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정채호 시점>
처음 보는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로 걸려오는 전화. 배우생활을 하면서 이런 경우 통화거절을 하거나, 수신차단 번호로 등록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받아야만 될 것 같은 느낌에 통화를 눌렀던 날이었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누구...신지?"
"김대웅 친구 장영혁이라고 합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초면에 이런 부탁 무례한거 알지만 좀 드려도 될까요?"
"무슨 일이시죠?"
"제가 직접 만나 뵙고 말씀을 드리면 좋겠지만, 제 상황이 그렇지를 못해서요..."
말끝을 흐리는 그에게서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처음 듣는 목소리, 한 번도 본적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마음이 쓰였다. 평소답지 않게 난 그와의 약속을 잡았고, 그가 있다던 병원을 찾았다. 어김없이 오늘도 들른 듯 보이는 대웅이 병실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멈칫 걷던 걸음을 멈추고, 구석 한켠으로 몸을 숨겼다. 통화할 당시 그가 부탁했던 조건이 있었다.
'아마, 수시로 대웅이가 제 병실을 드나들며 상태를 확인하느라 어쩌면 마주치실지도 모르겠지만... 가급적 대웅이 눈에 띄지 않게 와주셨으면 합니다. 부탁 좀 드릴게요...'
대웅이 스케줄 때문에 이동을 하는 듯 보였고, 병실에서 멀어져가는 대웅을 확인하고서야 그가 있다는 병실로 향할 수 있었다. 무슨 첩보작전 못지않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똑똑' 노크소리를 내고,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열고 안으로 몸을 들여 넣었다. 힘겨움을 버티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장영혁씨?"
"네, 어서 오세요."
"아, 이거요."
부탁을 받고 왔어도 예의상 빈손으로 오긴 뭐해서 병원 1층에 위치한 매점에 들러 병음료 한 세트 들고 왔었다. 내가 내미는 음료를 받아 들고 힘겹게 눈을 휘어 웃어 보이며 나름 너스레를 떤다고 농담을 하는 그. 곽 안에 들어있는 병음료를 하나하나 꺼내어 미니냉장고에 정리하더니 다시 침대로 올라앉는 그. 입매를 늘리며 잠시 생각을 하는 듯 보이던 그는 조심스럽게 내 앞으로 편지봉투 하나를 건넨다.
"이게 뭡니까?"
"이건 만일을 말씀드리는 건데요, 혹시라도 제가 대웅이를 다시보지 못하는 일이 생기면 그때 대웅이한테 전해주세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때가 되면 채호씨도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실 거예요."
"아, 예... 일단은 알겠습니다. 꼭 대웅이한테 직접 전하도록 할게요."
"고마워요. 무례한 부탁인줄 알지만 들어주신다 하니..."
나와 그는 어색하게 서로를 마주하고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일이 있고 불과 일주일만 이었다. 개봉을 앞둔 영화 홍보를 위해 동반 출연했던 예능프로에서 잠시 휴식시간에 대웅에게 다가와 매니저가 뭐라 속삭이고, 안색이 창백해져서는 스태프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허겁지겁 어딘가로 달려가던 날. 그가 눈을 감은 날이었다.
그리고 그 후 내가 대웅이와 마주했던 그날. 괜찮은 척 한다고 하지만 해쓱해진 대웅이는 몇 일새 술만 펐는지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런 그놈 앞으로 장영혁의 편지봉투를 전하는 것이 잘하는 짓일까 싶었다. 이걸로 인해 더 마음 못 잡고 방황하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섰지만, 일단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내보였고, 그것을 펼쳐들고 읽어 내려가던 대웅이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서서히 굳어가는 표정들로 쥐고 있던 종이를 바들바들 떨며 말을 잇지 못하던 그 모습. 처음으로 내 앞에서 그렇게 펑펑 우는 대웅이를 봤었다. 꾹꾹 참고 있던 울분을 토해내듯 눈물을 보이던 김대웅.
*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 했던가... 정상 주가를 치고도 부족했던 대웅은 하루아침에 하락세를 탔다. 보여 주기식 공개연애의 결별기사가 나가고 난 후폭풍이 몰아닥치기 시작했고, 잡혀있던 모든 스케줄이 취소되는 것은 이도 아니었다. 광고주들로 부터 청구되는 위약금배상 소송들까지. 하루가 조용할 날 없이 일들이 터져 나왔고, 그렇게 올곧게 쌓아올려졌던 대웅이의 인지도는 바닥을 치고 말았다.
"김대웅, 채디자이너는 정말 아니었어? 너 지금 너무 위태로워 보여."
"응. 채민영은 아니야. 마음을 속이고 계속해서 만남을 지속할 수가 없었어. 그러면 내가 걔한테 주는 상처가 너무 클 테니까."
"그 고등학생 아직 못 잊은 거야?"
"잊기는커녕... 아직도 또렷이 생각나고, 보고 싶고... 그래."
"만나보기라도 하지 왜."
"자신이 없어졌어. 그 앨 지켜줄 자신이..."
*
그 후, 내가 대웅이의 소속사로 옮기고 장영혁을 찾아가던 길이었다. 특별히 장영혁의 기일도 아니었지만 가끔씩 들러 몇 마디 건네고 와야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납골당 안에 들어섰을 때 즈음. 흐느끼듯 들려오는 울먹이는 여자의 목소리. 조금씩 그 소리가 가까워진다 싶을 때 걸음을 멈추고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쌤... 그곳은 지낼 만해요? 나 왔어요... 사실, 이곳에 오면 우연이라도 한번은 대웅오빨 마주치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또 왔어요. 근데 벌써 3년짼데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네요. 쌤이 한번만 도와주시면 안 돼요? 보고 싶은데..."
그제야 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서로가 다가가기엔 너무 많이 돌아왔다 싶었다. 그래서 쉽게 다가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언젠가는 꼭 그 둘을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꼭.
*
"형, 안녕! 오랜만이네."
"어쩐 일이야?"
"내가 방송국에 보이는 게 당연한거 아닌가? 암튼, 바빠 보이네? 무슨 일이야?"
"새로 기획한 라디오프로그램이 있는데, DJ를 할 만한 사람을 아직 못 찾아서...큰일이야. 당장 다음 주 부터 녹음방송 해야 되는데."
"손에 든 건 웬 이력서?"
"아, 오늘 작가 면접 있거든."
"그래? 나 좀 봐도 돼?"
"그래, 자!"
오래도록 알고 지낸 친분이 있는 라디오PD형을 만났다. 손에 들려있는 이력서에 눈길이 가서 받아들었고, 뒤적이며 훑어보다 순간 멈칫했다. 내 느낌이 맞다면 그때 우연히 마주쳤던 납골당에서의 그 여성인 듯 보이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지원자 이름에 '정은예' 라고 적혀있었고, 나이를 보니 얼추 맞는 듯 싶었다.
"형! DJ는 대웅이 어때?"
"배우 김대웅? 쉽게 라디오 DJ한다고 할까? 난 괜찮을 거 같은데, 노래목소리 들어보니까..."
"그래? 알았어. 그럼 내가 김대웅은 설득해서 무조건 하게 만들게. 대신! 얘 뽑아."
"어? 왜?"
"그냥, 질문 중에 오래도록 잊지 못한 사람이 있냐 묻고, 있다 하면 기간이 얼마나 됐는지 물어봐. 6~7년이라 답하면 합격시켜."
"뭔 얼토당토 않는 말이야? 무슨 라디오작가 면접을 그딴 질문으로 합격시키라는 거야?"
"꼭! 합격시켜라 형! 그러면 형이 나중에 일등공신이 될 거야!! 난 대웅이 만나고 연락할게."
지금이 아니면 절대로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던 둘. 내 말에 터무니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지만 결국 형은 정은예를 신입 작가로 채용했고, 김대웅은 내 달달한 설득에 넘어와 DJ를 하기로 결정하게 됐다. 그렇게 돌아 돌아 둘은 6년 만에 다시 만나 뜨겁게 사랑중이란 얘기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