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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실천적 전환: 운 (Οὖν, 그러므로)
로마서 전체의 무게 중심을 이동시키는 가장 위대한 접속사입니다! 1장부터 11장까지 쏟아진 그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 이신칭의, 긍휼과 자비하심! 그 모든 교리를 온몸으로 다 받았다면 "그러므로(Therefore)!" 너희의 삶은 반드시 이렇게 180도 뒤집어져야 한다는 맹렬한 선전포고입니다. 교리가 없는 실천은 맹목이고, 실천이 없는 교리는 죽은 지식입니다.
예배의 대혁명: 뒤시안 조산 (θυσίαν ζῶσαν, 산 제물)
구약의 제단 위에는 언제나 피 흘려 '죽은' 짐승의 사체가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기독교 예배의 본질을 박살 내듯 새롭게 정의합니다! "너희의 몸(육체를 포함한 전인격적 삶)을 거룩하게 살아 숨 쉬는 '산 제물(Living Sacrifice)'로 제단 위에 올려놓으라!" 일주일에 한 번 드리는 종교적 의식이 예배가 아닙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직장과 가정과 학교에서 내 욕망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나를 바치는 24시간의 거룩한 일상이 바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영적 예배(Logikēn latreian: 합리적이고 마땅한 예배)'**입니다!
형태와 본질의 충돌: 쉬스케마티제스데 (συσχηματίζεσθε) vs 메타모르푸스데 (μεταμορφοῦσθε)
바울은 두 가지 헬라어 단어를 날카롭게 대조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Syschēmatizesthe)': 세상의 유행과 썩어질 가치관이라는 '외형적 틀(Schema)' 속에 너 자신을 카멜레온처럼 구겨 넣지 말라!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Metamorphousthe)': 애벌레가 나비로 변태(Metamorphosis)하듯, 성령의 권능으로 내면의 본질 자체를 완전히 뜯어고쳐라!
II. 공동체의 질서: 은사와 겸손의 십자가 (12:3-8)
(롬 12:3, 6-7)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영적 교만의 파쇄: 소프로네인 (σωφρονεῖν, 지혜롭게/분수에 맞게 생각하라)
변화받은 마음이 가장 먼저 적용되어야 할 곳은 다름 아닌 '교회 공동체'입니다. 바울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인 영적 우월감을 찔러버립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교만)을 품지 말라!" * 성도는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철저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임을 아는 자입니다. 따라서 나를 다른 사람보다 높이는 것은 복음의 본질을 배반하는 짓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Sōphronein: 온전하고 냉철한 정신으로 자신을 객관화하여)' 생각하는 겸손만이 교회를 지킵니다.
은사의 다양성과 한 몸(One Body): 카리스마타 (χαρίσματα, 은사)
예언, 섬김, 가르침, 위로, 구제, 다스림, 긍휼! 이 모든 것은 내가 잘나서 얻은 훈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한 몸을 건강하게 세우기 위해 주권자께서 값없이 내려주신 **'선물(Charismata)'**입니다. 치밀한 커리큘럼으로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누구의 은사가 더 크냐는 마귀적인 경쟁을 버리고, 오직 각자의 위치에서 한 몸 된 교회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뼈를 갈아 넣는 것이 성도의 직무입니다.
III. 성도의 거룩한 일상: 거짓 없는 아가페 (12:9-13)
(롬 12:9, 11-12)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가면을 벗은 사랑: 아뉘포크리토스 (ἀνυπόκριτος, 거짓이 없나니)
기독교 윤리의 알파와 오메가는 '사랑(Agapē)'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사랑에 조건을 붙입니다. "사랑에는 거짓이(Anypokritos: 배우가 쓰는 위선의 가면이) 없어야 한다!" 입술로만 사랑한다고 떠들면서 속으로는 자기 이익을 계산하는 종교적 가면을 십자가 앞에 내동댕이치라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악을 맹렬히 혐오하고(Apostygountes), 선에 아교풀처럼 찰싹 달라붙어(Kollōmenoi) 있는 것입니다.
심장의 끓어오름: 토 프뉴마티 제온테스 (τῷ πνεύματι ζέοντες, 열심을 품고)
십자가의 군사는 무기력하지 않습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성령 안에서 심장이 펄펄 끓어오르는(Zeontes: 펄펄 끓다, 비등점을 넘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 세상의 환난이 닥쳐와도 소망 중에 즐거워하고, 기도에 내 영혼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 맹렬한 역동성! 이것이 진리에 붙들려 전 세대를 살려내는 살아있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IV. 십자가 윤리의 최고봉: 악을 선으로 이기라 (12:14-21)
(롬 12:14, 19, 21)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복수의 본능을 찢다: 에율로게이테 (εὐλογεῖτε, 축복하라)
로마서 실천편의 가장 무섭고 지독한 에베레스트가 등장합니다! "너를 박해하고 찢어 죽이려는 자를 도리어 축복하고(Eulogeite: 그를 위해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고), 결단코 저주하지 말라!"
인간의 본성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과한 자는 다릅니다. 원수가 나를 모욕할 때, 그에게 동일한 악으로 갚아주는 순간 나는 악에게 지는(패배하는) 것입니다!
심판권의 완벽한 이양: 도테 토폰 테 오르게 (δότε τόπον τῇ ὀργῇ, 진노하심에 맡기라)
억울해서 피가 거꾸로 솟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친히 원수를 갚으려 칼을 들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자리를 내어주라(Dote topon: 심판의 자리를 양보하라)'!"
원수를 갚는 심판권은 오직 우주의 재판관이신 하나님 한 분의 고유 권한입니다. 내가 원수를 갚는 것은 하나님의 재판석을 찬탈하는 신성모독입니다. 재판은 만왕의 왕께 완벽하게 위임하고 나는 십자가 뒤로 물러서는 것, 이것이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믿음입니다!
최후의 승리 선언: 니카 엔 토 아가도 토 카콘 (νίκα ἐν τῷ ἀγαθῷ τὸ κακόν, 선으로 악을 이기라)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십시오. 그것이 원수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아 그를 부끄럽게 만들고 회개시키는 가장 무서운 무기입니다.
12장의 거대한 마침표가 우주를 울립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십자가의 그 압도적인 선으로 악을 박살 내고 '이기라(Nika: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