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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북시조시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수엽
대상과 집합적 결합
- 나의 시쓰기의 한 방법
문덕수
<시인·홍익대 명예교수>
대상·1
시에 있어서 ‘대상’이란 무엇일까? 얼른 대답할 수가 없다. 많은 시인들(필자도 당연히 포함됨)이 대상(對象)의 개념을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혼동해서 쓰거나 미숙한 상태에서 쓰고 있지 않는가도 생각된다. ‘사물, 제재, 세계, 주제’ 등의 개념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그런 실례일 것이다.
나는 한때 현대시에 있어서 “대상에서의 해방”을 주장한 바 있다. 최근까지도 전위시의 문제와 관련해서 ‘무대상’의 이슈가 논의되고 있거니와, 이미지의 미적 주권을 강조하면서 시가 외부 세계에 있는 대상에서의 달갑지 않은 구속이나 주종관계를 단절해야 한다는 요지의 논문인 「내면세계의 미학」 (『사상계』 통권 151호, 1966. 3)을 1960년대에 발표했다. 이 무렵, 나는 시의 ‘대상’은 언어적 표상(表象)의 바깥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내면세계의 미학」의 발표 몇 개월 뒤에, 김춘수도 무의미시문제와 관련하여 대상 문제를 언급한 논문 「대상·무의미·자유」 (『시문학』 1966. 11, 『김춘수전집2 시론』 1999, p.376에 수록)을 발표했다. “대상이 있다는 것은 대상으로부터 구속을 받고 있다는 것이 된다” (동 전집, p.377)라는 대목은, “대상에서의 해방” (『모더니즘을 넘어서』 2003, p.406)이라는 나의 주장의 연장선에 놓이는 발언으로 간주된다. 김춘수는 또 같은 논문에서 “같은 서술적 이미지라고 하더라도 사생적(寫生的) 소박성이 유지되고 있을 때는 대상과의 거리를 또한 유지하고 있는 것이 되지만, 그것을 잃었을 때는 이미지와 대상은 거리가 없어진다”고도 말하여, ‘대상’이 시 텍스트 바깥에 있다는 점을 기정사실로 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춘수는 그 뒤 또 「대상의 붕괴」 (『김춘수전집2 시론』 1999, pp.395 ~402)라는 논문도 발표했다. 여기서는 자기의 다음과 같은 시를 소개하면서 작품에서의 대상 파괴의 시도를 설명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밤에 보는 오갈피나무,
오갈피나무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
새가 되었다고 한다.
발바닥만 젖어 있었다고 한다.
- 김춘수, 「눈물」 전문
대상의 파괴를 통해서(?) 관념이 파괴되어 무의미를 생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통일된 이미지나 의도를 찾아내기 힘든다는 말도 덧붙이고 있다. “우선 제2행까지와 제4행까지로 이미지는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게 납득이 안 될 것이다. ‘남자와 여자’와 ‘오갈피나무’가 무슨 상관일까? 이것은 하나의 트릭이다” (동상 전집, p.397)-이렇게 그는 말하고 있다.
이 시는 작자의 말대로 ‘트릭’으로 쓴 것이다. ‘트릭’(trick)이란 책략, 계략, 속임수라는 뜻이다. 작자는 대상과 관념을 파괴하기 위하여 ‘트릭’이라는 의식적인 시쓰기의 방법(이것도 지적 방법이다)을 고안한 것이다. 그러면 작가의 의도대로 대상도 관념도 파괴되어, 이 시에는 그것이 없어지는가? 그렇지 않다. 분석해 보자.
작자는 “남자와 여자”나 “오갈피나무” 사이의 관계는 얼른 납득이 안되는데, 고의로 납득이 안되도록 트릭을 썼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와 “오갈피나무”의 관계뿐만 아니라, 제5행의 “맨발로 바다를 밟고간 사람” (작자는 예수를 염두에 두고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도 쉽게 되지 않는데, 이 부분도 작자가 고의로 쓴 트릭 때문이다. 이 세 주어를 동일화(同一化)하기 어렵도록 작자는 지적 숙고 끝에 이러한 트릭(나쁘게 말하면 꼼수, 속임수, 좋게 말하면 수수께끼를 만들었다)을 쓴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남자와 여자, 오갈피나무,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 이 시의 ‘대상’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이 세 사물 사이의 관계를 통일하는 ‘동일성’을 찾기는 어렵다.
이러한 트릭은 명사관계(名辭關係)뿐만 아니라 술어관계(述語關係)에서도 보인다. 이 시의 술어는 모두 ‘물’과 같은 성질에 젖는다는 서술로 통일되어 있다. 남자와 여자는 아랫도리가 젖어 있고, 오갈피나무도 아랫도리가 젖어 있고,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 발바닥이 젖어 있다. 이러한 수성(水性)을 나타내기 위하여 제목을 「눈물」이라고 붙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젖어 있다”는 개개의 술어를 어떤 동일성의 관념으로 통합시키는 기능은 매우 약한 것 같다. 아니 그런 의미 기능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이러한 단절을 위한 지적 장치도 작자의 고의적인 트릭이고, 심지어 제목을 「눈물」로 정한 것은 한술 더 뜬 트릭으로 보인다.
그런데, 가령 “젖어 있다”는 술정(述定)을 연결하는 어떤 통일점을 찾을 수 있다면 그 통일점이 갖는 어떤 동일성도 정립할 수 있지 않을까. “남자와 여자”나 “밤에 보는 오갈피나무”의 경우에는 모두 “아랫도리”라는 통일점을 갖고 있고,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의 경우에는 “발바닥”이 젖는 부위를 갖고 있다. 물과 같은 성질의 수액(水液)에 젖는 부분은 아랫도리이건 발바닥이건 겉으로 잘 보이지 않게 숨겨져 있거나 가리워져 있는 하위부이다. 이런 하위부는 인체(남자와 여자), 식물(오갈피나무), 초월자(예수) 모두가 다 가지고 있고, 따라서 작자가 이러한 대상들의 동일성적 통합을 일부러 파괴하려고 트릭을 썼다고 할지라도 ‘대상’은 존재하며, 다만 그 대상들이 동일성적 통일점을 정립하지 못한 채 분산된 형태를 드러내어 미규정 상태로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김춘수의 이러한 ‘트릭’이 공인을 받을 수 있는 의식적 방법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여기서 논의를 접어두자.
첫째 시쓰기에서 어떤 진실을 암시하거나 나타내기 위해서는 이러한 ‘트릭’의 사용이 필연적일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의혹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둘째, 대상을 파괴하고 관념에서 벗어나겠다는 의도와는 달리, 독자에게는 “대상과 관념”을 찾게 하려는 사고(思考)를 더욱 강요하여 부과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것은 그의 시쓰기의 의도에 대한 역설적 반동이라고 할 수 있다.
대상·2
김춘수는 시 「눈물」 「하늘수박」 등, 트릭을 사용한 작품을, 대상 파괴를 시도한 작품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전히 대상은 시 텍스트 안에서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대상은 시 텍스트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김춘수나 다른 시인들이 갖는 관념과 대상의 혼용도 지양해야 하고, 대상은 일률적으로 작품의 외부 또는 표상의 바깥에만 있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상식화된 도그마를 버려야 함을 강조하고 싶다. 이 점은 새로운 시쓰기의 키 포인트가 될 수 있다.
자기 앞에 놓여 있는 ‘탁자’를 볼 때 바로 앞 부분은 잘 보이지만 탁자의 저쪽 모서리는 잘 보이지 않는다. 정면에서 탁자를 볼 때와 이동해서 왼쪽에서 볼 때와는 달리 보인다. 또 두 사람 이상이 볼 때는 사람에 따라 달리 보인다. 보는 사람, 보는 위치, 조명의 유무 등 여러 가지 조건에 따라 달리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작품 외부에 있는 대상과 작품 내부의 대상은 전연 같은 존재가 아닐 뿐 아니라, 우리가 흔히 ‘대상’이라고 할 때는 작품 외부에 있는 객관적 사물만 가리키기 쉽다.
객관이나 객체도 인식에 대응하여 독립된 것이라면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작품과 작품 바깥, 표상과 표상의 외부, 주관과 객관-이런 흑백 이분법적 대립으로만 대상개념의 파악이 가능하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게 된다.
여기서 작품도 언어적 표상이라는 관점에서 ‘표상’(表象, represen tation)이라는 용어로 통일해서, 이 문제를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우리가 ‘대상’이라고 할 때, 표상(‘표상력’이라고 해도 괜찮음)의 한계 밖에 있는 대상의 의미로 사용된다. 다시 말하면 지각이나 사고 즉 인식에 대응하는 사물 자체로서의 대상을 의미한다. 표상의 한계 외부에 있는 이러한 물 자체는 현전화(現前化)할 수 없는 것으로 본다. 즉 물 자체는 규정불가능, 인식 불가능의 것이다. 우리는 인식이 절대로 안 되는 물 자체를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의 ‘대상’이 표상활동의 산물인 시작품과 어떻게 관련되고 구별되는지 숙고해야 한다.
그런데, 앞에서 예시한 바와 같이, ‘탁자’라는 물 자체의 인식은 불가능하지만, 작품의 표상 속에서 탁자가 나타나 있다. 나타나 있는 그 표상도 탁자이긴 하나 표상 바깥에 있는 물자체로서의 탁자와는 다른 것이다. 하지만, 표상된 현상으로서의 ‘탁자’(정확하게는 ‘탁자’라는 이미지)를 통해서 실물로써 존재하는 탁자와의 어떤 관련성을 이해한다. 여기서 우리는 표상의 내부라는 영역 한계를 확정해도 그 내부에는 역시 표상의 대상이 있음을 알게 된다. 표상 내부에 존재하는 이 대상은, 시인의 인식과는 대응하면서 선험적으로 이미 부여된 것이 아니라 어떤 문제나 과제를 가지고 부여된, 그러나 규정불가능이 아니라 단지 미규정 상태에 있는 것이다.
표상의 대상인 ‘탁자’나 ‘남자와 여자’ 같은 대상이 시에 등장하는 보기를 앞에서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대상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 즉 원리적 탐구는 철학의 영역에 속하는, 즉 시와는 관계 없는 것처럼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시의 중립성이나 객관성 문제, 그리고 시의 구성 방법 문제(‘물리적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등)도 바로 이러한 대상의 본질론이 깊이 관련되어 있다.
표상의 대상에 대하여 현상학에서 ‘대상X’라는 개념으로 말하기도 한다. 앞에 든 ‘남자와 여자, 오갈피, 예’ 등은 대상X라고 할 수 없을까. ‘남자와 여자’와 ‘오갈피나무’는 사물로서 실재 가능성이 있는 존재이고, ‘예수’는 담화(談話)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므로, ‘대상X’라고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젖어 있다”와 “맨발로 바다를 밟은”의 술어들을 관계지워 연결하는 통일점이 없기 때문에 ‘대상X’라고 한 것이다. 즉 ‘X’란 아직도 규정하지 못한 술어관계의 통일점이다. ‘대상X’란 ‘어떤 것’ 또는 ‘어떤 것의 일반’이라는 말 외에 달리 그 본질을 규정하기 어려움을 말한다.
‘대상X’를 ‘무’, 또는 ‘공허’라고 할 수 없을까. ‘무와 공허’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상반된 복수의 언설이 경합하여 논의될 수 있는 토픽의 ‘담론공간’이라는 뜻이다. 30년대 한국 모더니즘 시에서도 시의 중립성 내지 객관성이 흔히 지적되곤 하는데, 그 문제가 그런 지적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 그 특징의 원인이 추구되어야 할 것이다. 중립성이나 객관성 논의도 ‘대상X’에 귀착된다. 회의주의나 허무주의가 모더니즘을 받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이유가 될지 모르지만, ‘대상론’에서 찾는 것이 더 설득력 있는 일이 아닐까. 김춘수의 ‘트릭’도 이 ‘대상X’에 귀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들의 기차는 느으릿 느으릿 유월소 걸어가듯 걸어간다
우리들의 기차는 노오란 배추꽃 비닐밭 새로
헐레벌떡어리며 지나간다
- 정지용, 「슬픈 기차」에서
이런 시에 일제식민지시대라는 역사 의식을 둘러씌우거나 어떤 이데올로기로 포장하면, 사실 공소한 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비난까지 포함한 논의 지점으로서 이 시는 담론공간으로 열려 있다. 그리고 이러한 중립성·객관성은 ‘공허’나 ‘무’라고 하는 대상의식에서만 열려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대상론은 시의 구성방법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반적으로 시간과 공간의 동일성, 감각이나 관념의 유사성 등에서 대상의 결합 원리를 찾고 있지만, 1, 2, 3, 4와 같은 기수개념(基數槪念)에 의거해서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수나 번호(사무실 번호, 아파트 번호, 주민등록번호, 차량번호, 군번, 기타 등등)는 개별성이나 개개의 구체적 내용규정과는 관계없는, 또는 그런 것을 사상(捨象)해 버린 높은 추상성과 초월성을 갖고 있다. ‘대상X’라는 것은 기수화(基數化)할 수 있는 요소(단위)가 아닌가 생각되고, 기수에 의한 결합이라는 것은 시의 구성방법을 무한히 확장·확대할 수 있는 혁명적 열림이 된다고 생각한다.
집합적 결합
지금까지의 한국시는 처음부터 단일성·동일성의 원리에만 의존해서 구성되어 왔다. 현재의 시도 대부분 그렇다. 꽃이면 꽃, 베고니아면 베고니아, 빌딩이면 빌딩-이런 식으로 대상, 주제, 내용, 정서, 기타 등등 모두 단일의 동일성 원리에 의거하여 발상되고 구성되어 왔고, 효과면에서도 단일성을 강조하는 것 같다. 이러한 폐쇄적 단순성의 경향은 단시(短詩)의 구조가 지향하는 것으로부터의 영향인 것 같다. 어쨌든 이러한 추세가 계속되면 한국 서정시의 허약성과 왜소성은 떨쳐버릴 수가 없을 것이다.
모든 대상이 그 성질이나 내용의 어떠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이 모두 사상(捨象)되어 숫자나 번호처럼 추상하고 초월할 수 있다면 거기에는 지금가지 볼 수 없었던 미지의 ‘구성의 틀’이 잠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대상의 중립성과 더불어 이러한 초월적 추상성은 제재의 다변화, 내용의 다양화, 구조의 복합화로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대상의 내용도 여러 가지 이질성, 대립성, 모순의 공존적 연결을 보일 것이다.
즉, 결합되는 개개의 대상이 가지는 성질, 종류, 범주, 형태 등에는 제한이 없다. 추상이건 구체이건, 또 물리적이건 심리적이건, 사실이건 공상이건, 그러한 성질이나 종류와는 관계없이 결합될 수 있다.
“소나무, 백당나무, 칠엽수” 등은 모두 나무의 종류로서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 ‘지구, 화성, 태양, 달’ 등은 천체의 종류로 결합되어 있다. 이러한 결합은 동일성이나 유사성의 원리에 의거하고 있으므로 여기서 말하는 집합적 결합의 전부라고 할 수 없다. ‘마르크스, 서울, 지옥, 관음보살, 의사’ 등의 결합 관계는 동일성이나 유사성의 원리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감정, 이데올로기, 의식, 무의식 등의 성질이 추가되면 초월적 기수의 집합개념에 더욱 더 다가서는 예가 될 것이다.
나는 1960년대에 무의식의 세계, 즉 내면세계의 시를 강조한 바 있고,(「선에 관한 소묘」의 연작시 등, 이 방면에 관한 시를 꽤 많이 썼다.) 그 뒤 내면세계에서 사회로 나와 현실과 문명을 비판하는 시를 썼으며, 다시 내면세계와 외면세계의 철폐를 주장했다. 이러한 과정은 나의 시력(詩歷)의 연대적 변화를 그대로 나타내지만, 결국 이러한 꽤 오래된 나의 시적 탐사여행도 결국 이 기수적 종합(基數的 綜合)에 이르는 방법을 목표로 한 나름대로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하철에 막 핀 장미 한 송이 사뿟 들어와 앉다 빨간 매니큐어, 이탈리아제 검은 악어백에서 제라늄 꽃지갑을 열더니 녹색 잎사귀 두 장을 끄집어 내다가는 판도라의 상자인 양 지레 닫아버리다 지상으로 올라와 더욱 살센 지하철 유리창엔 비바람에 우수수 젖은 가로수 잎이 한 장 달라붙어 파르르 떨더니 그 몸부림 뚝 떨어지다 여리고로 가는 길가 뽕나무에 올라가 예수를 기다리던 삭개오가 이것을 보다
- 「삭개오가 보다」 전문
최근에 쓴 시이지만, 나는 이 작품에 대해서는 불만이다. 여인이 지갑에서 지폐를 끄집어내는 것, 비에 젖은 가로수 잎사귀가 지하철 유리에 붙었다가는 떨어지는 것, 뽕나무에 올라가서 지나갈 예수를 기다리는 삭개오(『누가』 19장 1절~10절) 등의 세 장면의 결합이지만, 주제의 차원에서는 동일성의 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담화의 세계와 현실적 현장의 결합, 과거의 폭력적 현재화(과거와 현재의 동시적 결합) 등의 방법은 그런대로 괜찮으나, 동일성의 원리를 파괴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시속 80킬로의 지하철 선반에 알록달록 배낭 네 개, 눕고 기대고 포개져 흐너지지 않다 뭔가 오순도순 속소리로 속삭이다 선반 밑에는 서른을 갓 넘은 아빠엄마 사이에 낀 맏딸은 씨걱거리며 살세게 달리는 깜깜한 터널이 무서운 듯 여신 고개를 돌려 힐끗거리다 둘째는 머슴애, 엄마의 오른손을 꼭 잡고 휘둥그레 세상을 익히는 눈치다 천원 한 장에 두 켤레라고 꼬두기면서 목이 쉬어버린 요술장갑장수가 그 앞을 막 지나가다 아뿔사, 그때 나는 약을 먹고 가라는 아내의 말을 깜박 잊어버리다
이 시에는 지하철을 탄 젊은 부부의 일가족 모습, 요술장갑장수의 행상, 아내의 말을 잊고 나온 화자(나) 등 세 장면이 결합되어 있다. 지하철 안이라는 공간의 동일성이 여전히 전제되어 있어 이 점이 불만이다. 시간적으로는 현재와 과거(회상)가 동시적으로 공존하고 있다. 비록 지하철 안이라는 공간적 동일성에도 불구하고, 대상이 가지는 술어 상호간을 연결하는 통일점은 찾아내기는 어렵게 되어 있고, 이 점이 바로 집합적 결합(集合的 結合)을 전향적으로 열어놓고 있다.
대상의 초월적 추상성과 기수화를 바탕으로 한 복합적, 종합적 결합은 여러 가지 개념의 명명이 가능하나 E. 훗설의 용어를 빌려 ‘집합적 결합’ (kollektive Verbindung)이라는 용어로 부르고자 한다.
(문덕수 지음 『현실과 초월』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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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북시조시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수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