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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궁이의 추억, 소죽 쑤기
소죽을 끓이(쑤)기 전에 작두로 볏집을 소가 잘 씹어 삼킬 수 있도록 적당한 크기로 잘게 썰어야 한다. 뒷갓방 앞 토방이 건너편 창고에 이어 붙은 변소와 대밭 사이에 지어진, 나중에는 돼지막으로 바뀐 외양간을 마주보고 있는 본채 남쪽 큰마당에 잇대어 서쪽으로 꺽어진 작은마당이 있었는데, 그곳에 가을걷이를 마친 볏집을 쌓아 올린 볏집단이 통화책에서 보았던 동그란 백설공주의 성처럼 자리했다.
작은 마당이라고 부르는 이 터는 본채의 서쪽면에 있는 뒷갓방 문을 열고 토방에 내려서서 보면 왼쪽 남쪽 에는 내가 숨바꼭질 할 때 아무도 못찾게 숨었던 깊은 우물이 있었다. 그 우물은 아버지의 큰형에 대한 심한 얼차레의 상흔도 함께 남아 있는 곳이다.
큰형은 어릴적에 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아들인줄 알고 낳았더니 딸이더라''고 해서 '아들(子)로 믿었던(信)' 아이라는 뜻의 신자(信子)로 이름을 지은 큰 누나가 1944년 음력 6월13일에 태어나고 4년 만인 1948년 음력 1월5일에 드디어 그렇게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났다. 이름을 돌림자 잡을 병(秉)에다 사내 남(男)을 써서 병남(秉男)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사내아이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큰누나와 큰형의 이름이다. 이 아들을 위해 솟을대문 옆에 있던 사랑방에 서당 훈장님을 모셔서 아들에게 천자문도 가르치게 하고 동네에 서당을 열어 주었다고 하니, 지금의 조기교육이며 과외인 셈이다.
큰아들에 대한 과욕이 넘쳤을까? 불과 만 5살에 큰누나에게 달려서 초등학교를 보냈다. 동네에는 대부분 아홉살에 학교를 보냈는데, 큰 형은 여섯살에 학교를 입학하였으니 당연히 제일 작고 어린 학생이었을 것이다. 집에서 해룡초등학교는 약 6킬로미터 거리였다. 내가 전학와서 가본 통학길은 집에서 그 먼 광양장에 엄마를 따라 갈 때의 거리와 맞먹었다. 전학오던 5학년2학기에도 멀어서 집을 나서면 뛰다가 걷다를 해도 1시간이 넘게 걸려서 도착했던 학교 길이었다. 취학 연령보다 2살이나 어린 아들을 천자문도 떼고 한글을 떼었다고 해서 학교를 보냈으니, 어린 아이가 그 먼길을 제대로 다녔겠는가 싶다. 큰형은 순중을 다니다가 서울로 도망을 쳤고, 나중에 빌고빌어서 죽도봉 밑에 있는 홍암중학교를 마치고 순천공고의 전신인 순천실고를 마치기는 했지만 조기교육으로 실패한 우리집안의 사례인 셈이다.
해룡초등학교와 해룡면사무소가 길을 따나 100여미터를 사이를 두고 있어서 학교를 갈 때와 파하고 집으로 갈 때에 아들을 보고 싶어하던 아버지는 면사무소 앞에서 아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 아들을 못 본 날에는 불같이 화를 냈고, 겁이 질린 너무 어린 아들은 학교 가는 길에서 이미 큰 누나와의 걸음도 못 따라갔고 자꾸만 노꼬랑으로 숨어들어 아주 늦게 학교를 가거나 아예 학교를 가다가 집으로 바로 오는 날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마다 무섭게 아들을 혼내던 아버지는 이런 일이 빈번하자 망태에다 아들을 담아서 물박아지 튼튼한 줄에 매달아서 깊은 우물에 넣었다 뺐다를 해가며 앞으로 잘하겠다는 다짐운 받고 풀어주었다고 한다. 그런 탓일까. 내가 결혼해서도, 본이이 먼저 저세상 갈 때까지 아버지와 맞상을 못했던 큰성님의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은 짐작할만 하다.
그 우물이 본채의 남쪽 끝 서편에 자리잡고 있고, 서쪽으로 벽이 시작하는데 옛날 창고가 있었다. 할머니가 밀주를 숨겨 두었던 창고와 2층에는 온갖 농기구들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사다리 계단을 타고 올랐던 그 곳은 점삼이 성과 나의 어릴적 아지트였다. 그 창고 벽에 맞대어 누에를 치기 위한 큰 창고가 지어졌는데, 내가 5학년 2학기에 전학을 온 이후에 지어졌으니 어릴적에는 작은마당이 병석이 집 마당보다 넓은 너른 곳이었다. 창고에 맛닿은 서쪽 담의 부쪽 끝에 외양간이 서북쪽 대밭을 벽으로 이어져 있었다. 어른 키보다 높은 서북쪽 대밭은 엄마가 시집 오기 전부터 있었던 개복숭아 나무를 기점으로 인식이 장센집 대문까지 펼쳐져 있었다. 대밭 밑에는 토굴이 있었는데, 우리 집 작은마당 끝에서는 허리를 굽혀 들어갈 수 있었다. 지금의 냉장고 역할을 했고, 김장독과 무우독 그리고 온갗 먹거리가 가득했다. 그 냉장고 문 옆에는 대밭에 오르는 흙계단이 있었으나 어릴적 무섬증의 두 번째 발단인 대밭에는 오르지 못했고, 전학하여 돌아온 뒤에야 그 계단을 타고 대밭에 들어가 죽순을 뽑아 올 수가 있었다.
대밭에서 이어진 담으로 맞대어진 공간에는 지난 초가을에 산일(산림청에 허가를 내고 솔가지와 잔나무들을 자르는 일)을 하고서 잘라 놓아 두었던 솔가지들이 어느정도 말라 무게를 줄인 다음 단으로 묶어서 일꾼들이 지게로 일일이 지고 내려온 소나무를 쌓아올렸다. 이 나뭇단은 뒷담 밖에서도 어른 머리 높이보다 더 높이 올라가 있었으니, 집안에서 볼 때는 커다란 성과 같았다. 겨울이 되면 이 나뭇단 맨위부터 헐어서 불을 때다보니 높이가 점점 낮아졌다. 마을 북쪽 뒤빈터에서 해질무렵까지 놀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에 나뭇단의 높이가 낮아져 있을 때는 담장에 올라서서 나뭇단을 계단삼아 집으로 곧장 들어와 가운데방 뒷문으로 들어가서는 놀다욎 않은 것처럼 감쪽같이 속일 때 비밀 계단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 길은 점삼이 성이 막둥이를 찔벅거려 기어코 울린 후에 막둥이의 큰 울음소리를 듣고 쫓아온 엄마나 누나가 간짓대로 보복해 주려고 쫓아가면 얄밉게도 그 나뭇단을 통해 훌쩍 담을 넘어 도망쳐 홍길동처럼 사라져 버리던 통로이기도 하다.
북쪽 뒷담이 뒷갓방쪽으로 비좁게 붙어서 본채쪽으로 다가서면 좁아진 공간에 점삼이 성이 키우는 점삼이 전용 토끼장이 놓여 있었다. 토끼장을 지탱해 주는 빨간 벽돌로 쌓아 올린 높은 굴뚝은 또 다른 점삼이 성의 비상탈출구였다. 언제나 그랬듯이 가만히 있는 막둥이를 건드려서 올려 놓고는 뒤안으로 도망을 친 점삼이 성을 잡으려고 엄마와 셋째누나가 간지대를 들고서 양쪽으로 나뉘어서 엄마는 큰 부엌 뒷문을 잠그고 동쪽 장끄방에서 몰고, 셋째누나는 서북쪽 뒷갓방에서 시작하는 뒤안으로 돌아 조여가고, 나는 가운뎃 방 뒷방문을 잠궈서 포위를 해서 조여갔지만,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고 없기가 일쑤였다.
너댓 살이던 시절에 햇살 옹기종기 모여있던 한식이 장센 집 대문 앞, 그래서 겨울 오후에는 동네 사람들이 모였들었던 곳에서 아버지가 구성지고 재미나게 동네사람들에게 들려주었던 <홍길동전> 이야기 속의 그 주인공이 점삼이 성이었다. 그 비밀 탈출구는 내가 고교시절 조증이 심하게 발병한 아버지로부터 엄마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최초로 아버지와 맞잡이를 하여 엄마를 대문 밖으로 피신시키고 나서 맞잡이를 놓자마자 감쪽 같이. 도망쳤던 비밀통로 이기도 했다.
뒷갓방 토방 위에 어린 내가 올라서서 작두 손잡이에 연결된 새끼를 오른손목에 감아서 잡고 큰 작두의 손잡이, 어른이 두 손으로 잡아야 잡히는 나무 손잡이에 오른발을 얹어 놓고 기다리고 있으면 나보다 세살 위의 '점삼이 성'이 볏집단을 적당한 크기로 나누어서 두 손으로 앙잡고서 막둥이가 작두 손잡이에 연결된 새끼줄을 들어 올리면 따라 벌어진 입, 작두날과 받침대를 연결한 고리가 있는 쪽 사이가 입의 끝지점인, 작두날이 크게 벌어진 사이에 점삼이 성이 옹그라 쥔 볏집을 최대한 입안 끝으로 넣어 밀착하자마자 어린 나는 작두 손잡이에 올렸던 발을 꿀려 밟으면 첫 작두질이 시작된다. 점삼이 성이 ''어야차!''하고 말을 던지면 막둥이가 ''밟고!''를 외치면서 발을 내리 밟아 볏집을 썬다.
잘게 썰은 집을 삼태기에 담아서 미리 끓고 있던 큰 가마솥에 차곡차곡 넣어서 삶는다. 삶다가 볏집이 줄어들어 가마솥 공간이 확보되면 삼태기에 담아 놓은 나머지 볏집도 최대한 솥에 넣고 소죽을 누르ㄱㆍ나 젓누 기역자 나무로 꼭꼭 눌러 솥뚜껑을 닫고 솔가지 불을 더 넣으며 소죽을 쑨다. 소죽이 거의 끓을 때쯤 큰 부엌 앞에 있는 구정물 통에 엄마가 저녁 밥을 지으려고 살을 씻고 남은 살뜬물을 떠다가 내가 부뚜막에 올라서서 무거운 솥뜨근껑을 잡아 끌어 열면 점삼이 성이 구정물을 끼얹는다. 가끔 두부를 만들고 남은 콩비지를 끼얹기도 하지만 잔치날이나 설날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손을 호호 불어가며 볏집단을 썰던 두 아이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르는 아침이다
소죽을 쑤는 일이 단순한 일이었지만 한 집안의 가장 큰 노동력을 차지하는 소를 겨우내 살찌우고 정비하는 중요한 일이었다. 소죽은 풀이 다 말라 비틀어 지는 늦가을부터 풀이 다시 자라나는 봄까지 볏집을 구정물에 삶아서 먹인다. 입춘이 지나고 언 땅이 녹기 시작하면 땅을 갈아 엎을 쟁기질의 유일한 노동력이 소였다. 점삼이 성에게 맡겨진 소, 점삼이 성이 금이야 옥이야 키워냈던 소는 나중에 점삼이 성 앞에 홀연하게 나타났던 경운기로 환생하였다. 삼산중학교를 마치고 졸업하기도 전에 전남체고에 가입학하여 합숙훈련을 하고 있던 점삼이 성을 퇴학시켜 집으로 끌고 내려와 경운기 앞에 세워둔 절대권력의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집안 일을 척척 해내는 점삼이 성을 집안 농사를 이어갈 자식으로 점지를 했던 것일까?
아궁이에 불을 붙이는 불쏘시게는 새끼를 꼬기 위해 일반벼 볏집단을 거꾸로 알곡이 달렸던 부위를 잡아 땅바닥에 두드리고 나서 점삼이 성이 손아귀에 쥐고서 밑동 부분을 펴주면 내가 갈퀴로 긁어서 겉집 보푸라기를 훑어낸 '거무적'(볏집 부스러기들)을 사용한다. 갈퀴질을 마치면 형은 우물에서 떠온 물을 입에 머금었다가 ''푸푸풉'' 소리를 내며 물을 뿌려서 따로 가려 놓는다. 볏집은 일반볏집만 사용한다. 일반 볏집은 초가지붕을 이어 올릴 재료로 쓰일 뿐만 아니라 소의 중요한 주식이었다. 나중에 새마을 운동이 벌어지고, 지붕개량을 마치고 나서는 수확량이 많은 통일벼로 벼품종을 바꿨으나 아직은 일반벼 품종만 농사짓던 때였다.
나는 깨끗하고 가지런하게 가려서 묶어진 새끼 꼬기용 볏집 들고, 형은 볏집을 긁어 나온 거무적을 휘휘 뭉쳐서 작은 정재로 향했다. 화약 냄새가 훅하고 나면서 성냥불은 거무적에 확 붙었다. 뭉친 거무적을 아궁이 앞부분에 미리 넣어 놓은 마른 솔가지에 옮겨 붙이고 어느정도 활활타고 있을 때 아직 덜마른 솔가지를 넣어서 퀘한 연기가 가득 차면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부엌을 뛰쳐 나왔다. 점삼이 성은 자세를 최대한 엎드려서 생솔가지에 불을 옮겨 붙였다.
불쏘시개감은 다양했다. 큰정재에는 남사골 밭에서 거두어 온 참깻대와 들깻대가 쌓여져서 불쏘시개로 쓰였다. 큰부엌은 주로 음식 조리용 땔감으로 갈비(소나무 잎이 떨어진 것)를 긁어와서 사용하였다. 또한 잔칫날에 부침개를 부칠때 쓰는 땔감으로 솔방울을 따로 모아 두었다. 누나들은 솔방울을 줍고, 우리는 갈비를 하러 다녔다. 우리 산은 이미 산치기를 했고, 초가을에 일꾼들이 마르기 시작한 솔가지 단을 져 나르면서 갈비도 듬뿍 장만해 놓았지만, 솔방울은 일일이 주워와야 했다.
갈비를 하러 산에 형과 형또레들과 함께 가면 나도 작은 망태를 매고서 따라 나섰다. 갈비를 긁기 위해서는 사람 발길이 잘 닿지 않는 비탈진 작은 계곡에 침투하여야 한다. 어느 정도 각자의 양을 긁어 모았으면 처음에 흩어졌던 뫼똥자리에서 다시 만난다. 집에 가져 갈 최소의 양은 각자 망태에 꾹꾹 눌러 담아 두고서 '갈비따먹기'를 한다. 주로 모여서 흩어지던 장소가 뫼똥(묘)이 있는 곳이었는데, 상당히 넓은 곳이었다. 각자 한 모데기씩 내어 놓고 각자 가지고 왔던 갈퀴를 멀리 돌려서 던지기를 한다. 대부분 갈퀴가 뒤집어져 눕는데, 한 사람이 제대로 안착하면 각자 내어 놓았던 갈비를 따먹는 놀음이었다. 점삼이 성은 덤으로 내가 가지고 갔던 망태를 채울만큼 따먹기를 매번 독식하다시피 했다.
여름에는 소꼴을 베어서 가지고 갔던 낫으로 동일한 방식으로 '소꼴따먹기'를 했다. 낫 끝을 잡고 팽그르 돌리면서 뫼똥에 던져서 꼽히는 낫의 주인공이 꼴을 따먹는 시합이었다. 이때도 신기하게 점삼이 성은 독식하였다. 어떤 때 나는 소꼴은 베지 않고 딱주만 찾아다닌 적도 있다. 어차피 형이 꼴 따먹기해서 채워질 것이니 빈망태만 걸치고 딱주를 뽑으러 다녔다.
땔감으로 어린 우리가 해 오던 것 중에는 소나무에 죽은 가지를 소나무에 올라가 낫으로 쳐서 모아오는 '새깨비' 또는 '새깽이'라고 불리우던 것이 있었다. 이것은 할머니 약을 다리거나 작은 음식들을 할 때 사용했다. 또 지난 여름에 큰 소나무에 미리 상처를 내놓았던 곳에 송진이 나와서 굳어있는 곳에 도끼로 찍어내는 '강솔'또는 '갱솔'이 있었다. 산에 나무하는 것 중에서 제일 힘들여서 가지고 오는 것이 '덩글' 또는 '끌틍'이라고 불리우는 것이 있다. 산치기를 하면서 배어낸 큰 나무가 세월이 지나 부석부석해지면 돌출된 부위를 도끼로 찍어서 조각들을 모아 오는 것이 있고, 작은 나무는 흙을 파서 뿌리째 파내어 오는 것도 있었다. 들이는 노력은 금광을 파는 노동인데, 가지고 오는 양은 너무 적었다. 또한 혼자는 작업이 어려웠고 2인1조로 다녔다. 형이 주로 땅을 팠지만 형이 잠시 쉬는 시간에 깔짝거려 주면 얻어 맞지는 않았다. 통뼈인 점삼이 성과 나의 도끼질과 괭이질은 차원이 달랐다. 일을 할 때면 언제나 의기양양하던 형은 그때마다 막내 구박의 시동을 걸곤 했다.
이제 그마저도 없으면 계곡 안쪽에 무성했던 소꼴이 비틀어 말라져 무성한 마른 풀을 베어 오는 땔감인데, 우리 형제는 그 '풀거무적'을 제대로 베어와 본적이 없었다. 부지런하기로 소문난 앞집 벙캐유센이 마을 주변 모든 산을 다 덭어 낸 다음이기 때문이었다. 언젠가부터는 아예 시도를 하지 않았다.
작은 부엌에서 쇠죽을 쑤며 미리 챙겨온, 물뿌린 볏집단을 3분의 2는 형이 나머지는 내가 아궁이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서 새끼를 꼬았다. 균일하고 단단하게 꼬는 형의 새끼에 비해서 굵었다 앏았다를 반복하는 볼품없는 내가 꼬아낸 새끼는 지청구를 듣기 일쑤였다. 어느덧 새끼 꼬는 기술이 비등해지자 내기를 걸어오는 형의 술수에 말려 많은 것을 잃었다. 특히 아버지가 막둥이게만 몰래 주셨던 사탕이나 껌이 점삼이 성이 노리는 찬탈 대상이었다.
소죽을 쑤던 가마솥은 내가 들어가 앉으면 머리만 보일 정도로 깊었다. 구정이 다가오면 목욕물을 덮히고 큰 다라이에 물을 퍼내서 목욕을 시켜주던 아버지의 그 큰 손을 아직껏 만나지 못했다. 막내인 나를 먼저 씻겨 내보내고 옆에서 불을 때며 물을 떠다 붓던 형의 때를 벗길때는 집안이 난리가 났다. 간지럼을 심하게 타던 점삼이 성은 등짝을 얻어 맞아 울다가 잠시 후 아버지 손이 겨드랑이에 닿으면 금새 낄낄거리기를 반복하느라 온 집안이 들썩거렸다. 밤이 되면 큰 부엌에서 엄마와 누나들이 소리소문 없이 설 때를 뺏다.
끝주신센이 돈벌이 하러 가느라 머슴일을 그만두게 되자 삼부레(삼동)마을 이센이 큰(상)머슴으로 오셨다. 쟁기질이 서툰 이센인지라 쟁기질을 할 때만 끝주신센이 와주던 때쯤에는 소를 키우지 않아서 깔담살이 하던 대수골떡 숙모집 병모형도 그만두고 도시로 떠났다. 덕분에 소죽을 쑤지 않던 점삼이 성이 중학교 2학년이던 때, 내가 전학오고 방학이면 본가에서 농사일을 돕던 형은 느닷없이 낚시바늘을 만들겠노라고 말도 안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저녁으로 군불을 때고 남은 잉그라지는 불에다 굵은 철사를 잘라서 시뻘겋게 달구었다가 바께쓰에 담긴 찬물에 식히고 다시 펜치로 집어서 잉글불에 달구다가 물에 집어넣기를 수 십번 한 후에 망치로 두드려 줄로 갈고 '페이퍼'로 갈고 닦아서 문절이용 낚시바늘을 만들어 냈다.
아궁이 앞에 마주 앉아서 타진 고구마를 까먹느라 온통 얼굴에 숯검정을 묻혔고, 마주보다가 배꼽 빠져라 옷던 점삼이 성이 어느덧 2년 후면 환갑의 나이다. 소를 잘 다루던 점삼이 성의 인생을 떠올려 보았다. 세 살때부터 끝주신센이 ''아이 메주야!''하고 부르면 ''칵 xx를!'' 하면서 반응을 했단다. ''니 메주 말고 저 메주 말이다.''하며 달랬다가 ''메주야! 소 몰고 나가자!''하면 어느새 외양간에 있는 소를 몰고 대문을 먼저 나섰다던 점삼이 성.
소를 내 보내고 조금 편했다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마주했던 경운기를 끝내주게 다루며 농사일을 하다가 도시로 도망쳤다. 살아계시는 동안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낸 점삼이 성이 작은부엌에서 생솔가지 퀘퀘한 연기를 피하지 않고 낮게 엎디어서 훅훅 불어서 끝내 불을 지피던 영화 속 첫 장면같은 그림이 선연한 아침이다.
다가오는 구정에는 엄마도 없는 점삼이 성 집에서 차례를 지내게 될 것이다. 이번 구정에는 점삼이 성의 손을 꼭 잡고 하룻밤을 자고와야 하겠다.
2019.1.27.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