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기에 충분한
-<울기엔 좀 애매한>, 최규석
만화책이다. 주인공의 이름은 '원빈'이다. 입시를 준비하는 미술학원 학생들의 이야기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청춘로맨스 정도로 오해하기 딱 좋지만, 그렇게 만만한 책은 아니었다. '울기에 충분한', 이 책을 덮으며 떠올린 다른 제목이다.
못생긴 편인 외모 때문에 자기 이름을 말할 때마다 주눅이 드는 주인공 강원빈은 분식집을 운영하는 엄마와 둘이 산다. 만화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어느 정도 재능도 있지만 집안 형편상 학원에 보내 달라는 말을 못했었는데, 원빈의 스케치북을 본 엄마의 결단으로 미술학원 입시반에 들어가게 된다. 만화애니 입시반 학생들의 배경은 아주 다양하다. 집에 돈이 많고, 언니 오빠들이 모두 명문대에 들어가서 최소한 서울 4년제에는 들어가야 하는 지현, 목표했던 학교에 합격했었지만 등록금을 구하지 못해 결국 재수를 하게 된 은수, 엄마가 아파서 돈을 벌기 위해 술집에 나가는 은지가 한 반에서 수업을 듣는다. 이들의 상황이 '울기엔 좀 애매한' 이유는 상처를 받기만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재능이 없는 것 같다고 울먹이던 지현은 돈 많은 아빠의 도움으로 다른 친구들의 작품을 훔쳐 대학 수시모집에 합격한다. 좋아하는 지현에게 작품을 빼앗긴 원빈은 은지에게 맞서 지현을 두둔하면서 “돈도 재능”, “너도 예쁘다는 재능이 있으니 술집 나가며 돈 많이 벌고 있지 않냐”고 말하며 상처를 입힌다. 원빈 엄마의 등록금 얘기를 모른 척 함으로써 결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원빈의 친아빠는 ‘고객’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져 평점을 구걸하는 인터넷 서비스기사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상황은 ‘울기에 충분’하다. 그들은,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짐을 진 채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를 목표를 향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학원에 다니는 이유는? 대학 입학. 그럼 대학에는 왜 가야 하는 걸까? 독설에 일가견이 있는 만화반 강사는 이렇게 대답한다. 다른 걸 볼 기회도 없고, 대학에 가면 뭘 하는지도 모르지만 안 가면 어떻게 되는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고 그저 겁만 준다고. 그래도 대학을 나와서 이렇게 안 나가는 만화가도 강사 하면서 먹고 사니, 한국 입시제도는 교육정책이 아니라 고용정책이라고. 맞다. 대학 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이 취업률이 된 지 오래며, 대학은 이제 취업 정보를 얻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기관이다. 등록금은 또 좀 비싼가? 들어간 뒤에는 본전 생각 탓에 딴 짓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오로지 학점과 스펙을 위해 정진할 뿐이다.
또한 울 수밖에 없는 다른 이유는 울지 않고서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책은 말한다. 웃거나 울거나만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화를 내는 것도 가능하다고. 누구에게? 바로 그게 문제라고. 맞다, 바로 그게 문제다. 우리는 화를 내는 방법을 모르고, 화를 내서 상황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우리가 이렇게 힘든 진짜 이유도 모르고, 알 방법도 없다. 그것을 알아보고 제대로 화를 내는 일은 어지간히 공을 들이지 않으면 힘든 일이다. 그렇게 공을 들여서 알아내도 딱히 나아지는 것도 없다. 나만 더 답답해지고, 주변에서 불만 종자로 찍히기 십상이다. 야, 다 그렇게 살아. 너만 힘드니? 결국 네가 노력이 부족해서 힘든 건데 왜 자꾸 남 탓이야? 운운.
읽으며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졌다. 특히 몇몇 대사는 가슴을 찡 울렸다. 자존심도 없고, 자학 개그가 몸에 밴 은수에게 강사가 “그래, 가진 거 없으면 승질이라도 없어야지. 웃어라.”라고 말하는 장면이라든가, 은수의 동생이 “그냥 형 보면…… 나한테 꿈이 없는 게 참 다행스럽달까…….”라고 말하는 장면은 정작 말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담담한데도 수채화의 느낌과 어우러져 매우 서정적으로 읽혔다. 주제도, 구성도, 그림체도 매우 인상적인, ‘만화의 힘’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첫댓글 만화책이라는 것도 끌리고,
내용도 끌리고,
서정적인 느낌에 완전 끌립니다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