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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28:3-20) 박차를 가해 멸망으로
오늘 함께 읽은 말씀중심으로 <박차를 가해 멸망으로>라는 제목의 말씀 증거 합니다.
'박차를 가해 멸망으로'
박차를 가해서 멸망으로 치닫게 되는 과정의 사울의 모습을 우리가 함께 읽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단절, 참 무서운 것이지요. 하나님과 교통이 막히는 것, 참 무서운 것입니다. 지금 제가 알고 있는 어느 권사님의 남편 되시는 분께서 혈관이 막혀서 머리를 수술하셔서 혼수상태에 계시는데 한 달이 다 되어 갑니다. '막힌다'고 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참 이렇게 정말 위험한 일을 초래할 수 있는데 하나님과 막혀있는 상태가 어떤 것인가를, 우리가 오늘 사울의 얘기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우리 마음속에 깊이깊이 새겨 넣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3절에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더라.”라고 말합니다. 사울 왕이 그 땅에서 박수와 신접한 자들을 다 내쫓습니다. 올바른 생각이에요. 하나님을 믿는 선민의 공동체 안에 미신을 주도하는 그런 신접한 자나 무당 같은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에요. 쫓아냈습니다. 합리적인 생각을 할 줄 압니다. 그런데 블레셋 군대와 진영을 보고 두려움과 떨림에 사로잡혀서, 결국은 자기가 쫓아내었던 신접한 자를 다시 찾아가게 되고 신접한 자를 으름장을 놓고 타일러서 사무엘의 영을 지하에서 불러내는 것처럼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데 이런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종교개혁자 칼빈과 루터의 이 부분에 대한 주석을 보면, 이것은 진짜 사무엘의 영을 무당이 부른다고 지하에서 올라올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죽은 다음에는 영혼을 하나님이 관장하십니다. 그리고 무당을 돌로 쳐 죽이라고 명령하셨던(출22:18)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그 무당이 하나님의 선지자의 영을 불러낼 수 있겠습니까? 칼빈과 루터의 말을 빌리면 악한 영이 조작을 한 것이라고, 악한 영 스스로 변장을 했든지 아니면 조작된 악한 영, 사탄에 의해 조작된 영적 존재로 봅니다. 우리가 흔히 흉가에 귀신이 출몰하는데 그 귀신이 누군가 하면 억울하게 죽은 처녀귀신 또 아니면 조상 중에 억울하게 죽은 증조할머니의 혼이 손자에게 임했다고 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다 귀신들이 그렇게 변장을 하는 것이지요. 증조할머니처럼 목소리도 가장할 수 있고, 억울하게 죽은 처녀의 그런 사정을 알고 마치 그런 처녀가 어디를 떠돌아다니는 것처럼 표현할 수 있지만, 사후세계를 하나님이 관장하시면 그것으로 끝인 것이지 어디로 떠돌아다니겠습니까? 다 악한 귀신들이 변장하고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네가 누구냐? 그러면 나는 아르헨티나에서 온 귀신이다. 이렇게 말하잖아요. 아르헨티나에서도 올수는 있겠지만 귀신 세계에서 아르헨티나는 어디고 한국은 어디겠습니까? 4차원의 공간에서 다 귀신이 귀신 놀음 하는 것이지요.
자, 이렇게 미신을 쫓아가게 되고 그러나 귀신이지만 사울이 망할 것을 바르게 예언합니다. 당연하지요. 예를 들어서 이 세상에서야 살아가기 위해 미신을 쫓아갈 때, 이런 거짓말 저런 거짓말도 하겠고, 귀신의 작용으로 미래를 점치기도 하고 과거를 알아맞히기도 하고 그러겠습니다마는, 어쨌든 바른 소리를 했지만 사울이 지옥에 가면 지옥에 가서 내가 왜 지옥에 왔는지 설명해 달라고 할 때 그 때는 거짓말 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네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 멸절시키라고 했는데 네 눈에 좋은 것들을 다 뒤로 챙겨버리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하나님이 널 버리셔서 네가 지옥에 왔다.’라는 이 소리를 거짓말 할 필요 없지요. 지옥에서 아무리 마귀라도 바른 소리 하면 되는 것이지요. 지옥에 온 사울을 데리고 마귀가 위로하겠다고 ‘그럴 수도 있지. 사람이 뭐, 힘내. 비록 지옥이지만 열심히 살면 여기서도 기쁨이 있을 줄 누가 아냐?’라고 말 할 리가 있겠습니까? 지옥에 온 얘기를 그대로 말하겠지요. 심지어 신약에는 귀신들이 바울이 전도하는 곳마다 '높은 자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난리를 치고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귀신들이 벌써 벌벌 떨고 "지극히 높으신 자의 아들이여, 왜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쫓아내려 합니까?"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이지요.
자, 그런데 이것보다 더 중요한 얘기가 있어요. 어떻게 하면 사람이 미신을 믿게 되느냐는 겁니다.
하나님과 막힌 상태에서는 누구나가 다 미신으로 살아갑니다. 미신을 정의하기를 합리적인 생각에서 벗어난 생각이나 행동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이 믿을만한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지금 보세요. 합리적인 생각으로 사울이 신접한 자들과 무당과 점치는 사람들을 다 쫓아냅니다. 그랬다가 블레셋 군대를 보고 무섭고 떨려서 미신을 잡게 됩니다. 돼지머리에 절하는 사람들을 붙잡고 인터뷰를 해보세요. 그 돼지머리가 앞으로 하는 일을 잘 되게 해줄 것이라고 믿고 돼지머리에 절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저는 믿지 않습니다. 백이면 백 다 돼지머리가 어떻게 할 것이라고 믿는 게 아닙니다. 믿지 않아요. 그런데 왜 절합니까? 돼지머리의 신통력이 문제가 아니라, 내 속에 두려움이 있고 떨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섭기 때문에. 자신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돼지머리에 절하는 것이지, 돼지머리가 신통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믿는 게 아니지요.
오늘 블레셋 군대를 보고 떨렸다고 하는데 이게 뭘 말하는 겁니까? 하나님과 단절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반드시 떨리게 돼 있어요. 뭘 봐도 떨리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후천성면역결핍증과도 같아요.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지요? 하나님과 연결이 끊겨있지요? 반드시 마음에 두려움이 생기고 걱정이 생기고 불안이 생깁니다. 떨리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어떻게 행동합니까? 그 두려움에 쫓겨서 생각합니다. 두려움에 쫓겨서 판단합니다. 두려움에 쫓겨서 방법을 찾습니다. 이게 다 미신입니다. 사울처럼 근본적으로 버림을 받지 않은 믿는 사람들에게도 이 하나님과의 끊김이 계속 반복해서 일어납니다. 앞장과 바로 비교할 수 있잖아요? 다윗이 하나님과 끊긴 상태에서 나타난 일이 뭡니까? 사울의 손을 두려워해요.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사울을 앞에 두고도 죽이지 않을 정도로 여유가 있습니다. 사울 등 뒤에 있었어요. 찌르면 되었어요. 그래도 죽이지 않을 만큼 여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끊기면 그 사울의 손이 무섭습니다. 그래서 그 두려움에 쫓겨서 블레셋으로 갑니다. 블레셋으로 가면 내게 구원이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게 미신이라는 것이에요.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불안과 걱정이 생긴다. 그 불안과 걱정에 따라서 방법을 도모 한다. 그런데 이 방법은 모두가 다 미신으로 ‘이렇게 하면 될 거야, 저렇게 하면 될 거야.’라고 생각합니다만 하나도 그대로 되지 않습니다.
오늘 사울에게 나타난 특징이 두려움이에요. 뭘 봐도 두려워요. 그러니까 후천성면역결핍증이라는 게 아주 작은 세균이 들어와도 면역성 자체가 멸절되기 때문에, 그 균을 당해낼 수가 없지 않습니까? 지금도 우리 몸에는 다 균이 있어요. 보균상태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면역성이 없어지니까 다 두렵잖아요? 하나님과 관계가 끊기면 이게 후천성면역결핍증, 아니 이건 선천성면역결핍증이겠다. 이것은 원죄적인 상태 아닙니까? 하나님과 끊긴 상태에서는 모든 게 다 두려워요. 모든 게 다 걱정이 되고 그러므로 내가 뭐든지 작은 일이든지 큰일이든지 걱정이 마음에 생기고 두려움이 생기고 떨린다면 아십시오. 하나님과 끊긴 겁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두려움과 떨림에 의해서 쫓겨 가잖아요? 사울이 분명히 신접한 자와 무당을 쫓아내었던 합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레셋 군대를 보고 두려움이 생기잖아요? 그러면 반드시 미신을 붙잡게 돼 있습니다. 과학도 미신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과학적인 법칙대로 붙잡아 주고 계시는 것이지, 과학의 법칙이 영원불변하다는 게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것은 법칙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금도 수고하고 계시는 거예요. 중력 자체가 하나님이 지금도 수고하고 계시는 것이지, 하나님과 동떨어져서 법칙을 따로 만들어 놓은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인간들에게 그 법칙을 허락하시고, 그 법칙을 지금도 유지해 주고 계시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힘이. 그러므로 과학도 미신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은 과학은 미신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단절은 어떨 때 일어납니까?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어저께 밤중에 10시 30분까지 말씀을 준비하다가 11시 다 되어서 자려고 나오는데 가족들은 다 들어가서 자고 거실이 깜깜해요. 방에 들어가서 자려다가 다시 나와서 TV를 켰어요. 그냥 채널을 계속 돌려봅니다. 그런데 우리가 119구조대를 부를 때 주의사항에 대해서 방송을 하더라고요. 119구조대장이 나와서 119에 전화를 걸 때 어떻게 하라고 방법을 알려주고 있었어요. 듣는 중에 귀에 들어오는 부분이 한 군데 있더라고요. 중간만 한 10분 보았는데, 우리가 119에 전화해서 "큰일 났습니다. 빨리 와주세요."라고 하잖아요. 한 예를 드는데 연세 드신 아버지께서 쓰러지셨어요. 쓰러지셔서 여자분이 119구조대에게 전화를 했는데 그 다음에 곧바로 남편에게 전화하고 친정에 전화하고 시누이에게 전화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시아버지께서 쓰러지셨습니다. 빨리 와 주세요. / 예! 알겠습니다."라고 했는데 전화를 딱 끊어버렸어요. 그래서 구조대원이 계속 전화를 합니다. 쓰러진 시아버지의 증상이 어떤지를 알아야 거기에 맞게 준비를 해서 간다는 겁니다. 모든 사태에 대해 모든 준비물을 다 가지고 갈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119구조대라고 해도. 쓰러졌으면 왜 쓰러졌는지. 예를 들어서 당뇨병이 있어서 지병으로 쓰러졌다든지 아니면 혈압이 높았었든지 아니면 심장이 좋지 않았다든지 이렇게 다 증상이 있지 않습니까? 거품을 물고 쓰러졌으면 그랬다고 말을 해줘야 되는데 ‘빨리 와주세요.’라고 하고는 딱 끊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화를 하느라고, 119구조대가 계속 전화를 하는데 받지를 않는 거예요. 통화가 되지 않는 겁니다. 그래 119구조대가 왔는데 시아버지를 손을 쓸 수가 없는 겁니다. 결국 죽었어요. 119구조대에게 구조요청을 한 뒤에는 절대로 그쪽에서 또 전화를 해오도록 다른 곳에 전화를 하지 말라는 겁니다. 119구조요청을 한 전화기로는. 의미가 깊지 않아요?
자,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아말렉을 멸절시키라고 하셨습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그 순간에도 하나님과 통화가 계속 되어야지요. 그런데 그 순간에 사울의 마음은 어느 쪽으로 통화를 하는가 하면, 아말렉이 갖고 있었던 금, 은 보화에 마음이 다 가버린 겁니다. 단절이 돼 버리는 겁니다. 마음이 그쪽으로 가버리고 그쪽과 교통하지 않습니까? 눈으로 보고 좋다. 나쁘다. 교통이 이렇게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마음으로 보고 느끼는 게 교통, 교감이 이루어진다고 하잖아요? 교감이 그쪽으로 이루어져 버리면 하나님과 단절이 되고 맙니다. 거기서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이렇게 하지요. ‘하나님! 뭘 이루어주세요. 뭘 이루어주세요.’라고 하고는 끝나버리고 맙니다. ‘위급합니다.’라고 했으면 하나님께서 보시고 내게 필요한 것, 내게 취해야 될 조처, 이런 것들을 다 아시고 또 내가 움직여야 될 것이 있으면 가르쳐주시고 말씀을 하실 텐데, 내 마음이 금방 다른 곳으로 가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지지 않아요. 아무리 하나님이 전화를 하셔도 내 마음이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는 그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떤 상태가 하나님이 응답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까? 내가 하나님 말고, 다른 것에 마음이 붙어 있을 때에 응답의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교통이 될 수 없습니다. 119구조대 이야기를 명심하셔야 됩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 마음이 계속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향해 갑니까? 그게 십자가입니다. 계속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만 우리는 실지로 영이신 하나님과 교감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이상해요. 십자가를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에 대해 두려움이 없어져요. 어떤 분은 이렇게 얘기해요. ‘일이 크게 벌어지니까 십자가를 바라보려고 해도 안 됩니다.’라고 하는데 당연하지요. 이미 세상과의 교감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에서는, 하나님께 와서 해봐야 뚜뚜뚜 통화중입니다. 통화중입니다. 계속 그렇게 되고 맙니다. 일이 크게 벌어져서 마음이 그 일에 먹혀버린 상태에서 십자가로 옮기려니까 힘이 들지요. 정말 그때는 결단을 하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꿇어앉아 있어야 회복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꾸 십자가를 마음에서 놓치면 세상이 들어와서 세상과 교통하다 보니까, 하늘과 교통이 끊어지지요. 그 상태에서 십자가 회복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늘 십자가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이 임하게 되면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져도 두려워 할 일이 아니라, 그 일속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뜻을 내가 읽는 거예요. 하나님과 통화를 하면서 듣는 겁니다.
주님의 십자가! 혈관을 뚫어줄 때 청국장이 혈관의 막힘을 뚫어주는 좋은 역할을 한다면서요? 혈액이 응고되는 것을 막아주고 혈전을 없애 준다고 합니다. 그런 것처럼 주님의 십자가가 내 마음과 내 생각 속에 늘 돌아가요. 자식에 대한 생각 속에도 주님의 십자가가 돌아갑니다. 사업에 대한 생각 속에서도 주님의 십자가가 돌아갑니다. 이렇게 혈관이 늘 통해 있어야 십자가를 통해서 뻥뻥 뚫려 있을 때, 하늘의 생각이 돌아가고 하늘의 생각이 돌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이 표현될 때 외에는 다 미신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주어지고 마음이 평강한 가운데 두려움과 떨림과 걱정이 없어지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알려지고 행동과 생각으로 나타나는 이외에는 다 두렵고 떨리고 걱정되지요. 오늘도 아마 걱정하실 거예요. 그 걱정에 몰려서 하는 행동과 생각은 다 미신입니다. 다 미혹에 이끌려 생각하는 것이지 그대로 하면 된다는 것은 없어요. 누굴 찾아가면 된다. 이런 것은 없어요.
하나님이 찾아가라 해서 그 사람을 찾아가는 것과, 내가 두려움과 떨림에 쫓겨서 걱정이 되어서 혹시 그 사람이 해결해 줄까 해서 찾아가는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미신? 망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는 것입니다. 어떨 때 미신을 붙잡게 됩니까? 하나님과 막혀 있을 때. 하나님과 막혀있는 증거가 내 마음속에 걱정, 두려움, 떨림이 있다는 것이에요. 어떻게 해야 극복합니까? 늘 막힘을 뚫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늘 기억하는 겁니다. 모든 일에, 모든 생각에 주님의 십자가가 뱅뱅뱅 돌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죽었다.' 내가 죽은 사람으로서 자식을 어떻게? 죽은 사람으로서 사업을 어떻게? 죽은 사람으로서 어떻게? 늘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으면 평강이 유지되고 하나님의 뜻이 명확해 지면서, 사울이 앞에 있어도 죽이지 않을 만큼의 여유, 골리앗이 있어도 용기 다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마음에 걱정이 생길 때 그 걱정을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면 멸망을 향해 박차를 가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두려움이 생기고 걱정이 생길 때는 움직이지 말고 생각을 발전시키지 말고 멈추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십자가에서 나의 죽음을 다시 확인함을 통하여 하나님과 통하는 자리로 갈 수 있도록 저희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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