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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님과 어색한 사이>의 줄거리:
가족이나 친구 등과 비교할 때, 예수님에 대해 나 자신이 갖는 친밀함의 정도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요? 혹시 나 자신은 예수님과 아주 친하다고 생각하세요? 아마 십중팔구는 뭘 모르고 하는 오해일 것입니다. 아주 어색한 관계에 있으면서 친한 줄 아는 것이 대부분 신앙인들의 영적 현실일 것입니다. 예수님과 정말 친해질 수 있는 길을 한 번 살펴봅니다.
예수님과 어색한 사이
(막9:1~13)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7.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8.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어색한 예수님 사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관계가 굉장히 어색한 관계에 있으면서, 믿음생활이 끝나버릴 때가 있다는 거예요, 그럴 때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대부분이 아마…
‘좋으신 예수님 참 좋으신 나의 예수님’ 노래도 부르고 그러지만, 아주 어색한 관계에 머물러 있으면서 신앙생활이 끝나고,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예수님과 어색한 관계로 끝나는 한, 그것은 신앙이라고 하기는 좀 어렵다 이겁니다.
신앙생활이 예수님과 어색한 관계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다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과 어색한 관계에 있는지 친밀한 관계에 있는지 내가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그걸 알 길이 있느냐? 알 길이 있습니다.
동료 신앙인을 봐도 그 사람이 친밀한 관계인지 아닌지 알 수를 있습니다.
우리 그런 말 많이 하잖아요? 내 신앙을 당신이 어떻게 알아? 알 수 있어요.
대화를 해 보면, 이 사람이 예수님과 친밀한 것인가 아닌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어색한 관계에 있는 이 우리의 영적인 현실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기 위해서, 비유적인 한 사건을 한번 얘기해 봅니다.
제가 대학교 3학년 때에 처음으로 수원에 있는 어느 교회의 교육전도사로 부름을 받고 교회를 봉사하게 됐습니다.
토요일 날 가서 청년 아이들을 가르치고 거기서 자고, 그 다음날 주일날은 교회학교에서 교육전도사로 봉사를 하는데, 그 교회에 그렇게 교육전도사로 부임한지 몇 달 안돼서, 교회 상황이 급격하게 변화를 했습니다.
담임 목사님이 사임을 하셨어요, 왜 사임을 하셨는지는 잘 모릅니다.
교육전도사 뭐 꼬발이 전도사한테 그런 거가 뭐 알려지기나 합니까?
그리고 계시던 선배, 그때 제가 대학 3학년 때이니까, 신학대학 3학년.
신대원 3학년 졸업반에 계신 남자 전도사님이 계셨습니다, 선배님이지요.
졸업하시면 그 교회에서 전임전도사로 일을 하셔야 되는데, 건강상의 문제로 갑자기 사임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교회 전체 교역자 중에 남자 교역자로는 저 하나 남게 되었어요.
그래서 정말 울며 겨자 먹기로, 수요기도회 설교와 주일 저녁예배 설교를 다 하게 됐습니다.
남자 전도사가 나 하나 밖에 없어서.
그 당시만 해도 여자 목사님이 없을 때에요.
그래서 제가 그 설교를 다 하게 됐는데, 문제는 설교라는 걸 그렇게 정말 교인들 앞에 서서 정식으로 하기는 제가 처음이에요.
그리고 아이들 교육전도사 하면서 이제 막 교회에서 섬기는 자로서 익혀나가는 건데, 아니 가자마자 교육전도사 시절 대학 3학년 때, 그 교회가 수원에서 제일 큰 교회이었습니다, 우리 교단 교회에서는.
그런데, 제가 하려는 얘기는 장로님들이에요 장로님들.
교육부장 장로님이 계세요. 젊으신 데다 대머리에 아주 인상이 좋으십니다.
그래서 주일 날 아침에 만나 뵙게 되면, 밝게 웃으시면서 손을 잡고 악수를 하면 제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를 해 주시고.
뭐 교육전도사 제일 꼬발이 전도사이니까 그러시지요.
다른 장로님, 수석 장로님으로부터 해 가지고 장로님대부분이 서울농대 교수이십니다.
교수님들이 많으셨어요.
그 분들이 주일 날 스쳐지나 가면은 그저 의례적으로 눈 껌벅 하고 인사를 할 정도이지요.
‘새로 교육전도사가 왔구나, 열심히 하겠지.’
그런데 주일 저녁에 처음으로 설교를 하고 내려왔습니다.
그러면 설교자가 문 앞에서 인사를 하잖아요, 교인들 갈 때.
아니 이게 웬일입니까? 장로님들이 수석 장로님부터 90도로 인사를 하시는 거예요, 90도로.
그전의 교육전도사가 아니에요 이거는.
마치 무슨 대학에 조교수가 총장님 앞에 섰을 때나, 평사원이 말단 사원이 간부 앞에 섰을 때 그런 모습이에요 전부.
특히 교육부장 장로님은 가관이세요. 얼굴이 굳었어요, 완전히.
어깨 두드리며 열심히 하시라고 격려하던 그 교육전도사로만 알고 있었는데, 상당히 친밀했지요, 교육부장 장로님 하고.
그런데 대예배 강단에 서서 설교하는 모습을 딱 보고 나니까 태 전도사의 다른 모습을 본 거에요.
그러니까 그 교육전도사와 관계를 맺었던 그 친밀함이 유지가 될 수가 없습니다.
아주 어색한 관계가 돼버렸어요.
장로님들이, 당회원들 전체가 저를 초대 했습니다, 집사람하고 같이.
그리고 상석에 앉혀 놨는데, 이거 뭐 저하고 집사람이 밥이 콧구멍으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그 농대 학장 하시던 수석 장로님도 거기와 앉아 계시고, 머리가 히끗히끗 하신 분이.
아! 어색했어요, 아주 어색했어요.
변화산 사건을 마가는 특별히 이상한 데에 초점을 맞춰서 기록을 합니다.
5절에 보면 뭐라 그러냐 하면 여러분,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하고 그 다음 단어가 기가 막혀요.
‘랍비여’ 아니 왜 뜬금없이 랍비가 나옵니다.
랍비라는 건 선생님이여라는 뜻 아닙니까?
분명히 앞에서 바로 앞에서 일주일 전에 가이사랴 빌립보 지경에서 뭐라 그랬냐 하면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주라고도 부르고 그리스도라고도 부르고, 마태에 의하면 ‘주는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여기서 랍비가 튀어나옵니까?
이 랍비라는 말은 그냥 모르는 사람 중에서 지도급에 속하는 사람을 향해서도 부르는 존칭어입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같은 라인에 살고 있는 남자분들 만나면 뭐 사장님이라고 말하기도 어색하고 그래서, 저는 12층인데 예를 들어 12층 이상 되는데 사는 분과 같이 1층에서 타고 올라간다, 가만히 있기도 그렇잖아요?
그럼 뭐라 그래요? ‘아 선생님은 13층에 사시는군요 반갑습니다, 저 12층에 삽니다.’
그때 선생님이에요.
랍비! 이렇게 어색해 졌어요.
여러분, 공생애의 막바지에 지금 접어들고 있습니다.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고 있는 거예요.
3등분으로 하면 지금 마지막 단계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2년 동안 같이 따라다니면서 동고동락하고 생사를 같이할 결심을 가지고 함께 했습니다.
중고등학교 때 교회에서 2박3일 수련회 갔다 오면, 그 다음 주일예배 때가 1년 중에 가장~ 친밀한 분위기가 연출되는 주일이에요.
2박3일 함께 머물러도 그렇게 친해집니다.
그런데 2년 동안 동고동락한 거예요.
얼마나 친했습니까? 예수님하고.
근데 변화산에서 이 세상 사람이 빨래하는 자가 그 누구도 그렇게 희게 빨래할 수는 없을 것처럼 희게 됐다.
마태에 의하면 얼굴과 옷이 다 빛이 났다 그래요.
그러니까 빛 덩어리가 되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에서 하나님 보좌 앞에서 계실 때, 그 본래의 모습, 빛의 덩어리로 나타나자 갑자기 랍비가 튀어 나오는 거예요.
관계가 어색해졌음에 마가가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이 지구 위에서 12제자가 가장 친해요.
그 중에서 세 명,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고 산에 올라 가셨습니다.
이건 말 할 수없이 친해요.
이 지구 위에서 예수님과 가장가장 친한 자 세 명이 올라가서, 예수님께서 변화돼서 하늘나라에서의 모습을 보자 관계가 어색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요.
그러니까 장막을 짓고 이곳이 좋으니까 여기서 살자는 말을 뭐라고 얘기하는가 하면은, 6절에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여기가 좋다고 초막을 짓고 여기서 살자고 합니다, 그런데 무섭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리고 랍비라고 얘기합니다.
좋기는 좋아요 너무너무 굉장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그런데 무섭습니다.
왜? 마치 노숙자가 자고 일어났더니 갑자기 왕궁에 놓여 있는 거예요.
잠자고 깼는데 왕궁 앞에 있는 거예요.
왕궁이 좋기는 좋은데 무섭습니다, 그런 거예요 지금.
자! 이 장면에 의미를 네 가지로 한번 살펴봅니다.
첫째 어떤 의미가 있느냐.
그 동안 동고동락하던 예수님의 가려진 진짜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뭘까요?
자,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했어요, ‘주는 그리스도’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모든 제자가 이 베드로의 고백에 동의를 했습니다.
근데 여기서 놀라는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했는데도, 하나님 앞에 계실 때의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져 본적이 없는 거예요.
이들이 관심 있어 한 것은, 오직 이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역할입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천국에서의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은, 제자들의 관심이 베드로의 관심이, 예수님 자신에게 있을 때만 궁금해 할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만 중요하다는 것은 뭐냐 하면은, 이 지상에서 예수님을 그렇게 친하다고 느끼며 지내고 있는 동안에, 예수님 자신이 관심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들이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이 중요했던 이유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이 세상에서 이루고 싶었던 소원들이 있었습니다.
나라의 독립, 그리고 갈릴리 변방에 사는 이 운명을 벗어나서 중앙으로의 진출, 출세 이런 마음의 소원이 있었던 거예요.
이 소원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 그리스도라는 게 그렇게 귀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원래 이 땅에 오시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그 분이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는, 예수님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본래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아가 되어서 그리스도가 되어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가졌던 그 모습을 대하고 나니까 어떤 사태가 되느냐 하면, 이 땅에서 그렇게 이루고 싶었던 모든 소원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좋은 거, ‘여기가 좋사오니’ 이렇게 말하잖아요?
이 땅에서 좋다고 여겨서 갖고 싶은 모든 것들을 다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예수님이 좋습니다, 그 하늘에서 천국에서의 그 모습을 보니까.
내가 이 땅에서 나라의 독립을 이루고 싶었습니다.
김구선생님의 열망이었지요. 이준열사와 안중근의사의 열망이었습니다.
그런 열망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진짜 모습을 보니까, 나라의 독립이 김구선생님의 열망처럼 좋은 건데, 김구선생님이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나라 독립을 잊어버리는 겁니다.
내가 이 건희 씨처럼 돈 벌고 싶어요.
사업가가 이 건희 씨처럼 되고 싶다는 꿈을 예수님의 진짜 모습을 보면 잊어버리는 거예요.
그 만큼 예수님의 진짜 하늘나라에서의 본래 모습이 내 마음이 느낄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서는 무슨 소원이라는 게 예수님을 보고 있는 동안에는 성립할 수가 없을 만큼 예수님이 좋은 분이라는 겁니다.
그런 예수님을 주셨다는 거예요, 하나님아버지께서.
성립할 수가 없는 거예요.
내가 무슨 소원을 갖고 있던지 간에…
너무너무 결혼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습니다, 근데 예수님의 진짜 모습 보잖아요? 잊어버리는 거예요, 그 여자를 잊어버리는 거예요.
밤새도록 24시간 낮이고 밤이고 어딜 가나 그 여자 생각뿐이었는데, 예수님의 진짜 모습 딱 보잖아요? 어떻게 되느냐?
그 모습을 느끼고 천국의 분위기를 느끼기 시작하면 잊어버려요.
그게 소원이 안 되는 겁니다.
그렇게 좋은 게 천국이고 예수님이고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세 번째 의미는 뭐가 있을까요?
자기들 세 사람이 놀래갔고 자빠지면서 겨우 추스려 가지고 한 말이 뭐냐 하면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고 여기서 지냅시다’ 이 말을 했어요.
근데 구름 가운데서 음성이 나서 말하기를 입 닥쳐라! ‘너는 예수님과 말할 수 있는 처지와 형편이 못 된다’ 이겁니다.
자기들은 그렇게 Shut up! 입 다물어! 그러시는데, 엘리야와 모세는 예수님과 더불어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 셋이 이 세상에서 제일 친하고, 제일 친한 제자들이 군중에서도 가장 친한 자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자기들은 예수님과 대화도 말도 건네지 못해요, 어색한 관계에요.
그런데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과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진짜 친한 자들이 따로 있더라 이겁니다.
내가 친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왜 내가 친하지 않았을까요? 이 이유가 뭘까요?
왜 나는 예수님과 대화하면 안 되는 그런 어색한 관계가 되어 버렸을까요?
그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같은 아파트 아저씨와 말을 해야 되기 때문에 해야 되는 것, 이게 바로 베드로의 말이었다는 거예요.
정신없이 한 말이라는 거예요, 어색한 관계를 뛰어 넘기 위해 한 말이 이 말이에요.
자, 어색해진 이유.
우선 예수님과 친한 사람들인 모세와 엘리야가 왜 친했을까를 한번 생각해 봅니다.
율법을 대표하는 자가 모세이고 선지자를 대표하는 자가 엘리야인데, 이들의 특징이 있어요.
공통된 특징이 뭐냐 하면은 모세가 80살 되어서 부름을 받고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면대면 하게 됩니다.
시내산에 가기 위해서 산 아래를 다 버리고 시내산으로 올라가게 되고, 그리고 이 모세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는 자였습니다.
나라의 독립, 민족의 독립 이런 거 아무것도 이루고 싶은 게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버리고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대면한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어떤 사람입니까?
죽음을 보지 않고 불 병거를 타고 하늘로 승천한 사람입니다.
둘 다 특징이 뭐냐 하면, 마음이 이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을 만난 자들입니다.
이들이 예수님과 친해서 대화할 수 있는 자들이었고, 제자 셋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세상에서 제일 친한 줄 알았는데 왜 그 예수님과 어색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느냐 하면,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하면서 따라 다녔지마는, 이들 마음에는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것들 소원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그게 인지상정이지요.
모세와 엘리야는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것이 없는 자들이었고 그래서 하나님을 본 자들이었습니다.
천국으로 올라간 자, 마음이 세상을 떠나 있었던 이 자들이 예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친밀한 관계로 들어가고, 그렇게 친한 줄 알았던 자기들은 세상의 소원을 마음에 품고 있었던 그런 관계로 예수님의 진짜 모습 앞에서 한없이 한없이 어색한 관계가 돼버리고 맙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이 주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 엘리야와 모세와 예수님이 논의했다 그래요.
그 십자가 사건이 뭐겠습니까?
바로 이렇게 친밀한 관계로 어색한 관계에 몰입한 신앙인들을 이끌어가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라는 거예요.
십자가가 뭐 하는 겁니까? 이 세상에 대해서 죽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6장에 바울의 말씀대로 세상에 대해서 죽는 게 십자가입니다.
매 순간 죽는 거예요, 매순간.
어떻게 죽어요? 내 마음을 빼앗아가는 이 세상 모든 사람, 모든 일에 대해서 십자가를 기억해 내고 그 일에 대해서 죽는 겁니다.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가기 전에 먼저 한 시간 동안 십자가 붙잡고 아픈 몸에 대해서 내 마음이 떠나서 하나님께로 가는 거예요.
십자가가 바로 그거 해 주는 겁니다.
이렇게 날마다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에 대해서 죽는 동안에 내가 하는 일은 그것밖에 없어요.
십자가 붙잡고 세상에 대해서 죽어서, 마음이 안 뺏겨지고 하나님께 드려지기를 바라는 것 그리고 기다리는 거예요.
십자가 붙잡고 기도하며 기다리는 겁니다.
이때, 마치 땅에 심은 씨가 물을 주고 하는 동안에 언제 자라서 열매를 맺는지 우리는 모르죠.
부지중에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고 그러잖아요, 비유 속에서.
그런 것처럼 내 마음이 점점 더 하늘에 계신 하나님아버지와 예수님의 그 영화로운 모습을 성령의 감각을 통하여 내 마음이 느끼기 시작하고…
점점 더 세상에 대해서 소원이 없어지고, 반면에 점점 더 반비례해서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점점 더 친해져 가는 관계로 됩니다.
이 친해짐이 어느 정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에 도달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이제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런 소원이 없어요, 그래야 친해집니다, 그래야 친해져요.
안 그러면 어색합니다.
예수님의 진짜 하늘나라의 모습을 만나게 되면 어색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소원을 갖고 있는 동안에는, 그 예수님과 그 하나님을 만나지도 못하는 거예요, 만나지도 못하는 거라고요.
근데 그렇게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 소원, 마음이 끌어당기는 걱정 근심들 다 죽고, 자꾸 마음이 천국으로 천국으로 올라가서 성령님의 도움으로 그 천국의 하나님과 예수님을 느끼고 좋아하기 시작하잖아요?
이때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나와 대화 하십니다.
이 땅에서 이루셔야 될 하나님아버지의 계획을 놓고 나와 대화하실 정도로 친해진다는 거예요.
마치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건을 논의 한 것처럼, 십자가 사건과 같이 이 땅에서 일어나야 될 하나님의 계획들이, 나와 예수님 간에 하나님아버지 간에 대화가 될 수 있다는 얘기지요.
이 친밀한 관계를 향해서 어색한 관계에서 출발한 신앙의 삶이, 십자가를 통하여 날마다 날마다 조금 더 친해지고, 조금 더 친해지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이 땅 위에서 아직도 주님께서 살려두고 계시는 이유라 이겁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이유라 이겁니다.
어떻게? 어색한 관계에서 친밀한 관계로 돌입해 가는 것.
어색함은 왜 어색하느냐?
세상에 대한 소원이 내 마음에 있기 때문에 어색한 거예요.
세상에 대해 죽고 그 영화로운 하나님, 예수님과 친해질 수 있는 관계로 가는 것, 꼭 이루어 내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어색한 관계가 정리되게 하시고, 보좌 앞에 계신 영화로운 주님의 모습, 아주 친밀한 관계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발돋움 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