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소논문 중 일부 발췌)
■1990년대 장정일과 유하의 시에서 나타난 시의 구조와 특성
3-1. 장정일의 시에서 나타나는 시의 구조와 특성
이번 가을에 유행할,
가을 옷이 나왔다,
담쟁이 넝쿨잎이 붉게 물들기도 전,
(.....생략.....)
올해 가을 옷이 소개된다,
활발하게 활동하는 네 명의 디자이너가 주장하는,
올 가을 유행색은,
자연색과 파스텔 톤,
강렬한 색상과 단순한 디자인이 만나는.
복고풍 정장 시리즈도 아울러,
(.....생략....)
비서실 최양 같을 거야,
부잣집 외동딸 같을 거야,
공주 같을 거야,
가을 옷이 나왔다,
언니 나 저 옷 입고 싶어,
네 달치 월급과 야근 수당이면 될 거야,
안 될까,
파스 하이드라지드는 먹지 않을 테야,
(.....생략....)
가을 옷이 나왔어,
가을 옷을 입고 싶어,
-장정일, 「가을옷」 일부분
위 작품은 패스티시 기법으로 이미지나 기호가 소비되는 대중문화의 현상을 차용하여 창작한 작품이다. 장정일은 자신이 쓴 「인공시학」의 에세이에서 「가을옷」을 쓰기 위해서 헌책방에 가서 가을호 여성지를 사 모아 왔고 거기서 가을 패션을 소개하는 30여 개의 짧은 문장과 형용사를 뽑아 30여 개의 시행을 만들었다 밝힌 사실이 있다. 이 작품에서 보면 가을호 여성지에 실린 ‘가을옷’의 글에 대한 가치판단, 그리고 비판이 없다. 장정일은 ‘가을옷’에 대해 소개하는 광고의 글들을 모아서 짜깁기하여 시창작을 한 것이다. 이 시는 기존의 전통을 부정하고 새로운 형식을 도모하는 방법론을 뛰어넘어 이미지나 기호가 삶을 지배하는 대중문화의 현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에서 이 시의 의의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러니까 ‘가을옷’을 사 입으면 “비서실 최양 같을 거야/ 부잣집 외동딸 같을 거야/ 공주 같을 거야”라고 말하는 부분이 바로 이미지나 기호가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대중문화의 삶을 반영하고 있다고 해석될 수 있다. “최양에서 부잣집 외동딸, 그리고 동화 속에서나 존재할 공주에 이르는 과정은 현실을 벗어나 환상적 유토피아의 세계로 들어서기를 바라는 대중문화의 욕망을 반영하고 있다.
위 장정일의 「가을옷」은 기존 시가 가지고 있는 모든 전통성을 부정하는 해체적 방법으로 시가 만들어졌다. 동시에 그 해체와 부정 위에서 새로운 시적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으며 기존 전통 서정시의 문법적 언어적 기능에서 탈주하여 새로운 시의 지형을 발견하고 그 발견성 위에 소비사회의 대중문화가 가져다주는 역기능적인 효과를 우회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적 형식의 특징은 패러디와 패스티쉬 기법 등 기존의 전통시들이 가지고 있는 형태와 은유구조 정제된 시어들에서 탈주하여 시와 현실, 시어와 일상어 사이의 구별을 배격하고 그 예로써 욕설, 비속어, 은어 등을 자유롭게 시 속에 유입하여 시를 건축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장정일의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에서 김춘수의 꽃을 패러디한 구조에서도 장정일의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시적 기류를 짐작할 수 있다. 모더니즘이 현실 뒤의 본질과 질서를 찾으려고 한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현실 그 자체를 표피적으로만 제시한다는 것에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으며 모더니즘이 실재와 필연성의 믿음에 근거를 둔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현실이란 가변적이고 허구적인 것, 우연성의 믿음으로 나타나며 모더니즘이 예술을 진지하고 심각한 대상으로 고민할 때 포스트모더니즘은 그러한 진지성을 패러디하여 유희의 대상으로 삼으며 세태를 풍자한다는 것에서 차이를 드러낸다.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장정일,<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전문
위 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김춘수가 감각할 수 없는 관념적 사유의 ‘꽃’으로 주지주의적인 모더니즘의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면 정정일은 위 시에서 그러한 관념의 내외벽을 모조리 무너뜨리며 ‘꽃’이란 철학적 사유를 일상의 세태에 대한 풍자성으로 시의 진원지부터 바꾸어 버리는 형식을 취한다. ‘라디오처럼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는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마치 일회성 제품처럼 가볍고 저렴한 것으로 전락되는 어떤 소비제품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소비되는 현대인의 감정을 패러디란 구조를 통해서 비판한다고 볼 수 있다.
Ⅲ.2. 유하의 시에서 나타나는 시의 구조와 특성
90년대의 대표적인 주자로 등장했던 유하의 시에서도 90년대의 시의 구조와 특성을 파악할 수 있다. 전 시대의 시가 표현할 수 없는 것과 표현할 수 있는 것의 대립구조에서 억압되고 유통되어 왔다면 90년대의 시는 표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저항과 반발, 그리고 자유롭게 표현할 양식에 대한 새로운 실험적 토대를 90년대의 시가 그 전기적인 역할 수행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뭐 되는 일이 없어,
취직 시험 떨어진 날 다리까지 부러져
투덜거리던 후배 녀석의 말처럼
시 쓰는 일마저 무력해져 가는
폭폭한 습작의 하루 하루
뻥
오늘은 튀밥 튀기는 소리가
종일 동네를 뒤흔든다
괜시리 삶의 어려움에 대하여
뻥까지 말라고
뻥!
뻥!
뻥!
뻥튀기 할아버지가
칠월의 뙤약볕 아래서
뻥을 튀긴다
-유하,<살아가기>전문
위 시에서도 시의 외피에서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시의 구조는 문체이다. 위 시, 유하의 문체는 흔히 우리에게 시적 언어를 요구하고 억압하였던 ‘ 서정적 자아’를 거느렸던 전통적 시에서 요구되었던 시적 규범을 허물고 있다. 시적 언어의 체계에 비속어를 가감없이 끌어들임으로써 표현하지 못하게 한 것들에 대한 반발과 저항의식을 나타내고 있다. 당시 시대 주류적인 시인들의 언어에서 나타나는 탈전통적인 언어의 현상과 시적 변동은 70~80년대의 자유에 대한 억압과 4.19와 5.18을 거치면서 급속한 산업화의 진행과 농촌에서 도시로의 사회 중심축의 변동과 무관하지 않다. 그 기반으로 하여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정보사회의 진입으로 들어서면서 냉전시대의 종말과 함께 자본주의의 예찬론이 사회에 만연하게 되고 ‘시인군’들은 자본주의가 전달해 주는 매혹의 열매와 그 열매의 뒷면에 목젖처럼 돋아 있는 불편한 불안을 경계하며 비판하였다.
특히 유하는 『무림일기』 문학과 지성사, 1989. 통해서 무협지라는 중국무협판타지 소설형식과 문체를 사용하여 당시 시대를 패러디하는 시들을 발표하였다. 이 시집에서 유하는 장정일과 같은 형식으로 유하 자신이 경험하고 체험하였던 무협지, 만화, 포로노, 등 키치적인 소재를 활용하여 시대의 불안과 물질 풍요로 연결되어 가는 자본주의의 모순에 저항하려 하였다.<문정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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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옷
이번 가을에 유행할,
가을 옷이 나왔다,
담쟁이넝쿨 잎이 붉게 물들기도 전,
가을 옷이 나왔다,
이제 막 인쇄소를 빠져나온,
최신,
숙녀 잡지에,
올해 가을 옷이 소개된다,
활발하게 활동하는 네 명의 디자이너가 주장하는,
올가을 유행색은,
자연색과 파스텔 톤,
강렬한 색상과 단순한 디자인이 만나는,
복고풍 정장 시리즈도 아울러,
선보였다.
유행하고 있는 페이즐리 무늬의 실크를 이용하여,
부드러운 소재를 딱딱한 양복 스타일로 재단한 것이 특
징인,
블루 계통의 투피스,
어깨는 일직선으로 떨어뜨리지만,
허리 부분에 주름을 잡아 리본을 체크하고,
스커트를 랩으로 만들어 부드러움을 가미했다,
거기다가,
머리에 쓴 체리 핑크와 머플러가,
강력한 대비효과를 거두고 있다,
가을 옷이 나왔다,
너무 단정한 느낌을 피하기 위한 리본,
어깨를 강조,
풍성한 분위기,
화려한 세팅의 보석 악세사리,
의도적인 각,
주름 효과,
따뜻한 느낌,
역삼각형의 실루엣,
대담한 액센트,
성숙한 이미지,
활동파,
연출에 따라 캐주얼의 표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정장
분위기,
멋쟁이는 칼라로 승부한다,
재미있는 조화,
스탠다드형 반고트,
단순한 커팅을 응용한,
소재는 올 캐시미어,
선염 스트라이프와 솔리드 울을 이용한,
도심 속의 가을 여심,
특별한 날 당신을 그날의 최고 미인으로 표현해 줄,
심플한 디자인이 격조 높게 보인다,
언밸런스 칼라 여밈의 시티 캐주얼 투피스,
패미닌 룩의 결정,
그래그래,
비서실 최양 같을 거야,
부잣집 외동딸 같을 거야,
공주 같을 거야,
가을 옷이 나왔다,
언니 나 저 옷 입고 싶어,
네 달치 월급과 야근 수당이면 될거야,
안 될까,
파스 하이드라지드는 먹지 않을 테야,
가을 옷이 나왔어,
봄날,
고향 언덕에 피던 진달래 같아,
최신 디자인이야,
가을 옷이 나왔어,
가을 옷을 입고 싶어,
장정일 『길안에서의 택시잡기』, 민음사, 1998, p.71~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