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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7장 1-9절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도다
복음서의 내용이 시간적 순서를 따라 연속적으로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 요한복음 7장은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1)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5장만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로부터 박해의 대상이 되었습니다(16). 심지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7)는 말씀으로 인해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넘어 죽여야 할 대상이 되었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18). 저들 입장에서는 신성모독이라는 이유에서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 6장으로 넘어가면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로 모여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2). 바로 이들을 대상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는데,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 보면 단지 오병이어의 기적만 행하신 것이 아니라 거기에 말씀도 있었습니다. 기적만 베푸신 것이 아니라 기적에 앞서 하나님 나라의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셨고, 그 가르침이 길어지면서 시장한 저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으로 인해 무리들은 예수님을 찾게 되었는데 그 목적이 세상 임금을 삼고자 함입니다. 이런 저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은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26) 그러면서 오병이어 관련하여 주께서 드러내고자 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셨는데,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는 것(35), 이 떡을 주시기 위해서 자신이 하늘로부터 내려 왔다고 하셨습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54).
문제는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어렵다고 반응하면서 걸림이 되었다는데 있습니다(61). 그래서 그동안은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떠나게 되면서 더 이상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였다는 데 있습니다(66).
오늘 본문 1절은 기록의 순서로 볼 때 이런 내용을 전제로 합니다. 그래서 ‘그 후에’라는 말씀으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습니다. 저들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은 안식일에 할 수 없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하는 신성모독을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측면에서 함부로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병이어 이후 그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나는 자들이 많아졌습니다. 물론 그의 기적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모여드는 자들이 있었지만, 무리가 아니라 제자라 일컫는 자들 중 많은 수가 이탈한 것입니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유대인 입장에서는 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예수님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은 그런 배경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요한복음 7장 12절에 보면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나눠지는데,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으로 어떤 사람은 무리를 미혹하는 사람으로 생각하여 수군거리게 됩니다. 그러나 드러내 놓고 말하는 사람이 없는데, 왜냐하면 13절에 의하면 유대인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반감을 분명 가지고 있었고, 그런 반감은 단순히 마음속으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나타나 알려지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일에 있어 다른 지역보다 좀 더 적극성을 띤 곳이 유대지역인데, 거기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고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만큼 종교지도자들이 밀집해 있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고 할 때 그 뒤에는 종교지도자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지금 예수님은 그 사실을 알고 계신 것이고, 그래서 굳이 유대로 가서 다니기보다는 갈릴리를 중심으로 다니고 계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절을 보시면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고 말씀합니다. ‘초막절’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땅의 소산을 다 거두어들인 후인 일곱째 달 제15일에 지키라고 명하신 절기인데,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를 위하여 칠일 동안 지킬 것을 명하셨습니다(레23:34). 특히 레위기 23장 43절에 보면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출애굽 이후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에 광야 40년 동안 초막에 거주한 것을 기념하게 한 것이 초막절의 목적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단순히 광야 40년 동안 초막에 거주했다는 사실보다는 하나님께서 광야 40년 동안 지키시고 보호하셨다는 사실, 다시 말해 험악한 광야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친히 피난처가 되셨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의의라 할 수 있습니다.
유대 절기를 보면 모든 남자가 일 년에 세 번 여호와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으로 나아와야 하는 절기가 있는데, 무교절과 칠칠절 그리고 초막절입니다. 그만큼 유대 절기 가운데 중요한 날입니다. 이 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곳으로 모이게 되는데,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은 그런 점에서 갈릴리를 중심으로 다니시던 예수님께서 이제 위험 지역인 유대 지역으로 올라가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들이 다음의 말을 하게 되는데, 3절과 4절입니다.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간단히 말하면 능력이 있기 때문에 갈릴리 촌구석에만 있지 말고 많은 사람이 있는 유대 지역으로 가서 자신을 나타내 보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만 제자를 만들지 말고 더 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서 능력을 나타냄으로 더 많은 제자를 만들라는 것이고, 이미 유대 지역에서도 제자들이 있다고 할 때 그들에게도 더욱 나타내 보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이후 마리아가 요셉과 결혼하여 자녀를 낳았다고 할 때 예수님의 형제는 육신적으로 볼 때 동생들입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친인척까지를 포함한 형제들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적어도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님과 함께 자랐습니다. 자라면서 예수님의 범상치 않음을 보았습니다. 누가복음 2장 52절에서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말씀하시는데, 동생들이 그런 예수님을 곁에서 본 것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 5절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는 말씀을 고려한다면 예수님 곁에서 그의 범상치 않음을 보았다고 해서 그를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요한복음 4장 44절에서 이미 말씀하신 것처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우리는 그 사실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는데, 마태복음 13장은 씨 뿌리는 비유로부터 시작해서 여러 비유의 내용을 말씀하고 있는 장입니다. 모든 비유를 다 말씀하시고 난 뒤 고향으로 가서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그때 고향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는가? 성경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마13:54-57) 고향 사람들도 예수님의 범상치 않음을 보았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으로 시작하여 죄만을 내놓고 있는 가운데 전혀 죄를 범치 않는 분이 있다고 할 때 누가 그를 주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복음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에게도, 나아가 사람에게도 더욱 사랑스러워 가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스러워 가셨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를 믿을 수 있는 근거가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을 전하시자 고향 사람들조차 배척하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지금 예수님의 동생들도 이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를 믿고 있는 게 아니라, 믿음과 상관없이 지금 3절과 4절의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신앙을 가지고서 신앙의 잣대로 이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행보를 보면서, 특별히 오병이어와 관련된 사건을 염두 해 두면서 이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마치 어떤 자세와 같은가? 요한복음 6장 14절, 15절에 나타난 자세와 같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그래서 예수님의 형제들도 이런 표현을 합니다. 4절 마지막 부분에 보시면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 삼으려는 자들을 떠나셨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지 못하도록 제자들을 그들로부터 따로 떼어 놓으셨습니다. 때문에 요한복음 6장 15절의 자세도 주의해야 하고, 오늘 본문 3절과 4절의 자세도 주의해야 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3절과 4절의 자세로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신을 이름을 나타낼 수 있는 곳으로 가고자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있다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원하면 그것이 주의 뜻인지 주의 뜻이 아닌지 묻지 않고 많다는 이유로 그리로 갑니다. 직장을 선택하는 문제도 이 원리로 있습니다. 연봉을 많이 주느냐, 주지 않느냐에 따라 직장을 선택하지, 직장을 선택하는 데 있어 주의 뜻에 합당한가, 합당하지 않는가로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좋은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기회를 잡으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할 때 우리의 모든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은 하나님의 말씀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때문에 무엇을 선택하는 데 있어 반드시 가져야 할 기준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모든 뜻을 우리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자신의 뜻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나타난 뜻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율법입니다. 모든 인류에게 도덕법을 주셨지만, 특별히 자기 백성에게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을 명하셨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율법을 어기게 만드는 것은 그 길이 우리의 길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의 제4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입니다. 이 명령이 있는 한, 그리고 이 명령이 도덕법으로 있는 한 성도는 주의 날을 지키지 못하도록 만드는 직장은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토마스 카트라이트라는 개혁자의 기독교 교리 강론 안에 있는 제4계명에 대한 설명을 보면 “그러나 공공의 정직에 속한 일과 생명, 건강, 선한 것들의 보존을 위해서 필수적인 일들은 제외된다(눅13:15,16). 그것은 만약 그 날에 구제되지 않는다면, 죽을 만큼 큰 위험에 있는 자들, 또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수행하는데 필수적인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고 설명합니다(p.127). 이것 외에 직장을 선택하는 문제에 있어 주일을 지키지 못하도록 하는 일은 주의 뜻을 따라 금해야 합니다.
조금 더 실제적으로 말씀드리면 한 회사는 주일을 종종 빠져야 하지만 연봉이 꽤 높습니다. 반면 다른 회사는 주일을 지킬 수 있지만 연봉이 너무 낮습니다. 이때 우리는 어디를 선택해야 합니까? 간혹 이 문제로 기도하고서 결정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미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주의 뜻보다는 내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욕심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하지 않고도 주께서는 그의 말씀을 통하여 분명하게 알리셨기 때문입니다. 답이 주어져 있는데 기도하겠다는 것은 주께서 내놓은 답보다는 내가 원하는 답을 찾겠다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인 저 자신을 예를 들어 보자면, 저는 개혁신앙의 내용만큼 성경 교리에 합당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예배 형식 또한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에 근거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하다고 여깁니다. 이런 저에게 이런 형식의 예배가 아닌, 성경 기준으로 볼 때 자의적 예배를 드리는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교회에서 청빙이 온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물론 그런 교회라 할지라도 시간을 두고 교회를 개혁하겠다는 순수한 마음이라면 청빙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받는 생활비 때문이라면, 교회의 성도 수 때문이라면, 교회의 건물의 규모 때문이라면 이미 오늘 본문 3절과 4절의 자세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혹 시간을 두고 교회를 개혁하겠다는 마음을 가진다 해도 거기에 다른 욕심이 없을 수 있는가? 순수한 마음으로만 갈 수 있는가? 쉽지 않다고 생각이 됩니다.
오늘날 교회가 행하고 있는 일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3절과 4절의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능력이 있다면 그 능력이 보이라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을 모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합니다. 주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무엇을 행하기보다는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이라면 무엇을 해도 괜찮은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것이 주를 위한 것이고, 그것이 주께 영광이 되는 줄 압니다. 그러나 이런 저들에 자세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5) 믿음에 근거한 것, 신앙에 근거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형제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동생으로서 이 말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한 진심어린 마음으로 이 말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진심어린 마음으로 한 말이라 할지라도 믿음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면, 신앙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면 다음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16:23) 여러분,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를 중심으로 사도들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고백한 바가 있습니다. 이 고백 이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사도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기를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2)라고 말했습니다. 스승의 죽음에 대하여 어찌 보면 제자로서 진심어린 말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진심어린 말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생각한 것이라면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탄이라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일, 다시 말해 믿음과 상관없이 진심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책망의 말 외에는 들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오병이어를 볼 수 있습니다. 기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릴 때부터 자라오시던 것을 친히 곁에서 볼 수 있고 그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믿음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무엇으로 말미암는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그러나 듣는다고 해서 다 믿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요한복음 6장에서 분명히 보이셨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데, 듣는다고 해서 다 믿는 것이 아니라면 누가 믿을 수 있는가? 요한복음 6장 37절에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44절은 이렇게도 말씀합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지난 시간에 마태복음 16장에 있는 사도들의 고백을 언급했지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16) 주님께서는 이 고백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혈육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7). 하늘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것과 동일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의 형제들에게 참된 믿음이 없다는 것은 아직까지 하나님께서 그들을 예수님께로 이끌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주에 말씀드린 바 있는 것처럼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저들의 믿음 없음은 책망 받아 마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으로 있으면서도 믿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에게 핑계할 수 없다는 사실만 제공할 뿐입니다.
이런 저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왜 유대 지역으로 가시지 않고 갈릴리 지역에 머물러 계시는지를 드러내시는데, 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1절에서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유대 지역에서 다니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때’와 관련이 있습니다. 즉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 지역으로 가지 않고 갈릴리 지역에 머물러 계신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예수님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 보이기를 청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으로 저들의 요청을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참 하나님으로서 참 사람이 되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예수’라는 이름에서 우리는 그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하심으로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9장 22절은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피를 흘려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 제사 제도처럼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사하는 것은 아닙니다(히10:4). 그것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 하는 것으로 하나님이신 그가 사람이 되셔서 우리를 위하여 피 흘려 죽으시는 것을 통해 죄 사함이 있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간단하게 죽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자신의 죄가 아니라 택하신 자기 백성의 죄 값을 지불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단순히 죽음이 두려워서 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물론 인성을 따라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에 앞서 기도하실 때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죄로 말미암는 죽음, 그 죽음으로 인하여 일시적이긴 하지만 하나님과 단절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분명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인성이 신성과 연합되어 있습니다. 인성의 연약함을 신성이 붙드십니다. 그런 그가 단지 죽지 않기 위해서, 혹은 죽음이 두려워서 유대 지역으로 가려고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 유대 지역으로 가려고 하지 않았는가? 죽음을 피하실 목적도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이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것과 관련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작정하신 바가 있다고 할 때 작정하신바 실행할 때가 아직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작정하시면 작정하신 그대로 되지만 작정 안에 무엇까지 있는가? 과정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수단도 사용하십니다. 때문에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하는데도 자신을 드러내시면서 가는 것은 결코 작정에 대한 실행의 역사 속에서 지혜로운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이 왔을 때 형제들은 이때가 기회라고 하면서 올라가 자신을 나타낼 것을 말했지만, 예수님은 때가 되지 않음으로 지금은 가야 할 때가 되지 아니 했음으로 유대 지역으로 가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많은 사람들의 자세는 3절과 4절에 있습니다. 능력이 있다면 그 능력을 나타냄으로 빨리 알려지기를 원합니다. 빨리 유명하기를 원하고, 빨리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작정하신 바가 실행될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그때를 아십니다. 인성을 취하여 오셨지만 그분은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모릅니다. 우리가 모른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의 작정하신 바대로 실행하시지만, 우리 편에서 이해하자면 하나님의 때를 모르기 때문에 있어야 할 그 자리를 이탈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말한 것처럼 능력이 되기 때문에 유대 지역으로 가서 그 능력을 나타내고, 그래서 더 빨리 유명해지기를 바란다고 하면 거기에 솔깃해서 있어야 할 그 자리, 다시 말해 지금은 갈릴리에 있어야 하는데 갈릴리가 아닌 유대 지역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가는 길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가는 것이라면 갈릴리 지역이건, 유대 지역이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순종하도록 하는 길이라면 어디를 가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내 욕심, 내 자랑, 하나님의 뜻보다는 나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3절과 4절에 속습니다. 능력이 있다는 것으로 속고, 유명해질 수 있다는 것으로 속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6절에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 3절과 4절의 자세를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기까지 기다리겠다는 마음과 기다리면서 인내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의 원리와 기준을 버려야 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 합니다.
때와 관련해서 우리가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럴 때가 있으면 저럴 때도 있다는 것을 염두 해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아야 하는데, 전도서 3장이 그 사실을 잘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1절부터 조금만 보면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전3:1-4) 그런데 이 모든 때의 주관자가 누군가?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욥은 주신 자도 여호와, 거두신 자도 여호와란 고백을 통해 분명히 나타냅니다(욥1:21).
그럼 왜 하나님께서 이런 때를 주시는가 하면, 저런 때를 주시기도 하시는가? 우선 전도서 3장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창조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시기에 좋은 상태로 만드신 것처럼 섭리의 역사를 통해서도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목적을 가지시는데, 특별히 택하신 백성으로 하여금 무엇을 사모하도록 하시느냐? 영원한 것을 사모하도록 하십니다. 비록 이 땅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대하여 사람이 측량할 수는 없지만,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게 하는 마음을 주신 이상 세상의 모든 변화 속에서 영원한 것을 소망하도록 하실 목적으로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즉 세상의 삶에 있어서는 변화가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변하지 않는 마음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에 있어서는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럴 때만이 아니라 저럴 때도 영원을 사모해야 합니다. 어느 때든지 우리의 모든 소망은 영원한 하늘에 있어야 합니다. 좀 더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럴 때가 있게 하시고 저럴 때가 있게 하시면서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땅에 있는 것만 바라보며 사는 자가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원한 것을 바라보며 살아가도록 하시기 위함이란 것입니다.
더불어 전도사 3장 14절에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왜 이런 때를 주시는가 하면, 저런 때를 주시기도 하시는가? 우리의 본성은 내가 잘 될 때 감사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인 줄 안다면 어느 때든지 감사하는 자가 되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되라는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있게도 하시고 때로는 없게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초점이 되고 있는가? 성경 전체의 초점은 결코 3절과 4절이 아닙니다.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여기에 목적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오늘 본문 6절로 오시면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지만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 다시 말해 지금은 올라갈 때가 아니라는 것인데, 이와는 반대로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다고 말씀하기 때문에 너희는 언제든지 올라가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7절인데,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유대 지역으로 올라갈 때가 아니라는 것은 저들이 나를 미워하여 죽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죽이고자 하는가? 그의 말씀 때문입니다. 그의 말씀의 핵심은 무엇인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한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너희는 어둠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빛이 없이 어둠으로만 있을 때는 그들의 실상이 어떠한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자 어둠이 드러나게 되는데, 드러난다고 해서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일이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빛으로 인하여 더욱 분란만 일으키기 때문에 빛을 없애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기 때문이요, 그가 진리를 드러내심으로 인해 지금까지 진리로 여긴 것들일 거짓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저들의 악함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다고 하십니다. 나는 올라갈 때가 되지 않았지만 너희는 언제든지 올라가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너희도 세상과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둠인 것처럼 너희도 어둠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어둠이기 때문에, 5절 말씀에 근거하면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3절과 4절의 자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믿음을 선물로 주셨다고 할 때 반드시 3절과 4절의 자세는 거절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세상 앞에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드러나게 하신 것조차 거절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드러나게 하시지도 않았는데, 쉽게 말해 하나님의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세상에 드러나고자 하는 것들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있어야 할 자리를 이탈하는 것과 같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만 남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강조하여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모든 기준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그의 뜻을 따르고 그의 말씀을 준행하는 자리라면 그가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괜찮다고 여겨야 합니다. 말씀 때문에 더 좋은 자리를 거절할 수 있습니다. 말씀 때문에 거절하고 거절하다가 그렇게 좋은 형편에 있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복된 자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과 상관없이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고 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있는 자리는 결코 신앙의 자리가 아닙니다. 때문에 사람의 외적인 형편으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주의 뜻 때문에, 주의 말씀 때문에 오늘날 교회 성장과 관련해서 말하는 모든 것이 결코 주의 뜻에 합당치 않다는 것으로 거절하여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많이 모여야지만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오히려 진리의 말씀에 따르고자 하는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더욱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안에 깊이 새겨져 있는 잘못된 생각,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 땅에서도 잘 되어야지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사고를 반드시 버리셔야 합니다. 3절과 4절의 자세와 다를 바 없습니다. 거지 나사로처럼 살더라도 주의 뜻에 합당하게, 주의 말씀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실 때까지 우리 스스로 높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낮은 자리라 할지라도 거기서 주의 뜻을 따르고 주의 말씀을 따르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결론적으로 8절의 말씀을 하시는데,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고 하십니다. 다음 주에 보게 되겠지만 예수님께서는 명절에 올라가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올라가십니다. 그러나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직 때가 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올라가는 것은 유대인의 위협에 더 노출되기 쉽기 때문에 때가 되기까지 올라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9절에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모든 행보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행보이며, 그런 행보를 위해 하나님의 때가 되기까지 때로는 자신을 숨기기도 하시고 때로는 자신을 드러내기도 하셨던 겁니다.
우리의 행보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가지시는 계획과 뜻이 무엇인지 알 수도 없고, 또 그것이 언제 이루어질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타내신 뜻은 분명합니다. 우리의 모든 행보는 바로 나타내신 뜻, 다시 말해 이 말씀에 근거한 것이어야 합니다. 거기에 분명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한 것들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