 내렸다.
(장춘공항과 인천공항의 마무리)
밖으로 나오니 8/19 떠날 때와 같은 날씨가 우릴 맞이한다.
우린 졸업시험을 잘 치른 학생들처럼 큰 일을 끝내었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이 원행을 위해 반년 넘게 고생한 승기대장과 PM종원, 박사 호경 그리고 모든 산우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와 축하를 드린다.
"우 리 가 족 같 이 "
<끝>
2010년 9월 2일 윤신한 글.
(추신: 필자가 후미에서 찍은 들꽃 사진 중 약 20가지의 이름을 확인해 놓았는데 나중에 별도로 정리하여 이번에 참가한 산우들에게 메일로 보낼 예정임)
도 아 2010.7. 선반에서 22(목) 16:00 윤신한 글
ps: 윤신한 산행기에 사진을 많이 올리도록 노력했으나 미비한점 있으면 이해 바랍니다.
신영옥의 "신 아리랑"도 함께 보내며
hanmail.net 의 이메일 주소는 밑의 "표시하기"를 클릭하여 음악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김 승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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