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에 이어 1980년대 한국대중음악 가운데 30여 장의 추천 음반을 중심으로 여러 기록과 이야기, 그리고 대표 음악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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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반을 대표하는 싱어송라이터 이재성의 3집 앨범은 건전가요를 포함한 총 10곡 가운데 2집 앨범에서 2곡이 재수록되어 완성되었다.
목원대학교 음악교육과 재학 당시인 1981년 'MBC대학가요제'에서 '나의 꿈, 그리고 사랑'으로 은상을 수상하며 가요계와 인연을 맺은 이재성은 1986년 발매된 이 앨범을 통해서 명실상부한 최고 인기가수 반열에 올라섰다.
이재성 음악의 모든 것이 함축된 이 앨범에는 KBS가요톱10에서 큰 히트를 기록한 두 곡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1987년 1월 28일에 1위에 오른 이후, 2월 11일까지 3주 연속 1위를 기록했던 '촛불잔치'와 5주 연속 1위에 오르며 골든컵을 수상한 '고독한 DJ'가 바로 그 곡이다.
이재성의 3집 앨범은 4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했으며, 이재성은 같은 해 KBS 10대가수상에 선정되었다.
'촛불잔치'는 1986년 MBC와 KBS, CBS 라디오의 공동조사에서 93회로 가장 많은 방송을 탄 노래로 선정되었다.
또한 '고독한 DJ'는 롤러장과 음악감상실에서 특히 많은 신청을 받았던 노래였으나. 다운타운 DJ의 사기 저하를 일으킨다는 이유로 한때 금지곡으로 묶이기도 했다.
발표된 지 30년이 지났던 노래 '촛불잔치'는 2015년 국내 음원서비스 사이트에서 갑작스레 실시간 차트 19위에 오르며 이슈를 모은 적이 있다.
이는 확인 결과 서비스 사이트 서버의 일시적인 시스템 오류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이재성은 1994년 '결론'으로 큰 히트를 기록했고 배우 최재성과 결혼하게 되는 황세옥과 포맨의 윤민수 등을 발굴하며 제작자로서도 성공적인 길을 걸어 나왔다.
1983년 서울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중이던 신대철은 스쿨밴드 센세이션을 결성한다.
향후 신대철의 동생 신석철 등이 대를 이어 기수로 활동하게 되는 센세이션에서 활동하던 신대철은 보다 더 헤비하고 전문적인 음악을 구사하기 위해서 새로운 밴드 시나위를 결성하게 된다.
1984년부터 파고다극장에서 자주 공연을 가졌지만, 보컬의 한계를 느낀 신대철은 부활에서 활동하던 검은진주 출신의 김종서를 영입한다.
1집 레코딩을 준비하던 과정에서 시나위는 김종서와 강기영이 탈퇴하고 이병문과 박영배를 새롭게 맞이한다.
시나위의 초반에는 이병문이 노래한 '크게 라디오를 켜고'와 '남사당패', '젊음의 록큰롤' 3곡이 수록되어 있다.
레코딩 과정에서 갑작스레 탈퇴한 이병문을 대신해서 보컬을 담당한 임재범이 다시 녹음을 했고, 재반에는 임재범의 보컬 버전으로 전곡이 수록되어 유통되었다.
제작사 서라벌레코드는 초반을 회수하려 했지만, 판매가 호조를 보이면서 초반은 자연스럽게 모두 판매되었다.
임재범이 전곡을 노래한 재반 역시 엄청난 속도로 판매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은 앨범의 재킷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초반 재킷의 석고상과 뒷면이 모두 밝은 톤인 것과 달리 재반의 재킷 앞뒷면은 다소 어두운 톤으로 프린팅되어 있다.
신대철은 백두산의 김도균, 부활의 김태원과 함께 초기 한국 헤비메탈 씬에서 '3대 기타리스트'로 통하던 뮤지션이었다.
파워적인 면에서 우위를 지녔던 김도균과 절제된 테크닉 속에 서정미를 담아냈던 김태원과 달리 신대철의 기타는 속주와 감성적인 면에서 이들보다 돋보였다.
1986년 3월 경쟁을 벌이던 세 명 가운데 신대철이 리드하던 시나위가 가장 먼저 정규 앨범을 내놓았다.
앨범 발표 얼마 후 음악전문지 월간팝송의 애독자 가요순위의 1위는 시나위의 노래와 멤버들이 휩쓸다시피 했다.
여러 부분에서 백두산의 김도균과 부활의 김태원은 데뷔 앨범 제작에 더욱 속도를 낼 수밖에 없었고, 같은 해에 순차적으로 백두산과 부활의 데뷔작이 발매되었다.
데뷔 당시 시나위 멤버들의 평균 연령은 20살이었다.
이 앨범을 계기로 당시에 활동하던 여러 밴드는 해외 유명 뮤지션들의 음악을 카피하던 수준에서 벗어나서 본격적인 창작의 시대를 맞이했다.
더 나아가 시나위의 데뷔 앨범은 파고다극장과 송성라이브, 그리고 인천, 부산 등에서 활동하던 지방 밴드에 이르기까지 "우리도 레코딩을 해서 앨범을 제작할 수 있다"는 자신감까지 부여했다.
이 점은 시나위의 데뷔 앨범 발표가 갖는 가장 큰 의미이다.
무당과 마그마가 시나위 이전에 시도했던 헤비사운드는 하드락의 범주 안에서 완성되었다.
이 앨범은 사운드적인 부분과 가창의 스타일 면에서 보다 증폭되고, 구성적으로도 헤비메탈의 완벽한 형식미를 지니고 있다.
당시까지 헤비메탈을 전문으로 하는 레코딩 엔지니어가 없었던 탓에 시나위는 녹음 당시 애를 먹었다.
시나위의 데뷔 앨범의 녹음은 강인원과 해오라기의 1집 앨범을 녹음한 경력을 지닌 최병철기사가 서울 스튜디오에 진행했다.
이 때 시나위 멤버들은 최병철기사에게 AC/DC와 같이 자신들이 추구하는 음악과 비슷한 해외 밴드의 음악을 들려주었다.
짧은 시간동안 음악적으로 교감을 이루면서 시나위의 데뷔 앨범의 녹음은 단시간에 완료될 수 있었다.
경향신문에서 선정한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 가운데 32위를 차지했던 시나위의 데뷔 앨범은 건전가요를 제외하고 총 8곡이 수록되어 있으며, 7곡의 노래와 1곡의 연주곡으로 구성되었다.
신대철은 전곡에서 작곡을 담당했으며, 임재범은 '크게 라디오를 켜고'를 비롯해서 5곡에 신대철과 공동작곡자로 참여했다.
작사는 드러머 강종수가 4곡을 담당했으며, 1기 시나위 당시에 베이스를 담당했던 안준섭이 작사한 '그대앞에 난 촛불이여라' 등 2곡도 포함되었다.
1986년은 시나위가 최초의 헤비메탈 앨범을 발표했고, 뒤이어서 백두산과 부활의 데뷔앨범이 발매되었다.
변방에서는 뮤즈에로스를 중심으로 '메탈 프로젝트'가 활동하고 있었고, 단대부고와 서울고 등을 위시한 강남권에서는 많은 스쿨밴드가 등장했다.
강남권과 강북권으로 나뉘었던 헤비메탈 초창기에 시나위는 신중현이 세운 클럽 록월드를 중심으로 강남권의 세를 확장했으며, 부활은 강북권으로 분류되며 파고다극장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최초 부활은 디 엔드(The End)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멤버는 김태원(기타. 보컬), 이지웅(기타), 이태윤(보컬. 베이스), 황태순(드럼)으로 구성되었다.
검은진주의 김종서 가입 이후 베이스로 전향한 이태윤이 탈퇴를 하면서 보헤미안에서 기타를 담당하던 김병찬이 새롭게 영입되었다.
전문 보컬리스트 김종서를 맞이한 부활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85년 10월 파고다극장에서 '제1회 부활, 파고다 Rock Concert'를 개최한다.
당일 2회로 진행된 이 날 공연의 오프닝과 게스트는 각각 보헤미안과 시나위가 담당했다.
당시 파고다극장의 객석은 560석이었다. 이 날 공연은 1·2회 모두 매진을 기록했고, 자리가 없어서 되돌아간 인원도 상당했다.
종로경찰서에서 교통정리를 나올 정도였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의 관객이 동원되었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파고다극장에서의 성공적인 공연 이후 부활은 '6회 강변가요제'에 출전한다.
마음과 마음이 '그대 먼 곳에'로 대상을 차지한 이 가요제에서 부활은 예선 탈락하고 만다.
또한 이 가요제에는 밴드 파이오니어의 보컬로 이승철이 출전했으며, 역시 예선 탈락했다.
부활과 시나위는 결성 초기부터 라이벌 의식이 강한 밴드였다.
공교롭게도 두 팀은 보컬의 안정감을 기하기 위해 김종서라는 공통된 분모 속에서 데뷔앨범 제작 이전의 과정을 치렀다.
김종서를 먼저 끌어들인 것은 부활이었고, 김종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시나위로 이적한다.
그러나 정작 김종서는 두 그룹의 그 어느 데뷔앨범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작은하늘로 이적했다.
부활은 김종서의 탈퇴로 새로운 보컬을 찾기 위해 분주했다.
그러던 중 연습실에 자주 오던 건반주자 유승렬이 오디션에 이승철을 데리고 왔다.
오디션으로 김현식의 '사랑했어요'와 딥 퍼플(Deep Purple)의 'Soldier Of Fortune'을 부른 이승철은 부활의 새로운 보컬로 발탁되었다.
부활의 데뷔 앨범은 헤비메탈 앨범 가운데 멤버들의 실력과 기획·마케팅이 결합되어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당시 세계적으로 인정받던 일본 그룹 라우드니스(Loudness)와 마이클 쉥커(Michael Schenker) 등을 인용한 보도자료는 충격적이었다.
특히 1984년 발매된 마이클 쉥커 그룹(MSG)의 라이브 앨범[Rock Will Never Die]를 차용한 데뷔앨범의 타이틀은 락 마니아들에게 친숙함과 진정성을 동시에 전달했다.
이는 시나위와 백두산보다 많은 30만장 이상의 앨범 판매량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소였다.
부활의 데뷔앨범 뒷면에는 5명의 관계자들이 부활 음악에 대해 촌평한 글이 담겨져 있다.
이 가운데 '경복고교 3학년 이호석'은 부활 팬클럽의 회장이었으며, 가수 신해철의 친구였다.
이호석의 소개로 부활의 연습실을 자주 왕래하던 신해철은 김태원에게 음악적 조언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튜디오의 1프로가 3시간 30분이었던 시절에 부활 1집의 총 레코딩 시간은 이틀간 6프로였다.
김태원은 1집 레코딩 당시에 '비와 당신의 이야기'를 타이틀곡으로 내정하고 있었다.
최종 타이틀곡이 된 ‘희야’는 김태원의 친구 양홍섭이 자신의 여자친구가 백혈병에 걸려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아픔을 음악으로 담은 곡이다.
당시 한국갤럽의 조사에서 '국내 여성의 끝 이름자 순위'에서 '희'자로 끝나는 이름이 1위를 차지했었다.
순애보적인 사연이 '희'로 끝나는 여성들에게 더 어필할 것으로 판단한 멤버들은 보다 대중적인 '희야'를 타이틀곡으로 선정하게 된다.
'희야'는 2003년 신대철과 김도균, 김태원이 결성한 D.O.A. Guitar Project Band의 앨범에 수록되며 의미있는 리메이크가 진행되기도 했다.
그리고 수록곡 가운데 가장 빠른 비트를 지닌 '인형의 부활'은 원래 제목이 '인형의 친구'였는데, 밴드명을 의도적으로 집어넣은 곡이다.
전원석은 명지대학교 재학시절인 1984년 블랙 세인트(Black Saint)의 멤버로 '대한민국 제1회 문화공보부장관배 쟁탈 전국대학보컬&그룹사운드경연대회'에 출전하며 음악계에 데뷔했다.
전원석이 기타를 맡은 블랙 세인트는 이 대회에서 '그 피리소리'로 동상을 차지했다.
이후 전원석은 같은 대회에 출전했던 은상 수상 밴드 뮤즈에로스(Museros)의 멤버 김비오, 김현제와 대상 수상 밴드 탈무드의 멤버 이승호 등과 함께 6인조 포크락 밴드 주사위를 결성한다.
주사위는 1985년 [불꽃놀이/소나기 내리던 날]을 발표한 후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던 다섯손가락과의 경쟁에서 밀리고 군입대 등의 상황으로 자동 해체되었다.
1년이 흐른 1986년 전원석은 [전원석 1집/주사위]를 발표하며 화려하게 솔로 데뷔를 이뤘다.
13곡이 수록된 전원석의 1집 앨범의 뒷면은 '소나기 내리던 날'을 포함해서 '불꽃놀이', '피고지는 별들처럼' 등 주사위 앨범에 수록되었던 4곡이 전원석의 새로운 목소리로 실려 있다.
이 앨범에서 전원석의 목소리는 다듬어지지 않는 가운데 시원하게 뻗어 나가던 이전의 창법과 달리 여러 감성을 자신감 넘치게 표출하고 있다.
특히 주사위 시절의 곡을 다시 부른 노래들은 기존 록 스타일에서 발라드 창법으로 바뀐 전원석의 감미로운 감성까지 느낄 수 있는 매력적인 트랙들이다.
수록곡 가운데 '소나기 내리던 날'은 이 앨범을 포함해서 총 3가지 버전이 존재한다.
먼저 뮤즈에로스가 은상을 차지했던 가요제의 기념음반에 수록한 버전이 있고, 주사위의 앨범에도 리메이크되어 담겨 있다.
각 시기의 보컬과 밴드 스타일이 다르기에 비교해서 듣는 재미가 크다.
'소나기 내리던 날'은 뮤즈에로스와 주사위의 멤버였던 김비오가 중학교 시절에 완성시킨 곡으로 뮤즈에로스 활동 당시에 '젊은이의 행진'을 통해서 대중적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던 노래였다.
수록곡 가운데 크게 히트를 기록했던 '떠나지마'는 2002년 브라운 아이즈(Brown Eyes)를 시작으로 조관우와 디아가 차례로 부르면서 세대를 넘어선 발라드 명곡으로 손꼽힌다.
이 곡은 부활의 '희야'로 데뷔한 작곡가이자 가수인 양홍섭이 박원조와 함께 만든 노래였다.
단조와 장조를 고르게 오가는 멜로디 라인이 인상적인 '떠나지마'는 인트로에 흐르는 피아노 전주가 특히 매력적이다.
또한 젊은이들에게 어필하기 쉬운 이별의 애절함을 담은 가사와 전원석의 록과 트로트를 오가는 다양한 창법이 담긴 '떠나지마'는 성악을 전공했던 그답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매끄럽게 담겨져 있다.
제10회 대학가요제에서 각각 대상과 금상을 수상했던 유열과 이정석의 인기 역시 뜨거웠던 1987년 당시에 전원석은 가요계의 세대교체를 이루는 대표적인 남자가수로 손꼽혔다.
그리고 발표 이후 1년 여 동안 꾸준하게 인기를 유지하던 '떠나지마'는 전원석에게 KBS가요대상 신인상을 안겼다.
1987년 가요계에는 중창단 열풍이 불었던 시기였다.
포크 계열의 해바라기와 수와진, 댄스 계열의 도시아이들과 소방차, 세또래, 그리고 전통가요계의 서울시스터즈와 부부듀엣 딱따구리와 둘바라기 등이 당시에 활동했던 대표적인 중창단으로 손꼽혔다.
여기에 가요제 출신으로 바다새와 작품하나, 그리고 트리오 여운까지 합류하면서 대중가요계는 신선함을 더해갔다.
트리오 여운은 경성대학교의 기타 동아리로 시작되었다.
이곳의 선후배 관계였던 안현진과 박순화, 고상우로 구성된 트리오 여운은 1987년 '8회 강변가요제'에 '홀로된 사랑'으로 출전해서 대중음악계에 첫 발을 들였다.
당시 '매일매일 기다려'의 티삼스와 '진실이야'의 제제 등 실력있는 팀들을 누르고 은상을 차지했던 트리오 여운의 인기는 엄청났다.
강변가요제가 끝난 이후부터 대상을 차지했던 문희경의 '그리움은 빗물처럼'보다 더한 히트를 기록해 나간 '홀로된 사랑'은 1988년 4월 13일부터 5월 4일까지 KBS가요톱10에서 4주 연속 1위를 기록했다.
트리오 여운이 첫 1위를 기록하던 당시 1위는 역시 가요제 출신 가수 조하문의 '이 밤을 다시 한 번'이었다.
트리오 여운은 ‘8회 강변가요제’의 기념음반과 데뷔음반을 끝으로 활동이 정지되었다.
팀의 실질적인 리더였던 안현진의 군입대로 자연스럽게 해산했던 트리오 여운은 멤버 가운데 고상우가 그나마 음악적인 맥을 이어 나갔다.
1991년 고상우는 ‘너는 이미 너무 먼 사람’을 타이틀로 솔로 데뷔 앨범을 발표했으며, 이 앨범에는 박선주와 장필순 등이 참여했다.
안현진은 현재 부산에서 평범한 직장인으로 생활하고 있다.
(* 해당 앨범은 권리사의 요청으로 인해, 서비스가 불가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대중가요계에서 윤항기와 조하문에 이어서 목사의 길을 걷고 있는 김종찬은 1981년 '서울엔터프라이즈 가요제'에서 우승하며 가요계에 발을 들였다.
김종찬의 목소리는 매우 허스키하면서도 고음이 깨끗한 것이 특징이다.
김종찬은 자신의 누나가 운영하던 방배동 라이브 카페 '애드립'에서 두 가지의 소중한 인연을 갖게 된다.
당시 라디오 DJ로 활동하던 배우 김희애가 '애드립'을 자주 찾아왔다.
그 곳에서 간혹 무대에 올라 노래하던 김종찬을 지켜본 김희애는 가능성을 예감하고 음반사를 직접 연결시켜줬다.
또 다른 인연은 데뷔 이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타악기 주자이자 독보적인 음악세계를 지닌 박재천과 관련된 사연이다.
군복무 당시부터 데뷔 앨범을 준비하던 박재천과 자주 어울렸던 김종찬은 [박재천의 Devil Music]에 참여하게 된다.
최호섭과 박주연, 김정욱 등이 함께 참여했던 이 앨범에서 김종찬은 '사랑한다는 것은'과 '사랑했음에도' 두 곡을 불렀다.
하지만 이 앨범은 '사랑이 저만치 가네'와 '토요일은 밤이 좋아'가 히트하면서 주목받던 김종찬의 새 앨범으로 음반이 변형되어 발표되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박재천은 해당 음반을 전량 회수해서 폐기해 버렸다.
1988년 라디오 방송을 휩쓸다시피 한 노래는 전영록의 '저녁놀'이었다.
김종찬의 '사랑이 저만치 가네'는 같은 해 7월 13일 KBS가요톱10에서 3주 연속 1위를 달리던 전영록의 '저녁놀'을 제치고 1위에 오르며 엄청난 인기몰이를 시작했다.
이러한 기세는 결국 시간이 꽤 흐른 11월 2일에 '토요일은 밤이 좋아'를 가요톱10 1위에 등극시켰다.
2000년대 들어서 '불타는 금요일'을 뜻하는 '불금'이 유행어가 되었듯이 김종찬의 '토요일은 밤이 좋아'는 발표 당시에 토요일의 즐거움을 대변하는 노래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H2O는 한국 헤비메탈의 원년인 1986년에 등장했다.
재미교포 출신의 멤버들로 구성되었던 H2O는 1985년 밴드 흙을 모태로 시작되었다.
흙은 1980년 6월 미국의 인기 가수 레이프 가렛(Lief Garrett)과 함께 내한했던 무당의 멤버 장화영이 이끌던 밴드였고, 이후 장화영과 김준원이 주축이 되어 새롭게 결성된 밴드가 H2O이다.
H2O는 들국화의 LA공연 때 합동 공연을 펼치면서 서서히 국내 대중에게 알려졌으며, 미국 산타 모니카에서 제작된 '멀리서 본 지구' 등 세 곡이 수록된 미니 앨범을 1986년에 발표했다.
1986년 한국 헤비메탈은 의미있는 등장이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다.
한국 헤비메탈 최초의 앨범으로 기록되는 시나위의 데뷔 앨범이 3월에 발매된 것을 시작으로 6월에는 뮤즈에로스(Museros)와 불새, 혼 등의 그룹이 소속된 '메탈 프로젝트(Metal Project)'가 파고다극장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가요에 헤비 사운드를 덧입힌 백두산의 1집이 발매되었고, 7월에는 하드락과 헤비메탈의 경계를 무너뜨린 블랙 신드롬(Black Syndrome)이 결성되었으며, 10월에는 한국적 서정미를 앞세운 하드락을 구사했던 부활의 1집이 발매되었다.
그리고 활화산과 아발란쉬(Avalanche)가 결성되었던 12월에 H2O는 멜로디를 앞세운 세련된 헤비메탈 사운드를 지향하며 데뷔 싱글 [멀리서 본 지구]를 내놓았다.
이 시기에 흥미로운 점은 단대부고와 서울고, 상문고 등을 위시한 소위 8학군 진영의 스쿨 밴드까지 가세하면서 한국 헤비메탈이 부흥기를 맞이했다는 점이다.
당시 8학군에서 주로 활동했던 이들은 김세황, 손무현, 신윤철, 오태호 등이었다.
1987년 수많은 헤비메탈 밴드들이 파고다극장과 송설라이브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1987년 당시 한국 헤비메탈 밴드들은 주로 영국과 미국 헤비메탈과 흡사한 사운드를 지향했다.
때문에 기타에 중심을 잡으면서 속도와 비트에 주한 연주를 구사했다.
그러나 H2O의 음악은 한국 헤비메탈이 보다 다양한 장르와 비주얼까지 연출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H2O는 다른 밴드와 달리 키보드 파트를 포함시킨 라인업을 통해서 웅장하면서도 복잡하지 않은 사운드를 구사함으로 해서 디스토션과 건반이 조화를 이룬 헤비 사운드가 가능함을 보여줬다.
H2O의 등장 이후 한국 헤비메탈이 변화를 맞이했듯이 이들의 데뷔 앨범 [1집 안개도시]는 동시대의 여러 밴드와 비교했을 때 격이 다른 작품이다.
특히 장화영의 뛰어난 키보드 연주와 김준원의 매력적인 무대 연출은 H2O를 상징하는 이미지였다.
초기 한국 헤비메탈을 대표하는 곡이자 앨범의 타이틀곡 '안개도시'는 웅장한 키보드의 인트로에 이어지는 간결한 비트의 연결이 매우 인상적인 노래로써 아직도 그들의 무대에서 자주 연주되고 있다.
H2O의 원년멤버이자 보컬인 김준원은 과거 월간 파라노이드(Paranoid)와의 인터뷰에서 타이틀곡 '안개도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고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가슴 설레던 마음을 음악으로 담고 싶었다. 그리운 사람들과 서울이라는 도시에 대한 그리움을 안개로 쌓인 도시로 연출한 것이다.”
앨범 발표 이후 H2O는 한국 헤비메탈의 비전에 연민을 느끼며 멤버 전원이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그러나 보컬 김준원은 홀로 남아서 시나위 출신의 강기영과 김민기, 카리스마 출신의 박현준과 의기투합해서 H2O의 2기 시대를 열었다.
헤비메탈이 막 기지개를 켜던 1986년 다섯손가락은 전작을 이어서 서정성과 감수성을 바탕으로 한 2집 앨범을 발표했다.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은 다섯손가락에서 기타와 보컬, 작곡과 작사를 담당하는 이두헌이 가장 아끼는 곡이다.
이 곡은 이두헌이 한 여자를 향해 완성한 3부작 사랑가 중 첫 번째 노래였다.
1집의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을 이어서 2집 앨범에는 '사랑할 수 없는지'가 새로운 사랑의 바람으로 담겨져 있다.
'사랑할 수 없는지'를 잇는 사랑가는 그의 원맨 밴드로 제작된 4집 앨범에 수록되었던 '그 날 이후로'이다.
다섯손가락의 2집 앨범 수록곡 가운데 마니아들에게 크게 어필한 노래가 하나 존재한다.
당시에 프로그래시브락 밴드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와 아시아(Asia)의 음악에 심취해 있던 이두헌이 작곡한 '빈 지게'가 바로 그 곡이다.
앨범 내에서 유일하게 연주곡으로 수록된 '빈 지게'는 상당히 고급스러운 편곡과 연주가 깃든 트랙으로 핑크 플로이드의 'Shine On You Crazy Diamond'와 흡사한 구성을 지니고 있다.
이렇듯 이국적인 음악성과 제목이 얼핏 이질적으로 이해되지만, 국악기 등을 가미한 이 곡에는 작은 사연이 존재한다.
이두헌의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지게에 나무를 짊어 매고 온 후 마당 한켠에 세워놓았던 빈 지게에 대한 기억을 음악으로 담아낸 것이다.
2006년 보이그룹 동방신기가 다섯손가락의 '풍선'을 새롭게 부르면서 다섯손가락이 재조명을 받았던 때가 있었다.
'풍선'은 만화 월간지였던 '보물섬'에 연재되던 김동화 작가의 '요정 핑크'에서 주인공 핑크가 풍선을 타고 하늘을 날아가는 장면을 보고서 이두헌이 작사한 곡이다.
이두헌은 2016년 3월 경주 한국대중음악박물관과의 인터뷰에서 “1집 이후 멤버들이 교체되면서 솔직히 다섯손가락은 와해 직전이었다. 그러나 레코드사와의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몇몇 지인들의 도움 속에서 2집 레코딩이 진행될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 지인 중 가장 큰 힘이 되었던 이는 바로 김성호였다. 이두헌은 스스로 김성호의 제자를 자청한다.
김성호의 노래가 두 곡 수록된 2집 앨범에서 가장 큰 히트를 기록한 노래는 단연 '풍선'이었다.
이 곡의 기타는 이두헌이 아닌 김성호가 담당했으며, 초반 도입부의 "지나가버린" 다음의 후렴구 부분도 임형순과 이두헌의 목소리가 아닌 김성호의 목소리였다.
베이스 역시 박문일이 아닌 신현권이 담당했다.
1988년 2월 발매된 [1집 아! 바람이여]의 히트로 박남정은 원조댄스 가수의 성공신화를 그려 나왔다.
대중에게 안착한 박남정은 1집 이후 김정진 감독의 영화 ‘새앙쥐 상류작전’에 출연했고, 같은 해 11월에 ‘붉은 태양’과 '사랑의 불시착'을 타이틀로 한 2집 앨범을 발표했다.
이 앨범의 타이틀곡은 '사랑의 불시착'이었다. 그러나 대중의 반응은 '사랑의 불시착'보다 '널 그리며'에서부터 시작되었고, '널 그리며'는 1989년 가요톱10에서 골든컵을 수상했다.
2월 1일에 1위를 기록했던 '널 그리며'는 2주차에 변진섭의 '홀로 된다는 것'에 잠시 1위 자리를 내준 이후 3월 19일까지 5주 연속, 통산 6주 1위를 기록했다.
'사랑의 불시착'은 6월 18일부터 2주 연속 1위를 기록하다가 7월 9일에 주현미의 '짝사랑'에 잠시 1위 자리를 내줬고, 7월 23일에 1위를 탈환했다.
결국 8월 13일에 통산 7주 1위를 기록하며 또 한 번 골든컵을 수상하게 된다.
이는 한 앨범에서 두 개의 골든컵을 배출한 것으로 가요톱10 최다 1위를 기록한 조용필도 이루지 못했던 신기록이었다.
박남정은 이 앨범에서 '널 그리며' 등 4곡을 작사·작곡하면서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재능도 발휘했다.
특히 앨범의 첫 번째 트랙으로 자리한 '붉은 태양'은 박남정의 가창력이 돋보이게 완성된 노래이며, 김기표가 작곡한 '안녕 그대여' 역시 박남정의 매끄러운 창법을 접할 수 있는 곡이다.
또한 유로 댄스와 트로트가 결합된 '널 그리며'는 완성도가 매우 높은 곡이다.
'널 그리며'는 라디오는 물론 박남정이 방송에서 노래를 부르며 추던 일명 'ㄱㄴ(기역니은)' 춤에 이르기까지 큰 히트를 기록했다.
이 춤은 전국의 거의 모든 초등학교 학생들이 장기자랑 시간에 박남정의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붐으로 이어졌다.
일각에서는 아이들이 성인가요를 따라한다는 것을 '사회문제'로 부각시킬 정도로 박남정과 '널 그리며'는 전국민적인 이슈를 낳았다.
또한 '사랑의 불시착'은 디스코와 테크노 버전 등으로 편곡되어 전국의 나이트클럽과 롤러스케이트장을 휩쓸었다.
이 앨범의 활동을 위해 박남정은 '프렌즈'라는 백댄서 팀을 조직해서 화려함을 더했다.
이 팀에는 이후 서태지와 아이들의 멤버로 가입하게 되는 이주노와 양현석이 멤버로 활동했었다.
프렌즈는 이후 엄정화의 백댄서 팀으로 활동을 이어 나갔다.
1979년 이후 두 장의 솔로 앨범을 발표했던 전인권은 세션 기타리스트 함춘호의 소개로 허성욱을 처음 만났었다.
두 장의 정규 앨범과 한 장의 라이브 앨범을 발표했던 들국화 이후인 1987년 전인권과 허성욱이 발표한 [1979-1987 추억들국화]앨범은 들국화의 새로운 부활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앨범은 두 사람이 만난 시점부터 들국화가 해산된 시기까지의 이야기를 함축한 음반이었다.
그리고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전인권으로 거듭나기 위해 제작된 [전인권 3집]에도 참여했던 허성욱은 이 앨범의 연주를 마지막으로 1997년 캐나다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이 앨범은 전인권 보컬의 전성기라 할 만한 시기에 밴드 파랑새와 조화를 이룬 작품이다.
'파랑새'를 앨범의 첫 번째와 마지막 트랙에 위치시킨 수록곡 중 절반가량은 전인권이 들국화 전후에 노래했던 곡들을 리메이크한 버전으로 채워져 있다. 들국화의 조덕환이 작사, 작곡한 '아침이 밝아 올때까지'와 '축복합니다', 허성욱과 함께 했던 [1979-1987 추억들국화]의 '사랑한 후에'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따로 또 같이의 1기 당시에 나동민이 작곡했던 '맴도는 얼굴'을 '헛사랑'으로 제목을 바꿔서 수록한 것도 이채롭다.
포크부터 락에 이르기까지 전인권이 선보인 3집 앨범에서의 음악적 기취는 다른 앨범과 달리 재킷 사진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도 잘 드러난다.
또한 전인권의 1집에 수록되었던 '그 아이'에서 전달되던 청량감 넘치는 멜로디와 전인권 보컬의 화려함이 빛나는 '가을비’와 '아직도'는 비록 큰 히트를 기록하지 못했지만 그의 뛰어난 음악성이 담긴 곡이다.
특히 최구희의 기타와 허성욱의 건반이 매력적인 '아직도'는 전인권의 가창을 대표하는 노래로 손꼽힌다.
앨범의 타이틀곡이자 차트에서도 맹위를 떨친 '돌고, 돌고, 돌고'는 전인권이 마약복용으로 수감 중인 시절에 완성된 곡이다.
알 스튜어트(Al Stewart)의 'The Palace Of Versailles'를 번안해서 부른 '사랑한 후에'의 가사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며 완성된 노래이다.
그리고 앨범 내에는 화가를 꿈꿨던 전인권이 직접 그린 자화상이 삽입되어 있다.
신촌 블루스 1집은 뮤직디자인에서 제작되었고, 이후 엄인호는 김현식의 소개를 통해 동아기획의 김영 사장과 계약을 이루게 된다.
신촌 블루스 1집의 히로인이 한영애였다면, 2집의 히로인은 정서용이다.
1집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아쉬움'으로 그 실력을 인정받았던 정서용은 1986년에 개봉한 영화 '청 블루스케치'에서 스캣송 '그대를 사랑할 수 없고'로 데뷔했던 실력파 보컬리스트이다.
그리고 코러스 파트에서 눈여겨 볼 인물이 바로 정경화이다.
그녀는 정서용의 소개로 코러스에 참여했는데, 이 앨범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신촌 블루스 3집에서 메인 보컬을 담당하게 된다.
포크에 기반한 블루스를 주창했다는 점과 이를 대중화시키기 위해 신촌 블루스를 결성시켰다는 점에서 엄인호와 이정선은 2집 앨범까지 한 몸과 같았다.
두 사람은 1집 앨범에서 다소 조심스럽게 대중적인 트랙을 배치시켰던 것과 달리 2집 앨범은 보다 깊어진 블루스의 향기를 담아냈다.
1985년 엄인호의 솔로앨범과 신촌 블루스의 1집에 수록되었던 '바람인가'를 새로운 버전으로 수록하고, '산위에 올라'에서 블루스락의 진수를 선보인 이정선의 연주는 이를 잘 대변한다.
댄스와 발라드가 대세를 이루던 1980년대 후반 신촌 블루스의 2집 앨범은 블루스를 토대로 레게와 훵키, 재즈 등까지 담아내며 다양한 음악성을 보여준 작품이다.
신촌 블루스의 2집 앨범이 특히 여러 장르를 아우를 수 있었던 계기는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의 참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1988년 '언제나 그대 내곁에'를 타이틀로 한 [김현식 Vol.4]를 발표하면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던 김현식의 합류로 신촌 블루스의 2집 앨범은 록의 기운까지 가미시킬 수 있었다.
또한 데뷔앨범으로 퓨전재즈의 대중화를 선도하던 봄여름가을겨울의 참여 역시 신촌 블루스의 2집이 지닌 다채로운 음악을 상징한다.
총 9곡이 수록된 가운데 김현식이 3곡, 정서용과 엄인호, 이정선이 각각 2곡, 봄여름가을겨울이 1곡의 노래를 담당했다.
엄인호가 소속되었던 밴드 장끼들의 노래였던 '바람인가'와 '골목길'이 수록된 점은 이 앨범의 흥미로운 요소이다.
'골목길'은 1982년 앨범 [장끼들]에 처음 수록된 이후 엄인호의 솔로 앨범과 방미의 [84 방미] 앨범에 수록되었었다.
당시 이렇다 할 히트를 기록하지 못했던 '골목길'은 이 앨범에서 김현식의 화려한 창법과 독특한 연주 방식이 가미되면서 비로소 대중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1집 앨범에서 한영애가 가창했던 '바람인가'는 이문세의 '빗속에서'를 접속곡 형식으로 연결시켜서 '바람인가, 빗속에서'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정선표 블루스의 정수가 담긴 '산위에 올라'는 이정선이 선보인 마지막 신촌 블루스 음악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봄여름가을겨울은 보사노바풍의 '또 하나의 내가 있다면'으로 한층 세련된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눈여겨 볼 곡은 산울림의 9집에 수록되었던 '황혼'이다.
녹음 당시에 세션으로 참여했던 엄인호가 직접 선곡한 신촌 블루스의 '황혼'에서 정서용은 베시 스미스(Bessie Smith)를 연상시키는 성량과 화려한 노래 실력을 보여줬다.
푸른하늘의 데뷔앨범은 원래 '새벽기차'로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던 다섯손가락과 공중전화, 태백산맥이 소속된 서울음반에서 발매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다른 뮤지션보다 먼저 계약을 이뤘음에도 발매 시기가 늦춰지자, 푸른하늘의 유영석은 자비를 들여서 앨범을 제작하게 된다.
이후 홍보 방안을 찾던 푸른하늘은 동아기획과 계약을 맺게 되었고, 유통을 서라벌 레코드를 통해 진행하게 된다.
푸른하늘을 맞이한 동아기획은 음악다방과 지방 방송을 중심으로 푸른하늘의 기반을 다졌고, 겨울이 다가오면서 타이틀곡 '겨울바다'가 반응을 얻어내기 시작했다.
푸른하늘은 '남성들이 노래하는 애절한 사랑이야기'라는 특성으로 여성들에게 특히 많은 사랑을 받았던 밴드였다.
푸른하늘 노래의 가사는 자조적이고 한이 서린 감성이 주로 담겨졌다.
일인칭 시점에서 지난 과거를 바라보거나, 회상하며 읊어가는 가사의 흐름도 특징이다.
푸른하늘의 대표곡 '겨울바다'는 '겨울바다로 가자, 메워진 가슴을 열어보자'로 시작된다.
톤이 지극히 여성적이고 서정적임을 확연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푸른하늘의 데뷔앨범에는 건반을 통한 서정미와 웅장함이 고르게 배치되어 있다.
'겨울바다'와 함께 큰 사랑을 받았던 '하얀 사랑'은 이러한 푸른하늘 음악의 장점이 함축적으로 담겨진 곡이다.
1980년대 후반 2인조로 축약된 해바라기가 한창 인기를 누리던 시절에 남성 듀엣으로 구성되어 활동하던 가수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때 깨끗한 음색이 어우러진 절묘한 화음과 다양한 장르가 뒤섞인 팝 사운드를 구사하던 수와진은 아름다운 가사를 지닌 '파초'의 큰 히트를 통해 대중가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수와진을 논할 때 명동성당 앞에서 진행하던 '심장병 어린이 돕기' 공연을 빼놓을 수 없다.
버스킹의 원조로 기억되는 수와진의 명동성당 앞 공연은 '아베마리아'의 가수 김승덕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수와진은 1집의 '새벽아침'과 2집의 '파초' 등의 큰 히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 공연을 진행시켜 나왔다.
그러나 1989년 1월 1일 수와진의 안상진이 여의도 고수부지에서 괴한들에게 피습을 당하는 큰 사고를 겪게 된다.
안상진은 이후 세 차례의 뇌수술을 받아야만 했고. 수와진의 활동은 자연스럽게 정지되고 말았다.
파초과 나무는 잎이 넓고 크기 때문에 갑자기 비가 많이 내리거나 햇살이 뜨거운 열대지방에서 지나가던 이들이 파초의 나뭇잎 사이에서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준다.
수와진은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온유하게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노래 '파초'에 이러한 의미를 담아냈다.
이 앨범을 제작한 도레미레코드 역시 의미하는 바가 크다.
개그맨과 연예인을 주로 매니지먼트하던 도레미레코드가 프로덕션 체제에서 음반사로 사업 방향을 선회하고서 발표한 첫 작품이 바로 수와진의 2집 앨범이다.
도레미레코드는 1980년 국내에 프로덕션이라는 개념의 전문 매니지먼트사를 사업의 주요 틀로 인지도를 쌓았던 '준 프로덕션'을 모체로 시작되었다.
'준 프로덕션'은 1980년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태동기 속에서 쓰리랑 부부와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 등을 통해 기반을 잡았고, 이후 도레미레코드로 새롭게 다듬어지면서 전영록, 김지애, 김승진, 홍서범, 조갑경, 신효범, 조관우, 조성모, 김건모 등의 인기 가수와 이미연의 [연가] 등의 기획 앨범을 통해 수천만 장의 앨범을 판매해 온 명실상부한 최고의 음반 기업으로 성장했었다.
수와진의 2집 앨범의 히트는 도레미레코드가 대형기획사로 진입하는 계기로 이어졌다.
외인부대는 부활 출신의 기타리스트 이지웅과 시나위 출신의 보컬리스트 임재범을 중심으로 라인업이 구성되었다.
임재범은 시나위 1집에 참여한 이후 방위병으로 근무하면서 자진탈퇴의 수순을 밟았다.
이지웅은 부활 1집이 제작되기 직전에 탈퇴한 김종서를 이어 영입된 이승철의 보컬 스타일을 수긍할 수 없었다.
급기야 이승철의 창법과 목소리를 두고 '부활의 음악적 방향과 어울리지 않는 보컬리스트'라는 이유를 들어 김태원과 잦은 의견충동을 빚었다.
결국 부활 1집 앨범 이후 탈퇴한 이지웅은 임재범과 새로운 밴드 결성을 위해 의기투합하게 된다.
이후 다섯손가락을 탈퇴한 베이시스트 박문일과 바퀴자국 출신의 드러머 손경호가 합류하면서 외인부대는 부활과 시나위, 다섯손가락의 결합체라는 큰 의미마저 부여받게 된다.
또한 이전 소속 밴드와는 차별화된 사운드 연출을 위해서 스쿨밴드 셀프 서비스에서 활약했던 손무현을 추가로 맞이하면서 외인부대의 라인업은 완성되었다.
밴드명 '외인부대'는 각기 다른 팀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새롭게 모였다는 의미로 이현세 만화가가 1982년에 발표한 작품 '공포의 외인구단'을 착안해서 결정되었다.
이지웅은 앨범 발매 직후 "프로그레시브 메탈을 지향하는 퀸스라이크(Queensryche)의 음악과 흡사한 사운드를 연출하고자 고심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전반적인 사운드와 연주 패턴은 시나위와 부활의 기운이 고르게 뒤섞여 있다.
수록곡 가운데 많은 사랑을 받았던 '쥴리/Julie'는 감성적인 록발라드로 임재범은 원래 가사인 "돌아와 줄리"를 '돌아와 줄래'로 발음해서 녹음을 했다.
이는 듣는 이에게 임재범의 신들린 가창력과 함께 그의 센스있는 감각을 부각시켰다.
임재범은 지난 1991년 락밴드 출신 보컬들의 솔로 전향의 홍수 속에서 솔로 데뷔를 가졌다.
같은 시나위 출신 보컬리스트 김종서보다 1년 먼저 발매된 이 앨범은 60만 장 이상 판매되었다.
이 음반에는 외인부대의 히트곡 '쥴리/Julie'가 마지막 트랙에 새로운 버전으로 수록되었다.
'Julie'로 표기된 이 노래는 락적인 기운이 강했던 외인부대 버전과 달리 그의 거친 보컬이 더욱 섬세하게 담겨진 특징을 지닌다.
임재범은 과거 월간 록킷(ROCKiT)과의 인터뷰에서 “내 자신의 목소리가 가장 잘 터져 나오고, 부드러울 때 녹음된 버전이 바로 솔로 앨범 속 'Julie'이다.”고 언급한 바 있다.
더해서 임재범의 솔로 앨범 속 'Julie' 독특한 매력을 지니는 이유는 원곡에서 이지웅과 순무현이 담당했던 기타 파트를 시나위의 신대철과 앤디 서(Andy Suh)가 담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앤디 서는 1993년 바비 킴(Bobby Kim)과 함께 닥터 레게의 멤버로 활동하게 된다.
국내에 하드락과 헤비메탈 음악이 유입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다.
1970년대에는 미8군 무대를 통해서 이 분야 밴드들의 음반이 꾸준하게 발표되어 나왔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 락 음악은 김수철이 리드하는 작은 거인과 미8군 무대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최우섭이 주도한 무당, 그리고 대학가요제 출신의 마그마와 같은 밴드들을 통해 메탈 사운드를 선보이게 되었다.
1985년 이태원에 위치한 '태평극장'이 문을 닫고 클럽 '라이브'가 문을 열었다.
이후 '라이브'는 3층 건물 안에 500여 평의 규모를 마련한 '락월드'로 이름을 바꾼다.
바로 이곳 '록월드'를 통해 한국 헤비메탈 1세대와 후배들의 교류가 이어졌다.
이후 종로 2가에 위치한 '파고다극장'에서 잦은 공연을 진행되면서 '파고다극장'은 한국 헤비메탈의 시작점으로 기록되었다.
1986년 시나위의 데뷔 앨범이 발표된 이후 '파고다극장'에서 활동의 근간을 이룬 여러 밴드들 중 부활과 백두산이 순차적으로 데뷔 음반을 발표하며 한국 헤비메탈은 잠시간 융성의 시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그들의 뒤를 잇는 앨범 제작이 쉽게 이어지지 않았다.
밴드들의 활발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제작자 입장에서는 마니아층에 국한될 뿐, 일반대중의 호응을 기대하기 힘들어 제작비에 대한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여기에 2집을 발표한 부활의 김태원이 대마초 사건으로 구속되고, 역시 2집 앨범을 발표한 백두산은 가사가 영어라는 이유로 방송과 공연에 금지를 당하면서 한국 헤비메탈은 1987년에 이르러 정체기에 봉착하는 듯 했다.
이때 서울 용산구 남영동에 위치한 송설라이브 등을 통해서 2세대 뮤지션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다.
2세대의 대표적인 밴드인 아발란쉬(Avalanche)와 크라티아(Cratia)는 정통 헤비메탈에 국한된 연주를 구사하던 기존 밴드들보다 영미 음악을 빠르게 흡수하면서 음악적 지향점을 스래쉬메탈과 LA메탈로 확장시켰다.
이 앨범은 1988년 대도레코드에서 발매된 헤비메탈 시리즈의 첫 번째 음반이다.
대도레코드는 국내 팝음악의 저변 확대를 위해 1970년대에 많은 음반을 발매했으며, 1980년대 중반부터는 '락 카세트 시리즈'와 '기타 월드'를 발행했던 음반사였다.
해외 음반들에 대해 저작권 문제가 불거지면서 기존 음반들의 발매가 쉽지 않자 대도레코드는 자체적인 저작권 확보와 신인 가수 발굴을 위해 여러 안을 모색했다.
기획실장으로 근무하던 김재선이 젊은 층에게 새롭게 인기를 얻어내고 있던 헤비메탈 밴드들의 음반을 제작하자는 취지의 기획안을 내놓았다.
김재선은 밴드 블랙 신드롬(Black Syndrome)의 기타리스트 김재만의 친형으로 알려져 있다.
대도레코드는 옴니버스 형식의 음반을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신진 밴드들의 음악을 심도 있게 모니터하던 김재선은 위험부담이 덜한 컴필레이션 음반으로 이들의 대중성을 먼저 검증해 볼 생각으로 '프라이데이 애프터눈(Friday Afternoon)'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는 1990년까지 3장의 시리즈로 발매되었다.
이 앨범에는 총 7개 팀의 창작곡이 담겨 있다.
수록곡 가운데 쇼크 웨이브(Shock Wave)의 'A Mouse In Museum'은 유일한 연주곡이다.
앨범에 참여한 밴드 가운데 인기를 얻었던 팀은 크라티아와 아발란쉬였다.
LA메탈을 추구하던 크라티아는 그룹 도켄(Dokken)의 조지 린치(George Lynch)를 연상시키는 기타리스트 이준일과 잘생긴 미소년 외모를 지닌 보컬리스트 최민수를 중심으로 결성된 밴드다.
한국 최초의 스래쉬메탈 밴드로 기록된 아발란쉬는 수록곡 'Farewell To '99'에서 이태섭과 현상우의 트윈 기타와 보컬 마경식의 화려한 창법을 바탕으로 참여 밴드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실력을 보여줬다.
참고로 크라티아와 아발란쉬는 1989년에 스플리트 앨범 형식으로 [Various Artists Cratia & Avalanche Joint Album]을 발표했다.
아발란쉬의 이태섭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에 세션으로 참여했고, 마경식은 젝스키스(Sechs Kies)의 '커플'을 작곡했다.
참여한 7개 밴드 중 블랙 신드롬과 크라티아는 현재까지 앨범 발표와 라이브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양수경은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83년 KBS 신인가수 발굴 프로그램 '신인무대'에 출연한 뒤 잠시 모델로 활동했다.
당시 양수경은 자신의 오랜 꿈이었던 가수 데뷔를 학업 때문에 미루고 있었다.
제작자 변대윤과의 인연은 이 당시부터 시작되었다. 양수경의 2집은 1집을 이어서 변대윤이 기획과 연출을 담당했다.
변대윤은 최성수의 히트 방식을 그대로 적용해서 음악다방과 가요순위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양수경 2집을 매니지먼트해서 성공을 거두었다.
1989년 9월 양수경이 발매한 2집 앨범에서는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가 가요톱10에서 12월 첫째 주부터 3주 동안 1위를 기록했다.
양수경의 1집 앨범에 박광현의 작사·작곡 참여가 주효했다면, 2집 앨범은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를 제공한 전영록의 공이 컸다.
양수경이 가요톱10에서 첫 1위를 기록할 당시 경쟁 노래였던 이지연의 '바람아 멈추어다오'와 2집을 대표하는 히트곡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는 모두 전영록이 작사, 작곡한 노래였다.
양수경은 2집 앨범을 녹음하던 당시였던 1989년 6월 '동경세계가요제'에서 특별상을 수상하면서 본격적으로 일본 진출을 시도한다.
같은 해에 일본 도시바 EMI레코드사와 계약을 맺은 양수경은 후지TV의 목요극장 드라마 '지난날의 세레나데'의 주제가를 불렀다.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가 국내에서 히트를 기록했던 것과 달리 일본에서는 블루스 스타일의 ‘외면’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외면'은 같은 소속사 가수 박강성이 작사·작곡한 노래였다. 이 앨범이 갖는 역사성은 역시 히트곡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에 있다.
2000년대 후반까지 이 곡의 코러스는 전영록이 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사실 이 곡의 남성 코러스는 신승훈이 담당한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신승훈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노래 전주 부분 코러스 '쭈르르~'와 '그렇지만 그대 모습 떠오를 때면~' 부분의 목소리는 내 목소리이다"고 이야기했다.
또한 신승훈은 “녹음 당시 전영록이 감기에 걸려서 내가 모든 파트에 코러스를 담당하게 되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1987년 부활의 김태원이 대마초 사건으로 구속된 이후 부활과 백두산은 순차적으로 해산을 가졌으며, 승승장구하던 시나위가 멤버 교체를 이루고 발표한 3집 [Freeman]마저 실패하면서 한국 헤비메탈은 잠정적인 침체기에 접어들게 된다.
또한 정치적인 위기를 문화적인 이슈로 막으려 했던 정부의 일부 정책으로 한국 헤비메탈은 고난의 시기에 놓여졌다.
이후 헤비메탈 뮤지션들은 이태원과 미군 클럽을 돌며 그나마 미흡한 활동을 벌여 나왔다.
이처럼 혼란스러운 시기였던 1989년에 기획되고 제작된 음반이 바로 프로젝트로 구성된 옴니버스 앨범 [Rock In Korea]이다.
이 앨범은 한국 헤비메탈의 위기를 가장 현명하게 대처한 기획 음반이며, 한국 헤비메탈의 다음 단계를 이어주고 확장시킨 의미마저 지닌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는 앨범에 참여한 뮤지션들과 수록곡의 높은 완성도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이 앨범에는 그룹 시나위, 백두산, 작은하늘, 외인부대, H2O, 카리스마, 마쥬라(주한 미국인으로 구성된 국내 활동 밴드로서 앨범 내에는 Terry Scherrer과 Loren Scot 참여), 사랑과 평화, 어린왕자 출신의 뮤지션들이 참여했다.
김도균(중성자, 수레바퀴, 솔로몬, 백두산), 강기영(시나위, H2O), 오태호(리자드, 신촌블루스, 공중전화), 손무현(셀프 서비스, 외인부대) 등이 앨범 내의 수록곡을 작사, 작곡했다.
그리고 김성헌(시나위, 작은하늘), 임재범(시나위, 외인부대), 김종서(시나위, 카리스마), 홍성민(공중전화)이 각 곡에 보컬리스트로 참여했으며, 김도균, 강기영, 손무현, 김영진(콜로세움, 솔로몬, 시나위), 이근형(작은하늘, 카리스마), 김민기(시나위, 카리스마), 한정호(사랑과 평화), 이중산(무당), 김민기(카리스마), 손경호(시나위), 이병일(사랑과 평화), 김인용(어린왕자) 등이 기타와 베이스, 드럼 파트에 참여했다.
특히 음악계에서 '전설의 기타리스트'로 통하던 이중산이 은거 중 앨범에 참여했다는 사실로 많은 마니아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이 앨범은 [Friday Afternoon] 시리즈와 함께 한국 헤비메탈 음악사에서 가장 빛나는 프로젝트 음반으로 손꼽힌다. 그럼에도 두 앨범은 차별성을 지닌다.
[Friday Afternoon] 시리즈가 메이저를 향한 신인급 뮤지션들의 열정과 혼신의 연주가 펼쳐진 '난장'의 의미를 갖는다면, 이 앨범은 이미 데뷔를 이룬 기성 뮤지션들의 경합과 화합의 결과물이 함께 한 작품이다.
김도균이 과거 월간 록킷(ROCKiT)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스스로 나락으로 빠져 들었던 한국 헤비메탈의 현실을 깨우친 역사적인 앨범”이었다.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적인 측면에서 이 앨범은 몇 가지 중요한 이슈를 전개시켰다.
수록곡 가운데 'The Same Old Story’에서 협연을 이룬 것을 계기로 임재범과 김도균은 작업 직후에 그룹 아시아나(Asiana)를 결성하게 된다.
그리고 서울전자음악단의 신윤철과 오랜 숙적으로 회자되는 스쿨밴드 리자드(Lizard)의 리더였던 오태호는 '허상'과 '미로' 등의 수록곡에서 헤비메탈 기타리스트로서의 마지막 연주를 들려줬다.
또한 오태호는 이 앨범에서 '기억날 그 날이 와도'를 통해서 락발라드의 대중적인 성공 여부를 확인하며, 이후 대중 친화적인 작곡자와 가수로 변신을 갖게 된다.
전설로 불리었던 이중산은 '멈추지 않는 강'과 '파라다이스'에서 현란한 테크닉을 유감없이 펼쳐 줬다.
타이틀 곡 'Rock In Korea'는 본 앨범의 취지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곡으로 한국 헤비메탈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노래이다.
앨범에서 유일하게 대중적인 히트를 기록한 노래가 있다. 바로 홍성민이 부른 ‘기억날 그 날이 와도’이다.
1987년 그룹 공중전화에서 '사랑이 그리운 날들에'로 데뷔했던 홍성민은 이후 프로젝트 밴드 휴먼에이드에서 활동하다가 2007년 신촌의 바 '라이브'에서 급성 뇌출혈로 향년 4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동안 한국대중음악의 1920년대 태동기부터 1980년대까지 대표적인 가수의 음반과 노래를 소개한 '한국대중음악100년사' 코너를 사랑해주신 분들께 고마움을 전하며, 연재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