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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1-7
개혁하는 전통 / 은혜목회정보
요한복음 2:13-22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륙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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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과 역사
하나님이 이루시는 역사는 언제나 역동적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새롭고, 항상 발전하는 것이며, 항상 열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해 인간의 삶은 안정을 원하며 역동하기보다는 정적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강의 흐름에 비유한다면 우리 인간의 삶은 급류처럼 소용돌이쳐 흐르기보다는 넓은 호수처럼 고요하게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최상의 것, 최선의 것이 아니어도 현재 주어진 최소한의 삶에 만족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지어 노숙자(露宿者)들의 경우에도 그 생활에 익숙해지면 좀처럼 거기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의미에서 대체적으로 다 보수성이 강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안정을 추구하려는 경향 때문에 사회가 침체되고 부패하기 쉬우며 새로운 변화가 없는 무미건조한 삶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이 이렇게 가라앉을 무렵 이를 흔들어 놓으셔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변화를 향해 나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흔드시는 까닭은 우리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를 바라보고 나가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아름다운 약속의 땅이 우리 앞에 있는데, 우리가 그곳을 바라고 나가기보다는 현재의 삶에 안주하려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채찍질 하셔서 포기하지 말고 그 약속의 땅에 이를 때까지 전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쌓아올린 안정을 깨고 약속의 미래를 향해 전진하는 것이 바로 개혁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에서 자주 개혁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앞에 두신 목표를 향해 전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그런 의미에서 개혁하는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혁이 없이 역사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성경은 바로 이런 개혁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덴 동산을 잃어버린 인간은 끊임없이 안정을 갈구하여 바벨탑을 쌓기도 하고 거대한 왕국을 건설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의 왕국을 흔들어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미래를 향하여 나가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노아 홍수 이후 인간들이 자기들의 안정된 왕국을 이루기 위하여 하늘 꼭대기까지 닿는 바벨탑을 쌓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말을 각각 다르게 만들어 놓으시므로 흩어지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안정을 위해 쌓으려 했던 바벨탑은 결국 하나님의 간섭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이런 바벨탑 사건은 아주 상징적인 사건으로서 인간은 끊임없이 바벨탑을 쌓으려 하고, 하나님은 그의 선택된 지도자를 통하여 그것을 개혁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나가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4백년간 종살이를 할 때에 저들에게 모세를 보내시어 그곳에서 저들을 구원해 내셨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향해 40년간 광야를 헤맬 때 이스라엘 자손들은 약속의 땅을 향하여 가기보다는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불안정한 미래를 향해 가기보다는 익숙한 노예생활을 차라리 더 좋아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율법을 주시고 저들의 모든 삶을 완전히 바꾸게 하셨던 것입니다. 광야 40년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어 개혁하는 시기였습니다. 노예 근성에 젖은 저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거룩한 백성이 되게 만드는 개혁의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개혁의 과정은 저들에게 대단히 힘들고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저들은 그런 개혁을 거부하고 이제까지 익혀온 자기들의 삶의 방식을 고집하려다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음을 당하기도 하면서 어렵게 어렵게 약속의 땅을 향해 전진했던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 자손들은 처음 2백년 동안은 나라를 세우지 않은 채 지파공동체로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런 생활에 불편을 느낀 사람들이 왕국을 건설하자고 아우성을 치면서 왕국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솔로몬 왕의 시대에 이르러 왕국은 틀을 잡으면서 번영을 누렸지만, 그때부터 이스라엘 자손들은 오히려 타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솔로몬이 죽은 후 나라가 두 쪽으로 나뉘게 되었고,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함께 인간의 왕국으로 변질되면서 점점 타락하기 시작하여 여러 예언자들이 나타나 이를 책망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나가도록 이끌었던 것입니다.
요시야왕의 개혁
오늘 읽어 드린 열왕기하서 말씀은 요시야 왕이 유다를 개혁한 이야기입니다. 솔로몬이 그렇게 화려하게 지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퇴락(頹落)하여 형편이 없을 정도로 그 시대 신앙의 상태가 매우 나빴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시야는 이 성전을 다시 깨끗하게 수리하고 본래적인 모습을 되찾고자 해서 공사를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곳에서 두루말이 한 책을 발견하였는데, 아마도 지금의 신명기에 해당하는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책을 읽는 순간 임금은 애통하며 옷을 찢었다고 하였습니다. 거기에 적힌 말씀들은 요시야에게는 전혀 새로운 것들이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이 잊혀져 있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왕국을 안정되게 세워 가는 일에만 몰두하였던 것입니다.
요시야는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자기가 왕으로서 먼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로 개혁에 착수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을 위하여 만든 모든 그릇과 신상을 끄집어내어 성밖 기드론 골짜기에서 불살랐고, 성전 가운데 있던 성창(聖娼)의 집을 헐었고, 므낫세 왕이 성전 두 마당에 세운 단들을 헐고 그 가루를 기드론 시내에 쏟아버렸습니다.
그는 또, 유다의 역대 왕들이 유다의 성읍들과 예루살렘 주위에 있는 산당에서 분향하려고 임명한, 우상을 숭배하는 제사장들을 내쫓았고, 바알과 태양과 달과 성좌들과 하늘의 별에게 제사지내는 사람들을 모두 몰아냈습니다.
이런 개혁은 솔로몬 시대부터 내려오던 모든 이교적인 산당들까지 헐어버리는 과감한 개혁으로 실행되었습니다.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모든 이교적인 신앙의 요소들을 말끔히 청소해 낸 것입니다.
예루살렘만 개혁한 것이 아니라 유다 전역과 심지어는 예전 북왕국 땅에 있던 산당들도 모조리 헐어버렸습니다. 거기에 제사를 지내던 제사장들의 무덤까지도 파헤쳐 그 뼈들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요시야 왕의 이런 철저한 개혁은 잃어버린 야훼 신앙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물이 너무 오래 고여서 썩어버린 것과 같이 유다 왕국은 오랫동안 야훼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이교적인 문화를 그대로 받아드려 거기에 안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시야는 이렇게 정체된 신앙을 종교개혁을 통해 새롭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시야 왕의 죽음과 더불어 이 개혁은 다시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제도적인 개혁은 이루었으나 그 백성들의 의식을 개혁하지 못하므로 새로운 개혁의 물결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유다 왕국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요시야의 개혁이 그 역사를 변화시키지 못하자 하나님께서 친히 저들을 흔들어 바벨론에 포로가 되게 하시는 큰 개혁의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 포로 생활을 통하여 저들이 잃어버렸던 야훼 신앙을 다시 찾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개혁
오늘 읽어 드린 요한복음 2장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성전에 올라가셔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쫓으심으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사건에 관한 기록입니다. 그러자 유대 사람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하다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 주겠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만에 다시 세우겠다."
성전 중심의 유대교, 율법주의에 정착된 유대교는 너무 굳은 틀에 갇혀서 역동성을 잃어버렸고, 율법은 오히려 사람들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어버렸습니다. 야훼 신앙이 저들에게 생명의 기쁨과 약동하는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자유를 억누르는 속박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율법주의에 대하여 개혁의 기치를 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교의 중심인 성전을 허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자신이 사흘만에 다시 세우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개혁을 요청하신 말씀입니다. 기존의 신앙의 틀을 헐어버리고 새로운 역사 속에서 열리는 새 틀을 마련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철저한 개혁자였습니다.
이제까지 유대인들이 지켜왔던 율법적인 전통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해석을 하심으로 저들이 안주하던 율법적 틀을 깨트리셨습니다. 성전 제사를 중심으로 한 저들의 신앙을 완전히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을 내어쫓으신 것은 상업주의를 반대하신 것뿐 아니라, 제사의 필요성 자체를 거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몸을 단번에 십자가의 제단에 드림으로 이제는 더 이상의 제사가 필요 없을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놓으심으로 개혁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개혁
이렇게 유대교를 개혁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탕으로 새롭게 출발한 사도들의 교회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예루살렘 교회는 주로 유대인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던 것입니다. 이 교회는 아직도 율법적 전통인 할례(割禮)를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율법적 사고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바로 그런 율법의 완성이며 성취임을 강조하는데 머물렀던 것입니다.
이 새로운 복음이 유대땅을 벗어나지 못하자 하나님께서 두 가지 방향으로 여기에 개혁의 역사를 이루셨는데, 하나는 예루살렘에 유대인들의 핍박이 일어나게 하셔서 사도들로 하여금 흩어지게 하셨고, 또 하나는 교회를 핍박하던 율법주의자였던 사울을 부르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신 것입니다.
사울은 다메섹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려고 가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면서 변화되어 바울이 되었고, 오히려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완전히 율법적인 틀을 깨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새롭게 해석한 그의 신학을 바탕으로 이방인 선교에 그의 일생을 바쳤던 것입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른다는 바울의 신학은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 충격을 주었고, 혁명적인 사건으로 받아드려졌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이런 개혁적인 신학을 바탕으로 초대 교회를 유대인 중심의 교회에서 세계적인 교회로 발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개혁자였습니다.
개혁되어야 할 교회
이렇게 발전한 기독교가 중세에 이르러 권위주의적 교회로 머물면서 침체하게 되자 하나님께서 요한 후스나 위클리프 같은 개혁자들을 일으키셨고, 그들의 정신을 이어 받은 마틴 루터나 요한 칼빈 같은 개혁자들을 통하여 교회를 개혁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잃어버린 교회를 말씀으로 돌아오게 만들었으며,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잃어버린 교회로 하여금 다시 그 주권 앞으로 나아가도록 개혁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후 칼빈주의를 따르는 교회들은 그 이름을 아예 개혁교회(Reformed Church)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스콧트란드의 개혁교회들이 그 이름을 장로교회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그 본질상 항상 개혁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대로 그 이름에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지난 30년간 교회 성장에 몰두하면서 오늘에 이르렀으나 개교회주의에 빠진 교회들이 사회와 역사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하였고, 막강한 교회의 힘을 하나로 모아 사회 변혁을 이룩할 수 있었음에도 오히려 사회의 지탄을 받는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간 한국 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았지만, 좀처럼 움직이지 않던 교회들이 IMF라는 하나님의 채찍에 놀라서 정신을 차리게 되었고, 통일문제와 사회 봉사에 힘을 모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개혁을 이루어내지 못하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이 역사에 개입하셔서 한국 교회를 새롭게 변화시켜가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안동교회 역사를 돌아보아도 개혁하여야 할 때 우리가 개혁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셔서 시련과 채찍을 통해 우리를 흔들어 놓으셨고, 그래서 변화와 개혁을 이룩하여 왔던 것입니다. 이제 제가 이 교회에 온지 20년이 지나면서 우리는 '이만하면 되었다'라는 안정감에 사로 잡혀 시대의 변화를 주시하지 못한 채 정체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20여년 동안 끊임없이 움직여 왔습니다. 성전 건축으로부터 시작하여 교회 개척과 선교, 그리고 교육관과 사택의 마련, 특별신앙운동을 통하여 통일과 환경과 농촌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21세기를 앞에 두고 우리 교회는 새롭게 자신을 개혁하여야 할 자리에 이르러 있습니다. 신앙의 전통을 잇는다는 것은 바로 개혁하는 전통을 이어 받아 개교회주의에 만족하고 있는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이 민족 속에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시키기 위한 교회로 개혁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위기감을 가지고 개혁하고자 노력하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우리를 흔들어 놓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구하여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 그것을 향하여 우리 자신을 개혁해 가야 하겠습니다.
개혁은 정적(靜的)인 데서 역동적(力動的)인 데로의 변화이며, 안주함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십자가를 지는 일이며, 오늘 우리 사회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문제들의 도전에 대하여 고민하여 계속 응답하는 일입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우리끼리 모여 조용히 예배드리고 헤어지는 교회는 정체된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제 개혁하는 전통을 이어 받아 움직이는 교회, 일하는 교회, 격동하는 역사 속에 뛰어 들어 거기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교회에 오면 편안히 예배 드리고 돌아갈 수 있어서 좋다는 생각을 가지셨다면 이제부터 그 생각을 바꾸십시오.
사회가 소용돌이치고 있는데, 나만 편안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머물겠다는 생각은 죄악입니다.
이 역사가 계속 여러분을 부르고 있는데, 그 소리를 듣지 않고 자기만을 위해 사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면서 이 역사는 숨가쁘게 변화하고 있는데 우리만 강 건너 불 보듯이 그 역사를 외면한 채 안주할 수는 없습니다. 나 자신의 개혁을 위해 기도하며 교회와 사회의 개혁을 위해 무엇인가 거드십시오. 역사의 변혁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는 마지막 날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받고 바깥 어두운 데 버려져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마음을 열어 역사의 변화를 받아 드려 역동적으로 움직이면서 개혁을 이루어 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모두 개혁교회에 속하였고, 개혁하는 전통을 이어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분명하게 알고 잠시도 멈추지 말고 개혁의 대열에 참여하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