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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갈증 없는 삶이 가능하다>의 줄거리: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지옥 묘사를 위해 동원하신 핵심 개념이 바로 '갈증'입니다. 좀 더 정확히는 '해결이 불가능한 갈증'이지요. 이것이 바로 지옥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갈증이 75억 인구의 삶의 특징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해결이 될 수만 있다면 갈증은 상쾌함과 유쾌함을 극대화시키는 효과까지 있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갈증은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핵심 요소입니다. 갈증 없는 천국 삶이 땅에서도 가능하기에 소개드립니다.
갈증 없는 삶이 가능하다
(이사야 35:1~10)
1.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2.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3.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4.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갈증 없는 삶이 가능하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갈증 없는 삶이 가능하다’
천국의 특징을 체감할 수 있는 한계 안에서 언어를 통해 표현할 수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마치 천국 같고 천국에 온 기분일 때가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말기 암환자가 온전하게 건강을 회복했을 때 이런 기분이 들 것입니다. 또 형통할 때, 출세할 때, 돈이 많을 때, 유명해졌을 때, 인기가 있을 때, 부흥할 때, 성장할 때, 높은 임금을 받을 때 등이 이런 기분이 들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우리가 좋다고 여기는 상황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이 진실로 천국의 느낌을 대변하지는 못합니다. 그 이유는 천국은 갈증이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좋다고 여기는 상황은 동화 속 요술램프와 같습니다. 지니가 모든 소원을 들어줄 것이기 때문에, 램프를 가져야만 이 세상에서 천국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천국의 삶은 지니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 아니라, 지니가 필요 없는 상태가 될 때에 가능해집니다.
건강해야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건강에 대한 갈증이 생기지 않을 때입니다. 몸은 건강할지라도 다른 형태의 갈증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건강하지 않은데도 건강에 대한 갈증이 없는 상태가 되어야만 합니다.
돈에 대한 갈증이 있을 때에 돈이 생긴다고 해서 갈증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돈에 대한 갈증이 생겼을 때에는 돈을 쥐려는 것이 아니라 갈증 자체를 없애야 합니다. 이렇게 갈증 자체가 없어지는 상태가 바로 천국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하시면서 지옥의 모습을 묘사하셨습니다. 그 묘사에 나타난 한 가지 개념이 바로 갈증입니다. 주님께서 ‘갈증’이라는 단어를 직접 사용하시지는 않았지만 그 상황이 갈증의 개념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6장 23~24절에 “이때에 부자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 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지독한 갈증이 지옥의 특징입니다.
뿐만 아니라 26절에 아브라함이 가로되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지옥의 또 하나의 특징은 해갈의 가능성이 아예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종말에 임할 메시아 왕국이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고, 또한 그 왕국에 들어가게 될 사람들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알고 있는 언어로써 그 당시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가치관에 입각하여 최대한 아름답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종말에 임할 메시아 왕국의 모습 자체인 것은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아직 초림도 하지 않으셨는데 재림 후에나 있게 될 메시아 왕국이 언급되는 이유는 그것을 기대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지금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축복을 묘사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구원을 받으면 어떤 상태가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한편 이렇게 기가 막히게 좋은 구원을 발로 차버리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그것들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구원받은 백성들을 일컫습니다. 히브리어 ‘헤마(hêm-māh, הֵ֛מָּה)’라는 3인칭 복수를 지칭하는 단어로 ‘그들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이유는 여호와 영광 곧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을 보았다’라는 것은 곧 여호와 하나님만 보이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영광은 공연장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공연장 전체가 어둠에 덮여있는 가운데 조명이 주인공만 비춥니다. 그러면 무대 위에 다른 사람이 있을지라도 오직 주인공만 보이게 됩니다. 이렇게 마음에서 하나님만 보이게 되는 상태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상태입니다.
이때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에는 하나님 한 분밖에 보이지 않는데 그 하나님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황홀한 기분이 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취한 상태가 구원받은 상태입니다.
이렇게 구원을 받으면 내 마음에는 갈증이 없어집니다.
1절에서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곧 갈증이 사라짐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 믿고 구원을 받은 증거는 갈증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2절에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레바논과 갈멜과 사론’은 각각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유대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불렸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당대의 백성들이 가장 아름답게 여기는 곳을 예로 들면서 구원받은 자의 삶을 묘사한 것입니다.
메마른 광야와 같았던 마음이 백향목 향기가 가득한 레바논의 영광과, 울창한 상수리나무 숲으로 이루어진 갈멜과, 들꽃이 만발하는 드넓은 초원이 펼쳐진 사론과 같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핵심은 구원을 받게 되면 갈증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갈증이 없어지는 이유는 마음으로 하나님만 보고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황홀해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5~7절을 보면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이 또한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원받으면 장애감이 전혀 없는 삶이 주어지리라는 것입니다. 갈증이 없어짐과 동시에 장애감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라는 말씀에서 ‘이는’이라는 의미는 구원받으면 광야에서 물이 솟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르는 것처럼 만족함의 원천이 생겨나기 때문에 갈증이 없어지고 모든 종류의 장애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생은 왜 이러한 갈증과의 싸움이 된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처음 선민들을 만나주시고 함께 하시게 된 장소는 광야였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이들이 갈증의 노예였음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선민들에게 구원은 단순히 출애굽이 아니라 삶의 갈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광야로 데려다 놓으신 것입니다. 이제부터 갈증으로 대표되는 이 세상의 삶으로부터 완전히 구원해주심을 드러내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광야는 곧 인간의 삶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인 갈증의 상징이 되는 장소였습니다.
그렇다면 갈증의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 전체가 증거 하는 대로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 크기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일 수 있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창세기의 선악과가 의미하는 바도 그러합니다. 인간은 판단을 필요로 하지만 그 판단을 외부로부터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판단하시고 생각하시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판단뿐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 1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가 되는 것인데 내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 안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이 들어오시도록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근원적으로 하나님 크기의 공백을 가지고 있고, 이 공백이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는다면 엄청난 갈증을 유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무한한 우주를 지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 크기의 갈증이 세상 모든 사람들 마음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갈증으로 인해 죽어가면서도 하나님을 등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등지자 보이는 것은 이 세상입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어떠한 성취든지 이것들을 통해서 마음의 갈증을 해소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지옥으로 물 한 방울을 건네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이 세상의 가치를 통해 하나님 크기의 갈증을 해소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 크기의 갈증은 오직 하나님으로만 해갈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깨닫지 못한 채 어떤 사람은 배우자를 통해서 마음의 갈증을 해소하려 합니다. 그러면 그의 배우자는 죽을 지경이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녀를 통해서 마음의 갈증을 해소하려 합니다. 그럴 때에 자녀는 죽을 지경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가 무슨 수로 부모의 마음에 있는 하나님 크기의 갈증을 해갈시켜 줄 수 있겠습니까? 사업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업으로 마음의 갈증이 해소되기를 원하지만 이제 그 사업은 죽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렇듯 사람은 해결될 수 없는 갈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지옥에 있는 부자와 똑같습니다. 해결될 수 없는 갈증을 따라서 사는 동안 삶은 지옥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취할 정도로 황홀해지면 갈증자체가 없어집니다. 몸에 질병이 있으면 건강에 대한 갈증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건강이 없기 때문에 생겨난 갈증이 아닙니다. 돈이 없으면 돈에 대한 갈증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실상은 돈이 없기 때문에 생겨난 갈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생겨난 갈증인데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 원인을 헛짚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7~9절에서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하심이라 /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깨달음을 얻고 몸이 아픈데도 이로 인한 갈증을 느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없고 몸이 아프고 자녀의 문제든지 이것으로 갈증을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상황이 벌어진 것과 내게 있는 갈증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나의 갈증은 하나님이 없어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세상일들에 마음의 갈증이라는 덤터기를 씌울 수밖에 없습니다. 돈이 없어서 갈증이 생긴 줄로만 압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시선으로 볼 때에는 하나님으로 채워진 사람에게도 갈증의 상황은 주어질 수 있습니다. 없는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박국 3장 17절을 보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라고 ‘없다’는 말이 여섯 번이나 반복됩니다. 충분히 갈증이 날만한 상황이지만 이어지는 18절을 보면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고 말하며 전혀 갈증을 느끼지 못하며 만족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 받은 자의 상태입니다.
한편 이런 갈증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장애감과 배신감이 있습니다.
5절에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라는 말은 상징적 표현입니다.
실제로 앞을 못 보더라도 마음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체로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을 정도가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본래 하나님이 들어오실 때에 완전한 만족함을 느낄 수 있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일들을 갈증의 원인으로 생각해서 해결하려 할수록 장애가 생겨나고 마음에서는 장애감이 생겨나서 불같은 화가 생겨납니다. 갈증도 불로 인해 생겨났는데 불에 불을 더하는 격이 되어서 몸도 마음도 새카맣게 타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배신감을 느낍니다. 돈에 대한 갈증을 느끼던 사람이 복권에 당첨되어 거금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돈 자체로는 갈증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돈으로 명품을 사들입니다. 하지만 갈증은 해소되지 않고 계속 다른 시도를 해나갑니다. 이런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이 세상 것을 가지려는 노력에 방해를 받게 되면 장애감을 느껴 불에 불을 더하게 되고, 이것들을 생각대로 가지면 하나님 크기의 공백에서 생기는 갈증이 채워지지 않아 배신감만 느낍니다.
4절을 보면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실제로 하나님이 나 대신 누군가에게 앙갚음을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면 예수님께서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과 대치되어 버립니다. 원수의 개념을 정확히 구분해야 합니다.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보복이 대상이 되는 원수는 나를 속이고 배신하는 근원입니다.
돈을 가져보았으나 기대와 갈증은 충족되지 않았고 배신당했습니다.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하면 죽을 때까지 감사만 나오리라 생각했는데, 한 달도 못되어 또 다른 불평과 불만이 생겨납니다. 이러한 배신감은 끝이 없습니다.
또한 본문 3~4절을 보면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여 주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고 하였습니다.
겁내고 두려워했던 이유는 이 세상의 가치를 얻기 위해서는 방해와 장애감을 이겨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8~10절을 보면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시온의 대로’가 언급됩니다. 시온의 대로에 가면 여호와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갈증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고 몸도 병에 걸려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때에 갈증의 원인을 깨달아야 합니다. 일단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잠시 미뤄둔 채, 마음에서 생겨난 하나님 크기의 갈증을 해결해야만 합니다. 이 갈증 자체가 내 마음에서 사라지도록 하나님의 영광을 보러 가는 것입니다. 건강문제가 해결되어도 갈증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돈이나 명성 혹은 자녀의 형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에 속지 말고 하나님으로 해결하기 위해 일단 미뤄두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마음의 갈증이 해소되고 평강을 누리고 나서야 그 문제들을 보자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문제들은 모두 하나님이 떠맡으십니다. ‘원수를 갚으시겠다’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가 이와 같습니다. 내 앞에 놓인 문제들을 하나님의 과제로 취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병이 들어 죽게 되었을 때에 건강에 대한 갈증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때에 건강이 아닌 하나님을 갈구하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 괴로울 때에 돈에 대한 갈증이 생깁니다. 그러나 돈이 아닌 하나님을 갈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시온의 대로로 향하는 것입니다. 시온 즉 예루살렘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성전이 있는 유일한 곳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시온의 대로로 가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갈 수 있을까요?
8절의 하반부를 보면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음을 통해서 깨끗함과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갈증 자체가 지옥일 뿐 아니라 더러움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돈이나 건강으로 하나님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려는 것이 불신앙이고 다른 신을 섬기는 행위입니다.
이전에 ‘신’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다른 신은 곧 내 마음에 갈증을 해결해줄 수 있으리라 믿어지는 대상들입니다. 자녀이면 자녀가 나의 신이 됩니다. 돈이면 돈이 나의 신이 됩니다. 건강이면 건강이 신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는 이것이 더러움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돈이나 형통 혹은 부흥을 갈망하면 더러운 마음입니다. 이러한 내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부활할 때에만 깨끗한 마음과 거룩한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하나님 보좌로 향하셨습니다. 주님이 가신 이 길이 시온의 대로입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한 갈증을 죽인 자들의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이 만드신 시온의 대로를 따라서 하나님께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시온의 대로를 따라서 우리의 마음에 성령님께서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하늘로 가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은 하늘 보좌에 계신 성령이 내려오시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그대로 보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에 주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시온의 대로를 따라 하늘로 보내야 합니다. 그럴 때에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를 전할 때에 산헤드린공회원들이 그들을 잡아서 때리고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보았습니다. 즉 갈증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인생에 장애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부터 장애감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실제로 삶에서 배신을 당할 수는 있지만 그로부터 배신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가 처음부터 배신할 것을 아셨고 제자들도 예수님을 부인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배신감을 느끼지 않으셨습니다. 가룟 유다를 대해서도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라고 긍휼의 마음으로 바라보셨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던 제자들에 대해서도 사랑으로 대하시며 배신감을 느끼지 않으셨습니다.
사도 바울 또한 감옥에 갇혀서도 장애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것을 복음전파의 사역에 유리하게 여겼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 천국의 삶 아니겠습니까?
아직 내 마음에 갈증이 있다면 구원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시온의 대로를 향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 갈증을 느끼는 내 마음을 주님과 함께 죽은 것으로 인정함을 통해서 마귀의 속임수로부터 탈출해야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만이 갈증의 해결책이 되심을 믿는 마음이 되어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과 함께 하며 여호와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을 갈증 없이 살게 되고 장애감과 배신감을 느끼지 않는 천국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로부터 하늘로 이어지는 시온의 대로를 오늘도 끝없이 달려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호와의 영광을 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여 이 세상을 향하여 어떤 갈증도 느끼지 않으며, 배신감도 없고 장애감도 없는 천국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