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과 나는 새벽 4시까지 거의 밤을 새워 술을 마셨다. 그 양주를 마시고 또 술이 부족해서 소주를 몇병 더 마시기까지 하였다. 술을 마시면서 스님의 문학세계에 대한 여러가지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청학스님에게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스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긴 시간동안 내 이야기도 많이 하였다. 철학과 문학, 생과 사에 대해서 취한 가운데 진지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밤은 깊어가고 그러다 새벽이 되었을때 우리는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오전 늦게 자리에서 일어나니 희한하게도 간밤에 진지하게 열변을 토하면서 나누었던 대화들이 지우개로 싹 지운듯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숙취로 새우젓 같이 푹 절인 것 같은 몸에 청학사 시원한 샘에서 나오는 물을 두번을 연거푸 마시니 속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청학스님도 깨어나서 김삿갓 문화축제에 가려고 서두르고 있었다. 나도 담배 하나를 피우고 스님께 여분의 치솔을 하나 달라해서 웩웩거리며 이를 닦고 세수를 한 후 갈 채비를 서둘렀다. 아침식사는 건너뛰고 나는 청학스님 차에 올라탔다. 스님은 얼마 안가서 동네가게 앞에다 차를 세웠다. 그러더니 나더러 담배를 사오라고 만원을 주었다. 내가 살 수도 있는건데 스님은 날 중요한 손님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차밖으로 나가 사가지고 온 담배를 피우며 잠시 서 있었다. "스님. 속 괜찮으세요?" "괜찮을 리가 없다 아이가. 아구야. 죽을 맛이구마. 김삿갓 축제 가면 점심 준다카니 거가서 밥도 묵고 해장술도 한잔 하자 마. "그러지요. 그런데 전 해장술은 사양 할래요. 축제 끝나고 운전해서 가야 하니까요." "그래라. 그럼. 나는 마 운전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아이가. 허허." 담배를 다 피우고 난 후 청학스님은 나를 차에 태우고 백일장이 열리는 김삿갓 문학관 앞 광장으로 향했다. 나는 스님과 여러가지 추억을 쌓았다. 문학기행도 해마다 같이 다녀오고 스님이 문학상을 받을 때면 술취한 스님을 대신해서 내가 운전해주기도 하였다. 한번은 서울 흥사단 건물에서 청학스님이 어떤 문학상을 받게 되었는데 나에게 같이 가자고 연락을 하셔서 마침 쉬는 날이라 일단 내 차를 몰고 청학사로 갔다. 그곳에 가니 아름다운 한 여인이 있었는데 부산에서 스님의 문학상을 축하하러온 변호사라고 하였다. 예전에 그 분이 고치지 못하는 희귀병에 걸렸을때 스님이 민간요법으로 고쳐준 적이 있어 그 후로는 청학사의 독실한 신도가 되었다고 하였다. 스님이 날 그 여인에게 인사시켜 주었다. 아름답고 지적인 분위가 흐르는 여인이었다. 잠시 후 그 여인은 아주 고운 한복을 입고 스님 차의 조수석에 올랐고 나는 뒷좌석에 앉았다. 조금 가다가 영월 시내에서 윤시인이라는 분을 태우게 되었다. 청학스님과 윤시인, 그리고 나는 문학회 내에서 술을 제일 많이 마시는 회원들이었다. 지금의 나는 건강이 안좋아 오래전에 술을 끊고 입에도 대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술을 좋아하고 일단 마시는 보는 그런 유형이었다. 윤시인은 오랫동안 우체국에서 일을 하고 있던 분이었다. 집배원 일을 하고있었는데 그 일을 하면서 지금의 부인도 만났다고 한다. 우편 배달하면서 알게 된 인연으로 결혼까지 하게 된 것이라 들었다.
청학스님이 운전한 차는 서울 대학로에 있는 흥사단 건물에 도착하였다. 우리 일행들은 그 건물로 들어가서 3층에 있는 행사장으로 올라갔다. 식이 열리기 40분전인데도 꽤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거기서 잠시 서있는데 윤시인이 내게 청학스님에게 드릴 축하 꽃다발을 사자고 하였다. 생각해보니 청학스님 시상식 까지 왔는데 꽃다발을 안드리면 두고두고 미안할 것 같아서 윤시인과 나는 건물을 내려와 근처 꽃가게에서 종류가 틀린 2만 5천원 짜리 꽃다발을 하나씩 샀다. 청학스님이 받는 문학상은 상금은 없었고 상장과 상패만 있는 상이었다. 그날 상은 5개의 종류가 있었는데 2개는 각각 상금 100만원과 50만원이 있었고 나머지는 상금이 전혀 없었다. 난 좀 아쉬운 생각이 들었지만 당사자인 청학스님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하기사 그때까지 변변한 문학상 한 번 못받아 본 나로서는 상금이 없는 상이라도 천금 같이 귀하게 생각되었다. 시상식이 끝나고 뒷풀이 장소에서 청학스님과 윤시인은 술을 많이 마셨다. 부산에서 올라온 여자 변호사는 서울역에 가서 KTX를 타고 가야한다며 술도 안마시고 조금 있다가 떠났다. 뒷풀이가 끝난후에는 내가 운전을 해서 경기도 과천으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 청학스님 친척분이 식당을 하고 계시는데 그분이 상받은 스님에게 기념으로 한턱 낸다고 하여서 가는 길이었다. 나는 서울 대학로에서 경기도 과천가는 길을 잘 몰랐지만 시상식에 참석한 청학스님과 친한 다른 스님 두분중 한분이 앞에서 차를 운전해 주어서 죽어라고 그 뒤를 따라갔다. 서울에서의 운전에 능한 스님의 차를 따라가자니 나는 곡예운전 하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앞선 스님의 차는 그야말로 쾌속운전에 곡예질주였다. 몇번 놓칠뻔 하기도 하고 접촉사고 날 것 같은 아슬아슬한 상황을 견디면서 간신히 따라갔다.
아찔한 운전을 하며 힘겹게 과천에 있는 식당에 도착하였다. 식당은 한옥 건물과 큰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규모가 상당했다. 거기에다 정원 중간쯤에는 연못이 있었다. 청학스님 친척이라는 식당 주인의 안내를 받으며 우리는 조용하고 꽤 큰방으로 들어갔고 잠시 후에 식당 주인의 아내를 비롯하여 청학스님 친척들이 우리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꽃을 들고온 친척들도 있었다. 자리에서 돌아가며 간단히 자기 소개를 하고 난 후 우리와 스님의 친척들은 덕담을 하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문학에 소질이 있었다는 얘기 부터 시조의 천재라는 말과 나중에 청학스님의 문학관을 건립해야 한다는 이런저런 많은 덕담들이 오고 갔다. 스님도 좋아서 만면에 미소가 끊이지 않으며 계속 술을 권하고 마시면서 은근히 자신의 자랑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청학스님의 시조가 문학상을 받은 것에 대한 대대적인 축하는 3시간 가량 지속되었다. 그사이 윤시인도 술이 떡이 되어 있었고 청학스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운전때문에 술을 한방울도 마시지 않았고 조금은 지루해질때쯤 식당에서의 왁자지껄한 청학스님 축하행사는 마침내 끝이 났다.
거기에 모였던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나는 청학스님과 윤시인을 태우고 영월을 향해 차를 몰기 시작했다. 청학스님은 내 옆에서 윤시인은 차 뒷좌석에서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차안에는 네비게이션이 없어 나는 표지판에 의존해 강원도 영월쪽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 딱 한번 길을 잘 못들어 다시 돌아왔다 간 것 빼고는 처음 가는 길을 잘 찾아가며 운전했다. 두사람은 만취한 상태라서 가끔 번갈아 가며 잠에서 깨어나 여기가 어딘지 묻고는 다시 잠이 들었다. 나는 아무생각없이 묵념무상의 상태로 차를 몰았고 졸릴때는 운전석 창문을 열어서 찬바람을 들어오게 하였다. . 마침내 새벽 3시가 다 되어서야 차는 영월에 도착했다.
영월에 도착하기 10분 전에 난 차를 잠시 세워놓고 청학스님과 윤시인을 깨웠다. 그들을 어디로 태워줘야 할 지 몰라서였다. 그냥 청학사로 갈까 하다가 윤시인 때문에 시내에서 세워야 할 것 같기도 했다. 그들은 잠이 깊이 들었는지 몇번인가 몸을 흔들고 고함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을때 간신히 잠에서 깨어났다. 그런데 청학스님이 깨어나자마자 포장마차에 가서 한 잔 더 하자는 것이었다. 윤시인도 거기에 동의했고 자신은 포장마차에 가서 부인한테 전화를 해 데리러 나온다고 하면 된다고 하였다. 결국 난 포장마차를 찾아서 그 옆에 차를 대었고 포장마차에서 두 사람이 술을 마실때 난 국수를 먹었다. 청학스님은 아직도 수상의 영광이 남아있는지 포장마차 주인아줌마에게도 자랑을 했다. 나와 윤시인은 그게 대한민국에서 아주 큰 상이라고 실제보다 과장해서 맞장구 쳤다. 길었던 하루가 끝나갔다. 얼마지나지 않아 윤시인 부인이 그를 태우러 왔고 나는 청학스님을 차에 태워 청학사 까지 데려다 주었다. 시간은 새벽 4시를 넘고 있었다. 거기서 나는 내 차를 몰고 집으로 와 멍하니 있다가 금방 잠이 안와서 한참을 이생각 저생각 하며 뒤척이다가 간신히 잠이 들었다. 자다가 내가 문학상을 수상하는 꿈을 꾸었다. 그것도 상금이 있는 문학상이었다. 꿈 속에서 였지만 황홀하고 구름을 타고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청학스님 문학상 수상으로 서울을 다녀온 후 스님과 나는 점점 더 친해졌다. 스님은 외로움을 많이 타셨고 그 때문인지 청학사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대부분은 술손님이었다. 한번은 사과나무를 잔뜩 심으신 후 이걸 수확하면 그 자금으로 청학문학상을 만든다고 희망에 들떠 계셨다. 하지만 그 계획은 스님이 얼마 안있어 돌아가시는 바람에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한번은 스님이 내게 공양주 보살을 구해 달라고 했는데 내가 여기저기 수소문 해보아도 사람을 구할 수 없었다. 사실 스님이 식사를 제때 안들고 주로 막걸리나 소주로 식사를 대신 할때가 많아 건강이 걱정되는 면이 많았다. 또 밥과 반찬이 있더라도 조금 들다 말고 일을 한다가 또 술로서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다. 그런 상황에서 공양주 보살이 있더라도 밥을 차려주어도 스님이 꾸준히 잘 먹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바빠지고 일이 많이 생겨서 스님을 꽤 오랫동안 보지를 못했다. 처음엔 간간히 전화도 했지만 점점 더 소식을 전하지 않게 되었다. 몇달이 훌쩍 지나갈 무렵 나는 차를 몰고 영월을 가다가 영월역 부근에서 둥근 모자를 쓰고 맥없이 어디론가 걷고 있는 스님을 보았다. 스님을 태울까 하다가 그때 내 일이 너무 바빠 다음에 찾아가서 뵙기로 생각하고 스님을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그게 내가 본 스님의 마지막 모습일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그때 나는 문학회 모임에도 안나갔기 때문에 더더욱 스님의 소식을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나중에 문학회 인터넷 까페에서 스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그렇게 빨리 그렇게 허무하게 가실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청학스님은 술을 많이 마신 것이 원인이 되어 암에 걸려 돌아가신 거였다. 그때 내가 마지막으로 본 모습은 병원에 입원하러 가는 길이었다. 스님은 청학사 입구를 차를 몰고 나오다 큰 교통사고를 당해 차를 폐차 시켰으며 그때에도 병원에 한달정도 입원홰 있었다. 차가 없었길래 병든 몸을 이끌고 힘겹게 걸어 나오는 중이었는데 난 어쩌자고 그걸 그냥 지나쳤는지 자괴감 같은 것들이 밀려왔다. 내가 문학회 인터넷 까페에서 청학스님의 소식을 봤을 때는 이미 장례식이 다 끝나고 며칠이 흐른 후였다. 나는 스님이 자신의 이름을 딴 ‘청학 문학상’도 제정하지 못하고 쓸쓸히 가신 것이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스님을 소재로 시조와 소설을 쓰는 일이었다. 언제고 임자 없는 청학사를 찾아가 스님이 좋아하시던 막걸리를 절마당에 따라드리고 스님과의 추억을 회상하리라. 어디선가 스님의 호탕하고 너털스러운 웃음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