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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현대인을 위한 복음
질문 17.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계명은 무엇입니까?
제목: 최고의 계명
갈라디아서 5:13~15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설교의 핵심 요약
질문17.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계명은 무엇입니까?
성경 이야기에는 하나님의 계명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 시대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그것을 찾고 실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성경을 두루 살펴보면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계명은 자비를 실천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중요하며 종교적인 의무를 수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한가지 더 추가한다면 그것은 진실입니다. 참되고 따뜻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두 계명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을 요약하여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는 이 한 말씀이 모든 율법의 핵심이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보통 사회에서 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제자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배우고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마음과 행동을 살피시며 자기 백성이 따라야 할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에게는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일을 피해야 하는지 각자의 기준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지켜야 할 계명은 십계명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배운 것과 교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금기들도 은연 중에 불문율로 마음에 자리잡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우상숭배를 가장 큰 죄악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나 전통적인 제사방식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기 쉽습니다. 또한 술을 마시는 일과 흡연 등 어떤 행동에 대해서도 가까이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정기적인 예배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강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자기가 가진 기준에 따라 자기와 타인의 신앙의 수준을 평가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행동을 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다’고 규정합니다. 특히 현대에 와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구체적인 사안에 대하여 다른 이해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태도입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는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찬반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특히 동성애에 대하여 보수기독교인들의 우려가 큰 것이 사실입니다.
이 모든 문제들 앞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사실 이것은 신앙을 가지고 진지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모든 사람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율법을 충실히 지키기 위해서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과 예수님 사이에서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율법을 폐하러 온 사람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온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율법에 매인 사람들이 자기들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볼 때 예수님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그런 행동을 바로잡지 않느냐고 비난했습니다. 그때마다 예수께서는 율법의 근본정신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셨습니다(마태 15:18). 율법이나 계명을 지킬 때는 그 정신을 따라야 하며 그 문자를 따르다가는 사람을 죽이게 된다고 사도 바울도 말했습니다(고후 3:6).
성경에는 많은 계명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어느 계명도 문자 그대로 지키기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생각해 봅시다. 물론 우리는 살인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전쟁에서 총을 들고 싸우는 것은 어떻습니까? 임신중절은 살인입니까? 안락사는 어떻습니까? 이처럼 명확한 살인금지 계명도 때때로 주의 깊은 판단을 필요로 합니다. 하물며 다른 계명들은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예수께서는 모든 계명을 요약하여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 22:37~40). 사도 바울은 이 둘을 더욱 요약하여 이웃 사랑하기를 우리 자신같이 하라는 이 한 말씀으로 우리는 온 율법을 지키는 것이 된다고 가르쳤습니다(갈 5:14). 그런데 구약성경의 예언자들도 이렇게 율법의 핵심을 파악하고 가르쳤습니다. 예언자 미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 세 가지를 진실과 자비, 그리고 겸손이라고 했으며(미가 6:8), 예언자 호세아도 종교적인 행위에 앞서 따뜻한 마음으로 살아가며 제사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라고 가르쳤습니다(호세아 6:6).
하나님의 계명은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계명을 지킬 때는 문자가 아니라 그 계명이 본래 의도한 근본정신이 무엇인지 잘 살펴야 합니다.
1. 율법주의자란 어떤 사람입니까? 그들은 어떻게 기독교 신앙을 왜곡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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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지 않으시고 온전하게 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방식으로 율법을 온전하게 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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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최고의 계명은 자비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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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계명
최고의 계명은 사랑과 진실이지만 그것을 가르치신 예수님과 사도 바울은 극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진실할 것을 다짐한 사람들은 과연 자기를 희생하며 계명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과 진실이 분별력을 상실하고 맹목적인 것이 될 때 신자는 최고의 계명을 지킨다는 바로 그 이유로 가장 악한 일을 벌입니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삶을 보면 그것이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박해한 무리도 최고의 계명을 사랑하고 지킨다고 자부하는 산헤드린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박해한 무리도 가장 경건하다고 자부하는 유대교 열심당원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최고의 계명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강한 필요를 느낍니다.
사도 바울은 지식 없는 열심을 가진 동족에 대하여 걱정했습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로마서 10:2).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무지를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마태복음 23:23).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때는 올바른 지식을 따라 그 근본정신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구도자들은 단지 열심을 낼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배우는 일에도 열심을 내야 합니다.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처럼 자신의 짧은 생각과 낡은 판단을 무한 반복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투석형(投石刑)
투석형은 돌로 사람을 쳐서 죽이는 형벌입니다. 이것은 매우 오래된 전통입니다. 사람을 돌로 쳐 죽일 때 누가 치겠습니까? 그 사람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같은 동네 사람들입니다. 투석형을 받은 사람은 아마 동네에서 해서는 안 될 몹쓸 짓을 했기 때문에 온 동네가 일어나서 그렇게 돌을 던지는 것이겠지요.
성경을 보면 아간과 그의 가족이 투석형으로 죽었다고 합니다(여호수아 7:24~26). 아간은 전쟁 중에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금은과 외투를 훔쳤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은 전쟁에 패하고 서른여섯 명이 죽었습니다. 그 전에 더 크고 어려운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이 작은 전쟁에서 이렇게 큰 패배를 당하고 보니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하나님께 물었더니 바로 한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손대지 말아야 할 것에 손을 댔기 때문이라고 하나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한 사람이 아간이었습니다.
아간에게 돌을 던진 사람들은 민족이 살 길은 오직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것뿐인데 아간이 벌인 것과 같은 악이 그 민족 안에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절박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한 사람 때문에 죽은 서른 여섯 명의 장정들의 가족이 더욱 분개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아간이 돌에 맞아 죽은 곳은 아골골짜기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투석형은 공동체 안에서 멸망의 위기의식을 느낀 사람들이 그들 안에 있는 악을 없애야 한다는 절박감의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는 투석형에 대한 이야기가 여러 곳에 나옵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기 욕심을 위해서 사람들을 선동하여 무고한 사람에게 죄를 씌워 투석형을 받게 한 일도 있습니다. 그렇게 죽은 사람이 좋은 포도원을 가지고 있던 나봇입니다. 그리고 그 나봇을 투석형으로 죽이고 그 포도원을 빼앗은 사람은 아합의 부인 이세벨입니다(열왕기상 21장). 나중에 이세벨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성에서 떨어져 죽었고 그의 시체를 개들이 먹어 치웠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스데반 집사가 투석형으로 죽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예루살렘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동족의 미움을 받아 그 자리에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죽기 전에 연설을 했는데 그의 복음설교는 사도행전 7장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인 사람들은 스데반 집사가 그들의 율법과 성전에 대하여 나쁘게 평가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투석형을 받는 또 한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도 복음을 전하러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다녔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을 깊이 연구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회당에서 인기 있는 설교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이 유대인의 전통인 율법과 성전에 대하여 깎아내리는 발언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폭도들을 선동하여 그를 회당에서 끌어내고 돌로 쳤습니다(사도행전 14:19~20).
너무나 순수한 신앙 때문에
사람을 돌로 쳐 죽이는 투석형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아마 그 형벌을 받을 사람이 최고의 계명을 어겼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도 마땅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들의 신앙 전통을 순수하게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확신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자기가 잘 알던 사람을 돌로 쳐 죽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신앙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곳에는 이런 일이 더 자주 일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오늘날 순수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가문이나 동네에서 신앙을 더럽히는 사람이 일어나면 그들을 돌로 쳐죽입니다. 오늘날 이슬람 국가에서 가끔 투석형이 있다는 보도를 우리는 듣습니다. 그 투석형은 간음을 행한 사람에 대한 동네 사람들의 처벌입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명예살인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가족을 죽입니다. 그 가족이 가장의 허락을 받지 않고 결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들이 지금도 지구촌의 어떤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절로 일어납니다. 명예살인은 보통 여성들에게 가해지기 때문에 비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신앙과 계명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일들이 왜 일어납니까? 그 이유는 그런 형벌을 가하는 사람들이 최고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뜨거운 마음을 가졌지만 올바른 지식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투석형을 경험하고 나서 자신에게 돌을 던진 동족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로마서 10:2).
올바른 지식을 가지지 않고 열심만을 가진 신앙인들은 최고의 계명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음식이나 의복 또는 건물이나 예배의 날을 지키는 것을 가장 최고의 계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어기는 것을 극도로 주저하고 두려워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오늘날 이슬람 신자들이 할랄식품을 찾는 것도 그처럼 종교적인 계명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어떤 이슬람 신자들은 여성들에게 히잡이나 부르카 같은 것을 착용하도록 강제합니다. 그들은 최고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계명을 지키는 것에 대하여 새롭게 가르치셨습니다. 예를 들면, 바리새인들이 철저하게 십일조를 바치면서 이웃을 돌보지 않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렇게 자잘한 것까지 십일조를 바치느라 애쓰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아니냐 고 하셨습니다(마 23:23). 사도 바울도 말하기를, 율법 조문은 사람을 죽이지만 성령은 살린다고 했습니다(고후 3:6).
신앙인이 근본으로 돌아가면 가장 중요한 것을 만납니다. 그것은 음식이나 의복, 또는 건물이나 절기가 아니라 진실하고 따뜻한 마음과 서로 믿어주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것을 일깨워준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많은 경험을 통해서 글로 새겨진 율법조문이 아니라 그 조문 안에 담긴 정신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최고의 경지에 이른 신앙인들의 깨달음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어릴 때는 계명을 그대로 따르도록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것은 연습이며 훈련입니다. 그래서 음식을 절제하고 의복을 단정하게 하며, 날을 정하여 그 날에 예배를 드리는 연습을 합니다. 그렇게 몸으로 연습을 하면서 신앙인은 자신이 하는 행위를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점점 그 행위에 담긴 의미를 깨달을 때 그는 계명에 담긴 정신을 이해하고 그 정신을 따라 살 것입니다. 그렇게 그는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합니다.
그런데 신앙이 성숙하지 못하고 계명에 담긴 올바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때 신앙의 행위들은 사회를 선도하기보다는 도리어 사회에 어지러움을 유발하는 원인이 됩니다. 예를 들면,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은 술과 담배를 하면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습니다.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이 신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가르침도 있습니다. 주일성수라는 이름으로 주일예배를 반드시 드리는 신자가 최고라는 인식도 있습니다.
뭣이 중헌디!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면, 그런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직과 자비와 믿음입니다. 기독교인이 종교인으로서 계명을 따르기 위해서 어떤 음식을 피하고 어떤 의식을 피하는 것으로 이 세상을 선도할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을 선도하는 신앙인이 되려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율법의 근본정신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은 진실하고 따뜻하며 사람들에게 미덥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해병대 수사단장에서 보직 해임된 박정훈 대령은 진실과 긍휼과 믿음을 실천하는 일에서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박대령은 실종자 수색 도중에 사망한 해병대원 채수근 상병의 사건을 조사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는 유족들을 위로하고 정해진 절차에 따라 조사와 보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고위직에 있는 어떤 사람들은 그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그의 업무를 방해했습니다.
지금 온 국민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진실을 가리고 가족을 잃은 유족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는지, 그리고 국민의 신뢰를 저버리는지를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최고의 계명을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진실과 자비와 믿음입니다. 우리가 가장 힘써서 지켜야 할 계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른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아야 바르게 지킬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최근에 개신교회가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 정부에 대하여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것이나 교사의 권리와 학생의 인권에 대하여 따뜻한 시선을 보내지 않는 것은 우려할 일입니다. 개신교회가 한 마음으로 일어나 동성애 반대운동을 벌이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것을 보면서 저는 최고의 계명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신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박하와 근채와 회향이라는 풀을 거둘 때도 십일조를 구별하여 드리기 위하여 그렇게 마음을 썼는데,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들이 정말 마음을 쏟아야 할 영역은 소외된 영혼들을 돌보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힘없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그들을 믿어주며 더불어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마음을 써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기에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십일조를 철저히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 자신들이 복을 받기 위함이라고 보신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종교적 열정은 결국 자신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돌로 사람을 쳐 죽인 사람들도 결국 자신들을 지키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들은 누구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것입니까? 아마 그들은 계명을 어길 경우에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나라나 민족은 영원히 멸망하여 천국에도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아닐까요? 그들은 도대체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는 걸까요?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그렇게 자잘한 것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가르치실까요?
환향녀(還鄕女)
비속어 중에 ‘화냥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남몰래 남편이 아닌 사람과 정을 통하는 여자를 비하하여 부르는 말입니다. 그런데 화냥녀라는 말의 어원은 환향녀(還鄕女)에서 왔다고 합니다. 지금부터 387년 전, 1637년 조선의 16대 왕 인조 때 병자호란이 일어났습니다. 병자호란은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하여 굴복하게 한 사건입니다. 그때 조선의 왕은 굴욕의 절을 하고 많은 조선인이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 포로들 중에는 수많은 여인들도 있었는데 그 여인들 중에 어떤 이들은 죽을 고생을 하다가 겨우 목숨을 건져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을 환향녀라고 불렀습니다.
조선사회는 환향녀를 어떻게 대했을까요? 아마 지금까지 욕설에 그 이름이 전해지는 것을 보면 따뜻하게 감싸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얼마나 비참했을까요? 그런데 일본군에게 끌려간 조선의 여인들도 비슷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바로 위안부 희생자들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위안부 기림의 날이 있습니다. 그것은 8월 14일입니다. 일본군에 끌려가 성노예로 시달리다가 그 수를 알 수 없을 만큼 많은 우리나라의 여인들이 죽었습니다. 그 중에 살아서 돌아온 여성들은 자신의 과거를 숨기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해방 후 46년을 지내다가 지난 1991년 8월 14일 고 김학순 할머니가 처음으로 위안부 피해사실을 증언했습니다. 그 이후로 우리나라 정부와 민간단체들은 일본 정부에 대하여 사과를 촉구했습니다. 그것은 피해를 입은 여성들의 마지막 소원이자 인권에 대한 존중을 요구한 것입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일본이 과거에 저지른 만행을 알리고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를 받아내야만 동아시아에서 다시는 반인륜적인 만행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기념비를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를 이끌어 내기 위하여 우리는 위안부 소녀상을 세웁니다. 그런데 일본 정부가 끝내 공식적인 사죄를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언젠가 모든 위안부 소녀상을 허물고 다시 반인륜적인 침략행위를 획책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과거의 잘못을 사과하고 아시아와 세계 평화를 위해 협력할 것을 다짐할 수 있도록 이끄는 일은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최고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시대와 미래를 위해서 꼭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최고의 계명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교적으로 미성숙한 시절에 붙들고 있던 계율 중심의 신앙에서 벗어나 신앙의 중심을 붙들고 그것을 실천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테러를 통해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려는 극단적인 이슬람신자들을 우려합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성경이 말하는 최고의 계명을 따라 살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본질을 붙들지 못하면 결국 비본질에 해당하는 껍데기를 붙들고 평생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대로 율법에서 더 중요한 요소인 진실하고 따뜻하며 서로 신뢰하는 마음을 잘 키워 나가야 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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