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혁명전야 3
(아버지를 넘어선 아들, 혁명의 깃발을 들다)
뜻밖의 방문객 정탁을 맞이한 방원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한달음에 숭교리 이성계 사저에 들이닥쳤다.
몸을 다친 이성계는 병상에 누워있고, 사랑채에서는 이화와 이제가 머리를 맞대고 숙의하고 있었다. 사랑채에 들어선 방원은 이제와 이화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는 한이 있어도 여막으로 돌아가지 않고 몽주를 치기로 결심했다."
결심 포고였다. 좌중을 휘둘러보는 방원의 눈동자 구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방원은 이대로 어머니의 묘소 곁으로 돌아간다면, 그 화가 어디까지 미칠 것인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찬성합니다."
"목숨 걸고 따르겠습니다."
이제와 이화는 이구동성으로 찬동하고 나섰다.
"행동대장으로 누가 나서는 게 좋겠는가?"
"이지란 장군이 적임자입니다."
이지란은 고려로 귀화한 여진족 무장이다. 이성계가 동북면에 있을 때 이성계의 용맹에 감복하여 휘하의 장졸들을 이끌고 투항하여 이성계의 수하가 된 사람이다. 이성계를 도와 거란족 소탕작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이성계와 호형 호제하며 이성계 진영을 떠나지 않은 의리파 무골이었다.
"장군이 나서 주셔야 하겠습니다."
방원은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 이지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청했다.
"우리 장군께서 모르는 일을 내가 어찌 감히 하겠습니까?"
이지란은 난색을 표명했다. 이성계의 하명없는 행동은 나서지 않겠다는 뜻이다. 방원은 절벽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좌중을 휘둘러본 방원은 비장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휘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아버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지만, 몽주를 죽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마땅히 그 허물을 책임지겠다."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방안의 공기가 숙연함 마저 감돌았다.
호흡을 가다듬은 방원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국가와 왕실에 공로가 있는 것은 온 나라 백성들이 다 알고 있다. 지금 소인배의 모함을 받아 살육을 당한다면 저 모리배들은 우리에게 나쁜 평판을 뒤집어 씌울 것이니 훗날 누가 이 사실을 알겠는가?
장군 휘하의 인사들은 많지만 그 중에서 한 사람도 장군를 위하여 힘을 쓸 사람이 없단 말인가?"
호랑이가 포효하는 듯한 우렁찬 목소리였다. 목소리에는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아버지 이성계는 ‘죽고 사는 것은 명(命)에 있다’고 말하지만 방원은 명을 만들어 가겠다는 태도다.
경륜의 차이일까? 사유의 폭의 차이일까?
방원에게 정몽주는 핏줄을 보호하기 위한 장애물이었지만, 정도전으로부터 '새나라'에 대한 청사진을 넘겨받은 이성계에게 정몽주는 끌어안고 가야 하는 인물이었다.
방원은 이성계의 아들로서 핏줄에 충실하려 들었고, 이성계는 '새나라'라는 큰 그림에서 정몽주를 대하고 있었다.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침묵을 깨고 조영규가 개연(慨然)히 말했다.
"좋다. 조영규가 책임을 맡고 고여, 조영무, 이부는 지금 즉시 도당으로 쳐들어가 몽주의 목을 베어라."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인간 방원이 혁명가 이방원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이다.
이제까지는 아버지 이성계가 모든 것을 주관했다. 위화도 회군과 최영장군 처형 그리고 우왕과 창왕을 퇴출하는 일은 이성계의 영역이었다. 침범할 수 없는 장군의 권한이었다. 감히 범할 수 없는 아버지의 권위였다.
헌데, 정몽주를 죽이라는 명은 이성계를 제쳐 두고 방원이 하고 나선 것이다. 이제까지는 이성계의 정보참모로 충실했지만, 이제부터는 무리를 이끄는 리더가 된 것이다.
약관을 갓 넘긴 20대의 젊은이가 지도자의 반열에 올라선 것이다.
고려의 마지막 대들보 정몽주가 죽으면 고려가 무너진다는 것은 명역관화했다. 이성계는 임금의 명을 빌려 집행했고, 최소한의 질서와 순리를 따르려 노력했다.
방원의 명에는 국법도 없다. 위계질서도 무시했다. 군사를 움직일 병권도 없다. 그렇지만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지겠노라고 총대를 메고 나선 것이다. 가히 혁명적 상황이다.
방원의 명령은 폭력이다. 혁명은 폭력을 수반한다.
폭력이 정당화되었을 때 혁명이 된다.
이 폭력이 정당한 대접을 받을 것인지? 부당함으로 인하여 나락으로 굴러 떨어질 것인지? 그의 안중에는 없었다. 피 끓는 젊은이가 오직 앞으로 나아가는 선봉에 선 것이다. 이것이 혁명이라면 방원이 혁명의 깃발을 치켜세운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있다. 방원은 25세 젊은이다. 직책은 정2품 밀직대언(密直代言) 이다. 현대적 의미로 풀이하면 사정기관의 차관급 관리다. 25세에 고위관리라? 좀 이상해 보인다. 물론 아버지 이성계의 후광으로 고속승진 했겠지만 나이에 비해 과하다. 여기에 이성계의 숨은 뜻이 있다.
이성계는 방원의 저돌성을 익히 잘 알고 있다. 치고 나가는 방원의 추진력에 날개를 달아준 것이 정2품이라는 관직이지 않느냐 하는 해석이다.
이성계의 특급참모 정도전은 방원과 품계가 같은 정당문학이지만, 나이가 방원보다 30세 이상 차이가 난다. 나이도 어리고 관직도 낮았을 때 정도전과 동등한 입장에서 경쟁하고 견제할 수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오래전부터 준비해 두지 않았느냐 하는 점이다.
그밖에 이성계를 따르는 무장들도 방원보다 훨씬 연배가 높다. 이러한 서열과 위계질서를 깰 수 있는 무기가 정2품 관직이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무리를 지휘할 수 있는 무기가 직급이다. 비상사태가 발생하였을 때 방원의 저돌성에 동력을 부여하기 위하여 나이에 비하면 과한 직급에 올려놓지 않았을까.
"몽주를 죽여라“
역사를 가르는 방원의 명이 떨어졌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수레바퀴가 구르는 것 같았다. 조영규와 고여가 즉각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있었으니 정보와 첩보였다.
숭교리 이성계 사저의 동태를 주시하고 있던 이원계의 사위 변중량이 탄 말이 선죽교를 건너 정몽주의 집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었다. 어느 시대에나 정보 수집가와 첩보 염탐자는 있게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