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년 겨울 3일동안 평택전역을 도보답사하였습니다. 일을 만들었던 김성경샘의 답사기입니다.
2박 3일간 평택 걷기 여행을 다녀와서
김 성 경<송탄여중 교사>
세밑 어느 날, 세상살이에 좀 관심 있는 세 남자가 무릎을 맞대고 술잔을 기울이다가 무작정 걸어보자는 한 남자의 제안에 서슴없이 맘을 합했다. 술기운이었을까? 기간은 2박 3일. 어디를 걸을까? 이 곳 저 곳이 물망에 올랐으나 주변부터 살피기로 뜻을 모았고, 오랜만의 흡족한 판단에 들뜬 맘으로 마지막 잔을 털어 넣었다.
함께 할 사람을 찾았다. 쉽지 않았다. 3일을 걷겠다는 얘기에 겉도는 표정으로 찔끔 넘겨다보거나, 혹 무슨 사연이 있지는 않겠느냐는 궁금한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가끔 참 비슷한 사람들도 만났다. 같이 걷겠단다. 모두 5명.
평택 걷기. 이왕이면 알아가며 걷는 것이 났겠다 싶어 슬며시 김해규 선생에게 전화를 했다. 향토사 연구에 푹 빠져 사시는 분이니 함께 해주신다면 금상첨화 아니겠는가. 역시나 선생은 우리의 청을 흔쾌히 받아주시고 일정까지 꾸려주셨다. 이렇게 하여 2박3일간의 평택 걷기 여행이 제대로 꾸려졌다.
1월 6일. 6명의 남자는 소사동 대동법 시행 기념비를 시작으로 걷기 시작하였다. 배다리방죽을 거쳐 죽백동, 갈원, 도일동 원균장군 묘, 은산리 삼봉 정도전 사당에 이르기까지 옛길을 되짚어 걸었다.
걷는 동안 곳곳에서 김해규 선생이 일러주는 지명과 마을의 유래, 그 속에서 삶을 일구어간 민중들의 이야기는 과거를 되살림이 현재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더욱 분명히 해주었다. 막연히 극기 차원에서 가닥을 잡았던 우리의 걷기는 점점 땅과의 시공을 넘은 대화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대동법 시행 기념비에서는 민초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위정자가 지킬 도리를 보았고, 춘향이길을 따라 흩어져 있는 작은 마을들에서는 자연에 얹혀살던 민초들의 지혜과 애환을 들었다. 도일동에서 일그러진 이데올로기의 피해자, 원릉군 원균을 만났고, 은산리에서는 민을 바탕으로 세상을 경영하려 했던, 앞선 사상가 삼봉 정도전을 만났다.
1월 7일. 전날 무봉산 청소년 수련원에서 밤을 보낸 우리는 봉남리를 시작으로 진위천 둑길을 따라 도두리로 길을 잡았다. 바람이 차가워졌다. 물집 잡힌 발이 화끈 거렸고 오금도 당겼다. 하지만 뚝 아래 펼쳐진 넓은 들이 좁디좁은 시야를 터 주어 힘을 주었다.
오전 내내 몸으로 받아낸 찬 바람은 민세 안재홍선생을 만나뵐 기회에 대한 댓가였나 보다. 생가 툇마루에 걸터앉아 김해규선생의 이야기를 통해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후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가신 안재홍선생을 만나고 나서야 둑길에서 만난 찬 바람의 의미를 새삼 몸으로 느꼈다.
고택 담장 아래 폭신하게 깔린 잔디 위로 햇살이 따가울 만큼 아름답게 부서졌다. 질곡의 현대사와 맞서 치열하게 살다 가신 선생의 뜻이 아닐까?
살아가는 자들이 해야 할 일들을 곱씹으며 고택을 뒤로 하고 우리는 다시 둑길을 따라 도두리로 향했다. 넓게 펼쳐진 들은 점점 노을에 익어갔다.
간척지. 이 땅에서 소금기를 빼고 옥토를 일궈내기 위해 민초들은 얼마나 주름져 갔을까. 간척과 떼어내어 바라볼 수 없는 우리 지역의 역사에 새삼 눈 떴다.
얼음으로 뒤덮인 안성천을 발아래 두고 팽성대교를 건넜다. 마을길로 접어들며 멀리 미군부대의 가로등이 눈에 아팠다. 부대 철조망을 왼 어깨 위로 두고 대추리를 향했다.
곳곳에 전경이라 부르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살을 에는 칼바람 속에서 울타리를 지키고 있었다. 바람이 칼이 되어 파고들었다.
우리는 127일째 쉼 없이 달려온 지역 주민들의 촛불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함정리에 들어섰다. 길 한 켠에 차려진 비닐하우스 안에는 지역 어르신들이 차가운 땅 기운을 이겨내며 손에손에 촛불을 움켜쥐고 계셨고 아이들의 재롱이 시위장 안을 녹이고 있었다.
주민은 하나였다. 참 보기 힘든 하나. 그 안에는 있었다. 낯선 사람들을 분에 겹게 맞아주시는 따뜻함 속에서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가슴 저리게 느꼈다. 낯선 사람들은 우리뿐이었다. 촛불 시위 100일 행사에 참여했던 기억이 난다. 사람이 꽤나 많았는데….
선뜻 내어주신 도두2리 마을회관에서 마감 뉴스를 보며 세상을 얘기하다 잠이 들었다.
1월 8일. 아침도 먹여주시고 마을 안내도 해주고 싶으신 이장님의 푸근한 마음을 뒤로 한 채 일정 상 새벽같이 길을 나섰다. 접어들었던 길을 되짚어 나와 안중을 거쳐 최종 목적지인 평택호 미술관을 향했다. 팽성대교를 건너고 들을 가로 지르며 현덕면에 다다랐다.
김해규선생님을 따라 찾은 곳은 현덕면 노인회관. 사라져가는 평택의 역사를 지켜내려는 선생의 노력은 곳곳에 흩어진 마을 조사에 이르렀고, 이를 위해 선생은 농한기인 겨울철, 노인회관을 찾아 어르신들의 입을 통해 사라져가는 사실들을 찾아내어 복원·보존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긴 시간 선생과 어르신들은 이야기를 나눴다. 마을과 지명의 유래, 사라져가는 노래 한 자락, 생생한 체험담 등은 그 어느 것보다 살아 숨쉬는 역사였다.
책을 통해 접한 역사적 사실들의 건조함과 편협함이 어르신들의 따뜻한 입김으로 활기를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역시 역사는 사람이 만들어가는 것인가 보다. 다음에는 막걸리라도 품고 찾아뵈어야겠다.
곧고 널찍한 새 길을 버리고 좁을 길을 따라 휘도니 몸의 편안을 찾게 될 평택호미술관이 눈에 들었다. 다 왔다. 몸은 녹아 내렸고 머리는 약간 빈 듯한, 맘은 훵 하니 열린 느낌. 떠나오기 전 예상과는 좀 다른 느낌이었지만 그냥 좋았다. 그 기분이….
2박3일간의 걷기 여행 동안 우리는 좁은 술집에서처럼 치열하게 자기를 이야기하거나 사람을 논하거나 지금만을 바라보지 않았다. 시공을 넘나들기도 하였고, 사람이 아닌 자연과 만나기도 했다.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의 문제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듣기도 했다.
지금 나는 이 여행이 ‘내게 무엇을 남겼는가?’를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남겨야하는가?’를 생각한다.
여행의 깊이를 더 해주신 김해규선생, 함께 동행한 김태성, 고병한, 문성후, 박종구선생에게 감사한다. 한 번 더 걸읍시다.(20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