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인 소설의 탄생 방식 외 4편
김바다
버린 정원을 다시 버린다
이름을 버리고 태어난 풀들 사이로
열매가 붉어져간다
뱉어버린 열매를 다시 뱉는다
정원에서 얼굴의 위치는 어떤 나무보다 높다
턱 아래로 지나가는 바람의 일방통행
어제 너머 어제로만 이어진 길을 추격한다
도끼를 쥔 손에 힘을 주면
푸른 혈관처럼 솟아오르는 이름
버린 이름을 다시 버린다
풀이 흔들릴 때마다
세상 모든 이름이 하나로 모인다
목소리는 밤마다 목을 움켜쥔다 무책임하게
버린 얼굴을 다시 버린다
검은 점퍼만 걸치고
겨울 갈대숲으로 굴러와 멈춘다
벌어진 지퍼 너머는 구릿빛 알몸
쇳내 나는 바람이 스친 부위를 잘라내면
꼬리든 다리든
새로운 소설이 시작된다
딱, 한 영혼의 지도가 바뀐
귀의 겨울
절름발이 사과를 귀로 베어 먹습니다
사과 아닌 사과를 귀 아닌 귀가 견디지 못해
붉게 녹슨 귀로 움푹 속살을 파내어
허기진 달팽이를 먹입니다
노란 사과 한 점이 달팽이의 식도를 따라
위와 항문을 거쳐 나오는 과정이
우리의 얼굴을 닮았습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얼굴에는 출구가 없습니다
물로 그린 문은
민달팽이의 항로처럼 금세 증발하지요
몸의 지도가 허물어집니다
태양신은 물 알갱이로 가득 찬 제물을
그냥 두지 않습니다
풀잎의 끝에서 떨며 우리는
절름발이 사과를 귀로 베어 먹습니다
달팽이가 천천히 떠나간 귀로
바람은 노래를 부릅니다
둥근 상에 마주 앉아 우리는 빈 찻잔을 놓고
끝이 기억나지 않는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잔에 스민 대추와 감초 냄새를 귀로 씹으며
검은 가구 하나만으로 장식된 야간열차를 타고
몽마르트 언덕으로 갔지요
캔버스와 붓도 없이 서서
사람들아 나는 무엇입니까
작은 우리에 살고 있으니 새입니다
온 몸이 귀로 된 기형의 새이군요
물소리로 귀를 채우고
짤랑짤랑 동전 소리를 내는
멸종 위기의
그래서, 우리에 갇혀 보호받는 운명의 새
차는 달작지근하고 따뜻해
우리의 귀는 자귀나무 꽃처럼 벙글어지고
귓불은 붉어집니다
귓불을 만지작거리자 민달팽이가 잡힙니다
엄지와 검지 사이로 내려다본 대지는
아득합니다 우리는 흩날리는 빗속
달팽이를 붙들고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중입니다
문득 귀는 겨울이고
삼월토끼의 파티장을 횡단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즐거운 회식
고기를 먹고 있습니다
속이 쓰려 옵니다
당신은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고
나는 당신과 데이트를 합니다
이것은 인내심의 문제입니다
더 이상 무슨 문제가 있나요?
그렇다 해도 누구의 의견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고
간단히 처리할 일도 복잡하게 만듭니다
짐승의 숨통을 끊어 놓고 다음 할 일은
살점을 섬세하게 잘 도려내는 것인데
마지막까지 차오르는 피가 일을 복잡하게 만듭니다
충분히 먹은 것 같은데 고기를 더 먹고 있습니다
나는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고
그는 당신의 여자와 데이트를 합니다
우리는 역시 죄인입니다
살해한 짐승의 피로 손을 깨끗이 씻으면
누가 우리를 벌 줄 수 있을는지요
고기는 말이 없고 얼굴이 없어
마음껏 즐길 수 있습니다
조심할 건 아무것도 없어요.
오직 피, 피, 피만
고기의 피는 의도적인 불이고 물입니다
꼭 있어야 할 몸의 문장입니다
그 앞에서 우리는 의심스러운 존재입니다
고기 앞에 나이프를 든 채 웅크려 앉아
작고 아름다운 모임 중인
당신의 올바른 선택
어느 여름 장대비 쏟아진 날
이런 식으로 자신의 관을 준비한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당신도 같이 해보시면 어떨까요?
우리가 아무 사이가 아니라도 같이 못할 짓은 아니지만
지금은 뭔가를 선택해야 할 때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늘 이렇게 살아왔는걸요
처음으로 신이 되는 느낌이에요
창문 틈새로 테이프를 꼭꼭 다 발라 두었습니다
비겁한 말이지만 미안합니다
자식도 남편도 죽였으니 이제 당신 차례라고 생각합니다
돈이 가장 무섭다는 생각이 드네요
당신 몫은 충분히 받지 않았나요?
옷이 무겁다고 벌거벗고 거리에 나가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죠
아시다시피 이렇게 간단하고 쉬운 방법이 있다구요
번개탄을 피우는 것!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는 습관을 길러야 했는데
종교적으로 처리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탓입니다
힘드실 텐데 말을 아끼세요 호흡이 거칠어지고 있습니다
빨리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누구 맘대로 말입니까? 뒤치다꺼리를 생각하니 벌써 골머리가 아프다구요
제가 올바른 결정을 한 것이라고 말해주세요
마지막까지 배우답게 퇴장하시면 됩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해 살아왔을 뿐입니다
당신이 언제나 꿈꾸던 것은 무엇입니까?
정말 지긋지긋한 질문이에요
훌륭한 책에 나올 법한 대답을 요구하진 않았는데요
바로 이런 것입니다 끝까지 미쳐가는 것!
당신을 돕느라 고독을 느끼진 못하겠네요 어떻게 감사를 표할지?
이런 식으로 자신의 관을 준비할 사람은 많습니다
어느 여름 장대비 쏟아지는 날 아니더라도 말이죠
타동사의 시간
죽은 자의 그림자를 잘라낸다
너무 뜨거워서 손바닥을 데인다
먼 나라로 떠나던 낙타의 묵묵한 발걸음을 잊어버린다
한 순간 터져나오던 외마디 비명을 잊어버린다
나의 그림자는 그의 그림자로 두꺼워진다
아는 것은 점점 모르게 되고
울지 않는 무례한 사람이 된다
그림자가 없는 자는 쉽게 증발한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발목으로
출구를 마련해주기 위해
한때 벽이었던 바닥을 일으켜 세운다
그림자는 뒤집어지며 뒤는 앞자리를 차지한다
뒤는 앞과 닮아있다
고 주장해야 한다 영원히
남편과 아내로 죽을 사람들의 목소리로
신분에 맞지 않게 가위질은 계속된다
너와 나의 구별이 가장 힘들어지면
누가 무슨 짓을 할 수 없을지
아무도 모른다
불가능에 대한 책임을 조각할
더 많은 관객이 필요하다
더 많은 그림자가 필요하다
하루 종일
빈집을 보는 어린아이같이
몸을 숨기고 환한 바깥을 훔쳐본다
저 그림자는 언제부터 땀을 흘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