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외 수업 회상
작년 초여름, 강릉 출신 동우회원들이 고향으로 귀향한 회원의
초청으로 모처럼 남항진에서 화기애애하게 점심을 들고, 테라로
사 커피 공장을 경유하여 솔향 수목원으로 발길을 옮기게 되었다.
구정면 출신이지만 하도 오랜만이고 온 마을들이 원체 낯선지라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아 좌우를 살피면서 가다 표지판을 보고
서야 ʻʻ아! 여기구나!ʼʼ라고 했다.
수목원 입구에 도착하니 갓 단장한 ʻ강릉솔향수목원ʼ 石文이 반
겨 주었다. 산자락 길로 접어들면서 아련한 어린 시절 속으로 빠
져들어 갔다. 산기슭으로 木板路가 이어진 길을 따라 전망대에
오르니 확 트인 동해 바다가 보인다. 누군가 ʻ강릉 만세ʼ 삼창을
제안하여 일행 모두 하늘, 백두대간, 동해를 향하면서, 우렁찬 만
세 삼창을 하였다. 동우회원들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우리는
기슭을 돌아 내려와 내천을 거슬러 올라가며 회상의 실타래를 풀
었다.
55년도, 내가 다녔던 제비초등학교는 4월부터 신축하게 되어
고학년은 관사 마당 천막에서, 우리 3학년 이하는 인근에서 야외
수업을 하게 되었다. 등고비에서 고개를 넘으면 바로 용소골이다.
처녀 선생님께서 용소 옆 적송 그늘 아래 樂山樂水 야외학당을 차
렸다. 작은 칠판이 소나무에 걸리고 소갈비(솔가리), 가랑잎을 모아
방석을 만들고 얇고 판판한 돌멩이는 책상으론 안성맞춤이었다.
춘 3월이라 계곡을 타고 불어오는 훈훈한 높새바람을 맞으며
수업은 시작되었다. 특히 5월쯤이면 산들바람에 송화가루가 살며
시 머리위로 내려앉으며, 가지사이로 햇빛이 아른거렸다. 가끔
다람쥐가 출몰하고 물총새가 방해꾼이 되었는데, 간이 울타리를
쳐 학습 집중력을 높였다.
용소골 래천은 좌우로 온갖 나무들이 어우러져 있었고, 상류
쪽 산허리엔 산목련이 군락을 이루어 모내기 할쯤이면 향내를 하
류 멀리까지 뿜어대어 천혜의 무릉도원을 연상케 한다. 태풍 루
사 수마로 훼손되었던 계곡을 수목원 공사와 治山治水 차원으로
석축을 쌓고 내를 넓혀 堡를 만들고 옆길 水路水로 물레방아가
돌아가게끔 단장했지만, 옛날 경관이 눈에 선하다. 두 길 가량 깊
던 龍沼는 바위 등 퇴적으로 얕아져 지난날 모습을 볼 수 없으니
안타깝다.
❚草根木皮
때는 바야흐로 보릿고개인 춘궁기, 먹거리가 부실하다보니 깻
묵, 개떡, 술찌게미 등으로 허기를 채웠으나, 조금만 부지런하면
초근목피로 연명할 수 있으니 다행인 셈이었다. 야들야들한 연두
색 줄기나 잎들은 삶아 우려낸 후엔 웬만하면 먹을 수 있었다. 영
양분이 있고 없고가 문제일 뿐이었다. 하지만 단오를 지나면 진
녹색으로 변하면서 본성의 독성이 생기기 때문에 문제가 달라진
다. 담임선생님은 이러한 점을 우려해 초근목피 食用 교육을 하
셨다. 우선 산나물 채취 체험실습, 식용 독버섯의 판별, 뿌리의
식용성 등에 대하여 손수 채취한 견본으로 반복 교육을 실시하여
어디든지 풀어놔도 안전하도록 하셨다. 이때 터득한 실력 덕분에
軍 시절 지형 정찰 기간 중 식량이 떨어졌어도 야전삽과 단도로
비장의 비법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부대장 칭찬을 받았으니 진정
선생님 은혜가 河海와 같을 줄 어찌 알았겠는가!
수업 중 배꼽 신호가 거의 동시에 울리면 쉬는 시간! 산등성에
서는 뻐꾸기와 멧비둘기가 구성지게 합창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망을 봐 둔 곳이나 개천으로 달려 나갔다. 사내아이들은 각자 집
에서 괭이, 호미, 쟁기를 챙겨 와 숨겨둔 곳이 있었다. 용소 주변
에서 하루 한나절을 신나게 보내면서 두메산골 철부지들은 자신
도 모르게 가슴에 산골 정서가 쌓여만 갔다.
❚管鮑之交
점심시간이나 수업이 끝나면 병정놀이를 했다. 맨 처음 병정놀
이는 아마도 전망대 부근의 고지 점령이었다. 남자 학생 수가 고
작 2개 분대 인원(18명)으로 유격대와 돌격대로 편성하였다. 먼저
봉우리 정상에 전원 올라가야 승리하는 걸로 하여 고지 점령 전
투가 시작되었다. 산 입새부터 치열한 몸싸움 백병전…, 소년병
들의 전투는 맹렬하였다. 비탈에 접어들면서 판세는 기울어졌는
데 우리 유격대는 소갈비와 가랑잎에 미끄러지고, 집중 공격에
막힌 용달(假名)이는 고무신이 헐겁고 고무줄 바지라 자꾸 흘러내
려 결국 구원나간 나와 꼴찌가 되어 규약대로 둘은 생포되어 참
패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헐거운 고무신과 바지 고무줄이 패
인이었으니, 형님한테 통사정하여 짚신 두 켤레가 밤새 만들어졌
는데 난 그걸 안고 잤다. 다음날 등교 길에서 만난 용달이는 눈
등이 약간 부어 있었다. 가뜩이나 사변으로 아버지를 잃은 상처
탓인지 의기소침하고 늘 외톨이였는데 어제 일로 다시 한 번 가
슴에 못이 박혔는가 보다. 나는 용달이에게 짚신을 건네주었고
가는 도중에 물이 오른 칡넝쿨 줄기로 허리띠를 만들었다.
점심시간에 싸움은 다시 시작되었다. 용달이와 나는 한 조가
되어 後尾를 맡았다. 짚신에 물을 축이니 짝 달라붙는다. 용달이
는 허리띠를 꽉 조여 매고 나에게 다가와 설욕을 다짐하는 악수
를 하였다. 산비탈에서부터 우린 돌격대 한 사람씩 따돌리며 전
방으로 돌진하였다. 짚신의 위력으로 경사진 언덕으로 종횡무진
전진하면서 대원들을 구원하여 일사분란하게 고지를 탈환, 돌격
대를 전원 생포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그렇게 말이 없던 용
달이가 ʻʻ아! 이겼다.ʼʼ 외쳐대며 환희의 눈물을 흘릴 때 나도 울먹
였다. 가슴에 맺혔던 응어리가 풀어지는 순간이었다. 머리엔 칡
동아리 월계관을 쓰고 풀피리를 연신 불어대며 보무도 당당하게
개선하였다. 줄넘기를 멈추고 손뼉을 치며 맞아주던 동네 소녀들!
우리 몰골은 가관이었지만 그 순간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
다. 용달이는 지금까지 무력함에서 벗어나 浩然之氣가 넘치는 일
대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그날 이후 나와 용달이는 관중과 포석
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우정이 깊어만 갔고 지금까지 이어왔다.
生我者父母 知我者龍達也
(나를 낳으신 분은 부모이지만 나를 아는 자는 오직 용달뿐이다.)
❚直立渡江
용소골은 단오가 지나면서 녹색으로 탈바꿈하였고 우리들은
먹거리로 가재 또는 개구리 잡기에 나서 수확을 많이 올렸다. 물장
구, 개헤엄, 자멱질을 하다보면 소나무 그림자가 물 위에 드리워
지고 하루를 마치게 된다. 다음 날부터는 잠수와 팔 들고 헤엄치
기를 지속하여 심호흡 단련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용달이와
나는 시합하면 항상 막상막하였다. 둘은 중학교 시절 회산 흑소
에서 회돌이 물 이겨내는 연습을 했고, 고교 땐 경포 5리, 10리
바위까지 거뜬히 헤엄쳐 가 그 곳에서 섶을 딸 수 있었다. 軍에서
문서 연락병 할 때 홍수로 인해 38교가 일부 소실되어 멀리 돌아
갈 수밖에 없었는데 군화, 문서 가방, 벗은 옷을 싸서 머리에 이
고 도강하여 무사히 임무를 완수했던 일화는 예하부대까지 회자
(膾炙)되었다. 이는 바로 야외 수업을 통하여 터득한 산물이었다.
여름 방학을 끝으로 야외 수업이 끝나게 되니 아쉽기 한이 없었다.
야외수업 마지막 날, 하교하다 학산 할머니집에 들러 복숭
아와 자두를 실컷 따먹던 기억이 떠올랐다.
桃李不言 下自成蹊
(복숭아 오얏나무가 말을 안 해도 그 아래는 저절로 길이 생긴다)
강릉은 산천경계가 수려하여 어딜 가나 강릉산이라면 선망의
대접을 받는다. 내가 뛰놀고 정 들었던 곳이 솔향 수목원이 되었
으니, 앞으로 순례지 안내자로 나설 것을 생각하니 가슴 벅차다.
한 폭의 수채화 속에 담아 놓아도 손색이 없는 야외 학습장 용소
골! 팔순이 넘으신 선생님, 참전 노병들과 꽃댕기 매고 고무줄 넘
던 천사들에게 야외 수업을 회상하며 안부와 더불어 시(詩) 한 수
를 보낸다.
泉心常在外 샘물 마음은 언제나 샘 바깥 세상에 있어
石齒苦遮前 돌 이빨이 제아무리 가는 길 막더라도
掉脫千重驗 천 겹 험한 길을 이리저리 헤치고서
夷然出洞天 깊은 골짝 벗어나 평탄한 곳으로 달려간다.
- 茶山 丁若鏞 先生 詩 心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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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철형
강릉시 구정면 제비리 출생.
강릉 사범병설중학교, 강릉고등학교 졸업.
서울공과대학 전기공학과 졸업.
동부제철 부사장, 동부 EMC 대표이사.
경인지역 환경 친화 기업 회장.
BEX ENG 대표이사.
현재) 志一書緣會 任員
E-mail: jch072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