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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국공산당 입당(入黨)과 하얼삔 일본영사관 습격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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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허형식 가족이 이주한 빈현(賓縣)은 부근의 주하(珠河), 연수(延壽), 오상(五常), 목란(木蘭), 방정현(方正縣) 등과 함께 토지가 비옥하고 수리자원(水利資源)이 풍부하였으므로, 토지의 개간이 비교적 일찍 시작된 곳이었다. 그 결과 소수의 지주가 대토지를 집중소유한 반면에 대다수의 농민들은 거의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였다. 특히 무토지(無土地) 농민의 비중은 여타 중국동북지역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조사되고 있었다.18) 그러므로 이 지방은 농민운동의 잠재역량이 큰 곳이었다. 이에 따라 1927년에 성립한 중공당 만주성위는 이 지역에 북만특별위원회(北滿特別委員會)를 설치하고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이 무렵 하얼삔 부근의 북만지방에는 1920년대 들어 다수의 한인 농민들(주로 남부지방 출신)이 이주하였으나, 거의 중국인 지주의 소작농으로 지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과 중공당 북만특위는 열악한 처지에 있는 농민들을 포섭하여 당세를 확장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반국민당(反國民黨)·반군벌(反軍閥)투쟁 및 반제반봉건운동(反帝反封建運動)을 전개하려고 방침을 세우고 있었다. 특히 빈현에는 화요파 조공(朝共) 만주총국 군사부장의 중책을 맡고 있던 최용건(崔庸健)(이명(異名) 최석천(崔石泉) : 후일 북한 부주석 역임)이 중공당 빈현지부 서기를 겸하고 김지강(金志剛)이라는 가명으로 분주히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를 중심으로 농민동맹과 청년동맹, 부녀회 등 대중조직이 결성되어 농민들의 권익옹호 등을 표면으로 내세우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19) 허형식은 비교적 일찍부터 항일사상과 계급의식에 각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빈현에 이주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최용건 등 한인 공산주의자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그는 최용건의 후원과 지도를 받아 1929년 중반부터 중공당 북만특위 및 조공당 만주총국 관계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들과 함께 활동하기 시작했다. 최용건은 1900년생으로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와 중국의 운남강무학당(雲南講武學堂)을 졸업한 뒤 황포군관학교(黃 軍官學校) 교관을 역임한 군사엘리트였으며,20) 이후 동북항일연군의 한인 가운데는 최고위급 인사로 활동하게 되는 선배라 할 수 있었다. 허형식은 그해 김정숙(金正淑)과 갓 결혼한 상태였으나, 그녀와 부모의 곁을 과감히 떠나 하얼삔, 아성(阿城), 주하(珠河), 탕원(湯原) 등지를 드나들며 항일투쟁과 사회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하게 되었다. 그는 여러가지 사업을 활발히 추진하기 위해 중국인(한족(漢族)) 대중과 접촉하며 의식적으로 중국어(한어(漢語))를 배우기에 노력하여 마침내 유창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는 부친으로부터 받은 한문교육이 큰 도움이 되었다. 1930년 초부터 중국동북에서 활동하고 있던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각파의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코민테른의 일국일당(一國一黨) 원칙에 순응하여 중공당 만주성위에 입당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허형식도 동년 초 중공당에 입당하여 정식 당원이 되었다.21) 1929년 후반기부터 진행된 한중(韓中) 양민족 공산당 관계자들의 협의를 거쳐 이듬해 3월 20일 ML파 조공당(朝共黨) 만주총국은 해체 선언을 하고 산하 당원의 중공당 입당을 선포했다.22) 그러나 그 즉시 모든 만총(滿總) 조공당원이 중공당에 입당한 것은 아니었다. 화요파나 서울-상해파등 여타 파벌의 조공(朝共) 당원 대부분이 입당을 완료한 것은 그해 말경이었다. 따라서 이해 전반기까지 조공 만주총국의 각 조직은 건재하고 있었으므로 한중 양민족의 조직이 당분간 공존한 셈이었다. 당시 중공당 만주성위에서는 한중(韓中) 양민족의 공동투쟁을 내세웠으나 그들의 역량과 중국인 대중에 대한 영향력은 미미했고, 더욱이 1930년 4월 주요 간부 30여명이 검거되는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23) 때문에 이들은 한인(韓人) 조공당원의 흡수와 한인(韓人) 대중의 동원 및 포섭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중공 만주성위는 후일 좌경노선으로 평가된 이립삼(李立三)노선의 방침이 중앙에서 하달됨에 따라 중국동북 각지에서 무장폭동을 일으킨다는 무모한 방침을 세웠다. 중공 만주성위는 같은해 3월 '소수민족운동위원회'를 세워 여기에서 한인들에 대한 공작을 총괄케 하는 한편, 폭동을 실행하기 위해 4월 24일 '5·1투쟁행동위원회'를 결성했다. 이때 소위 '붉은 5월투쟁(紅五月鬪爭)'이라는 사업이 구체화되었고, 일제(日帝) 및 국민당 타도, 고리대(高利貸)착취반대, 지주의 토지몰수, 쏘비에트정권 수립 등의 구호가 제정되었다.24) 중공 만주성위는 5월 1일, 즉 메이데이(May Day : 노동절)를 기점으로 '붉은 5월투쟁'이라는 일련의 투쟁에 한인(韓人)들을 참가시켜 시련을 겪은 '선진분자'를 중공당과 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시킨다는 방침을 굳혔다. 이에 따라 4월 하순 북만특위 산하 하얼삔 시위(市委)와 조공 만주총국(화요파) 위원회가 회합하고 하얼삔의 중국노동자 200여명과 부근의 한인 농민 200여명을 동원해서 5월 1일 하얼삔에서 메이데이를 기념하는 시위행진을 단행하기로 약속했다.25) 그 무렵 북만의 한인 농민들을 상대로 활발한 대중사업을 전개하고 있던 허형식(許亨植)은 이 계획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반일투쟁이라는 입장에서 정치적 영향력이 클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중공당 북만특위 위원겸 전국총공회(全國總工會) 특파원 임중단(林仲丹)(장호(張浩) : 한족(漢族))의 후원하에 분주히 뛰어다녔다. 이리하여 4월 30일 하얼삔 근처 황산저자(荒山咀子)의 한인 당원과 청년 등 수십명을 데리고 하얼삔에 갔다. 이날 하얼삔에 모인 한인 농민과 청년들은 200여명이나 되었는데, 아성현의 해구(海溝)와 평방(平房) 등지에서 온 사람들도 많았다. 특히 100여명의 황산저자(荒山咀子) 농민들은 중국인이 경영하는 혜제도전공사(惠濟稻田公司)의 과도한 수탈에 맞서 '합동황산저자(哈東荒山咀子)농민조합쟁의단'을 결성하고 항의방문차 온 사람들이었다.26) 그러나 막상 5월 1일이 되자 오전에 비가 내린데다가 중공 하얼삔시위(市委)에서 동원하기로 했던 중국인 노동자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소수의 한인들만으로는 시위행진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더욱이 함께왔던 농민 150여명은 기다리다가 불만을 터뜨린 뒤 제각기 돌아가 버렸고, 같은 중공당원 김대수 및 허형식과 가까운 40여명의 청년들만 남고 말았다. 이후 허형식은 그날 뒤늦게 이런 사정을 연락받고 달려온 화요파 조공당 공산청년단 선전부장 양환준(梁煥俊)과 상의한 결과 하얼삔 주재 일본총영사관을 습격하기로 계획을 바꾸었다.27) 파급효과가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때마침 일본영사관 직원들은 빈현(賓縣)에 출장갔다가 한인(韓人) 무장대원에게 피살된 송(宋)순사(한인(韓人))의 현지 장례식에 가고 남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 당시 일본영사관에는 당직자와 러시아인 용병 2명, 유치장 간수 2명밖에 없어서 매우 여건이 유리했다. 중공 하얼삔시위에서는 중국인 대중동원에 실패했지만, 대신 일제의 침략을 경계하고 있던 하얼삔 경찰당국과 은밀히 협의했다. 그 결과 일본영사관을 습격한 사람들을 보호하겠다는 언질을 받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사건 직후 경찰대가 출동하더라도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체포되면 얼마 뒤에 석방할 것이라는 약속도 받아냈다.28) 이에 허형식과 김대수는 습격운동을 주도하고, 중공 하얼삔시위는 중국 경찰과의 연계 및 뒤처리를 책임지기로 합의했다. 허형식은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리다가 오후 7시쯤 되자 40여명의 한인 청년들과 10여명의 중국인 반제동맹원(反帝同盟員), 학생들과 함께 과감하게 일본영사관 앞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허형식의 주동으로 행동계획에 따라 미리 준비한 선전물을 뿌리고 일제침략을 성토하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하였다. 그러다 구경꾼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자 길바닥에 깔려있는 돌멩이를 들고 일제히 일본영사관을 향해 던지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일본영사관 정문 및 창문의 유리 86장이 깨져버렸고, 그 안에 있던 몇명의 직원들은 혼비백산하여 중국경찰에 구원요청을 하였다. 허형식 등은 영사관 안으로 들어가 바닥에 깔린 벽돌을 부숴 유리창을 깨는 한편, 내부의 기물도 박살낸 뒤 일본총영사의 관사를 습격했다. 그러나 얼마 뒤에 중국경찰이 달려와 허형식 등 32명의 참가자가 체포되었고, 나머지는 도주하였다.29) 체포된 사람 가운데는 5명의 한인(韓人) 여학생도 있었고, 소수의 중국인도 있었다. 사건 직후 일본영사관측에서는 중국경찰 당국에 검거된 사람들을 넘겨달라고 요구했지만 중국당국에서는 주권침해를 이유로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일본영사관 당국은 '범인색출'을 명분으로 하얼삔 시내의 엉뚱한 한인들을 200여명이나 체포했으나, 결국에는 석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중국경찰측은 당분간 참가자들을 구속하고 있었지만, 애초에 약속한대로 한달을 전후해서 몇명씩 차례대로 석방하였다. 허형식도 한달 뒤쯤 석방되었다. 이 사건 직후 양환준은 중공당에 가입했고, 조공당원이었던 김책(金策)(본명 김홍계(金洪啓), 김재민(金在民)이라고도 함, 후일 북한 내각 부수상 역임), 장시우(張時雨)(후일 북한 초대 상업상 역임) 등도 이 무렵 중공당에 가입하였다.30) 일본영사관 습격사건 자체는 소규모 반일투쟁이었고, 중공당의 '좌경화' 경향 속에서 단행된 것이었기 때문에 일정한 한계를 갖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내외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일제는 커다란 심리적 타격을 받은 반면 하얼삔 일대의 중국인 등 대중에 대한 반일투쟁의 선전효과는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은 현지 언론에도 크게 보도되었고 국내에서 발행되던《조선일보(朝鮮日報)》등 일간지에도 일종의 독립운동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며 1면 톱으로 보도될 정도였던 것이다. 허형식은 이 사건을 계기로 중공당 및 조공당 관계자들의 신임과 주목을 받게 되었고, 새로운 투쟁경험을 쌓게 되면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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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항일유격대 및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에서의 항일무장투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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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식은 하얼삔 일본총영사관 습격 사건이 있은 뒤 중국경찰에서 석방되어 다시 황산저자(荒山咀子)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31) 이미 환갑을 넘은 부친 허필(許苾)과 신혼의 아내 등 가족들은 크게 걱정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그는 최용건 등과 긴밀한 연계를 유지하고 농민들의 권익옹호에 앞장서는 한편, 당원포섭과 조직확장에 열중하였다. 이후 그는 중공당 만주성위에서 제기한 '붉은 5월투쟁' 계획에 따라 북만에서 전개된 각종 농민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이무렵 동만(東滿)지방에는 '간도 5·30폭동'과 '8·1 길돈(吉敦)폭동'으로 표현되는 일련의 대중봉기가 초래되어 큰 사회문제를 야기했으나, 여기에 참가한 한인(韓人)들의 희생은 매우 큰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한인들이 중공당에 가입할 수 있었다. 북만에서도 중공 만주성위의 방침에 따라 이에 호응하는 많은 활동이 있었다. 특히 영안현(寧安縣) 화검구(花 溝)에서는 1930년 6월 중공당 영안현 임시위원회를 조직한 뒤 그해 10월에 영안현 쏘비에트임시정부를 수립하는데까지 성공했다. 이 임시정부의 주석에는 김책(金策)이 선임되었으나, 그달 말 보안단의 습격을 받고 와해되었다.32) 당시 이러한 대중봉기에는 주로 한인들이 참가하고 있었고, 중국인 참가자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허형식은 반제반봉건운동 성격을 띠는 이러한 대중봉기를 주도하다가 1930년 후반경 중국 공안당국에 검거되어 공산분자라는 혐의로 심양(瀋陽)감옥에 수감되었다. 김책도 1931년 체포되어 심양감옥에 갇혔다. 두사람은 감옥에서 서로 잘알게 되었다. 1931년 9월 일제의 중국동북침략 직후 두사람과 이복림(李福林) 등은 만주성위에 의해 12월 말경 구출되었다.33) 이후 허형식은 전사할 때까지 6년 연상인 김책과 매우 가까운 선후배 내지 동지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활동하게 된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인 1931년 첫아들 창룡(昌龍)이 태어났다. 감옥에서 나온 허형식은 일제의 침략으로 새로운 정세가 조성되는 가운데, 만주성위의 지시에 따라 김책과 함께 빈현(賓縣)에서 항일투쟁 준비사업을 주도하게 되었다. 1932년 1월 만주성위 빈현특별당지부(賓縣特別黨支部)가 성립하여 김책이 서기, 김수성(金水星)이 조직위원을 맡았고, 허형식은 선전위원의 직책을 맡았다. 그 뒤 허형식은 이삼룡(李三龍)이라는 가명을 쓰며 김책 및 김수성과 함께 빈현일대를 무대로 반일동맹회(反日同盟會) 및 공산주의청년단, 자위대 등 항일단체들을 조직하기에 노력하였다.34) 당시 빈현은 길림성에 속했는데, 일본군이 성도(省都) 길림(吉林)을 점령하자 길림성 대리주석 희흡(熙洽)은 일제에 동조하고 독립을 선포했다. 하지만 이러한 매판적 행위에 반대하고 있던 성윤(誠允)은 1931년 11월 중순 빈현에 임시길림성정부를 세우고 스스로 주석이 되어 일제에 저항하였다. 그러자 이두(李杜)· 정초(丁超)· 풍점해(馮占海) 등이 사령관으로 있던 동북군벌계(東北軍閥系)의 여러 부대들도 이 정부를 지지하며 이듬해 1월 말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을 조직하고 일본군에 항거하였다. 길림자위군은 빈현일대 10개현을 기반으로 1932년 2월 하얼삔 전투 등에서 한때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그해 3월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滿洲國)이 수립된 뒤 일(日)· 만(滿) 군경의 공세가 본격화하자 1933년 초 이래 쇠퇴의 길을 걸었고, 1934년 경에는 거의 와해되고 말았다.35) 비슷한 시기에 '반만항일(反滿抗日)'을 표방하는 중국인들의 각종 무장세력이 봉기하였고, 민족주의계 독립군인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도 각각 남만과 북만에서 일제와 일대 결전을 벌였다.36) 허형식과 김책, 김수성은 이와 같은 항일투쟁의 고조기에 항일투쟁의 중심지로 부상한 빈현 주민들의 항일정서에 호소하는 방법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의 역량은 한정되어 있었지만 농민과 학생, 노동자들 속에 파고들어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나름대로 분투하였다. 그 결과 동년 7월에는 62명의 성원을 가진 '빈주반일회(賓州反日會)'와 19명의 회원을 가진 '오하(烏河)부두반일회'를 결성하는 데 성공했고, 9월에는 모두 100여명의 반일회원을 결집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오하부두반일회는 허형식이 직접 송화강(松花江) 하류의 오하에서 부두노동자로 일하면서 조직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애착이 컸다. 10월에는 10여명의 한족(漢族) 학생을 수용하여 빈현공청단(賓縣共靑團)을 조직하기까지 했다. 또 1년 사이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던 30여명을 당원으로 포섭하기도 했다. 허형식은 이들과 같이 반일선전을 행하고 무기를 구입하여 소수의 무장대를 조직하는 한편, 주구배와 밀정을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하기도 했다.37) 그러나 허형식 등 빈현특별지부의 간부들이 모두 한인(韓人)(조선족)이었기 때문에 한계도 있었다. 가장 큰 고충은 반일회원의 대부분이 한인이고 중국인은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이 때문에 서기 김책은 중국인 대중에 대한 공작을 추진하기 위해 1932년 7월 하순 중공당 북만특위에 한족(漢族) 간부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하였다. 허형식은 이 문제로 김책의 지시를 받고 북만특위가 있는 하얼삔까지 다녀오는 연락업무를 맡았고, 빈현의 정세를 보고하는 대신 앞으로의 공작방침을 전달받아 왔다.38) 허형식이 이렇게 1932년 한해를 바쁘게 보내고 있을 때 뜻밖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그는 항일투쟁과 '혁명'을 위해 뛰어다니느라고 아버지께 소홀했던 자신을 후회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허위(許蔿)나 허겸(許 ), 4촌형이나 다른 일가분들이 그랬던 것처럼 일제 타도와 조국의 독립, 그리고 억눌린 자의 해방을 위해 뛰어다니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때문에 허형식은 부친의 장례식을 성대히 할 수 없었으나, 동료들의 도움으로 하얼삔 근처에 묘지를 잡아 정성스럽게 모실 수 있었다.39) 이해 9월 빈현지부 서기를 맡아왔던 김책이 이웃 주하현(珠河縣)(현재는 상지현(尙志縣))에서 주하중심현위(珠河中心縣委)가 성립하자 군사위원으로 갔다. 그 뒤 빈현지부는 허형식과 김수성에 의해 주도되었다. 1933년 3월 김책은 다시 빈현에 돌아와서 서기직을 한족(漢族) 여대천에게 인계하고 주하에서 활동했다. 이 때 허형식도 만주성위의 지시로 빈현을 떠나 탕원(湯原)으로 가게 되었다.40) 이곳에서 항일유격대 창건을 지원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가 이 임무를 지시받은 것은 대중 속에 뛰어들어 그들을 조직화하는 데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허형식은 탕원중심현위(湯原中心縣委) 서기 배치운(한인(韓人)) 등 동지들과 함께 분투하여 탕원(湯原)에서 반일회원 1,400여명을 결집하는데 성공하였다.41) 그러나 그곳에서 창건된 유격대는 일제의 탄압과 역량의 미흡으로 창건 후 한달도 못되어 와해되었다. 그는 다시 주하현(珠河縣) 흑룡궁(黑龍宮) 일대에 가서 대중 조직화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직접 노동에 종사하며 가난한 농민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가사를 돕기도 하는 등 그들의 신임을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그는 현지 풍습에 따라 다수의 한인 및 중국인 농민들과 의형제(義兄弟)를 맺어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었다. 허형식이 애써 뛰어다닌 결과 흑룡궁에서는 농민반일회와 청년반일회, 부녀반일회 등의 단체가 조직되기 시작했다. 또 중공당 지부조직 사업도 진전되어 그는 주하중심현위의 표창까지 받았다.42) 1933년 중반을 고비로 중공당 만주성위의 활동방침은 크게 변했다. 즉 만주성위는 일제(日帝)의 중국동북 침략 직후인 1931년 9월 하순 '일본제국주의가 무력으로 만주를 점령한 데 관한 선언' 및 '일제가 무력으로 만주를 점령한 데 대하여 전 만주 조선인(朝鮮人) 노동자, 농민, 학생 및 노구(勞苦)대중에게 알리는 글'을 발표하여 일제의 격퇴를 호소하면서도 의연히 '토지혁명' 등의 구호를 제기하는 등 좌편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43) 이에 따라 1930년대 초반 중국동북에서 많은 항일무장투쟁 세력이 봉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동만(東滿)지역의 일부 유격대(한인(韓人) 중심)를 제외하면 중공당 계열의 부대는 거의 없었다.44) 1932년경 중공당 중앙에서도 좌경모험주의로 평가되는 왕명(王明)(본명 진소우(陳紹禹))노선이 재등장하면서 당시의 객관적 정세와는 동떨어진 잘못된 전략전술을 채택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만주성위는 9·18사변(만주사변)이후 연변(延邊)지역에서 '한인자치'나, '간도독립', '한인쏘비에트' 등의 구호가 제기되었을 때 이를 무조건 반대했다. 그리고 동년 6월경 만주성위는 "무력으로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는 것이 동북당의 중심임무가 되어야 한다"고 중공 중앙 소집의 북방회의(北方會議)에서 문제를 제기했으나, 이 주장은 '만주특수론'이라 하여 수용되지 않았다. 그 결과 만주에서도 중국 관내(關內)지역과 마찬가지로 홍군(紅軍)과 쏘비에트 정권을 세울 것이 요구되었다. 이 때문에 항일투쟁이 고양되는 분위기에서도 중공 만주성위는 각종 항일부대를 적대시하며, 모든 지주나 자본가를 타도하고 그들의 모든 재산을 몰수한다고 하는 '좌경'의 실책을 범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반제통일전선(反帝統一戰線)의 형성은 시기상조였고, 오히려 유격근거지와 유격대의 입지를 약화시켰다.45) 그러나 1932년 말 코민테른과의 협의를 거쳐 중공당 중앙은 이러한 잘못을 크게 시정하게 되었다. 그 내용을 집약한 것이 바로 1933년 1월 26일 중공 중앙에서 만주성위에 준 '만주(滿洲)의 각급당부(各級黨部) 및 전당원(全黨員)에 주는 서간(書簡) ― 만주(滿洲)의 상황(狀況)과 우리 당(黨)의 임무(任務)에 대하여'이다. '1·26서간'으로 표현되는 중공 중앙의 이 방침은 만주성위의 미흡한 역량을 일정하게 비판하면서도 무산계급의 영도권 견지를 전제로 한 반제통일전선의 형성을 제기했다.46) 이 서간은 만주성위의 좌경노선을 상당부분 수정시키고 항일무장투쟁의 발전을 상당히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만주성위는 동년 5월 하얼삔에서 회의를 열고 중공 중앙의 방침을 대폭 수용하는 결의를 채택한 뒤, 그 기본방침을 각 지부로 하달하였다. 이후 만주성위의 긴급한 당면과제는 좌경오류의 시정과 모든 반일역량을 연합한 반일반제투쟁의 전개, 선출된 민중정부 및 인민혁명군의 건립 등으로 집약되었다.47) 이에 따라 만주성위는 각 지역에 있던 반일유격대를 기초로 항일민족통일전선의 성격이 강화된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을 건립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만주성위의 이러한 결의에도 불구하고 '좌경'의 오류는 완전히 극복되지 못했다. 1932년 말부터 1935년 중반까지 동만(연변)지역에서 전개된 '반민생단(反民生團) 투쟁'으로 인해 무고한 한인 운동가 431명이 밀정 혐의로 피살된 참변이 벌어졌던 것이다.48) 이러한 상황에서 동북의용군 계통의 손조양(孫朝陽) 부대가 일본군의 공격으로 괴멸되어 다수의 부대원이 여기에서 이탈하였다. 주하중심현위에서는 이 부대에서 활동하던 조상지(趙尙志)(한족(漢族))와 이계동(李啓東)(한인(韓人)) 등 13명을 토대로 마침내 1933년 10월 주하반일유격대(珠河反日遊擊隊)를 창건하였다.49) 허형식은 주하현(珠河縣)당위원회 비서장으로 있던 김책의 지시를 받고 중동철도(中東鐵道)(만주리(滿洲里)―하얼삔―수분하(綬芬河) 연결) 이북의 흑룡궁(黑龍宮), 후림향(侯林鄕) 일대에서 적극적으로 항일선전을 벌이고 대중들의 항일투쟁 의지를 고양시켜 항일유격대가 그 지역에서 활동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만들었다. 이에 일본군은 이곳의 항일활동을 탄압하고 공산당 조직을 말살하기 위해 밀정을 파견해서 정탐하는 등의 책동을 벌였다. 허형식은 그러한 밀정들을 색출하여 처단하는 과감한 작업을 벌여 유격근거지 대중들의 경각심을 높였다.50) 1934년 봄 주하반일유격대 대장 조상지(趙尙志)는 대원들을 데리고 철도 남북을 왕래하며 투쟁했다. 같은 해 7월 주하(珠河)에 주둔하던 일본군이 조상지 부대를 추격하여 흑룡궁(黑龍宮) 지방에 들어왔다. 그러자 일본군의 '토벌'을 두려워한 당지부 서기 왕홍생(王鴻生)은 변절하여 투항하였다. 또 허형식과 의형제를 맺었던 장유재(張有才)도 숨겨둔 장비를 꺼내 일본군에 투항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에 격분한 허형식은 감연히 나서 항일자위대를 조직하는 한편, 부근에 있던 반일유격대를 인솔해 와 두사람을 체포했다. 그리고 군중집회를 열어 한족(漢族) 두사람의 죄상을 열거한 후 공개 처단하고 말았다. 그의 과감한 조치는 중공당 지부조직을 보전하고 주하유격대의 군사행동을 지원했다고 하여 주하중심현위의 찬양을 받았다.51) 이로 볼 때 허형식은 매우 결단성이 있고 신념에 투철하며 강인한 성격이었다고 단정할 수 있다. 특히 그는 반일감정이 매우 강했던 사람이었다고 하겠다. 주하유격대는 주하(珠河), 연수(延壽), 빈현(賓縣) 등 북만(北滿)의 항일투쟁이 점차 활발해짐에 따라 1934년 6월 말 주하현위(珠河縣委)의 결의를 거친 뒤 일부 의용군과 반일산림대(토비(土匪) 또는 마적을 지칭)를 받아들여 동북반일유격대(東北反日遊擊隊) 합동지대(哈東支隊)를 건립했다. 이는 1·26서간과 만주성위의 반제통일전선 방침을 실현한 것이었다. 합동지대는 3개 총대(總隊)로 구성되고 각 총대는 다시 3개 대대(大隊)로 편성되었다. 그러나 창립 초에는 편제대로 구성되지 못하고 3개 총대 및 5개 대대, 9개 중대로만 이루어졌다. 총병력은 450명 가량이었는데, 중공당에서 직접 영도하는 주력은 180여명 정도였다. 조상지(趙尙志)가 사령(대장), 장수전(張壽 )(해방후 이조린(李兆麟)으로 개명 : 한족(漢族))이 정치위원을 맡았다. 허형식은 이때 제3대대 정치지도원으로 임명되었다가 그해 가을에 제1대대장이 되었다. 또 그와 절친한 사이였던 김책은 경제부장이 되었다.52) 허형식이 이끄는 1대대는 합동지대의 주력이었다. 이무렵 그는 이희산(李熙山)이라는 가명을 썼다. 모친의 성(姓)을 따고 아버지 항렬 일가들의 산자(山字) 돌림호(號)를 참고한 것 같다. 합동지대는 건립 후 작전구역을 세 방면으로 나누었다. 허형식은 대장 조상지를 따라 80여명의 병력을 지휘하며 주하현(珠河縣) 철도북(鐵道北) 제5구역과 연수, 빈현, 방정현(方正縣) 일대에서 기민하게 활동했다. 그는 일본군과 만주국 관헌의 거점을 격파하고 적의 무장을 해제했으며, 북만지방의 정세를 잘 활용하여 농민위원회와 자위대, 청년의용군, 부녀회, 아동단 등 대중 항일조직을 상당수 세웠다.53) 이러한 그의 활동은 지방당의 세력확장 및 합동지대의 유격근거지 마련에 크게 기여했다. 실제로 이 무렵 주하(珠河) 일대의 항일 유격근거지 내부에는 5천여명의 농민자위대가 있었다고 한다.54)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형식이 소속된 북만특위 산하 각 조직의 활동은 대단히 어려웠다. 일제와 그 추종세력 외에도 그들의 활동을 적대하는 반공(反共)세력이 무시못할 정도로 있었기 때문이다. 허형식이 합동지대에서 본격적 항일무장투쟁의 길에 매진하고 있을 때인 1934년 딸이 태어났다.55) 그는 주하(珠河) 일대에서 활동하는 자신의 행적을 의식한 듯 딸의 이름을 하주(河珠) 라고 지었다. 당세 및 유격구의 확대, 만주성위의 지시에 따라 합동지대(哈東支隊)는 지방청년의용군을 흡수하여 1935년 1월 말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 제3군 제1독립사로 발전했다. 이때 조상지가 군장, 풍중운(馮仲雲)이 정치부 주임이 되고, 허형식은 3군의 제2단(團) 단장으로 임명되었다.56) 이미 남만(南滿) 지방에는 1933년 9월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 제1군 독립사(사장(師長) 양정우(楊靖宇))가 성립하고, 이듬해 11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군장 양정우)이 정식으로 결성되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밀산(密山) 일대에도 동북항일동맹군(東北抗日同盟軍) 제4군이 성립한 뒤였다.57) 1군에는 많은 한인 대원들이 있었으나, 민생단(民生團) 사건으로 크게 위축된 상태였다. 1934년 말부터 이듬해 전반까지 주하(珠河) 유격근거지는 매우 강력해서 일제측은 이 지역을 공산당의 '합동낙원(哈東樂園)'으로 부를 정도였고, 항일대중은 '붉은 기반(홍지반(紅地盤))'이라 불렀다. 이 때문에 만주성위는 이곳에 임시정부인 '동북인민혁명정부'를 수립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그 계획은 1935년 봄부터 일본군이 '춘계대토벌'을 시작하고, 주하유격근거지를 중점 공격함에 따라 무산되었다.58) 허형식의 2단 등 동북인민혁명군 3군은 철도 북쪽에서 활동하고 있는 의용군 부대와 연합해서 일본군에 대항했다. 동북인민혁명군 3군은 주하(珠河), 연수현(延壽縣) 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여 적에 큰 타격을 주었다. 결국 일본군의 춘계 토벌은 실패로 끝났다. 일본군은 그해 6월에 다시 만주국군과 경찰까지 대거 동원하여 주하유격근거지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다. 이로 인해 주하근거지는 파괴되었고, 북만특위는 큰 손실을 입었다. 허형식이 이끌던 2단도 많은 손실을 입었다.59) 이해 9월 중순 주하중심현위는 회의를 열고 새로운 결정을 내렸다. 즉 일제의 공세를 피하기 위해 대부대 활동을 지양(止揚)하고 송화강(松花江) 하류유역에서 새로운 유격근거지를 개척하며, 근거지의 청년의용군을 편입시켜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을 6개 단(團)으로 확대편성한다는 것이었다. 새 편제에 따라 허형식은 잠시 2단 정치부 주임을 한 뒤 다시 제 3단(團)의 정치부 주임을 맡았다. 3군의 주력은 탕원(湯原) 방면으로 갔으나. 2· 3단은 주하(珠河)에서 계속 투쟁하기로 함에 따라 허형식은 그곳에서 적의 포위망을 넘나들며 유격전을 벌였다. 이 무렵 3군의 전체 병력은 620명 가량이었는데, 허형식이 이끄는 3단은 90명 정도의 대원이 있었다.60) 물론 한인(韓人) 대원도 많았다. 그는 정치부 주임으로서 대원들의 사상교육과 통제, 단의 활동방침 결정과 대민(對民)접촉 등의 임무를 장악했으며 단장(團長)을 보좌하는 참모 역할도 수행했다. 1935년 겨울 3단은 오상현(五常縣) 고려영자(高麗營子)에서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매복습격하여 100여명을 살상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동북인민혁명군 3군 사령부에서는 이해 말부터 1936년 중반에 걸쳐 이미 있는 각 단(團)을 기초로 사(師)를 확대편성했다. 이에 제3단을 제3사로 하고 허형식을 그대로 정치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1개 사는 3개 단으로 구성되었다. 허형식이 소속한 3사(師)의 병력은 130여명으로 늘어났다. 3군에 있는 한인 간부로는 김책(金策)이 있었는데, 그는 4사 정치부 주임을 맡았다.61) 허형식이 이끄는 3사는 주하(珠河)와 오상(五常) 일대에서 활동하면서 차츰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3사는 이 무렵 오상, 서란(舒蘭) 일대에서 활동하던 왕아신(汪雅臣) 지휘의 '쌍룡대(雙龍隊)' 의용군과 연합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동북인민혁명군을 적대시하던 경괴무(景魁武)의 '창강남(創江南)' 의용군과도 연계를 맺는 데 성공했다. 허형식은 정치부 주임으로서 사장(師長) 장연과(張連科)(한족(漢族))와 상의한 뒤 이들과 연합, '반일연합군로남지휘부(反日聯合軍路南指揮部)'를 건립했다. 3사는 이들 의용군 부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일본군경 및 만주국관헌과 싸웠다. 3사는 이 연합부대의 주력으로서 납랍둔(拉拉屯), 오도강(五道崗), 십팔층전자(十八層甸子) 등의 전투에서 승전을 거듭했다. 허형식은 도남(道南)유격구의 근거지를 튼튼히 하기 위해 제3사와 노남(路南)연합부대 등의 병력 1,000여명이 참가한 오상현(五常縣) 소산자(小山子) 전투를 주도하여 적의 거점을 함락시켰다. 이를 계기로 동북인민혁명군 3사와 연합군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62) 이 무렵 허형식은 우수한 정치지도원으로서 지혜롭고 용감한 군사지도자였으며, 자기희생정신이 투철한 모범적 인물이었다고 묘사되고 있다. 특히 그는 대원들과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며 열악한 처지에 있는 농민들을 동정했다. 또 부대원들이 농민들을 접촉할 때는 철저히 민폐를 금지토록 했으며, 가능하면 그들의 일손을 돕고 그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63) 바로 이런 점이 중공당이 영도하는 유격대가 초창기에는 미약했지만 점차 세력을 확장해갈 수 있었던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고 하겠다. 실제로 일제측은 1935년 10월경 동북인민혁명군 3군의 숫자가 1,378명, 기관총수는 20정이나 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64) 일반적으로 이 시기 동북인민혁명군 3군 등 공산당 계열 유격대의 재정은 근거지내 주민들의 성원이나 징세(徵稅)로 충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일제의 주구(走狗)로 판명된 자, 친일적(親日的) 혹은 악질적이라 생각되는 지주나 부농 등 자산계급(資産階級)의 재산을 몰수해서 재원(財源)으로 쓰는 방법도 썼다. 이 때 일부 빈민(貧民)에게 그 일부를 분배하기도 했다.65)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들의 행적을 부정적 시각으로 평가하기 쉽다. 그러나 이들 유격대가 철저한 규율로 통제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엄격한 도덕률로 무장되지 않는다면 그들의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다.66) 그렇지만 후일 일제의 공세가 강화되면서 대중과의 연계관계가 차단되는 등 궁핍한 조건에 처했을 때 약탈과 같은 사례가 없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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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동북항일연군 및 중공당 북만성위(北滿省委)에서의 활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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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북항일연군 및 북만성위(北滿省委)에서의 분투 허형식이 이처럼 북만(北滿)에서 일제와 투쟁하고 있을 때, 중국 관내(關內)에서 활동하고 있던 중공당 중앙위원회는 국민정부군의 공격을 받고 쫒겨가던 도중인 1935년 8월 1일 '8·1선언(위항일구국고전체동포서(爲抗日救國告全體同胞書))'를 발표하고 내전중지와 거국적 국방정부(國防政府)의 구성을 제안했다. 물론 이는 중공당 자체의 생존을 위한 전술이라는 의미가 큰 것이었지만 그 반향은 상당한 것이었다. 더욱이 이듬해 12월 장학량(張學良)이 장개석(蔣介石)을 구금한 서안사변(西安事變)이 발생하여 제2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이 가시화되었다. 이 8·1선언은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결성을 구체적으로 제안하고 있었는데, 각 당파와 민족, 모든 계층을 망라한 항일연합군의 조직을 명시했다.67) 8·1선언은 중국동북의 항일무장투쟁 양상에도 일정한 변화를 가져왔다. 중공당 길동(吉東), 북만특위는 1936년 1월 탕원현(湯原縣)에서 각 항일부대 간부회의를 소집하고 각 항일부대를 동북항일연군으로 재편성하기로 결정했다. 2월 20일에는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통일군대건제선언(統一軍隊建制宣言)'을 발표하고 기존의 부대를 항일연군으로 확대 개편하기 시작했다.68) 이로써 종전보다 한층 광범위한 항일역량의 결집이 가능해졌고, '항일민족통일전선'의 실현이 본격화하였다. 1936년중에 중공당 계열의 동북인민혁명군을 중심으로 동북항일연군 제1군부터 11군까지가 건립되는 것이다. 허형식이 소속한 동북인민혁명군 3군은 이해 8월 1일 정식으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3군으로 개편되었다.69) 1936년 가을 일본군과 만주국군의 '토벌'이 강화되는 등 새로운 정세가 형성되었고 만주성위(滿洲省委) 내부의 첩자 존재여부가 문제되어 당 조직의 정비필요성이 제기되었다. 특히 중공당 중앙의 만주주재 대표는 '주하당단현위(珠河黨團縣委) 및 제3군 부책동지(負責同志)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내 만주성위(滿洲省委) 대신에 남만(南滿)· 동만(東滿)· 길동(吉東)· 송강(松江)의 4개 성(省)위원회와 하얼삔 및 합동특위(哈東特委)를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다.70) 이에 따라 만주성위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이에 9월 중순 중공당 주하(珠河)· 탕원중심현위(湯原中心縣委)와 항일연군 3군 및 6군에서는 탕원현에서 연석회의를 열고 현재의 정세분석과 앞으로의 활동방침을 확정했다. 즉 이 회의에서 '목전(目前) 정치형세분석과 우리 당의 새로운 책략임무(策略任務)에 관하여'라는 결의를 채택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3군과 6군의 연합투쟁 및 흑룡강 중류지역을 중심으로 한 새유격구역의 개척이 논의되었다. 이 때 양 현위(縣委)를 중심으로 중공당 북만임시성위원회(北滿臨時省委員會)가 세워졌다. 허형식은 이 회의에 참가하여 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동시에 3군 1사 정치부 주임에 임명되었다. 북만임시성위원회의 서기(書記)는 풍중운(馮仲雲)· 장란생(張蘭生)(만주족)· 김책(金策)이었고, 항일연군 3군 군장(軍長)은 조상지(趙尙志), 정치부 주임은 장수전(張壽 )이었다.71) 3군 사령부에서는 연석회의의 결정을 집행하기 위해 허형식으로 하여금 3군 1사 선견대를 거느리고 먼저 출발해서 주력부대의 원정호를 개척하는 한편, 보급물자를 준비토록 하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허형식은 수십명의 대원들을 이끌고 약 2개월의 강행군 끝에 그해 11월 북만의 소흥안령산맥(小興安嶺山脈) 부근의 철력현(鐵力縣) 경내에 도착했다. 그의 선견대는 거기에서 나중에 온 3군 6사 및 9사 부대와 합류했는데, 3개사의 군세는 약 200명이었다. 허형식은 항일선전과 대중사업을 활발히 하고 구도강(九道崗)에 주둔하고 있던 만주국군에 대한 포섭공작을 진행했다. 그 결과 만주국군은 항일부대의 원정을 탄압치 않으며, 오히려 허형식이 거느린 선견대에 식량까지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뒤 허형식은 팔도강(八道崗)에 있는 악질 지주의 장원을 습격해서 무기와 식량을 노획했으며, 그곳에서 군중대회를 열고 항일선전을 실시했다.72) 이러한 활동은 부근의 대중들에게 동북항일연군의 활동을 새롭게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 직후 허형식 부대는 해륜현(海倫縣) 손령각산(孫靈閣山) 부근으로 이동하다가 이들을 추격해 온 일본군 및 만주국군 연합토벌대 300여명과 불시에 마주쳤다. 중과부적의 어려운 조건하에서도 허형식은 침착히 응전하며 격전을 벌였다. 그 결과 적을 격퇴하고 오히려 큰 승전을 거둘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허형식 부대는 적 수십명을 살상하고 경기관총 1정과 말 30여필을 노획했으며, 적의 중기관총 1정과 포 1문을 파괴해버렸던 것이다.73) 한겨울의 북만주는 영하 30-4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이 계속된다. 따라서 월동장비와 보급물자가 충분치 못한 유격대의 활동은 고통의 연속이었으며, 강인한 투지와 신념이 없이는 수행될 수 없는 것이었다. 허형식은 고급지휘관으로서 이러한 난관을 불굴의 의지로 극복했다. 이 무렵 동북항일연군 3군에서 불렀다고 전해지는 아래의 군가를 통해 그러한 모습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눈쌓인 대지의 유격전쟁은 여름에 비교할 수 없네. 삭풍 불고 큰눈 날리니 눈쌓인 대지는 다시 얼음하늘이 되네. 바람은 뼈를 에이고 눈은 얼굴을 때리니 손발이 동상에 찢어진다. 애국남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어찌 다시 간난을 두려워 하랴! 설지유격, 불비하일간(雪地遊擊, 不比夏日間). 삭풍취, 대설비, 설지우빙천(朔風吹, 大雪飛, 雪地又氷天). 풍자골, 설타면, 수족동개열(風刺骨, 雪打面, 手足凍開裂). 애국남아불파사, 나파재간난(愛國男兒不 死, 再艱難).74)
허형식은 위의 노래를 부대원과 함께 높이 부르며 용감히 싸웠을 것이다. 그는 손영각(孫靈閣)전투 후 철력현(鐵力縣) 정금점(鄭金店)으로 돌아왔다. 그해 12월 3군 군장 조상지(趙尙志)가 500여명의 주력 기병부대를 거느리고 탕원(湯原)을 출발하여 악전고투하며 철력에 도착했다. 3군 주력부대는 허형식이 이끄는 1사 선견대와 합류했다. 조상지는 철력에서 잠시 휴식한 뒤 다시 주력부대를 데리고 서정(西征)의 장도(長途)에 올랐다. 그러나 허형식은 조상지의 지시에 따라 1사장 상유균(常有鈞)(한족(漢族))과 같이 부대를 거느리고 1937년 초에 다시 의란현(依蘭縣) 동부지구로 돌아왔다.75) 이 무렵 허형식이 소속한 동북항일연군 제3군의 편제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76)
동북항일연군 제3군 편제 | ![]() |
이 당시 송화강 하류유역에는 동북항일연군 3군 일부병력 외에도 4· 5· 6· 8군과 2군의 일부 부대가 활동하고 있었다. 특히 2군의 경우 동만과 남만지구에서 강화되는 일본군과 만주국군의 토벌을 피해 북상한 것이었다. 이들 항일연군 부대들은 일제의 토벌이 가중되는 와중에 인원의 손실이 점차 늘어갔고, 또 식량 등 보급물자의 부족이라는 난관에 부딪히고 있었다. 따라서 각 항일부대들은 다른 부대와의 유대강화 및 보급물자의 효율적 조달이 시급히 요청되었다. 허형식이 이 지역으로 온 이유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중공당 북만성위와 길동성위(吉東省委), 북만항일연군 사령부에서는 이 일대 항일연군의 협동작전을 강화하고 유격활동과 군수(軍需)조달, 간부의 교환문제 등을 토의하기 위해 1937년 1월 하순 탕원(湯原) 부근의 애홍(涯洪)에서 회의를 소집했다. 이 때 5군 군장 주보중(周保中)과 8·9군 군장등도 참석하였다. 허형식은 3군을 대표해서 여기에 참석했다.77) 이 회의 직후 북만항일연군 총사령부는 여러 부대간의 협동과 징세 및 군수물자의 배분문제를 통일시키기 위해 항일연군 의동판사처(依東辦事處)(뒤에 합동(哈東)판사처로 확대됨)를 세우고 허형식을 주임으로 임명했다. 허형식은 2월 초까지 그곳에 머물며 5군 군장 주보중(周保中)과 의논했다. 그리하여 항일연군 각 부대 사이의 현안문제에 대해 상당한 정도의 대책을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허형식은 이해 전반기까지 판사처 일을 맡아보는 동안 각군 사이에 미묘한 차이와 갈등이 없지 않은 점을 고려해서 물자의 배분을 공평하게 하고, 또 간부들과의 인간관계를 주도면밀하며 원만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그는 이 임무를 원만하게 완수해서 항일연군 전력의 증강에 크게 기여했다.78) 허형식의 그러한 활동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937년 4월 10일 허형식이 동북항일연군총사령부 합동(哈東)판사처 주임(主任) 명의로 의동판사분처(依東辦事分處) 처장 및 3· 5· 6· 8군 등에 보낸 편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1) 일적(日賊)이 점차 준동하는 마당에 의동(依東) 및 연접(連接)지대의 연군(聯軍) 각 부대는 마땅히 협동동작에 노력하고 서로 호응하여 적을 제압해야 하며, 일적(日賊)이 진행하고 있는 집단부락 및 집촌(集村) 등에 대해 마땅히 적극적으로 막아야 한다. 2) 분처(分處)의 과거 동계(冬季) 세(稅)수입금액 지불은 5월 1일 이전에 결산이 분명하도록 노력하고, 응당 각부대 관계자들에게 분배한 것 외에 (항일연군)총부(總部)와 (합동(哈東)판사처)총처(總處)에서 공제한 비용 및 분배하고 남은 비용 모두는 일률적으로 분처(分處)를 거쳐 총처로 호송하며, 지체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한다. 3) 발송지의 소작료 및 우마(牛馬)면세증, 차마세증(車馬稅證) 발급을 분처(分處)는 규정에 따라 진행한다. 춘계지(春季地) 소작료는 더욱 철저히 징수하고, 수입은 분처에 완전히 집중한 뒤 총처로 호송하며, 연군회의(聯軍會議) 규정판법(辦法) 및 총처의 신(新)보충지시판법에 따라 (합동(哈東)판사처) 총처를 거쳐 3· 5· 6· 8· 9군과 독립사 부대 및 기타 분배권이 있는 항일부대에 분배하고, 반드시 규정에 따라 진행하도록 노력한다. 4) 공작진행 상황 및 일반정황에 관해서는 총처에 수시로 보고해주기를 바라며, 연락이 끊기지 않도록 한다.79)
물론 위 허형식의 편지 내용은 4월 6일에 있었던 길동(吉東) 및 북만당위(北滿黨委)의 방침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80) 그러나 이 편지를 통해 허형식이 북만지역 항일투쟁 각 부대 소요비용의 총괄조정과 각 부대 사이의 공동작전을 연계시키는 매우 중요한 업무를 장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또 무기와 탄약 등의 배분업무도 맡고 있었다. 허형식은 엄격한 원칙주의자였던 것 같다. 위에서 규정의 준수를 누누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서신을 통해 항일연군이 근거지 내의 농민들로부터 상당한 세금을 거두고 있는 것도 확인된다. 1937년 6월 말 탕원현(湯源縣)에서 중공당 북만성위 및 길동성위(吉東省委) 간부들의 연석회의가 열렸다. 이 때 제5군 군장이며 길동성위 대표인 주보중(周保中)도 참석하였는데, 항일연군의 군사행동계획이 제정되었다. 즉 이 회의에서 북만당(北滿黨)과 길동당(吉東黨) 조직의 연계, 송화강 하류유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3군 일부부대와 여타 항일연군의 협동작전, 그리고 고봉림(考鳳林) 부대의 흡수여부문제, 앞으로의 유격활동 방향 등 투쟁방략이 검토되었던 것이다. 또 통일전선 전술강화에 따라 나중에 항일연군으로 편입된 8· 9군에 대하여 중공당의 지도를 관철시키는 문제도 토론되었다.81) 특히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항일의지(抗日意志)가 투철하고 사상 및 정치이론에 강하다고 평가되던 허형식이 9군의 정치부 주임으로 전보되었다. 9군은 원래 장학량(張學良) 군벌정권하 동북군(東北軍)의 장교 출신이던 이화당(李華堂)이 지휘하고 있었는 데, 1936년 말 항일연군 9군으로 편성되었다. 그러나 이 부대 간부들의 사상은 다양했고 구성이 복잡했으며, 대중과의 관계도 좋지 못하여 상당한 문제를 안고 있던 부대였다.82) 허형식은 9군의 항일투지를 고양시키고 중공당의 방침을 수용하는 부대로 개조하기 위해 방정현(方正縣) 대라륵밀(大羅勒密) 밀림에 3차례의 군정훈련반(軍政訓練班)을 조직하여 120여명의 간부와 대원들을 교육했다. 그의 이러한 사상교양 강화사업은 9군의 군사, 정치적 소질을 크게 증강시켰다. 때문에 항일투쟁이 매우 곤란한 처지에 빠졌을 때인 1939년 7월 하순 9군 군장 이화당(李華堂)과 일부 간부가 일제에 투항하는 사태가 벌어졌지만, 나머지 중견 간부들은 부대를 이끌고 계속 투쟁했던 것이다.83) 이해 7월 7일 일제는 소위 '노구교(蘆溝橋)사건'을 일으켜 전면적 중일전쟁을 도발했다. 이에 따라 중국동북의 정세도 급변했다. 그러나 일제 관동군(關東軍)은 이미 1936년 4월부터 1939년 3월까지의 3년안에 중국동북의 항일세력을 말살한다는 '만주국 치안숙정계획대강(大綱)'을 마련했다. 그리하여 중국동북에서 활동하고 있던 항일무장투쟁 세력과 그 근거지에 대한 '토벌'을 더욱 강화하고 있었다. 특히 북만주의 삼강(三江) 지구에 대한 일제의 토벌은 중일전쟁이 발발하던 1937년 7월 개시되어 그해 겨울부터 본격화하였다.84) 이 지방은 소련과의 접경지역이었고, 동북항일연군의 활동이 활발한 곳이었기 때문에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었던 것이다. 중국측 기록에 의하면 이 시기 이 곳에 대한 일제의 탄압에는 일본군 3개 사단과 만주국 군경 2만 5천명 등 거의 5만 여명의 병력이 동원되었다고 한다.85) 이와 같이 일제의 북만지구에 대한 '토벌'이 집중될 무렵인 1938년 1월 동북항일연군 3군 군장인 조상지(趙尙志)가 소련에 갔다가 '반당분자(反黨分子)' 혐의로 체포되어 중국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또 일본군의 추격에 쫓긴 항일연군 6군 500여명이 소련으로 도피했을 때 도움을 받기는 커녕 이들 내부에 스파이의 존재를 의심한 소련군에 의해 중국 변방인 신강성(新疆省)으로 추방되는 사건도 일어났다.86) 그 와중에 북만에서 투쟁하고 있던 항일연군 각부대들은 물론, 3군도 큰 타격을 받았다. 남만주에서 활동하던 민족주의계 독립군인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이 해체되는 시기도 바로 이해 중반경이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같은해 6월 초 동북항일연군 3군은 4개 사(師)로 축소개편되었다. 항일연군의 일부 부대는 삼강(三江)지구에 잔류하였지만 3·6·9·10군의 주력부대는 일제의 포위망을 뚫고나가 서북쪽으로 원정하기로 북만성위의 방침이 결정되었다. 이 결정에 따라 허형식(許亨植)은 9군 3사와 3군 1사의 생존대원을 거느리고 의란(依蘭)을 출발해서 해륜(海倫)으로 북상했다. 이후 그는 9군을 떠나 3군 1사를 새롭게 편성하고 사장(師長)의 직책을 수행했다. 북만의 삼강성(三江省)지구에서 활동하고 있던 항일연군 3·6·9·11군의 잔여부대는 장수전(張壽 ), 김책(金策), 허형식(許亨植) 등의 주도로 1938년 7월부터 12월까지 북만의 소흥안령산맥(小興安嶺山脈) 지대인 해륜(海倫)과 경안(慶安) 등지에서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투쟁하였다.87) 1939년 1월 말 개최된 중공당 북만성위 회의에서는 일본군 및 만주국 군경의 포위망을 뚫고 해륜(海倫) 지구에 도착한 항일연군 각 부대들로 하여금 현지의 중공당 조직과 연대하여 북만주 소흥안령산맥(小興安嶺山脈) 서북쪽의 흑눈(黑嫩)평원에서 유격전을 전개하도록 하는 방침을 정했다. 이러한 중공당위의 결정을 통일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장수전(張壽 ), 허형식(許亨植), 왕명귀(王明貴)(한족(漢族)) 등으로 구성된 눈해지구대표단(嫩海地區代表團)이 조직되었다. 동시에 이 대표단의 군사부문 지휘는 장수전, 부지휘는 허형식이 담당하는 임시지휘부가 세워졌으며 그 아래에 용남(龍南), 용북지휘부(龍北指揮部)가 생겼다. 용북(龍北)지구에서는 장수전이 책임지고 1·2지대를 지휘했으며, 용남(龍南)지구에서는 허형식이 책임지고 3·4지대와 독립 제1·2사를 지휘하게 되었다.88) 허형식은 장수전과 함께 대표단을 이끌며 북만성위의 결정에 따라 구체적 계획을 수립했다. 즉 덕도현(德都縣) 조양산(朝陽山)에 군정간부학교와 후방병원을 건설하고 부대를 재정비하는 한편, 눈강(嫩江), 눌하(訥河), 극산(克山), 덕도(德都), 조원(肇源), 조주(肇州) 등지의 북만 평야에서 활발한 유격전과 대중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던 것이다.89) 1938년 후반기부터 이듬해 초기까지 북만지방에 대한 일제의 대대적 탄압으로 동북항일연군은 매우 심한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인명손실이 생겼고, 일제에 투항하거나 변절하는 자들도 많이 생겼다. 실제로 1938년 한 해 동안 북만지방에서 일제에 '귀순(歸順)'한 대원은 무려 2,742명을 헤아렸는데, 특히 부금현(富錦縣)의 경우 717명, 의란현(依蘭縣)은 439명, 방정현(方正縣)에서는 583명의 투항자가 발생했던 것이다.90) 더욱이 투쟁조건이 악화됨에 따라 중공당 북만성위 내부에서도 갈등이 심화되었다. 주요 간부들 사이에 중공당의 활동방침과 무력투쟁 방식, 그리고 앞으로의 노선(路線)문제 등을 둘러싸고 치열한 내부투쟁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는 중공당이 소위 통일전선 전술을 제창하고 항일투쟁을 위해 다양한 세력을 포용한 데 따른 당연한 현상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 내부에서의 갈등은 파벌투쟁의 양상을 띠면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고, 전력의 약화를 초래했다. 대표적 사건이 바로 3군 군장 조상지(趙尙志)의 소련에서의 피체와 당적제명(黨籍除名)이었다. 이미 1937년 후반부터 북만성위 일부에서 허형식과 조상지, 주보중 등은 '좌경관문주의자(左傾關門主義者)'의 대표격으로 지목되기 시작했고, 허형식· 김책· 장수전 등은 이에 대해 상대방을 '우경취소주의자(右傾取消主義者)' 내지 '우경(右傾)기회주의자'로 비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91) 특히 장수전과 김책, 허형식 등 실질적으로 3군을 영도하고 있던 3인은 자신들을 비판하고 있던 후계강(候啓剛)(한족(漢族))과 첨예한 노선 투쟁을 벌여 마침내 1939년 3월 중순 후계강(候啓剛)의 당적(黨籍)을 제명(除名)시키고 그가 주장한 노선을 폐기시키는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당시 허형식(許亨植)은 북만성위 집행위원의 직책을 겸하고 있었다.92) 이러한 내부투쟁 과정을 거쳐 이 세사람은 불가분의 동지 및 친분관계를 유지하며 중공당 북만성위 및 북만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을 이끌었다. 같은해 4월 중순 통하현(通河縣)에서 북만임시성위 집행위원회 전체회의가 열렸다. 여기에서 조상지(趙尙志)가 중공당에서 제명(除名)되었고, 군(軍)의 직책도 박탈되었다. 그리고 '임시(臨時)' 두 자를 삭제한 북만성위(北滿省委)가 정식으로 성립했으며, 김책(金策)· 장수전(張壽 )· 풍중운(馮仲雲) 등 3인을 성위(省委) 상무위원으로 선출하고 김책을 성위의 서기(書記)로 삼았다. 또 제3군과 제 6· 9· 11군의 잔여병력을 통합하여 동북항일연군 제(第)3로군(路軍)을 편성하기로 했다. 3로군의 총지휘는 장수전, 정치위원에 풍중운, 총참모장 겸 3로군 산하 제3군 군장에 허형식이 선임되었다.93) 이제 허형식은 온갖 어려운 조건하에서도 투철한 신념을 견지하고 끈질기게 일제 및 내부 반대론자와 투쟁한 결과 중공당 북만성위와 동북항일연군 3로군의 핵심적 지도자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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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허형식의 최후와 그에 대한 평가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은 1939년 5월 30일 북만(北滿)의 덕도현(德都縣) 조양산(朝陽山) 후방기지에서 3· 6· 9· 11군의 생존 대원들이 집결하여 정식으로 발족했다. 이때 부대규모는 1930년대 중반보다 많이 줄어들어 500여명 정도였고 허형식이 지도하는 3군에는 3개 사(師)가 있었는데, 3로군의 주력부대라 할 만했다.95) 허형식은 이때 참모장도 겸했기 때문에 이날 '동북항일연군 제삼로군 성립선언(東北抗日聯軍 第三路軍 成立宣言)' 및 '국부(國府)에 보내는 전문(電文)', '마점산(馬占山)장군 및 제팔로군(第八路軍) 유격사(遊擊師)에 보내는 통전(通電)', 그리고 '항연(抗聯) 제일(第一), 이로군(二路軍)에 보내는 통전(通電)' 등의 문서를 기초(起草)하고 정리하여 발표하는 역할을 다하였다. 이런 문건에는 3로군 총지휘 장수전(張壽 )과 참모장 허형식(許亨植)의 이름이 기재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일제타도의 목표가 명시되었지만, 조선(朝鮮)(한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싸우자는 구호는 전혀 제기되지 않았다.96) 장개석의 국민정부(國民政府)에 전문을 보낸 것은 1937년 국민당과 중공당의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하여 형식적으로는 동북항일연군도 국민정부군의 일원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허형식은 3군 군장(軍長)으로서 이해 7월 초 휘하 부대에 주요 행동강령을 하달하고 활발한 투쟁을 촉구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일제 반일당파(反日黨派), 군대, 교문(敎門) 등을 즉시 모아 연합봉기하고, 민중을 동원하며 무장시킨다. 2)각처에 민중의용군의 총지휘부를 즉시 건립하며, 통일된 군사계획과 지도하에 통일된 편제(編制)와 목표하에 행동하게 한다. 3)반일(反日)의 언론, 집회, 출판, 결사(結社), 시위, 파업의 민주권리를 즉시 요구· 쟁취하며, 민중무장항일을 허락한다. 4)비행기장, 병고(兵庫), 철로, 교량, 전선(電線) 등 일만(日滿)의 일체 군사설비를 즉각 파괴하며 적의 전차, 화차(火車), 영방(營房)을 습격하고, 성(城)과 진(鎭) 등을 공격하며 적극적 유격전쟁을 벌인다. 5)일적(日賊) 및 한간(漢奸) 주구(走狗)의 재산을 즉각 몰수하여 항일전비로 쓰며, 일부는 빈민(貧民)에게 준다. 6)인질(人質)을 즉시 금지하고 광범한 모금운동을 진행하며, (향촌(鄕村)의 대지주, 자본가에게) 반일특연(反日特捐)을 징수하여 항일경비(抗日經費)로 충당한다. 7)민중과 함께 주구 및 밀정을 즉시 숙청개시하며 투항 및 싸우지 않는 것에 반대하고, 일체 반동(反動)유언비어를 반대하여 항일진영(抗日陣營)을 튼튼히 한다. 8)몽(蒙)·한(韓) 민중과 즉시 연합하여 공동항일을 일으킨다.97)
이를 통해 우리는 허형식의 정세인식과 의식의 일단을 파악할 수 있다. 공산주의운동과 같은 문제 보다는 항일투쟁을 더 급박한 당면과제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동북항일연군 3로군 성립선언 등에서는 볼 수 없는 한민족 등 소수민족과의 연합투쟁 문제를 제기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허형식의 이러한 구체적 지시와 솔선수범은 실제로 북만 평원지역에서 상당한 성과를 가능케 했다. 1940년부터 이듬해까지 일제는 관동군(關東軍)을 40만에서 76만으로 증강하고 소련에 대한 침입을 준비하는 한편, 항일연군에 대한 '토벌'을 더욱 강화했다. 그 결과 1940년 2월 하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총사령 양정우(楊靖宇)의 전사를 전후하여 남만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은 사실상 끝났고, 동만지방에서도 이해 말을 고비로 거의 쇠퇴하였다. 다만 허형식과 김책, 장수전 등이 활동하고 있는 3로군의 일부 병력만이 명맥을 유지하는 형편이었다. 중국측 기록에 의하면 1940년 말경 항일연군은 1,500여명으로 줄어들었다고 하나,98) 필자의 견해로는 이보다 더 적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정세하에서 중공당 북만, 길동, 동남만성위의 일부 간부들은 이미 1930년대 말부터 소련을 왕래하며 원조를 요청하기도 했는데, 이들은 1940년 초와 1941년 초 사이에 소련 하바로프스크에서 두차례 회의를 열었다. 여기에서 우세한 적의 역량 가운데 항일역량을 보존하고 미래의 항전을 견지하기 위해서는 항일연군 부대들을 소련 경내로 피신시켜 재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1940년 가을부터 남은 항일연군 부대들은 점차 소련 경내로 도피했다.99) 같은해 11월 말 3로군의 장수전과 김책 등은 이같은 중공당의 방침에 순응하여 소련으로 이동했다가 나중에 김책은 다시 돌아왔다. 동만지구에서 활동하던 김일성 등 일부 생존자들도 1940년 12월 중순 혼춘(琿春)을 거쳐 연해주로 피신했다.100) 이들을 토대로 연해주에 소위 남(南)(B)야영(野營)과 북(北)(A)야영(野營)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유독 허형식(許亨植)만은 한 번도 소련으로 넘어가지 않고 일관해서 북만지방을 고집하며 투쟁했다. 그의 이러한 행적은 몇가지 측면에서 해명해 볼 수 있다. 우선 일본 무산자계급의 봉기와 경제공황으로 일본에서 국내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적' 전망, 그리고 소련· 몽고· 영국 등과의 충돌로 국제정세가 일본에 불리하게 될 것이라는 정세인식 등을 들 수 있다. 즉 일본 국내외의 모순 때문에 불원간 일제가 패망할 것이라는 낙관적 인식에 기인한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당시 중국은 계급모순 외에도 일본의 침략이라는 민족모순이 겹친 시기였기는 하지만 민족의 피압박을 우선시하고 민족해방을 먼저 쟁취해야 한다는 민족혁명전쟁론을 견지하고 있던 자세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었다.101) 거기에 그의 일족이 보였던 국내외에서의 항일투쟁과 중국에서의 성장배경도 그의 적극항일투쟁론에 무시못할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1940년 봄 3로군(路軍)은 3·6·9·11군 대신에 제 3·6·9·12지대로 편성되었다. 허형식은 3로군 총참모장을 맡으면서 12지대 정치위원을 겸하고 12지대를 지휘했다. 당시 12지대는 약 90명 가량의 대원이 있었다. 3로군 부대는 중국동북의 여타 지역 무력항쟁이 거의 쇠퇴한 단계에서 하얼삔 서북(西北)의 3조(三肇)(조동(肇東)· 조주(肇州)· 조원(肇源)) 평원에서 많은 전과를 거두어 일제를 놀라게 했다. 이들은 1년여 동안 30여개의 현(縣)에 걸치는 넓은 지역에서 40여 차례의 전투를 치르고 500여 자루의 총을 노획했으며, 적 250여명을 사살했고, 500여명을 생포했다고 한다.102) 그러나 1941년 중반 이후 북만에서의 항일무장투쟁도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일제는 만주국 군경을 대거 동원하여 3로군을 집중공격하였다. 그 결과 3로군 손실의 대부분은 만주국군에 의해 초래되었다.103) 1941년 초 김책(북만성위 서기겸 3로군 정치위원), 장수전(張壽 )(3로군 총지휘), 풍중운(馮仲雲)(북만성위 위원)이 하바로프스크에서 열린 만주당 대표회의에 참가하게 되자 3로군은 참모장 허형식이 지휘하게 되었다. 이 시기 최용건과 함께 북만에 남아있던 허형식은 적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휘하 부대를 여러 소부대로 분산시켜 각지에서 개별적으로 활동하게 했다. 1941년 10월 소련에 갔던 김책이 3로군 사령부 소재지로 돌아왔다. 그 뒤 김책은 활동의 곤란을 고려하여 6·9·12지대원의 대부분인 160여명을 소련으로 보내고 허형식으로 하여금 12지대장 박길송(朴吉松)(한인)과 장서린(張瑞麟)(한족(漢族))이 지휘하는 두 지대를 거느리고 대중조직 사업과 유격전을 벌이도록 했다.104) 허형식은 외롭게 북만에 남아 소부대 활동을 독려하고 각지에 산재한 반일구국회(反日救國會) 등 대중 조직체를 점검하기 위해 분주히 돌아다녔다. 그는 1942년 7월 말 파언(巴彦), 목란(木蘭), 동흥(東興)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소분대의 활동을 지도하기 위해 그곳으로 떠났다. 특히 그는 동흥에서 100여명이나 되는 노동자들을 항일회원으로 포섭했다는 보고를 받고 사실을 확인하여 그 내용을 상부에 보고하려 했다. 하지만 허형식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경성현(慶城縣) 청풍령(靑風嶺)에서 적의 포위망에 빠지고 말았다. 8월 3일 아침 허형식은 만주국군 토벌대에 포위되어 2명의 경호원과 함께 격전을 벌이다가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던 것이다.105)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33세였는데, 일족(一族) 허위(許蔿)가 1908년 10월 일제에 희생된 지 거의 44년 뒤였다. 허형식은 3로군의 책임자로서 중요한 서류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피살된 후 지하조직망이 발각되었고, 근거지 산채도 일만(日滿) 군경의 토벌로 완전히 붕괴되어 3로군과 북만성위는 큰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 이듬해 1월 박길송(朴吉松)도 체포되어 봄에 희생되었다. 김책(金策)은 친근한 동지 허형식의 전사로 큰 충격을 받았으나, 여전히 투쟁을 고수하다가 1943년 10월에야 소련으로 철수하기 시작해서 이듬해 1월 남북야영이 개편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교도려(敎導旅)에 합류했다.106) 허형식이 전사하기 바로 이틀 전인 8월 1일 소련 극동군은 동북항일연군의 잔류대원을 동북항일연군 교도려로 편성하는 한편, 소련적군(赤軍) 88특별저격여단으로 정식 개편하면서 주요 간부들에게 소련군 계급을 수여했다. 이 때 북만에서 활동하고 있던 허형식도 이 부대에 간부로 편제되었다. 교도영의 1영장(營長)은 김일성, 정치위원 안길(安吉)(한인(韓人))이었고, 2영 영장은 왕효명(王效明)(한족(漢族)), 정치위원은 강신태(姜信泰)(한인)였으며, 3영 영장은 허형식, 정치위원에는 김책, 4영 영장은 시세영(柴世榮)(한족(漢族)), 정치위원은 계청(季靑)(한족(漢族))이 임명되었다. 또 이때 각 영장에게는 소련군 대위계급이 주어졌다.107) 북만에서 완강하게 투쟁하고 있던 허형식의 공로를 어느 정도 인정한 셈이었지만 허형식과 김책, 박길송 등은 이무렵 소련군의 일련의 행위를 중공당의 독자성을 침범하는 것이라하여 크게 반발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이들은 입소(入蘇)하라는 당위(黨委)의 지시도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108) 허형식의 전사는 현지 중국인 언론 및 일제의 언론에 크게 보도 선전되었다. 한편 소련에 있던 항일연군 지도부에 그의 전사(戰死) 소식이 전해진 것은 1주일 뒤인 1942년 8월 10일이었다.109) 그러면 당시 중공당 북만성위 및 항일연군에서 같이 활동했던 동지들은 그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는가? 허형식은 성격이 소탈하고 진실했으며, 항상 대원들의 모범이 되었다는 평이 있다.110) 이는 나름대로 타당한 설명이 될 것이다.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많은 사람을 영도하려면 그에 합당한 능력과 자질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의 판단에 의하면 그는 매우 강직하고 신념에 투철한 사람이었던 반면에 성격이 급하고 고집이 세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잘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단점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때문에 그는 한때 '좌경관문주의자'로 오해받기도 했던 것이다. 실제로 1938년에 장문염(張文廉)이 보낸 편지에는 그가 하급동지의 의견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비판을 하며, 조급해 하지말고 아래 대원들에게 좀더 겸손하며 유연한 자세를 취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111) 그리고 허형식의 선배격인 장수전(張壽 )도 그를 "왕성한 기세로 남을 압도하는 영웅"으로 높이 평가하면서도 급한 성격을 고치고 더 원만한 지도요령을 취하라고 충고하고 있다.11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중국동북지방에서 거의 최후 단계까지 일제와 항쟁한 동북항일연군의 주요 한인 지도자였다는 위상에는 변동이 있을 수 없다. 또 중공당 북만성위에서의 노선투쟁 및 적극항일투쟁론을 통해 일정하게 한·중 양민족의 연대와 항일무장투쟁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사실도 중시되어야 하는 점이라고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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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식은 비록 중공당원이었고, 북만지방을 주무대로 활동했지만 그의 행적이 우리 민족해방운동사와 직접 간접으로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동북항일연군에는 다수의 한인들이 참가하고 있었다. 특히 다른 주요 항일연군 지도자들이 소련 경내로 도피했을 때도 그는 철저한 항일투쟁을 제기하면서 소수의 대원들을 지휘하며 싸웠다. 이 때문에 소련으로 건너간 항일연군이 1942년 봄 소련군의 일개 조직으로 흡수될 뻔한 위기에서 허형식(許亨植) 등 북만(北滿)에서 활동하는 병력의 존재를 이유로 이를 거부할 수 있었다.113) 그리고 심지어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에서도 중국동북지방에서의 항일투쟁세력에 한인(韓人)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미국 정부 관리들에게 원조를 요청하는 자료로 삼았던 사실이 이를 웅변해주고 있다.114) 허형식 가문의 항일투쟁 양상의 변화라는 측면에서도 그의 중공당 및 동북항일연군에서의 활약은 주목된다. 즉 당숙인 허위(許蔿)의 의병투쟁, 허겸(許 )의 남만주 망명과 독립군기지 개척운동 주도, 또한 4촌 및 6촌 형제들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 독립군활동 투신, 그리고 1930년대 허형식의 사회주의운동 투신 등은 객관적 조건의 변화에 따른 다양한 민족운동의 성격변화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우리민족의 치열한 항일투쟁과 이념의 변화, 민족운동 양상의 전환 사례를 파악할 수 있다. 중공당 만주성위 및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한 한인(韓人)들 전부를 우리 민족운동사의 범주에 포함시킬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항일투쟁이 바로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한 간접투쟁이라고 간주한 대부분의 한인들의 입장은 긍정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1930년대 중반 이후 내부의 계급모순보다는 일제의 수탈과 압박이라는 민족모순의 척결을 우선과제로 제기하는 단계의 활동일 경우 더욱 그러하다. 허형식 등 동북항일연군내 한인들의 활동은 현재까지는 주로 한국학계의 무관심으로 중국안의 소수민족운동사와 중국공산주의운동사, 중국 항일투쟁사의 범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그를 비롯한 다수 한인들의 행적을 고찰하여 한국근대민족운동사의 한 갈래로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다시 말하자면 중국 관내(關內)지역에서 활동한 임시정부와 광복군,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처럼 독자적 조직체를 결성하지는 못했다고 해도, 동북항일연군의 일원으로 활동한 한인들은 분명히 이 시기 중국에서의 3대 민족운동세력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허형식 개인의 역량은 한정되어 있었고, 나름대로 결점을 지닌 인간이었기에 한계가 없지 않았다. 그는 당시 재중한인(在中韓人)들이 직면하고 있던 여러 모순의 해결이라는 과제를 떠맡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허형식의 분투는 1930년대 말과 1940년대 초반 북만(北滿)에서의 최후단계 항일투쟁과 중국공산주의 운동, 그리고 한국민족운동의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또한 그를 비롯한 최용건, 김책, 김일성 등 항일연군에서의 한인들의 활동이 국내는 물론, 중국관내(中國關內)와 미주(美洲)지역에까지 일부가 알려지고 있었는데, 이들 세력이 한국현대사에 끼친 영향도 큰 것이었다. 즉 이들 항일 빨치산 세력이 해방 이후 북한 정권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는 점에서 연구의 유용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논문은 허형식(許亨植)이라는 개인의 행적에 초점을 맞춘 관계로 그의 정세인식과 항일투쟁 방법론 등을 심층규명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널리 존재했던 동북항일연군의 전체적 조망 및 그 활동의 의의를 평가하지 못한 한계가 있다.115) 다만 이 글에서는 문제를 제기하는 단계에 그치고 중공당 만주성위 및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한 한인들에 대한 전반적 조명은 별도의 글을 통해 검토하고자 한다.(참고로 허형식의 연보와 활동지역 요도를 덧붙인다) < 허형식(許亨植) 연보(年譜) > 1909 1915 1920 이후 1929 1930 초 1930. 5. 1. 1930 후반기 1931. 12. 1932. 1. 1933. 3. 1933. 10. 1934. 6. 1935. 1. 1935. 9. 1936 초. 1936. 9. 1937. 2. 1937. 6. 1938. 6. 1939. 1. 1939. 4. 1940 봄. 1941 초. 1942. 8.3 1962 | 경북 선산군 구미면(현재의 구미시) 임은리에서 출생. 중국 요녕성(遼寧省)(현재는 길림성) 통화현(通化縣)으로 이주. 요녕성(遼寧省) 개원현(開原縣) 이가태자(李家台子)를 거쳐 흑룡강성(黑龍江省) 오상현(五常縣)으로 이사. 흑룡강성 빈현(賓縣) 가판참(枷板站)으로 이사.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당원으로 입당. 하얼삔 일본총영사관 습격 주도. 중국 경찰에 체포되어 심양(瀋陽) 감옥에 수감됨. 중국당 만주성위에 의해 감옥에서 구출됨. 중공당 만주성위 빈현(賓縣)특별지부 선전위원이 됨. 탕원현(湯原縣)으로 가서 항일유격대 창건을 지원. 이해 1,400여명의 반일회원을 결집하는 데 크게 활약. 주하(珠河)반일유격대가 창건되자 이를 지원하는 데 노력. 동북반일유격대 합동지대(哈東支隊) 제3대대 정치지도원이 됨(가을에 1대대장)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 제1독립사 제2단 단장(團長)이 됨.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 제3단 정치부 주임이 됨.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 제3사(師) 정치부 주임. 중공당 북만임시성위원회(北滿臨時省委員會) 위원겸 동북항일연군 제3군 1사 정치부 주임이 됨. 동북항일연군 의동판사처(依東辦事處)(뒤에 합동(哈東)판사처) 주임에 임명됨. 동북항일연군 제9군 정치부 주임으로 전보됨. 동북항일연군 제3군 제1사 사장(師長)이 됨. 이해 말까지 해륜(海倫), 경안현(慶安縣) 등지에서 투쟁. 중공당 북만성위(北滿省委) 집행위원 겸 눈해지구대표단(嫩海地區代表團) 부지휘, 용남지휘부(龍南指揮部) 책임을 맡음. 동북항일연군 제3군 3·4지대와 독립 제1·2사를 지휘.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路軍) 총참모장 겸 제3군장에 임명됨.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겸 12지대 정치위원으로 활동하며 북만에서의 항일투쟁을 주도. 생존한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200여명)을 총괄지휘. 북만주 경성현(慶城縣) 청풍령(靑風嶺)에서 전사. 북한에서 간행된《혁명선렬들의 생애와 활동》제1권에 그에 대한 회고담이 최초로 수록됨. |
<허형식 활동지역 요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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