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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t teacher Joan Halifax describes five “edge states” where courage meets fear and freedom meets suffering.
불교 스승인 조안 핼리팩스는 용기와 두려움이 부딪치며 해탈과 고통이 만나는 다섯 가지 ‘경계선 상태’에 대해 이야기한다.
Photo by Erico Marcelino.
I have a small cabin in the mountains of New Mexico where I spend time whenever I can. It is located in a deep valley in the heart of the Sangre de Cristo Range. It’s a strenuous hike from my cabin up to the ridge at more than twelve thousand feet above sea level, from where I can see the deep cut of the Rio Grande, the run of the ancient Valles Caldera volcano, and the distinctive mesa of Pedernal, where the Diné say First Man and First Woman were born.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뉴멕시코 산속에 작은 오두막을 가지고 있다. 싼그레데 크리스토 산맥의 심장부의 깊은 계곡에 있다. 내가 있는 오두막에서 해발 1만 2천 피트(3,657m)나 되는 산맥까지 가자면 힘든 산행이다. 거기에서 리오그란데의 깊은 단층이 보이고 오래된 발레스 칼데라 화산이 뻗어나가며, 나바호 인디언이 최초의 인간이 태어났다고 말하는 페르데르날 고원이 뚜렷하게 보인다.
Whenever I walk the ridge, I find myself thinking about edges. There are places along the ridgeline where I must be especially careful of my footing. To the west is a precipitous decline of talus leading to the lush and narrow watershed of the San Leonardo River; to the east, a steep, rocky descent toward the thick forest lining the Trampas River.
산맥으로 걸어갈 때마다 나는 경계선 끝을 생각한다. 아주 조심스럽게 발을 디디면서 걷는 능선이 있다. 서쪽으로 우거진 풀숲과 산레오나르도 강의 분수계로 이어지는 급경사면이 있다. 동쪽으로는 탐파스 강을 따라 이어지는 빽빽한 숲을 향해 가파른 암석 투성이의 경사면이 있다.
I am aware that on the ridge, one wrong step could change my life. From this ridge, I can see that below and in the distance is a landscape licked by fire and swaths of trees dying from too little sun. These damaged habitats meet healthy sections of forest in borders that are sharp in places, wide in others. I have heard that things grow from their edges. For example, ecosystems expand from their borders, where they tend to host a greater diversity of life.
능선 위에서 한 발만 삐끗해도 삶이 바뀔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능선에서 저 멀리까지 내려다보면, 산불에 그을린 풍경과 햇볕을 너무 적게 받아서 말라 죽어가는 나무들이 보인다. 이렇게 손상당한 서식지는 군데군데 날카로운 선으로 보이지만 다른 면에서는 넓어 보이는 숲 경계선의 건강한 부분과 만난다. 나는 숲의 경계선에서 생명이 자란다고 들었다. 예를 들자면 생태계는 경계선 영역을 넓히면서 생명의 다양성을 밀고 간다.
Edges are places where opposites meet. Where fear meets courage and suffering meets freedom.
경계선에서 양극점이 서로 만난다. 거기에서 두려움이 용기와 부딪치며, 고통과 해탈이 만난다.
My cabin sits on the boundary between a wetland fed by deep winter snow and a thick spruce-fir forest that has not seen fire in a hundred years. Along this boundary is an abundance of life, including white-barked aspen, wild violet, and purple columbine, as well as the bold Steller’s jay, the boreal owl, ptarmigan, and wild turkey.
내 오두막은 깊게 쌓인 겨울 눈으로 젖은 습지와 수백 년 동안 산불이 나지 않은 가문비나무숲 사이의 경계에 위치한다. 이런 경계선에는 생명의 풍요로움이 있으니, 하얀 껍질 사시나무, 야생 제비꽃과 보라색 매발톱뿐만 아니라, 겁 없는 스텔라 까치, 북극 올빼미, 멧닭, 야생 칠면조가 산다.
The tall wetland grasses and sedges of summer shelter field mice, pack rats, and blind voles that are prey for raptors and bobcats. The grasses also feed the elk and deer who graze in the meadows at dawn and dusk. Juicy raspberries, tiny wild strawberries, and tasty purple whortleberries cover the slopes holding our valley, and the bears and I binge shamelessly on their bounty come late July.
키 큰 습지의 풀과 여름의 수변식물은 파충류와 살쾡이의 밥이 되는 들쥐와 숲 쥐, 눈먼 들쥐들의 은신처가 된다. 풀은 새벽이나 해진 뒤에 풀밭에서 풀을 뜯는 엘크와 사슴들을 먹여 살린다. 즙이 많은 나무딸기와 작은 야생 딸기, 맛있는 보라색 빌베리(블루베리와 비슷)가 내가 사는 계곡의 경사면을 덮고 있는데 곰과 나는 7월 말까지 자연이 주는 선물을 뻔뻔스레 마음껏 따먹고 즐긴다.
I have come to see that mental states are also ecosystems. These sometimes friendly and at times hazardous terrains are natural environments embedded in the greater system of our character. I believe it is important to study our inner ecology so that we can recognize when we are on the edge, in danger of slipping from health into pathology.
마음 상태도 역시 생태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끔은 우호적이다가 때로는 위험한 영역이 자연환경인데, 더 큰 시스템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특징도 그렇게 내장되어 있다. 나는 우리 내면의 생태학을 공부하는 게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러면 건강한 상태에서 병든 상태로 미끄러질 위험한 경계선상에 있는 시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And when we do fall into the less habitable regions of our minds, we can learn from these dangerous territories. Edges are places where opposites meet. Where fear meets courage and suffering meets freedom. Where solid ground ends in a cliff face. Where we can gain a view that takes in so much more of our world. And where we need to maintain great awareness, lest we trip and fall.
그리고 우리 마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떨어질 때면 우리는 위험한 곳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경계선에서 두 가지 상반되는 것이 만난다. 두려움과 용기가 만나고, 고통과 해탈이 만난다. 단단한 땅은 절벽에서 끝난다. 거기에서는 우리 세계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시야를 얻는다. 거기에서 걸려 넘어지지 않으려면 큰 알아차림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Our journey through life is one of peril and possibility—and sometimes both at once. How can we stand on the threshold between suffering and freedom and remain informed by both worlds? With our penchant for dualities, humans tend to identify either with the terrible truth of suffering or with freedom from suffering. But I believe that excluding any part of the larger landscape of our lives reduces the territory of our understanding.
우리의 인생 여정은 위험과 가능성 둘 중 하나이거나 가끔은 둘 다일 때가 있다. 괴로움과 해탈 가운데 경계에서 어떻게 처신할 것이며, 어떻게 그 양쪽 세계를 알아차리고 있을 것인가? 인간은 둘로 나누기를 아주 좋아하므로 자기를 고통의 진리 아니면 고통에서 벗어난 자유와 동일시하려 든다. 그러나 삶이란 큰 그림에서 어느 한 부분을 제외한다는 것은 우리의 이해 영역을 좁히는 것이라 믿는다.
Edge States 경계선 상태
Over the years, I slowly became aware of five internal and interpersonal qualities that are keys to a compassionate and courageous life, and without which we cannot serve, nor can we survive. Yet if these precious resources deteriorate, they can manifest as dangerous landscapes that cause harm. I called these bivalent qualities Edge States.
세월이 감에 따라 나는 자애롭고도 용기 있는 삶의 열쇠가 되는 다섯 가지 내면적이며 인간관계의 자질-그것이 없다면 봉사할 수도 없고 살아남을 수도 없는-에 대해 서서히 알게 되었다. 이런 귀중한 자질이 타락하면 해를 가져올 위험한 풍경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나는 이렇게 이가(二價)적인 자질을 ‘경계선 상태’라 부른다.
We can lose our firm footing on the high edge of any of these qualities and slide into a mire of suffering.
우리가 그토록 자신하는 자기의 자질 가운데 어떤 것이든 그것의 높은 정점에 섰을 때 견고해 보이던 발판을 잃어버리고, 고통의 수렁으로 미끄러질 수 있다.
The Edge States are altruism, empathy, integrity, respect, and engagement, assets of a mind and heart that exemplify caring, connection, virtue, and strength.
경계선 상태란 이타주의, 공감, 정직, 존경, 그리고 참여인데, 이는 모두 보살핌, 연결, 덕과 힘을 보여주는 마음과 가슴의 자질이다.
Yet we can also lose our firm footing on the high edge of any of these qualities and slide into a mire of suffering where we find ourselves caught in the toxic and chaotic waters of the harmful aspects of an Edge State.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자질 중 어느 하나의 높은 경계선에서 든든한 발판을 잃어버리고, 해가 되거나 혼란한 파도에 휩쓸리는 괴로움의 수렁 속으로 미끄러질 수 있다.
Altruism can turn into pathological altruism. Selfless actions in service to others are essential to the well-being of society and the natural world. But sometimes, our seemingly altruistic acts harm us, harm those whom we are trying to serve, or harm the institutions we serve in.
이타주의는 병적인 이타주의로 변할 수 있다. 타인에게 봉사하는 비이기적인 행동은 사회와 세계의 안녕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가끔 겉으로는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동이 우리에게 해를 가져오며 우리가 도와주려는 타인과 단체에 해를 끼치기도 한다.
Empathy can slide into empathic distress. When we are able to sense into the suffering of another person, empathy brings us closer to one another, can inspire us to serve, and expands our understanding of the world. But if we take on too much of the suffering of another, and identify too intensely with it, we may become damaged and unable to act.
공감은 공감으로 인한 고뇌로 미끄러질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고통이란 느낌으로 들어가면, 그 사람과 더 가까워져서, 봉사하게 되고 세계에 대한 이해도 넓어진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너무 많이 받아들여, 내 것인 것처럼 심하게 동일시하면, 우리는 해를 입어 활동할 수 없게 된다.
Integrity points to having strong moral principles. But when we engage in or witness acts that violate our sense of integrity, justice, or beneficence, moral suffering can be the outcome.
성실함은 도덕적 원칙을 강하게 견지하는 데 초점을 둔다. 그러나 우리는 정직, 정의 혹은 관대함이란 자질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거나 그걸 목격하게 되면 양심의 고통이란 결과가 따라온다.
Respect is a way we hold beings and things in high regard. Respect can disappear into the swamp of toxic disrespect, when we go against the grain of values and principles of civility, and disparage others or ourselves.
존경은 사람이나 물건을 높이 받드는 일이다. 존경은 유해한 불경의 늪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그땐 아주 작은 가치도 돌보지 아니하고 예의 바름이란 원칙을 어기면서 나와 타인을 흉보게 된다.
Engagement in our work can give a sense of purpose and meaning to our lives, particularly if our work serves others. But overwork, a poisonous workplace, and the experience of the lack of efficacy can lead to burnout, which can cause physical and psychological collapse.
함께 하는 일, 특히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 목적이 있다는 느낌과 의미를 부여해준다. 그러나 과로하거나, 유해한 환경에서 일하거나, 효율성이 없는 경험은 지쳐서 탈진할 수 있다. 이건 심신 쇠약을 가져오기도 한다.
Even in their degraded forms, Edge States can teach and strengthen us, just as bone and muscle are strengthened when exposed to stress, or if broken or torn, can heal in the right circumstances and become stronger for having been injured.
경계선 상태는 비록 타락한 형태가 되더라도 여전히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면서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뼈와 근육이 스트레스를 받거나 부러지거나 찢어질 때라도 적절한 환경을 만나면 치료가 되듯이 상처받은 만큼 더 단단해지기도 한다.
The way back to freedom on the high edge of strength and courage, is through the power of compassion.
힘과 용기의 높은 경계선에서 해탈을 돌아가는 길은 자비의 힘을 통해서이다.
In other words, losing our footing and sliding down the slope of harm need not be a terminal catastrophe. There is humility, perspective, and wisdom that can be gained from our greatest difficulties. In her book The Sovereignty of Good (1970), Iris Murdoch defined humility as a “selfless respect for reality.” She writes that “our picture of ourselves has become too grand.”
다른 말로 하면 발판을 잃어버리고 해가 되는 내리막길로 미끄러지는 것은 반드시 말기적 참사라고 할 수 없다. 여기에는 겸손함, 관점 그리고 자신이 경험한 것 가운데 가장 큰 역경에서 얻어진 지혜가 있다. 아이리스 머독의 저서 ‘선함의 주권(1970년)’이라는 책에서 작가는 겸손함이란 ‘현실을 사심 없이 존중하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그가 쓰기를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너무 큰 그림을 그린다.’
This I discovered from sitting at the bedside of dying people and being with caregivers. Doing this close work with those who were dying and those who were giving care showed me how serious the costs of suffering can be for patient as well as caregiver. Since that time, I have learned from teachers, lawyers, CEOs, human rights workers, and parents that they can experience the same. I was then reminded of something profoundly important and yet completely obvious: that the way out of the storm and mud of suffering, the way back to freedom on the high edge of strength and courage, is through the power of compassion.
내가 임종을 앞둔 사람 옆에서 간병인과 함께 앉아있을 때 이 점을 발견했다. 임종하는 사람과 돌봐주는 분들과 가깝게 일하는 가운데 환자와 간병인이 겪는 고통의 대가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었다. 그때부터 교사들, 변호사들, 회장님들, 인권 운동가들, 그리고 부모들도 똑같이 고통을 겪는다는 걸 알았다. 심오하도록 중요하며, 완전히 명백한 어떤 점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건 폭풍과 고뇌의 진흙탕에서 벗어나는 길, 힘과 용기라는 높은 경계선에서 해탈로 향하는 길은 자비의 힘을 통해서라는 사실이다.
Futility and Courage 헛된 노력과 용기
나에겐 정신분석가로서 활동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분은 수년 동안 자기 일을 잘 수행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도저히 이 일을 더 이상 못하겠어요.’ ‘나는 완전히 지졌고 마음이 우울해요.’라고 했다. 한편 나에겐 다른 친구도 있는데, 그는 네팔에 사는 빠상 라무 세르파Pasang Lhamu Sherpa라는 사람이다. 그는 네팔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산악인 가운데 한 분이다. 2005년 4월 네팔에 지진이 났을 때 그는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었는데, 그는 즉시 구호팀을 꾸려 이재민들을 도우러 나섰다. 카트만두에 있는 자기 집도 지진으로 부서졌는데도 불구하고 남편 토라 아키타Tora Akita 씨와 함께 이타적 구호활동을 재개했다.
We can draw lessons from places of utter devastation.
우리는 완전히 실패한 곳에서 교훈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정신분석가 내 친구는 경계선 상태를 넘어서지 못했으며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했다. 반면 나의 네팔 친구는 인간성이란 경계선을 딛고 설 수 있었다.
How is it that some people don’t get beaten down by the world but are animated by the deep desire to serve?
왜 어떤 사람은 세상이 넘어뜨릴 때도 넘어지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을 도우려는 깊은 열망을 일깨울 수 있는가?
I think compassion is key. The psychologist had lost his connection to his compassionate heart; burnout had deadened his feelings. Cynicism had sent down a deep root. Pasang, though, was able to remain grounded in compassion and let those feelings guide her actions. I have come to view compassion as the way to stand grounded and firm on the precipice and not fall over the edge. And when we do fall over the edge, compassion can be our way out of the swamp.
나는 자비심이 열쇠라고 생각한다. 정신분석가는 자비로운 가슴과의 연결을 잃어버렸다. 탈진하여 자기감정이 죽어버렸다. 냉소주의가 깊이 뿌리를 내렸다. 한편 빠상은 자비심에 안착할 수 있었기에 절벽에 단단하게 붙어서 경계선에서 굴러떨어지지 않았다. 경계선에서 떨어질 때 자비심이 우리를 늪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다.
This is the very premise of coming to know intimately the Edge States: How we develop the strength to stand at the edge and have a wider view, a view that includes all sides of the equation of life. How we find life-giving balance between oppositional forces. How we find freedom at the edge. And how we discover that the alchemy of suffering and compassion brings forth the gold of our character, the gold of our hearts.
다음은 경계선 상태를 내밀하게 알게 되는 전제이다. 경계선에 서는 힘을 기르고, 더 넓은 시야-삶의 방정식의 모든 측면을 포괄하는 관점을 가지는 것이다. 서로 상충하는 힘들 사이에서 생명을 주는 균형을 발견하는 것. 경계선에서 자유를 발견할 것. 고통과 자비의 연금술이 어떻게 자신의 성격 가운데서 황금을, 우리 가슴속의 황금을 가져오는지 알아내는 것이다.
Adapted from Standing at The Edge: Finding Freedom Where Fear and Courage Meet, by Roshi Joan Halifax.
<경계에 서다:두려움과 용기가 만나는 곳에서 자유를 발견하기>
조안 핼리팩스 선사(미국 여성 선사)의 책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