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 중국 평화운동
중국은 국부군(國府軍)과 중공군(中共軍)이 십여 년 계속하여 와상대치전쟁(臥牀對峙戰爭)한 고로 사억의 민가는 여지없이 병장(病奘)하였고 인명의 사상과 재산의 소실이 극도에 달하였다. 소위 초공(剿共)을 주장하는 국부군은 장개석(蔣介石)이 주장하고 소위 사회홍군(社會紅軍)을 주장하는 공산군은 모택동(毛澤東)이 주장하였다. 양방(兩方)의 주장하는 목적은 숙비숙시(孰非孰是)을 논할 수 없으나 그들의 행동에 있어서 차이가 심하다.
장파(蔣派)의 군대는 도처에 로(鹵)조과 수탈을 자행하여 민심이 창대하고 모파(毛派)의 군대는 도처에 침해가 없고 도리어 인민을 보호하며 심지어 물을 길어다 주기와 정원을 소제하여 주는 등이며 담배 한 갑, 실 한 올이라도 반듯이 대금을 주고 사가지고 일절 침도(侵盜)가 없는 고로 도처에 환영을 받는다.
공산주의가 중국 사천여년 예의지국에 합당치 못하다 하여 토벌을 주장함으로 민중이 복종치 않을 수 없어 맹종하여 10여년 생명, 재산을 희생하여 가며 싸워도 민가의 고통은 점차 심각하고 그 반면에 소위 중정부(中政府) 요인들은 백성들의 피를 긁어다 거부가 되고 조금도 백성을 돌아보지 않는 것 같은 고로 민중들이 자각이 일어나 공산군과 내통하여 우리는 피가 같은 동족이라 서로 싸우지 말자 서로 죽이지 말자 이 운동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우두머리 몇몇 야심가들을 위하여 싸우지 말자는 소리가 상급 지도자들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층 민중에서 일어나 장관들이 명령을 내려 싸우라 하여도 응치 않고 미국서 무기를 구입하여 주면 가지고 공산군)에게 팔고 공산군도 이 소리에 공오(共嗚)하여 절대로 싸우지 않고 와상왕래(臥牀往來)하여 아무리 싸우려 해도 싸울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장개석(蔣介石)은 물러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일절 임무를 부총통(副總統) 이종인(李宗仁) 씨에게 위임하고 하야를 선언하였다. 이종인(李宗仁) 씨는 민가의 소원을 좇아 정체자로 수상을 삼고 중공군과 정전협정을 체결하고 서방대표를 선정하여 국부대표 일동은 비행기로 북경(北京)에 도착하니 중공측은 차를 환영하여 연회를 열고 연속하고 1949년 4월 4일에 서방대표들의 역사적 회합이 있었다.
우리 조선민중들은 이 소문을 듣고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무슨 까닭으로 삼팔선을 그어 놓고 국토를 양분하였으며 북쪽 인민군들이 남으로 와서 살인방화를 자행하여 견딜 수 없이 되었으니 무슨 이유로 동족끼리 이렇게 상잔상살(相殘相殺)을 하고 부끄러운 줄 모르니 참 가련하다. 연이나 북평회담 20여일 후에 공산서 요구가 너무 강동(强動)하여 회담을 약속 토이기(土耳其) 내란 재발 오호 천하는 악*정(惡*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