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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 9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 약 1: 11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3. 낮은 형제와 부한 형제 ( 1: 9 – 11 )
⑨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⑩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⑪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약 1: 9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
개역 성경에는 '데'(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이 '데'는 9-11절의 내용이 2-5절의 시험과 연결된 것임을 나타낸다(Burdick, Martin). 왜냐하면 12절에서 다시 '시험'에 대해 언급되기 때문이다.
1]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낮은'(호 타페이노스)가 신분적인 것인지 아니면 물질적 또는 육체적인 것인지는 명백하지 않다. 70인 역에서는 이 단어가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 가난한 것을 가리킨다.(Robertson)
* 시 72: 4 - 저가 백성의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 잠 30: 14 - 앞니는 장검 같고 어금니는 군도 같아서 가난한 자를 땅에서 삼키며 궁핍한 자를 사람 중에서 삼키는 무리가 있느니라.
10절의 '부한 형제'(호 플루시오스)와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보아 본 절의 '호 타페이노스'는 물질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는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Burdick).
이렇게 비천에 처한 자들이 자랑해야할 것은 '높음'이라 했다. 여기서 '높음'이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피조물의 가치,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영적 승귀를 나타낸다.
* 요 15: 15 -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 계 3: 21 -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육체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비천한 자리에 처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당하고 인내함으로 보다 더 영예로운 지위를 얻게 될 것이다.
약 1: 10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찌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
1]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낮은 형제'와 마찬가지로 부자들도 취해야 할 마음이 있다. 그것은 자신들이 많이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뽐내지 말고 겸손해야 한다.
'부한 자'에 대해서 혹자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신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Dibelius, Blackman). 그 이유는 본문 9절에는 '형제'라는 말이 있지만 본 절에서는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왜냐하면 헬라어 본문에서 '형제'를 생략한 것은 9절에서 사용한 것이므로 본 절에서는 반복을 피하여 생략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기 때문이다(Burdick, Martin).
따라서 본문의 '부한 자'는 그리스도인이면서 물질적으로 부요하거나 어려움을 당해보지 않은 자를 가리킨다(Marton, Adamson, Cantinat, Mayor, Ropes, Mussner).
일반적으로 부자인 형제들은 자신들의 부요함으로 인하여 영적인 교만함까지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인 부한 형제들은 지상에서 소유한 부가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변화시킬 수 없으며 일시적인 것임을 깨달아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처럼 낮은 자와 동일시하며 부를 자랑하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한다(Moo, Tasker).
* 롬 11: 12 -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 빌 2: 8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자기의 낮아짐'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적 부요의 헛됨을 인정하고 낮은 형제들과 교제하게 된 것을 가리킨다.
2]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본 절은 부한 형제들이 낮아짐을 자랑해야 할 이유이다. 아무리 부요한 자라고 할지라도 그 부요함을 영원히 누리지는 못한다. 마치 꽃이 시드는 것처럼 부(富)뿐만 아니라 생명도 곧 시들어 버릴 것이기 때문에 겸손해야 한다.
* 사 40: 6-7 -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 시 102: 11 -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쇠잔함 같으니 이다.
* 고전 7: 31 -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 벧전 1: 24 -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그들은 믿기 전에 가치 있게 여겼던 세상의 것들이 풀의 마름같이 시들고 아름다운 꽃의 떨어짐같이 없어지는 것임을 깨달았고 그래서 거기에 더 이상 큰 가치를 두지 않는다.
성도의 가치는 오직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천국 기업이요 영원히 죽지 않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이다.
약 1: 11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
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야고보는 사 40: 7을 인용하여 부한 자의 부를 덧없는 풀의 꽃에 비유하여 부한 형제들이 낮아져야 함을 권면한다.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는 순간적으로 변하는 것을 나타내고자 함이다. '뜨거운 바람'(카우소니)은 사하라 사막에서 불어오는 '시로코' 라는 뜨거운 남동풍으로 이 바람이 불면 곧장 채소 따위의 식물이 말라죽곤 하였다.
* 욥 1: 19 - 거친 들에서 대풍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소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한지라.
* 사 11: 15 - 여호와께서 애굽 해고를 말리우시고 손을 유브라데 하수 위에 흔들어 뜨거운 바람을 일으켜서 그 하수를 쳐서 일곱 갈래로 나눠 신 신고 건너가게 하실 것이라.
* 렘 4: 11 - 그 때에 이 백성과 예루살렘에 이를 자 있어서 뜨거운 바람이 광야 자산에서 내 딸 백성에게 불어온다 하리라. 이는 키질하기 위함도 아니요 정결케 하려함도 아니며
* 눅 12: 55 - 남풍이 붊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이처럼 부자의 입는 옷과 물질적인 풍요로움으로 오는 안락은 쉽게 시들어 버린다. 그러기에 부한 자는 일시적인 부나 아름다움을 추구하거나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낮아져야 한다.
* 시 90: 6 -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
* 시 103: 15 -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 사 40: 6-7 -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 벧전 1: 24 -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쇠잔하다'(마란데세타이)는 '불을 끄다'라는 의미를 지닌 '마라이노'에서 유래하였다. 이것은 지상에서의 부와 영화가 영원하지 않으며 아침 안개와 같이 곧 사라지는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Ropes)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종말의 때에 부로 인하여 마음이 교만해 있던 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부와 행한 일로 인하여 심판을 받고 역시 이 세상의 물질과 함께 사라질 것을 시사한다(Martin).
따라서 본문을 해석할 때 '부와 함께'를 포함하여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Erasmus, Calvin).
* 시 73: 26 -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 시 102: 11 -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쇠잔함 같으니 이다.
* 사 24: 4 - 땅이 슬퍼하고 쇠잔하며 세계가 쇠약하고 쇠잔하며 세상 백성 중에 높은 자가 쇠약하며
* 사 34: 4 - 하늘의 만상이 사라지고 하늘들이 두루마리 같이 말리되 그 만상의 쇠잔함이 포도나무 잎이 마름 같고 무화과나무 잎이 마름 같으리라.
3] 남은 것은 그리스도뿐입니다. : 김정남 목사
< 거꾸로 사는 교인 >
야고보는 야고보서를 쓰면서 오랫동안 목회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가장 중요한 문제들을 꼽아보며 썼던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 첫째 문제는 ‘시험’이고(2-4절), 둘째 문제는 ‘기도’이며(5-8절), 셋째 문제는 ‘가치관’의 문제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시험과 기도에 이어 가치관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본문 9-10절을 보십시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가치관이 변하지 않으면 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습, 세상의 가치관은 어떻습니까? 낮은 형제는 낮다고 상처를 부여잡고 살고, 높은 형제는 부하다고 과시하며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거꾸로 보아야 하고, 거꾸로 살아야 합니다. 분당에서 교회를 개척할 때 처음에 교회 이름을 짓는데 한 성도가 ‘거꾸로 보는 교회’라고 짓자는 얘기를 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기발한 이름을 지어냈는가 라고 물었더니 그분이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목사님의 사상이 그렇지 않나요?”
얼마나 좋은 이름입니까? 거꾸로 보는 교회! 교회 이름으로 너무 특이해서 그렇게 교회 명칭을 붙이지 않았지만 세상과는 달리 거꾸로 보는 교회, 거꾸로 사는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즉, 없어도 낙심하지 않고, 있어도 교만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이와 같은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바른 모습을 가질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옛날의 세상적인 것이 좋다고 하면 그것은 온전한 믿음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 성경이 말하는 참된 가치관 >
좋은 환경에서만 ‘좋다’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차원 높은 신앙생활이 이루어지겠습니까? 우리는 나쁜 환경에서도 '좋다'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참된 가치관은 무엇일까요?
첫째,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적으로 산다는 말은 “예수라는 어떻게 하실까?”라는 거룩한 질문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정신적이고 영적인 보이지 않는 것에 더 중요한 가치를 두는 것입니다. 셋째, 순간적인 것보다는 영원한 것을 보는 미래지향적 가치관입니다. 넷째, 자기중심적인 것보다는 이타적이고 봉사하는 것에 가치를 둡니다.
우리가 그러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훌륭합니까? 그런데 왜 이런 가치관의 변화가 있어야 할까요? 10절 후반부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인생은 풀의 꽃과 같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적인 세계관입니다. 이것만 알아도 훌륭한 철학자가 될 수 있습니다.사실상 철학이 별것 아닙니다. 인생의 허무와 허망을 아는 것이 바로 철학입니다.
철학을 인간의 학문 중에서 왜 최고의 학문으로 여깁니까? 교만한 인간에게 자기 자신의 허무함을 알게 하는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철학보다 한 차원 더 높은 학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학입니다. 참다운 신학을 무엇을 가르칩니까? 인생은 허무하지만 하나님 안에 있는 인생은 허무하지 않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인생은 허망하지만 하나님은 희망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신학을 잘 배우면 보람과 행복이 넘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 교만과 긍지는 다른 것입니다 >
오늘 본문을 보면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더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동등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똑같다는 것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설령 다른 것이 있다고 해도 아주 작은 것으로 알고 그 정도 차이는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가는 과정은 조금 달라도 마지막 가는 길이 같지 않습니까? 그 사실을 극대화하여 늘 잊지 않고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허무주의인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마지막 가는 길을 같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하나님 중심적인 세계관에서 나오는 진리입니다. 그러한 세계관을 가질 때 얻어지는 플러스알파가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엄청난 가치관의 변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다시 한번 본문 9-10절을 음미하면서 보십시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 구절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구절에서 두 번 나오는 단어 바로 ‘자랑’입니다. 모름지기 사람은 자랑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삶 자체를 쓸데없다고 하면서 살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내가 정말 소중히 여기는 것, 즉 나의 진정한 자랑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자랑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말은 교만이 아닙니다.교만과 긍지는 별개의 것입니다. 교만은 없어야 하지만 긍지는 있어야 합니다. 부해도 교만이 없어야 하고, 가난해도 긍지가 있어야 합니다. 가끔 물질은 많은데 마음이 거지와 다름없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보는 일은 가장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반면에 물질은 없어도 마음이 넉넉하고, 부해도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회하면서 그런 분을 보는 일은 가장 감동적인 일입니다.
예를 들어, 목회하다 보면 인간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는데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부하지만 낮아지는 원리를 아는 참으로 자랑스러운 사람입니다. 어떻게 그런 자랑스러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자기 자신의 기본적인 모습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즉 물질이나 지식은 생각지 않고 자신의 근본적인 모습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인간의 근본적인 모습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본문 10-11절을 보십시오.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화는 꽃과 같습니다. 다 떨어져 없어지고 맙니다. 이 사실을 진지하게 아는 것에서 바로 그리스도인의 참된 가치관이 나옵니다.그런 가치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은 넉넉한 마음으로 안달하지 않고 아주 초연하게 살아갈 수 있고 대수롭지 않은 일에 “죽네! 사네!” 하지 않게 됩니다.
가끔 대학입시 때가 되면 합격했다고 하늘에 올라갈듯 좋아하고 떨어졌다고 자살할 듯 절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먼 훗날이 되어야 과연 어느 쪽이 잘되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한마디로 두고 봐야 압니다.
부한 자는 낮아짐을, 낮은 자는 높아짐을 자랑하는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가치관, 같은 자랑, 같은 종말론적 신앙, 같은 기쁨을 향유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남는 것은 그리스도뿐이요,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은혜뿐입니다.여기에 새로운 세계관이 있고 새로운 가치관이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사는 사람은 늘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