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김(淸金)은 양파(兩派)로 분하였으니 일(一)은 판봉상사공파(判奉常寺公派) 이(二)는 청로장군공파(淸虜將軍公派)이다. 년전 대동보시(大同譜時)에 청로파(淸虜派)를 장파(長派)로 승인하였다가 역사와 보첩(譜牒)을 준하여 판봉상사파로 장소를 정하고 경오(庚午)등 대동보(大同譜)를 거쳐 교정되었다. 양파가 이조(李朝)에 들어와 혁혁한 선망(羨望)이 있어 명공신향(名工臣鄕)이 배출하고 승혼정지임(昇昏井之任)과 사림녹지경(沙林鹿之慶)이 중사직(重思直)함으로 엄연히 동방거족(東方巨族)이 되었으나 우리나라 당화(黨禍)가 날 때마다 청김(淸金)이 매양 수론자(首掄者)가 되어 남에게 참화를 주기도 하고 또 입은 적도 많았다. 이것을 생각할 때 부끄럽기도 하였다.
양파가 다 동조(同祖)의 손(孫)인즉 자손들의 명행(名行)을 마땅히 같이 할 것이어늘 그렇치 못하고 명명(名名) 달리하여 청로파(淸虜派)의 행자(行字)선익직유수는 판봉파(判奉派)의 동성(東性) 규진영(奎鎭永)과 동행이다. 이렇게 갈렀다가 년전에 운양구직(雲養久稙)*의 제기(祭起)인 대동보(大同譜) 시에 자손들의 명행(名行)를 통일케 하고 화금목토(火金木土)를 버리고 갑을병정(甲乙兵丁)을 따라 명행(名行)을 개정하고 시이(始以) 주자(周字)로 상자(相子)를 대용하여 쓰기로 되었다. 양파가 비로소 통일한 감이 있어 매우 잘되었다. 동성(同姓) 동본(同本) 동조(同祖)라는 목의(睦意)가 이 명행(名行)으로 보여졌다.
그러나 오파(五派)에는 임의 가손(家孫)들에게 상자(相字)로 명명(命名)한 자 있어 별안간 다 고치기가 어려워 그냥 두었으니 예하면 상철(相哲) 상길(相吉) 상륜(相倫) 상면(相冕) 등은 그냥 두고 요사이 출생한 자만 주자(周字)를 쓰게 하고 명명(命名)하였으니 예하면 주봉(周鳳) 주만(周晩) 동(同) 형제 중에 명행(名行) 자(字)가 서로 달라 거북한 점도 불무(不無)하지만 파족대동(派族大同)을 위하여 부득이 명명하였다.
특히 여(余)의 명행(名行)은 임의 진자(鎭字)로 행세하여 친구들이 다 진호(鎭浩)로 불러오고 법적으로 내 이름이 가 있을 곳에는 다 진호(鎭浩)로 되어있어 고치기 심난(甚難)하고 고칠 이유도 없다.
이제 천행(天幸)으로 해방이 되어 나를 위협하던 원수 일적(日賊)이 물러가고 우리 조선이 해방되고 국호 대한이란 작명(綽名)으로 얻고 세계만방에 당당(堂堂)한 독립국(獨立國)이 되었으며 모든 것이 새로 고쳐져 새 이름을 부르게 될 때 구름을 헤치고 다시 하늘을 본 것처럼 마음 통쾌하다.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하니 부르던 이름까지 고치면 하고 생각던 중 오랫동안 지구친척(知舊親戚)들이 불러오던 것을 일조(一朝)에 버리기가 곤란한 점도 있어 초구(招俱)하고 있었다.
나는 청진(淸津) 있을 때부터 이 뜻이 있어 덕영(悳永) 희영(喜永)에게 편지하고 삼대(三代) 개명(改名)을 토론하였으나 저들은 원치 않은 것 같아 강권할 수 없고 상철(相哲)의 삼형제는 해방 전부터 동경(東京)에 있으며 해방된 고국에 돌아오고 있는 것 같지 않고 또 조(祖)의 말을 순종할 것 같지 않아 자손들의 개명은 정지하고 홀로 노물(老物)이 생각한대로 복자명(復字名)을 비자(卑字)로 정하고 흠(欽)으로 자칭(自稱)하였다.
흠(欽)은 경야(敬也)라 입신(入信) 이후에 나의 일상생활이 다 신의 도움으로 되었고 몇 번 죽을 뻔한 경우에 주의 도우심으로 다시 살아났고 앞으로 얼마를 살던지 신을 경외하는 맘으로 여생을 보내려 한다.
이번 병중에 주자(周子) 경제잠(敬齊箴)을 외우다 성윤(成倫)치 못하여 우인 원광보(元光普)씨에게 부탁하여 그 서재에 있는 경제병서를 등사하여 얻어가지고 정야무적지시(靜夜無寂之時) 한번씩 통독하였다. 주자(周子)는 야소(耶蘇)는 모르는 선생이로되 그의 심공(心工)인즉 경자(敬字)로 성공(成功)한 높은 철학자(哲學者)이다. 흠경(欽敬)의 도(道)는 선생을 배우려하나 부끄러운 것 많다.
나라에 벼슬하는 자를 나라의 흠차(欽差)라 하나니 나는 천국에 벼슬하여 상제(上帝)의 흠차(欽差)가 되어 한국에 주재(駐在)하였고 년전 배재에 근 20년간 주재하였고 그 후에 2년간 인천(仁川)에 주재하였고 삼청(三淸)과 궁정(宮井)에 5년간 주재하였고 또 그 후에 함북지방(咸北地方)에 8년간 주재하다가 다시 상경하여 궁정(宮井)에 주재하는 중이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이 흠흠친서(欽欽親書)와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저술하고 천관(天官)에 봉직자(奉職者)는 마땅히 흠흠(欽欽)의 맘을 가지고 국가에 봉행(奉行)하며 인민을 자목(字牧)하라 하였으니 그 글을 읽을 때 나는 많이 반성하였다. 나는 목민(牧民)의 천관(天官)은 아니라도 교우를 거느리는 천관이다. 나도 흠흠(欽欽)의 맘을 가지고 여생을 보내며 교회의 생활을 계속하련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