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희(朴麟姬, 1945년 ~ )는 대한민국의가수, 작사가, 작곡가, 방송인이다. 1970년대 대표적 통기타 가수 중 하나로 방송인으로 재능을 떨쳤다. 차분하고 청아한 음색의 소유자로 히트곡 〈목마와 숙녀〉, 〈모닥불〉,<방랑자> <세월이 가면> 등이 있다.[1]
이해인과는풍문여자중학교동창이다.[2][3]1971년숙명여자대학교불문과 재학 중에 혼성 포크 듀엣 ‘뚜아에모아’(너와 나)의 멤버로 〈약속〉을 발표, 가수로 데뷔하였고 1971년9월21일 TBC가요대상 중창단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하였다.[4]그해 9월에 그룹을 해체하고[5]DBS 《3시의 다이얼》의 진행을 맡았으며, 이후 1981년까지 방송인으로 활동을 계속하였다.[4]
글쓰기를 좋아하여 숙명여대 3학년 재학 중 지은 〈얼굴〉이 회자되어 《한국의 명시집》에 수록되기도 하였으며, 1989년에는 이해인과 함께 수필집을 냈다.[2]
한대수에 의해 촉발된 포크는 사회성 있는 가사로 정면돌파를 하지 못하게 되자, 서정적이고 멜로딕한 기타 선율의 대중적인 음악들로 곁가지를 형성했다. 이런 기운의 하나인 1970년대 이른바 포크송이라 불리는 장르의 정점에 서있던 박인희는, 아름다운 가사와 청아한 목소리로 많은 인기를 끌었던 가수이다.
그녀는 우리 나라 최초의 혼성포크듀오 뚜와에무와로 출발했다. 숙대 불문과를 다니던 그녀의 행로를 말해주듯 '너와 나'란 제목의 불어로 된 이 팀은, 일본 그룹 타이거즈(Tigers)의 이름을 딴 동명의 이름으로 활동하던 이필원과 미도파란 음악 살롱에서 인기 DJ로 활동하던 그녀가 같이 화음을 맞춰 노래를 부르면서, 평론가 이백천과 가수 조경수 등의 후원에 힘입어 탄생되었다.
1960년대 말 나온 이들의 첫 음반은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지만 이어 나온 앨범들은 1970년대 초반을 화려하게 장식하며 1971년엔 중앙일보, 동양방송 등 언론사에서 주는 음악상 시상식을 휩쓸었다. 창작곡과 번안곡을 함께 수록했던 이들은 1집에서는 이필원의 창작곡인 '약속'이 히트했고 2집에서는 '그리운 사람끼리', 3집에서는 '추억' 등이 크게 인기를 얻었다.
당시만 해도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편하게 바라보지 못했던 사회여서 인지, 이 둘은 갖가지 소문을 낳으며 절정의 인기와중에 해체를 했고 박인희는 <3시의 다이얼>이란 라디오 프로그램의 DJ를 맡으며 가수에서 진행자로 방향을 선회했다.
솔로의 생각이 없었던 박인희는 작사가 박건호 작사의 '모닥불'로 다시 활동을 재개하게 되었다. 박건호를 일약 최고의 작사가로 만든 계기가 된 이 곡을 시작으로 '하얀 조가비', '방랑자', '봄이 오는 길', '얼굴'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내며 맑은 목소리에서 나오는 서정성의 카리스마로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정규 음반 외에도 시 낭송 음반을 발표해 '목마와 숙녀', '얼굴'같은 시도 유행시켰다.
여고시절엔 문학에 심취한 소녀였고, 대학에서는 초대 교내방송국장을 역임한 그녀는 결혼 전까지 광화문에서 뚜와에무와라는 상호의 레코드점을 운영했으며, 총 6장의 음반을 발표하며 화려한 전성기를 보냈다. 하지만 앵무새처럼 같은 노래를 자꾸만 부르는 게 싫어서 가수활동을 포기하고, 가끔 작곡과 작시만 하며 DJ로 오래도록 남았다.
한편 그녀는 자신의 감성을 오래도록 삭힌 시들을 <지구의 끝에 있더라도>, <소망의 강가로>와 같은 시집으로 발간했으며, 이해인 수녀와의 우정으로 화제를 모은 수필집을 냈다. 현재는 미국에서 한인방송국의 국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한국일보 1995년 11월 1일자
박인희씨 노래의 매력은 문학적 낭만입니다.인생과 사랑을 부드러운 어조로 얘기하는 듯한 그녀의 노래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좀처럼 빛깔이 바래지 않죠.
'모닥불'은 박인희씨의 시적 감성을 잘 드러내는 노래입니다.감정을 차분하게 절제한 그녀의 목소리는 서정시 같은 여성적 감성을 아름답게 전해줍니다. 아직도 사람들이 이 노래를 즐겨 부르는 것은 인생에 대한 상념과 예감을 부담없는 노랫말과 멜로디로 들려주기 때문이죠.
박인희씨는 숙명여대 불문과에 다니던 1970년 이필원씨와 함께 혼성 듀엣 '뜨와에 므와'를 결성해서 가요계에 데뷔했습니다.'약속', '세월이 가면' 등으로 절정의 인기를 누렸던 이 그룹은 1972년 박인희씨의 결혼으로 해체되고, 두 사람은 독립했습다.
박인희씨는 1976년까지 여섯장의 앨범과 한 편의 시낭송 음반을 발표 했죠. 시낭송 음반에는 대학 3학년 때의 자작시 '얼굴'과 <한잔의 술을 마시고…>로 시작되는 박인환시인의 '목마와 숙녀' 등이 담겨 있습니다.당시 파격적이었던 이 음반은 큰 인기를 얻었었죠.
그녀는 또 DJ와 작가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1971년 동아방송의 '3시의 다이알'로 시작한 DJ생활은 당시에 아주 유명한 프로였고,'지구의 끝에 있더라도' 등 두 권의 시집과 한 권의 수필집을 펴냈습니다. 지금은 미국에서 한인방송에서 DJ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참고; 한국일보 1995년 11월 1일자
박인환(朴寅煥) 詩人의 [목마와 숙녀] / 박인희 낭송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어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가슴에 가볍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 한다
등대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어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최근의 박인희님 근영
박인희에 대하여..
박인희는 숙명여대 불문과에 다니던 1972년 이필원과 함께 혼성 듀엣 [뚜와에 므와]를 결성해 가요계에 데뷔했다. [약속][세월이 가면][그리운 사람끼리]등 매력있는 음색과 호소력이 강한 화음으로 데뷔한지 불과 1년도 안돼 스타덤에 올라섰으나, 이 그룹은 72년 박인희의 결혼으로 해체되고. 두 사람은 각기 독립했다.
박인희는 74년 2월 첫 독집앨범 발표이후 76년까지 여섯장의 앨범과 한 편의 시낭송 음반을 발표했다. 시낭송 음반에는[얼굴]과 [한잔의 술을 마시고..]로 시작되는 박인환시인의 [목마와 숙녀]등이 담겨 있었다.
당시 파격적이었던 이 음반은 큰 인기를 얻었다.71년 동아방송 [3시의 다이얼]로 DJ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방송 DJ 뿐 아니라, [지구의 끝에 있더라도]등 두 권의 시집과 한 권의 수필집을 펴낸 작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가수로 활동했던 기억이 아련할 정도로 DJ로서 더 오랫동안 대중과 만났지요. (가수 박인희)가 오래 기억된 것처럼 방송인으로서도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라는 본인의 술회와 같이 그녀는 방송에 대한 애착이 커서인지 한때 LA 한인방송 라디오 프로를 진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을뿐이다.
그리고 남편에 대한 것은 거이 없습니다. 미국에서 살면서 한인방송 을 했지만 방송국에서도 연락인 안돼고 있으며 남편과는 이혼한 상태이고, 슬하에는 아들 한명 있는데, 이름은 환 이고, 성은 모른다. 아들은 현재 미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해인 수녀님과 풍문여중 동창으로.. 편지로만 친하게 지낸 사이라고 한다. 현재 한국에 머물고 있는 것은 확실한데..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려진 것이 없다.
풍문 여중시절...왼쪽 끝이 박인희씨 그리고 그 하나 건너 옆이 시인, 이해인 수녀님
시인 박인환(朴寅煥). 가수 박인희.
〈목마와 숙녀〉와 〈세월이 가면〉과 수십편의 주옥같은 시를 남기고 3월 20일 31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시인 박인환(朴寅煥).
그는 1926년 8월 15일 소양강 상류에 위치한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상동리 강촌 마을에서 4남 2녀중 맏아들로 태어났고 경성제일고보를 졸업하고 평양의전을 중퇴하였습니다.
1946년 『거리』『군상』을 발표 등단하였고,『아메리카 영화시론』등 영화평을 쓰기도 하였으며, 1949년 시집『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하면서 모더니즘의 기수로 활동했습니다.
1949년 "경향신문"의 기자와 1951년 종군기자로 활약하면서『박인환 선시집』을 간행했습니다.
1956년 3월20일 저녁9시, 세종로 자택에서 눈을 감지 못한채 심장마비로 급사하였습니다. 시인 『이상』을 기리며 사흘간 쉬지 않고 마신 술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문우들은 그의 무덤에 평소 좋아하던 술 조니워커와 카멜담배를 함께 묻었다는 일화가 전합니다. 박인희, 1969년 어느 날 청아한 음색과 시적인 감성으로 음악 펜들을 열광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 넣은 혼성 듀엣 '뚜와 에 무와'의 박인희가 혜성처럼 나타나 불렀던 노래입니다.
당시 숙명여대 불문과에 재학 중이던 박인희는1946년 3월 15일생으로 엘리트 가수였습니다. `이필원`과 팀을 이루어 『약속』『세월이 가면』등으로 인기를 휘몰아 많은 펜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면서 인기 절정에 올랐습니다.
1972년 결혼과 함께 1년여 만에 솔로로 독립하게 되는데, 그녀는 솔로로 데뷔 후 1972년에 첫 히트곡으로 '모닥불(자작곡)'을 내놓은 후,
'봄이 오는 길' '끝이 없는 길' '눈빛만 보아도' '하얀 조가비' '미루나무' '장미꽃 필 때면' '젊은 날의 우리들' '모래알' '방랑자' `그리운 사람끼리(자작곡)등의 히트곡을 발표했습니다. 가수 생활은 불과 7년여밖엔 하지 않았습니다.
`박인환(1926년생)` 과 이름도 비슷한 `박인희(1946년생)`는 박인환 의 시 《세월이 가면》을 히트시킨 후, 노래로 부르기 어려운 박인환 시를 시낭송으로 발표하며 펜들의 마음을 어루만졌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목마와 숙녀》 입니다. '세월이 가면'이란 시와 노래가 탄생한 것은 1956년 전란 이후 막 서울로 환도한, 아직도 쌀쌀한 봄 어느 날, 을지로 입구 은성주점에 둘러앉았던, 시인 김광주, 송지영, 조병화 그리고 박인환, 가수 나애심, 작곡가 이진섭 등이 주흥이 좀 시무룩해지자 가수 나애심에게 노래 한 곡을 주문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녀는 마땅한 노래가 없다면서 계속 고개를 흔들었는데, 그때 박인환이 호주머니를 뒤지더니 구겨진 종이를 꺼내 즉석에서 《세월이 가면》이란 시를 써 내려갔고, 이를 본 작곡가 이진섭은 흥얼거리며 역시 즉석에서 곡을 붙였다고 합니다.
이진섭이 나애심에게 악보를 건넸을 때, 당대 최고의 가수의 입에서 서늘한 노랫말과 군더더기 없는 곡조가 울려 퍼지기 시작, 마지막의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은 노랫말의 여운을 위해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즉흥적으로 낭만적인 한 편의 시와 노래가 탄생되었고 박인희는 이를 히트시키면서 박인환의 시를 부활시켰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