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지 밭죽
겨울이 끝난다는 동지(冬至)는 요즘에는 명절도 아니고 그저 팥죽 먹는 날일 뿐이다. 귀신이 싫어하는 붉은색 팥죽을 먹어 액운을 물리친다는 정도로 팥죽을 먹는 이유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왕이면 팥죽 먹는 의식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왜 팥죽을 먹는지 정확한 이유나 알고 먹자.
동짓날 팥죽은 비록 양기가 되살아나는 것을 기원하는 뜻이라고는 하지만, 귀신을 쫓겠다고 문지방에다 팥죽을 뿌려대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니니 그만두라고 명했는데도 아직까지 팥죽 뿌리는 행위가 계속되고 있다. 이후로는 철저하게 단속해 잘못된 풍속을 바로잡으라.
조선시대 영조가 내린 왕명이다.
[영조실록] 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임금의 명령도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을 정도로 동짓날 팥죽을 뿌리는 풍습이 지나쳤던 모양이다.
지금은 옛날 전통을 되새기며 동지 팥죽 한 그릇 먹는 것으로 끝나지만 옛날에는 귀신을 쫓겠다는 일념으로 집집마다 문기둥에 얼마나 팥죽을 뿌려댔으면 임금이 다 역정을 냈을까 싶다.
예나 지금이나 동짓날이면 으레 팥죽을 먹는다. 귀신이 팥의 붉은색을 싫어하기 때문에 팥죽을 쑤어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집안의 평안을 빌던 풍속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무리 전통 민속이라고 하지만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린다. 현대적 관점으로 보면 미신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는데 과연 동지에 팥죽을 먹는 것이 미신에서 비롯된 풍속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동지 팥죽은 미신이 아니라 과학이다. 유래를 보면 알 수 있다. 동지 팥죽의 기원은 6세기 초에 간행된 중국의 [형초세시기] 라는 책에서 찾을 수 있다.
동짓날 해의 그림자를 재고 팥죽을 끓인다.
역귀를 물리치기 위해서다.
이유도 함께 적혀 있다.
공공씨(共工氏)에게 재주 없는 아들이 있었는데 동짓날 죽어 역귀가 됐다. 팥을 무서워했기 때문에 동지에 팥죽을 끓여 귀신을 물리치는 것이다.
얼핏 읽으면 말도 안 되는 이유고 게다가 약 1500년 전 이야기이니 무지했던 시절, 몽매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미신 같다. 하지만 옛날이야기에 담긴 의미를 풀어보면 동지에 팥죽을 먹는 일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지를 알 수 있다.
동지 팥죽의 의미를 알려면 먼저 공공씨의 정체부터 알아야 한다. 공공씨는 중국 신화에 나오는 전설적 존재로 황하를 다스리는 신이었다. 아들이 죽어 귀신이 됐다고 했는데 보통 귀신이 아니라 역귀(疫鬼)가 됐다. 다시 말해 전염병을 퍼트리는 귀신이 된 것이다.
[형초세시기] 의 내용을 현대식으로 풀이하자면 다음과 같다. 황하에 홍수가 나서 강물이 범람했는데, 그 이유는 강물을 다스리는 신인 공공씨가 심술을 부렸기 때문이다. 공공씨의 아들이 죽어 전염병을 퍼트리는 귀신이 됐다는 것은 홍수로 인해 수인성 전염병이 나돌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공공씨의 아들은
왜 하필 팥을 무서워했던 것일까?
이 말은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이 뜨거운 팥죽을 끓여 먹고 영양을 보충해 병을 이겨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하필이면 팥으로 전염병을 예방하고 치료한 이유는 먹을 것이 넘치는 요즘과는 달리 옛날에는 팥이 겨울을 이겨내는 데 좋은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당나라 때 간행된 [초학기] 에서도 동짓날 뜨거운 팥죽을 먹으면 소화가 잘되고 양의 기운을 보충할 수 있어 몸에도 이롭다고 풀이했다.
추운 겨울, 뜨거운 팥죽 한 그릇이면 영양도 충분히 섭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얼었던 속까지 녹여 추위까지 물리칠 수 있으니 전염병 예방과 치료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동짓날이면 배고픈 사람을 모아 팥죽을 먹였다고 하는데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팥죽 한 그릇은 보약과 다름없는 영양식이었을 것이다.
그럼 왜 하필 동짓날 먹었을까?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동지 팥죽은 설날 떡국처럼 새해 소원을 비는 음식이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예전에는 동지를 아세(亞歲)라고 했는데 새해에 버금가는 날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고대에는 음력 11월이 한 해의 시작이었으며, 동짓날이 새해 첫날이었다.
그래서 우리 옛 속담에 “동지 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먹는다” 고 하는 것이다.
동지 팥죽에 담긴 진정한 의미는 해가 바뀌는 동짓날, 한 해 동안 전염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게 해달라며 비는 소원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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