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어의 성배(聖杯)를 수호하는 기사의 편력
- 김언 시집 모두가 움직인다에 부쳐
전병준
어머니의 몸에서 분리됨으로써가 아니라, 언어를 배우고 사용함으로써 비로소 태어난다고 할 수 있는 인간이 과연 언어로 구축된, 언어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도대체 있는 것일까?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겪고 견디는 억압이란 언어라는 감옥에서 연유한 것은 아닐까?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누군가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 무의식의 알 수 없는 저 밑바닥까지도 언어에 의해 규제받고 있음은 이제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 되었다. 이미 있는 규칙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체화해야만 겨우 호모-로퀜스로서 인정받게 되는 이 세계에서 그러한 규칙을 어긴다면 어떤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일까? 아니 그러한 규칙의 체계로부터 벗어난다는 꿈이 과연 실현 가능한 것일까?
김언의 시를 읽으며 내도록 드는 질문은 이것이다. 언어로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전달하는 시인이 언어의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이란 과연 무엇일까? 언어를 매개로 하는 예술가가 자신의 도구인 언어를 근본적인 수준에서 탐구하지 않을 수 없을 터, 그런 까닭에 진정한 시인이라면 누구나 언어를 문제 삼고, 언어를 자신의 문학적 재판정에 소환할 수밖에 없었음은 충분히 예상가능한 일이다. 물론 이러한 물음은 김언이라는 한 시인만이 제기하는 물음이 아니라 2000년대 초반의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기 시작한 시인들이 끊임없이 제기한 물음과 연장선에 있다 해야겠으나 김언이 시적 여정을 시작할 무렵부터 최근까지 이러한 근본적인 물음을 한시도 내버려두지 않고 끊임없이 갱신해 왔음 또한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물음을 던지며 그는 비로소 비중 있는 시인으로 탄생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한국현대시의 새로운 지형은 언어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과 그에 대한 치열한 탐구에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자신이 기존 체계의 바깥에 있음을 선언하고(「나는 밖이다」), “물려받은 시는 물려줄 수 없는 시”(「아버지와 화분」)라고 다짐하던 첫 시집 숨쉬는 무덤에서부터 김언은 자못 비장하게 자신의 시적 지향을 밝혀두었다. 시인 선언문이라 할 수 있는 첫 시집의 한 산문에서 그는 “예술이란 죽여야만 존재가치를 부여받는 양식”(「불가능한 동격」)이라 말하기도 한 것이다. 비록 그의 말은 좀 더 화려하게 비상했던 다른 이들의 말에 파묻히는 듯했으나 결코 좌절하지 않고 쉬지 않고 시도하였으니, 마치 골리앗에 저항하는 다윗과 닮았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처음부터 그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전쟁을 시작했다고 해야 할까. 아니, 실패로서만 비로소 성공할 수 있는 언어의 전쟁을 감행했다고 하는 것이 더 사실에 부합할 수도 있겠다. 언어라는 성배(聖杯)를 수호하는 기사의 편력이 있다면 아마 그것이 김언의 시적 기록일 것이다.
두 번째 시집인 거인에서 김언은 언어적 실험을 더욱 공고히 하는 한편 타자에 대한 관심을 한층 더 강화하였다. 변화나 생성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 「거품인간」이나 「돌의 탄생」, 그리고 유령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 「유령-되기」와 같은 작품이 이러한 경향을 대변하는 작품이다. “한쪽은 존재하는 힘으로 한쪽은 불멸하는 힘으로/ 이미 불멸하고 없는 미래를 향해서 날아”가는 “환멸의 기록”(「불멸의 기록」)이라고 자신의 시작에 대한 간략한 소묘를 했던 그는 이 시집에서 자신의 문장론을 다음과 같이 요약적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비문에서 문장을 발견한다.”(「詩도 아닌 것들이-문장 생각」) 이미 있는 체계 안에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지만 또한 그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욕망이 아닌가. 인간 가운데 인간이 아니기를 바라지 않는 이 도대체 누구인가. 김언의 시적 기록은 한계에 대한 인식과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모색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이러한 모색과 시도가 정점에 도달한 것이 소설을 쓰자라는 시집이다. 언어가 세계를 구성하는 유일한 원인임을 말하는 데서(물론 첫 시인 「감옥」은 비트겐슈타인식의 화행론에 크게 의지하고 있음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사건의 존재론’과 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시집의 해설을 쓴 신형철의 말을 따라 ‘사건의 시학’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사건 다음에 문장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문장 다음에 사건이 생긴다”(「이보다 명확한 이유를 본 적이 없다」)는 구절이 이를 충분히 알게 해주는데 이러한 문장으로 구성된 소설을 쓰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는 “초심으로 돌아가서 길을 잃을 것”(「소설을 쓰자」)이 그가 목표로 삼는 것이었다. 그러나 길을 잃는다는 것은 무엇이고, 길을 잃은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김언이 소설을 씀으로써 만들고자 했던 세계란 기존의 어떤 체계로도 환원되지 않는 세계라고밖에는, 언어를 쓰는 나로서는 달리 말할 방법이 없다.
자아만이 존재하는 유아론(唯我論)의 세계를 벗어나 타자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 그리하여 타자와 함께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그 세계에 참여하는 것, 그리고 언어의 규범 체계에서 벗어나 한없는 자유를 만끽하는 것, 이것이 김언이 시를 통해 말하고자 했고, 또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시적 방법론은 단지 사건의 존재론이나 사건의 시학이라는 말로는 포괄할 수 없는 것에까지 가닿고자 한다. 이를, 시를 통한 관계론, 혹은 시의 윤리학이라 부를 수 있을까. 나와 너, 주체와 객체, 자아와 타자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묻고, 그를 통해 궁극적으로 가닿고자 하는 지점이 윤리학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겠기 때문이다. 범박하게 말해 시집 모두가 움직인다의 전체적인 기획이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을 듯하다. 우선 시집의 첫 머리에 있는 시를 옮긴다.
나는 혼자서는 쉽게 놀지 않는다. 어딘가에 타인을 만들고 있다.
고요하고 거침없이 적을 만든다. 그를 사랑해도 좋다.
그와 무엇으로 대화하겠는가.
적당한 간격을 두고 위험에 대해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다.
나는 혼자서는 쉽게 취하지 않는다.
어딘가에 항상 손님을 만든다. 분노를 만들기 위해
그를 쫓아가도 좋다. 꼭 그만큼의 간격으로
누군가를 방문하고 멱살을 잡는다.
나는 혼자서는 쉽게 풀지 않는다. 어딘가에 꼭 오해를 만들고 있다.
- 「미학」 전문
그가 전하는 “미학”의 정체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는 없으나 그럼에도 그것이 “혼자”만의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타인”과 함께 만드는 것이고, 심지어는 “적”과 함께 만드는 것이라 했으니 말이다. “고요하고 거침없이 적을 만든다. 그를 사랑해도 좋다”고 했으니, 여기서 적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타인이란 타인의 한 극단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아마도 그러한 적-타인과 함께 만드는 어떤 것이 “아름다움”이고 곧 미학의 정체일 터인데, 이것은 또한 “적당한 간격을 두”는 것이며 동시에 “위험”을 자아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미학이란 아름다움과 위험을 동시에 지니는 것이라 해야겠다. 위험을 통하지 않는 아름다움이란 가치 있는 아름다움이 아닐 것이니 그가 추구하는 미학이 어떤 것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겠다.
이 시의 두 번째 부분에 이르면 미학을 즐기는 것, 이를테면 미학의 향유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혼자서는 쉽게 취하지 않”고 “어딘가에 항상 손님을 만”들며 “분노를 만들기”도 하는 것. 이러한 향유란, 아름다움의 경험이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그리고 동시에 때로는 적대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기도 함을 의미한다. 시인이 이 시의 마지막에 이르러 “어딘가에 꼭 오해를 만들고 있다”고 말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미학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리하여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음을 이 구절이 의미하고 있으니 말이다. 자신의 시학이 이해되지 않더라도, 오해를 살지라도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것이 이 시의 최소한의 전언이라 해야겠다.
이 시간이면 그 도시도 전혀 다른 새벽을 보여준다.
나의 발걸음도 수상하다. 아무도 없을 때
멀리서 걸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그의 눈에 띄면서 나는 드디어 사람이 되었다.
직전의 영혼은 모두 유령이었다.
누가 발견하기 전 나의 걸음은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나의 보행과 나의 생각과 나의 입김이 그의 눈에서 순간 빛나고
나는 놀란다. 사람이 된 것이다. 아무도 없을 때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디에도 없는 나의 보행이 걸어가면서
그를 본다. 멀리서 걸어오는 그를.
한 사람의 윤곽과 어렴풋한 입김을
그 생각을.
멀리서 나를 발견한 그는 가까스로 유령에서 빠져나왔다.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고 있다. 직전의 나처럼.
- 「유령 산책」 전문
김언이 오래도록 유령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은 그의 시를 읽어온 독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앞서 언급했듯 두 번째 시집에서부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유령인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느냐, 그게 문제겠지요.”(「유령-되기」) 유령이란 무엇인가. 유령이란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어떤 것, 그래서 존재론이라는 형이상학의 근본 물음을 위태롭게 만드는 어떤 것이 아닌가. 이미 죽었으나 아직 죽지 않고 있는 존재가 곧 유령이니, 유령이란 존재의 가장 극단적인 타자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타자와 더불어 있고자 하는 자는 결국 유령과 대면하게 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곧 유령임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 그리고 내가 곧 유령임을 선언하게 되는 것이 유령론이 결국 도달하게 될 단계인 것이다.
위의 시에서 결국 김언이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 이와 다르지 않다. “전혀 다른 새벽을 보여”주는 시간에 “그의 눈에 띄면서 나는 드디어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는 이는 직전까지는 유령이었을 것이다. “누가 발견하기 전”까지는, “직전의 영혼은 모두 유령”이라는 말은 우리가 유령이라는 사실의 확인 아닌가. 그렇다면 그가 이러한 유령론을 통해 결국 말하고자 한 것은 무언인가.
이런 물음에 김언은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그렇게 묻는 것은 당신이 “캔버스만 빼버려도 그림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평론가”(「팔레트」)이기 때문이라고. “일원으로 살 건지 관찰자로 살건지”(「죽은 지 얼마 안 된 빗방울들의 소설」) 우리는 그에게 대답을 강요하지만 그는 다만 시라는, 최소한이며 동시에 최대한의 자유를 즐기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얼마나 많은 방황이 필요하고/ 얼마나 많은 기술이 필요한가/ 이런 것들을 잃어버리기 위해서는/ 지나온 길을 또 지나가기 위해서는”(「방황하는 기술」)이라고 말했을 터이다. 끊임없이 어긋나고, 어김없이 실패로 끝나는 시도를 하는 것이 그가 시를 통해 실험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겠다. “나는 항상 실패한다. 나는 항상 시도한다.”(「나는 항상 실패한다」)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실패와 시도가 겹치는 시점에는 과연 무엇이 일어날까.
내가 아는 너와
네가 아는 나 사이에
뭐가 지나갔을까
생각하는 사이
무언가가 사라졌다
내가 아는 너와
네가 아는 나는
그게 무얼까
알아차리지 못한다
무엇이 사라졌는지 모르고
서로를 이해한다
내가 아는 너와
네가 아는 나만 남겨두고
무언가가 사라졌다
사라진 그곳에서
한 사람이 추가되었다
두 사람이 추가되었다
이름도 없이
우리만 남겨놓았다
내가 아는 너와
네가 아는 나와
좀 전과는 다른
무엇이
- 「혁명」 전문
짐작하지도 눈치 채지도 못하는 사이 지나간, “좀 전과는 다른 무엇”이 과연 무엇인지 우리는 도무지 알 수 없다. 무엇이 왔는지도, 그리고 무엇이 사라졌는지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예민하지 못하고 무감각할 뿐인 우리는 다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일 뿐이다. 그러나 시인은 섬광과도 같은 그 순간을 “혁명”이라 부르고자 한다. 이미 이곳에 와 있어 우리가 깨닫지도 못하는 것이지만 또한 언제 사라졌는지도 알 수 없는 것, 그것이 혁명이 아닌가라고 묻는 것이다.
잘 마름질되어 시인의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이 시는 그런 까닭에 이 시집에서 가장 이채롭게 빛난다. 어쩌면 이러한 짧고 함축적인 언어로 그는 무언가를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인간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간적으로 호소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과 “문장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다시 문장에 기대어 쓸 수도 없”음을(「용서」) 뼈아프게 깨치는 이로서 그는 문장 뒤에 숨어 있는 말로써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순간은 영원을 뇌관으로 타들어가는 심지”(「빅뱅」)이라 말했으니, 이 혁명의 순간을 새로운 시가 탄생하는 순간이라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우연히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나는 인간을 구원할 생각이 없었다”(「그런 생각」)고 시인은 짐짓 의뭉스럽게 말했지만 이 말을 온전히 믿을 수는 없다. 그가 얼마나 문장을 통해서, 문장을 벗어나는 실험을 해왔는지를 우리는 익히 알기 때문이다. “낱말이 부족한”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문법이 바뀌려면 아직 멀었”지만(「내가 죽고 나서」) 그럼에도 언어를 지키는 기사와도 같은 시인이 있기에 우리의 언어는 조금은 더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전병준
문학평론가
2005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어 등단.
평론집으로 떨림과 사귐의 기호들이, 연구서로 김수영과 김춘수, 적극적 수동성의 시학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