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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회 님, 안녕하세요?
지난번에 우리는 『법화경』 <제16 여래수량품>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석가모니불의 일대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비밀을 알아보았지요. 다시 말해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보통 29세(혹은 25세)에 출가하여 6년간 고행 끝에 35세(혹은 31세)에 성불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역사적인 부처님의 모습이고, 참다운 생명으로서의 진정한 부처님의 모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곧 석가모니부처님은 상상할 수조차 없이 오랜 세월 이전에 이미 성불하셨고, 항상 살아계시면서도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제도하기 위해서 방편으로 열반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이란 말씀까지 살펴보았어요.
<여래수량품>에서 처음으로 설한 부처님의 영원한 수명에 대한 고백은 『법화경』 전체 내용 가운데에서 가장 핵심적인 정수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그렇지만 신심과 지혜가 부족해 잘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납득시키기 위해서, 부처님께서는 각별한 자비로 어진 의사의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해주시죠.
그럼 여기에서 부처님의 영원한 수명에 관한 비유 설명을 다 함께 살펴보시겠습니다.
소리경전자료실(CD법화경 <5권> 16. 여래수량품(1) 11:36 - 17:28끝)
소리경전자료실(CD법화경 <5권> 16. 여래수량품(2) 00:00 - 05:35끝)
여러분, 잘 들어보셨어요?
지금 들으신 바와 같이 어느 훌륭한 의사에게 자식들이 많이 있었는데, 어느 날 의사인 아버지가 집을 비운 사이에 아이들이 잠깐 모르고 독약을 마셔버렸지요. 아버지가 집에 계셨으면 주의를 주시니까 괜찮았을텐데, 안계시니까 그만 방심해서 그런 사고가 나버린 것입니다.
아이들 중에는 독약을 너무 마셔서 아예 본심을 잃고 정신착란이 된 아이도 있었지만, 아직 본심까지는 그런대로 잃지 않은 아이도 있었죠. 그런데 얼마 있다가 외출에서 돌아온 아버지를 보고, 아이들은 자기네가 잘못해서 독약을 마셨으니 어서 해독약을 지어달라고 사정을 해요.
이윽고 아버지는 자식들을 위해 효험이 뛰어난 약초들을 잘 처방하여 좋은 약을 지어주셨는데, 독약에 중독되어 본심을 잃어버린 몇몇 애들은 약을 먹지 않는 거예요. 본심까지 잃지 않은 애들이사 아버지 말씀대로 얼른 약을 먹고는 병이 다 나았지만, 독기가 깊이 스며들어 정신착란이 된 아이들은 좋은 약을 주어도 좋은 줄을 모르니까 먹을 생각을 아예 안하는 거지요.
이에 의사인 아버지는 아이들을 낫게 하기 위해서 방편으로 아이들에게 유언하듯이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 죽을 때가 다 되었다’ 이렇게 말씀하면서 ‘이 약을 여기 두고 갈테니 염려 말고 먹으라’고 타이른 뒤에 타국으로 멀리 떠나십니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을 시켜서 ‘너희 아버지가 외국에서 돌아가셨다’고 소식을 전하게 하지요.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다 해주실 거란 막연한 기대와 의타심으로 인해 느슨해질 대로 느슨해져서 방만해졌지만, 이미 돌아가시고 없다는 생각을 하니까 아이들도 이제는 혼자 일어서야 한다는 각성을 하게 되면서 스스로 정신을 차리게 돼요.
그래서 아버지가 남겨주신 약을 귀하게 여기고 바로 먹으니까 병이 싹 낫게 되거든요. 그 소식을 듣고는 아버지가 원래 돌아가신 것이 아니니까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을 만난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영원한 생명의 근본실상과 하나가 되신 분으로 이미 생사를 뛰어넘으신 분이지만, 하열한 중생들에게 선근을 심게 하고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열반을 말하고 보여주시는 것이란 뜻입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그 훌륭한 의사는 바로 부처님을 뜻하고, 그 아이들은 우리와 같은 미혹한 중생들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겠죠. 물론 의사가 처방한 좋은 약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미하며, 아이들이 잘못 마신 독약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재물욕 · 성욕 · 음식욕 · 수면욕 · 명예욕 등의 오욕락을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
흔히 중생이 괴로움을 느끼게 되는 주된 원인은 실존적으로 있지 않은 것을 실재한다고 집착하고, 정말로 실재하는 것을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착각하는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즉 만물의 근본성품인 진여불성이 언제 어디에서나 보편적으로 상주하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실재하지 않는 걸로 오인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우주가 형성되기 이전부터 곧 어떤 생명체도 생겨나기 이전부터 존재해왔고, 또 언젠가 우주가 소멸하더라도 그런 생멸변화와는 무관하게 항상 실재하는 참생명의 자리를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평등 부동한 성품자리(불성)를 없는 것으로 잘못 알고, 반면에 인연 따라 허망하게 변화하기 마련인 육신과 마음을 ‘나’라고 집착하고 또 ‘나의 것’이란 착각에 빠집니다.
그래서 나와 남을 구분하고 차별하는 마음이 싹트며, 이로 인해 재물과 이성에 대한 욕심뿐만 아니라 권세와 이익 그리고 명예 따위를 얻기 위해서 온갖 나쁜 짓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결국 생명의 근원을 바로 알지 못하고 나와 남을 구분 짓는 망념으로부터 한량없는 번뇌가 생기며, 그 번뇌로 인해 무량한 고통이 뒤따르게 되는 셈입니다.
하지만 인생 고통의 근본원인을 정확히 진단하고 나면 그것을 없앨 수 있는 올바른 처방책을 찾기가 쉬운데요.
한 마디로 쉽게 말하면 ‘있는 그대로 바로 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실재하는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바로 보고, 실재하지 않고 인연에 따라 생멸하는 온갖 것에 대하여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바르게 알아서 미련을 두지 않으면 되는 것이지요.
모든 집착이 없다면 변화하는 온갖 인연에 대해 무심하게 되고,
또 상처를 받지 않고 항상 편안하게 됩니다(안심).
설사 병에 걸려 죽을 만큼 아프게 되었더라도, 모든 생명의 영원한 실상자리 곧 나의 불성은 아프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다고 바르게 명심한다면 그냥 덤덤하게 병을 받아들이고 앓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비명횡사하는 경우도 있는데, 거기에 비하면 병에 걸려서 참회라도 하고 가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꼼짝을 못하고 누워있어도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염불할 수 있다는 것 하나만도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 우러나게 되지요. 그러다보면 제아무리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의외로 빨리 호전이 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그래야만 설령 인연이 다해서 떠난다 하더라도, 부처님 말씀을 공부하면서 혹은 염불하면서 떠날 수 있으니 참으로 다행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여유롭고 넉넉한 생각이 말할 수 없는 편안함과 함께 스스로에게 무한한 자신감을 주어, 오히려 어떤 고통이든지 기꺼이 감내하며 극복할 수 있는 용기가 내부에서부터 솟아나오게 되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인생고의 해결은 생명의 근원, 곧 실상에 대한 지혜로운 안목이 열려야만 무시겁래로 쌓여온 온갖 고통의 실타래들을 풀어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 <여래수량품>에서 한 가지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그동안 역사적인 부처님으로만 알고 있던 석가모니불을 생명의 근본실상 곧 진리를 인격화한, 눈에 보이지 않는 불생불멸의 영원한 법신불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비단 석가모니불에만 한정하지 않고, 모든 부처님의 자리는 영원한 생명의 자리라는 뜻이기도 한데요.
이러한 부처님의 영원한 생명은 곧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중생들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도 모르게 오랫동안 습관이 된 잘못된 행위와 버릇을 고치고, 삿된 집착과 편견에서 벗어나 근본실상을 바로 보고 깨달아 부처님이 되는 길이죠.
그러므로 중생과 보살을 구분하는 첫 번째 관문은 두두물물의 온갖 차별을 넘어, 본래 평등한 부처님성품을 바로 보느냐 아니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상대적으로 변화하는 온갖 유위법의 차별세계 속에서도, 영원히 변치 않는 절대적인 진리의 세계에 눈을 뜨는 것이 가장 우선이라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윤회하는 중생들 마음 안에 변치 않는 평등한 불성의 근본실상을 분명히 깨닫고, 순간순간 변화하는 무상한 현실 속에서도 영원을 볼 줄 아는 지혜가 열려야 한다는 말인데요.
허공에 아무리 금을 긋고 경계선을 친다고 해도 허공 자체에 금을 그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우리 마음도 눈에 보이는 경계에 집착해서 스스로 한정을 지으니까 임시로 그에 갇혀 매이게 되는 것이지, 원래 중생의 마음이나 부처님의 마음이나 허공처럼 청정히 텅 비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속의 좋고 나쁜 시비분별을 탁 털어내버리게 되면, 본래 평등한 성품자리가 아득한 옛날부터 늘 여여한 열반적정임을 알게 되는 것이죠.
이처럼 우리 마음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있으나, 법신부처님의 무한공덕이 깃들어 있는 불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비었다는 것은 모든 생명의 근원은 일체 시비분별 망상 따위가 원래 존재하지 않는 청정한 성품임을 뜻하며, 이를 가리켜 불교의 전문용어로 ‘공여래장空如來藏’이라 부릅니다.
동시에 무한공덕이 깃들어 있는 불성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비었다고 해도 모든 것이 단절된 허무한 공空이 아니란 뜻입니다. 이렇게 허무한 것으로 잘못 이해하는 것을 단멸공斷滅空이라 부르는데, 참된 마음은 이런 단멸공이 아닙니다. 곧 무한한 창조에너지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가리켜 불교의 전문용어로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이라 부릅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불성佛性을 다른 말로 여래장如來藏이라고도 하지 않습니까. 곧 일체중생에게는 여래의 성품이 동등하게 내재해 있기 때문에 감출 장(藏)자를 써서 ‘여래장如來藏’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일체존재의 참된 실상을 법성法性 또는 불성佛性이라 한다면, 법성 또는 불성의 그 내재된 의미를 ‘공여래장’과 ‘불공여래장’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설명한 것으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공여래장과 불공여래장은 언어적 표현상 지극히 상반된 개념이지만, 우리의 참마음(존재의 근본실상)은 이것이 동시적으로 충족된 상태이므로 ‘중도中道’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불교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중도’의 의미를 전문용어를 써서 말하여 다소 어렵게 느껴지시지요. 일체존재의 근본실상에 대한 바른 안목을 갖추기 위해서, 한 번은 익히고 가야 하기 때문에 좀 장황하게 설명드렸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용어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참마음(생명의 실상)은 일체 분별망상 없이 청정하게 텅 비어 있으나 불성의 무한한 공덕에너지로 가득차 있다는 것만 분명히 기억하시면 됩니다.
따라서 『화엄경』에서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곧 ‘일체 만물이 다 마음에서 나왔으며, 마음이 있는 모든 중생은 다 성불할 수 있다’고 했는데요. 솔직히 원자력보다도 훨씬 막강한 순수에너지의 고성능 기능으로 충만한 것이 우리의 불성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불성이나 마음 혹은 진여라고도 하고, 실상 · 열반 · 법신 · 법성 · 공성 · 본래면목이라고도 하는 이런 용어들은 전부 말만 다를 뿐 사실은 같은 뜻입니다. 즉 똑같이 모든 생명체의 근본바탕, 곧 영원불멸한 성품자리를 지칭하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묘한 것이 우리 마음이라서, 마음이란 쓰면 쓸수록 한량없이 무시무시한 힘을 내게 되지요. 하지만 마음을 안쓰면 차츰 무디어져서 한량없이 어리석어지고, 그러다 보면 결국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해 얽매이게 되는 겁니다.
물질세계에 얽매이다 보면 제아무리 천재라 해도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 거예요. 물질도 마음의 작용에서 나온 부산물에 불과한 것인데, 물질이란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거기에 얽매이다보면 마음의 무한한 생명에너지들이 발휘되지도 못하고 사장되고 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 불자님들도 오늘 <여래수량품>을 공부하면서 스스로 내 자신의 생명이 현재의 몸뚱이 안에 한정된 것으로만 인식해왔던 버릇을 싹 바꿔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예불할 때마다 외우는 『반야심경』에도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더 이상 눈에 보이는 모습이나 귀로 듣는 소리나 코로 맡는 향기나 혀로 느끼는 맛이나 몸으로 감각하는 촉감이나 의식으로 분별하는 관념 따위에 속지 말고, 본래로 청정한 부처님의 성품자리를 깨달아 영원한 생명의 실상과 하나가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즉 천지우주의 모든 만법이 마음에서 출발하여 나왔으니, 천지우주가 다 마음뿐이고 부처님뿐이다. 이렇게 마음으로 크게 회통을 쳐서 일승의 도리에 입각하여 우주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이 부처님의 영원한 생명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가지 간단한 예를 들어볼까요. 가령 지구에서 달을 바라볼 때 처음에 보름달이었다가 반달이 되고 또 초승달로 되었다가 그믐달이 되면 아예 보이지도 않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달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지요. 곧 자전과 공전의 인연에 따라서 또 바라보는 사람의 위치나 각도에 따라서, 달의 모양이 둥글게도 보이고 작게도 보였다가 또 보이지 않기도 했다가 하는 것뿐이라는 거예요.
그와 같이 부처님도 어진 의사의 비유에서 살펴본 것처럼 병든 자식을 낫게 하려고 고의로 죽은 걸로 소문을 내지만, 자식이 다 나으면 아버지가 원래 돌아가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시 살아있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죠.
즉 근기 약한 중생을 제도할 인연에 따라서 열반을 보여주는 것뿐이지, 석가모니부처님은 이미 나고죽는 생사의 단계를 초월하신 분으로 본래 영원한 생명의 법신불이라는 뜻입니다.
요약하여 말하면 부처님의 3가지 몸, 곧 법신불과 보신불 그리고 화신불(응신불)이 모두 동일한 삼신일불三身一佛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중생의 본래 생명이 부처님의 영원한 생명의 근원과 조금도 차별이 없음을 명심하고, 우리도 법의 성품 곧 모든 생명의 고향으로 돌아가 영원의 차원에서 현재를 바라보는 지혜를 깨닫도록 정진해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뜻을 『금강경』에서는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라 해서, ‘이렇게 인연 따라 형성된 겉모습에 속지 말고 형상 이면의 본질적인 성품을 보아야 참다운 여래를 보는 것’이라 하고 있는데요.
이것이 <여래수량품>에서 의미하는 ‘진정한 자아발견’이고 ‘참다운 자기실현’이라 할 수가 있겠습니다. 쉽게 말해 마음의 눈을 뜨고 바로 보면, 산하대지 두두물물이 그대로 법신불의 나툼이라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저마다 차별된 일체중생의 본질이 모두 부처님이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아침종성염불이나 장엄염불에는 이런 사상을 노래한 여러 게송들이 많이 있지만, 뛰어난 시인이나 문장가들도 티끌 하나에서 우주를 보는 직관력을 갖춘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컨대 중국의 대문장가인 소동파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저 높은 산봉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얼굴이요,
졸졸 흐르는 시냇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설법일세.
그럼 오늘은 <여래수량품>에서 부처님의 영원한 수명이 의미하는 바를 살펴본 것으로 이만 마치고, 다음에는 이어서 「법화경」 <제17 분별공덕품>을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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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일체중생의 본질이 모두 부처님 이라는 뜻.
오욕락 이란 ? 재물욕, 색욕, 식욕, 수면욕, 명예욕 이랍니다.
저는 잠이 많으요. 아니 밤에 잠을 안 자서....늦잠을.. ㅎㅎ
부처님의 3가지몸 :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 모두 동일한 삼신일불이랍니다
1, 법신불: 영겁토록 변치않는 만유의 본래 진리의몸
2, 보신불: 인연을 따르되 영구성이 있는 불성(인간부처님)으로 태어난 몸
3, 화신불: 무명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모습 (제불, 보살, 인간, 기타중생, 귀신 등)으로 나타난 부처님의 몸)
와우 ~~~ 짱 이십니다. _()_
덤으로, 보신불 : 법신불에 의해 나타나는 德相.
예를 들면 달은 법신불이요, 달빛은 보신불이요, 물에 비친 달 그림자는 화신불이라고 할수 있겠지요.
달빛의 의한 작용이 없으면 화신불이 없는 셈이지요.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법신불은 비로자나불, 법계(우주의 생명) 그 자체.
보신불은 약사여래불,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등등
화신불은 석가모니불(월광화보살님 말씀처럼 화신불은 만물이 다 해당되나, 특히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성불을 보이신 화신불을 應身佛이라고도 하지요).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은, 아(화신불) 미(보신불) 타(불타:법신불)를 다 내포하고 있어, 명호 자체가 삼신일불이 다 들어 있습니다. 특히 다른 불명호에 없는 "法" 자체가 들어 있어 가장 위대한 명호이지요.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아비발치(robert) 아(阿)는 인도어로 무한정, 한이 없다. 라는 의미로, 흔히 삼라만상이 다 화신부처로 무수히 많다고해서 阿라는 글자 자체가 화신불을 의미합니다.
@아비발치(robert) 다시 익히는 시간을 갖겠습니다-()-나무아미타불
@월광화 보살님! 주제넘게 쓴 글이라고는 하시지 않겠지요? ㅎㅎ감사합니다. 아미타불-()-
두두물물의 온갖 차별을 넘어 본래 평등한 부처님 성품을 바로보느냐 아니냐
마음의 눈을 뜨고 바로보면 산하대지 두두물물이 그대로 법신불의 나툼입니다.
있는 그대로 바로 보는것.....
부처님 께서 열반에 들지않으시면서 열반함과 의사의 거짓 죽음이 모두 방편으로 우리의 근기를 성숙 시키기 위함을 설 하시고,
만법이 마음에서 출발하여 천지우주가 마음 뿐이고.부처님 뿐이다라고 크게 회통치며 우주를보라.......
알듯 말듯, 스님의 해설에 무언가 잡힐듯말듯한.........또 또 와야지요.......
나무아미타불♥^*^♥
"여기 <여래수량품>에서 한 가지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그동안 역사적인 부처님으로만 알고 있던 석가모니불을 생명의 근본실상 곧 진리를 인격화한, 눈에 보이지 않는 불생불멸의 영원한 법신불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감사합니다. 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