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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40
출애굽기 20장 3절
하나님의 율법에는 도덕법과 함께 의식법, 재판법이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구조로 볼 때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부분은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을 의미합니다. 특히 의식법의 경우 유아교회인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서 주신 법으로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제사법이나 절기 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재판법의 경우 이스라엘 국가를 공의와 공평으로 다스리도록 한시적으로 주신 법으로 구약 이스라엘 국가와 함께 만료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신약 백성은 의식법이나 재판법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그 정신은 도덕법 안에 남아 있게 되는데, 의식법은 폐하셨지만 십계명의 처음 네 계명을 통해 예배와 경건에 관한 교리와 의무를 영원한 도덕법으로 주셨습니다. 또한 재판법은 폐하셨지만 십계명의 나머지 여섯 계명을 통해 질서와 사랑에 관한 교리와 의무를 영원한 도덕으로 주셨습니다.
이러한 도덕법은 모세 시대 기록의 형태로 남기셨는데, 모세 이전에는 도덕법이 없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위 자연의 법 혹은 양심의 법을 처음부터 주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2장에서는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된다고 설명하면서 양심의 증거가 율법의 행위를 나타낸다고 말씀합니다(롬2:14-15). 물론 타락 이후 사람에게 주신 양심이 항상 같은 기준으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며, 심지어는 악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양심의 법으로 율법을 나타내신 이상 율법을 모른다는 것으로 핑계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율법의 구체적인 내용 하나하나를 살필 것인데, 왜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죄와 비참함에 있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구원에 대한 감사로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은 십계명의 서언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출애굽기 20장 2절에 보시면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자신을 여호와라고 말씀합니다. 출애굽기 3장 14절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신 부분이 여호와란 이름의 뜻입니다. 직역하면 ‘나는 나다’는 뜻입니다. 이 이름 안에는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신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피조물은 창조주에 의해 만들어진 자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의해 나로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닙니다. 나는 나다. 누구에 의해 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존재해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란 이름에서 우리는 모든 피조물들과 구별되시는 참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만이 최고의 통치자시요, 통치자로서의 권세와 권위를 가지고 계신 분이심을 알게 됩니다. 이런 여호와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명령하신다면 여호와란 이름 하나 때문에라도 순종하고 복종해야 할 의미가 피조물인 우리에게는 있는 겁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는 말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특별히 너희와 언약을 맺은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창조한 하나님이지만, 창조뿐만 아니라 보존하고 통치하는 하나님이지만,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모든 피조물의 하나님이지만, 특별히 나는 교회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교회의 특별한 사건으로서 십계명 서언에서는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말씀하시는데, 간단히 말하면 구원의 하나님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요약하면 그가 우리의 창조주시요, 그가 우리와 언약을 맺은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그가 우리의 구원자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서언에 이어 제1계명을 말씀하시는데, 출애굽기 20장 3절입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말라’라는 부정적인 표현을 쓰고 있지만 그 안에는 긍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1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고, 교회에 계시된 여호와인 나만을 유일한 네 하나님으로 여기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46문. 제1계명에서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1계명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유일한 참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하나님되심을 알고 인정하여(대상28:9, 신26:17) 그를 예배하고 영화롭게 하기를 요구합니다(마4:10, 시29:2). 제47문. 제1계명에서 금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1계명은 참되신 하나님을 하나님과(롬1:21) 우리의 하나님으로서(시81:10-11) 인정하지 않거나(시14:1) 예배하지 않거나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거나, 그리고 오직 그에게만 합당한 예배와 영광을 다른 것에 드리는 것을(롬1:25-26) 금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제1계명 해석은 94문을 통해 잘 나타납니다.
94문. 제1계명에서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답. 나의 영혼의 구원을 바라는 만큼 모든 우상숭배(고전6:9-10, 10:5-14, 요일5:21), 점술, 마술, 미신(레19:31, 신18:9-12), 성인에게나 다른 피조물들에게 간구하는 일(마4:10, 계19:10, 22:8-9)을 피하고 멀리할 것과, 또한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올바르게 인정하고(호6:3, 요17:3), 오직 그분만을 신뢰하고(렘17:5,7), 모든 겸손과(벧전5:5-6) 인내로(골1:11, 히10:36) 그분에게 복종하며, 모든 선을 오직 그분에게만 기대하고(시104:27-28 약1:17),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고(신6:5, 마22:37) 경외하고(잠9:10, 벧전1:17) 높이며(신6:13, 마4:10), 그리하여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행하기보다는 모든 피조물들을 버리고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마5:29-30, 10:37-39).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경우 두 문항으로 나눠 제1계명에서 요구하는 것과 금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지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한 문항 안에서 두 부분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우르시누스는 제1계명이 요구하는 순종의 부분들은 다음 일곱 가지로 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신지식, 믿음, 소망, 하나님에 대한 사랑, 하나님을 경외함, 겸손, 그리고 인내가 그것입니다.
제1계명이 요구하는 순종의 부분으로 첫 번째가 신지식인데, 신지식에는 그가 기뻐하시는 뜻대로 그의 역사하심과 말씀 속에 자신에 관하여 주신 계시와 일치하는바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대한 관념이 포합됩니다. 이러한 신지식으로 말미암아 감동이 일어나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과 두려움과 예배가 불러일으켜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롬10:14),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라고 성경은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지식과 반대되는 것은, 첫째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한 무지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 창조의 역사와 또한 우리에게 베풀어진 신적 계시로부터 마땅히 알아야 할 일들에 대해서 의심하는 것입니다. 이때 무지는 타고난 무지일 수도 있고 가장된 무지일 수도 있습니다. 타고난 무지란 우리의 본성의 부패로 인하여 지식이 전혀 없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한 무지를 말합니다. 반면 가장된 무지란 우리가 궁구해야 한다는 것을 양심이 말하는 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열심이나 그를 순종하려는 갈망이 없어서 알기를 구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전자, 즉 타고난 무지와 관련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롬3:11) 후자, 즉 가장된 무지와 관련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고전2:14)
둘째 하나님에 대한 오류 혹은 그릇된 관념들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없다고 상상하거나 혹은 이교도들과 미니교도들처럼 신들이 여럿이라고 상상하는 경우, 혹은 말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만 고유한 속성들을 피조물들에게 돌림으로써 사실상 여러 신들을 만드는 경우들입니다. 천사들과 세상을 떠난 자들의 영혼들을 신처럼 받드는 교황주의자들이 이에 속하는데, 기도 시에 누구의 이름을 높여 기린다는 것은 그렇게 기리는 그 존재에게 무한한 지혜와 능력을 돌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롬1:23,25) 요한계시록에 보면 주의 천사가 요한이 자기에게 경배하려고 할 때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는 내용도 있습니다.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계19:10)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에 대해 부정확한 관념을 갖고서 그에게서 벗어나 있으면서, 한 신을 인정하되 복음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참되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도 여기에 속합니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철학자들이나 이슬람교도들이 이에 해당합니다. 심지어 참되신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하면서도 그를 멀리하고 그 대신 자기들이 만들어낸 다른 우상을 예배하는 자들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참되신 하나님을 상상하나 말씀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그분과는 다른 분으로 상상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과 사모사타주의자들과 아리우스주의자들이 이에 해당하는데, 사모사타주의자들과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예수가 세례를 받거나 승천할 때 ‘입양’되었다고 주장하고, 후자의 경우는 성자 예수는 성부에 의해 시간 이전에 창조된 존재, 즉 피조물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요5:23),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요일2:23)
셋째 신지식에 반대되는 것으로 마술, 점술, 주술이 있는데, 이런 유에 속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적절한 지식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하나님의 원수 마귀와 맺어진 언약 혹은 협약에 의거하여 시행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특정한 말이나 의식들이 수반되는데, 그것들을 반복하거나 행함으로써 사람들이 마귀에 대한 약속된 것들을 얻고자 합니다. 본래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구하고 얻어야 할 것들이지만 마귀에게서 그것을 얻고자 하며, 또한 마귀의 도움을 받아 불필요한 일들을 알고 행하여 자기들의 악한 정욕을 드러내거나 뽐내려하며, 생활의 이익을 얻고자 합니다. 여기서 우르시누스는 독일어 ‘zaubern’[자우번]이라는 단어를 설명하는데, 이 단어의 뜻은 마법을 쓰다, 요술을 부리다 혹은 마술을 통해 불가능한 것을 수행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어디로부터 왔는가? 페르시아어 ‘magus’[마구스]로부터 왔다고 설명합니다. 이 단어의 뜻은 철학자나 교사를 의미하지만 사람들이 자기들 자신의 무지를 느끼고서 사탄의 도움을 구한 자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접신한 자와 박수무당을 음란하게 따르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의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레20:6),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신18:11-12)
넷째 신지식에 반대되는 것으로 미신이 있습니다. 물리적인 원인이나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하지 않는 어떤 효과들을 어떤 사물이나 표시나 말에 돌리는 것으로, 이런 효과는 마귀와 기타 원인들이 아니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악에는 점술과 또한 꿈에 대한 특별한 주시와 해석, 점술가들이 제시하는 징조나 예언 등이 있는데, 성경은 이 모든 것들을 지극히 명확한 언어로 정죄합니다.
다섯째 피조물에 대한 모든 신뢰가 있습니다. 피조물을 신뢰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여러 신들을 만드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이나 권세나 재물이나 피조된 대상물에다 신뢰를 두는 모든 자들을 명확히 정죄하십니다.
여섯째 우상숭배가 있는데, 우상숭배에 대해서는 특별히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95문에서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제1계명은 명백한 뜻은 우상 숭배에 대한 금지로 있기 때문입니다.
95문. 우상숭배란 무엇입니까?
답. 그것은, 말씀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 대신, 혹은 그분과 더불어, 다른 존재를 만들거나 지니고 거기에 우리의 신뢰를 두는 것입니다(대상16:26, 사44:15-17, 마6:24, 갈4:8-9, 엡5:5, 빌3:19).
그런데 우상숭배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하나는 참되신 하나님 이외에 다른 존재를 공공연히 섬기거나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예는 다른 종교들을 통해 잘 나타납니다. 그러나 다른 형태의 우상숭배가 있는데, 다른 신을 공공연히 섬기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오류를 범하거나 혹은 참되신 하나님을 섬길 때에 그가 제2계명을 비롯하여 그의 말씀의 갖가지 다른 부분들에서 지정하신 것들과 다른 방식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우상숭배는 더욱 교묘해진 것으로 제2계명을 통해 더욱 자세히 살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신상과 형상을 통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자신들은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상숭배의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형상화해서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바꾸는 것으로 그렇게 바꾸면 하나님은 더 이상 동일한 하나님이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지식과 관련된 마지막 내용은 하나님을 멸시함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를 사랑하고 그를 예배하고자 하는 갈망이 생기도록 감동을 받지 않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혹은 교회에 계시된 참되신 하나님을 알면서도, 그 지식으로 말미암아 그를 사랑하고 예배하며 두려워하고 신뢰하는 마음을 갖게 되지 않는 경우라 할 것입니다.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그 지식에 합당한 감정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가지고 있는 신지식은 마귀나 이방인이 가지고 있는 신지식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성경의 경고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롬1:20-21)
제1계명이 요구하는 순종의 부분으로 두 번째가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1문에서 정의한 바가 있습니다. 참된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든 것을 진리로 여기는 확실한 지식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값없이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죄 사함과 영원한 의와 구원을 베풀어 주셨다는 견고한 신뢰로서, 성령께서 복음을 통하여 마음속에서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이런 믿음을 두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에 반대되는 것들 가운데 결핍 상태에 속한 것이 있습니다. 불신앙, 의심, 망설임, 그리고 외식적이며 일시적인 믿음이 있는데, 외식적이며 일시적인 믿음과 관련해서는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마13:20-21)
믿음에 반대되는 것으로 좀 더 적극적으로 표현되는 것이 있는데, 하나님을 시험함, 육신적인 안일함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질서로부터 이탈하여 그의 진리와 권능을 자기 멋대로 추측하거나 시험하고, 그리하여 교만하고도 건방진 자세로 하나님을 불신하거나 멸시하는 것인데, 이런 자들은 헛된 자기 확신과 자기 자신의 지혜와 의와 권세와 영광을 추구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시키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권면을 하기도 합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고전10:9) 육신적인 안일함은 하나님과 그의 뜻 혹은 자신의 연약함과 위험에 대해서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또한 자신의 죄악성을 시인하거나 탄식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없이 사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기도 했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24:37-39)
제1계명이 요구하는 순종의 부분으로 세 번째가 소망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값없이 베풀어지는 영생에 대한 확실한 기대이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의 뜻과 경륜에 따라 현재의 악들로부터 구해주시며 그것들을 완주시켜주실 것에 대한 기대입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이런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이 소망은 믿음으로부터 생겨나는데, 왜냐하면 자신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누리고 있음을 확신하는 자는 미래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소망에 반대되는 것들 가운데 결핍 상태에 속한 것이 있습니다. 절망, 미래의 은덕에 대한 의심이 그것입니다. 특히 절망의 경우 자신의 죄를 하나님의 아들의 공로보다 더 큰 것으로 간주하여 아들 안에서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들이지 않고 신자들에게 약속된 은덕들을 바라보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끔찍한 진노와 영벌에 던져질 것에 대한 두려움에 짓눌려 고통을 당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끔찍하게 여기며 그를 잔인한 폭군으로 여겨 그를 미워하게 됩니다. 가인이 그러한 자였습니다.
소망에 반대되는 것으로 과잉의 상태에 속한 것이 있는데, 믿음 부분에서 살핀 육신의 안일함이 그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안일함에 대하여 정죄함과 동시에 영적인 안정감이 모든 경건한 자들이 가져야 할 것으로 교훈합니다. 영적인 안정감이란 양심의 모든 책망과 정죄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확신을 하는 것인데, 이는 다름 아닌 믿음과 소망에 참된 회개가 연합한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말한 내용이 이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1-32)
제1계명이 요구하는 순종의 부분으로 네 번째가 하나님을 사랑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최상으로 선하시며 긍휼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리하여 그를 최고로 사랑하며 그와 연합되고 일치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의 뜻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을 그 외의 다른 모든 것들을 즐기는 것보다 더욱 간절히 원하는 것이고, 또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잃을지언정 그의 사랑에서 제외되기를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것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거부함 혹은 하나님에 대한 멸시와 미움인데, 악인들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그들을 저주하시고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하면서 그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성이 하나님과 그의 공의에 대해 지닌 반감과 죄에게로 기우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으로 자신과 다른 피조물에 대한 무절제한 사랑도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그의 뜻과 영광보다 우리 자신의 정욕과 쾌락과 삶과 명예 등을 더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사랑하는 그것들을 잃어버리기보다는 그를 무시하고 거스르기를 더 좋아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거짓된 외식적인 사랑도 있는데,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어 결핍의 상태에 있는 것들입니다. 과잉의 상태에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이 절대로 없기 때문입니다.
제1계명이 요구하는 순종의 부분으로 다섯 번째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혹은 경외입니다. 이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진노, 죄를 벌하시는 하나님의 권세를 인정하며, 또한 하나님을 거스르는 범죄와 그에 대한 혐오를 가장 큰 악으로 간주하여 죄를 미워하고 혐오하는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사소한 일에서도 하나님을 거스르기보다는 차라리 다른 모든 것을 잃어버리리라는 기꺼운 심정입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보통 자녀의 두려움이라고 칭합니다. 아버지의 불쾌함과 화에 대해 죄송스러워 하며 아버지가 속이 상하여 벌하시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인데, 그러나 이런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선의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확신하게 됩니다.
이와 반대되는 것이 종의 두려움입니다. 종의 두려움은 일단 죄에 대한 지식과 깨달음, 또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에 대한 자각에서부터 생겨나게 됩니다. 때로 이러한 자각이 죄로부터 도피하고 죄를 미워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자녀의 두려움과 달리 죄 자체보다는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 때문에 돌아설 뿐 하나님을 거스른다는 것 때문에 죄를 미워하고 도피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종의 두려움은 영원한 정죄와 하나님의 거부에 대한 두려움일 뿐, 그것이 구원이나 영생과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제1계명이 요구하는 순종의 부분으로 여섯 번째가 겸손입니다. 겸손이란 우리가 행하는 모든 선한 것들이 우리의 고귀함이나 탁월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나오는 것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위엄과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무가치함을 인식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선한 것들에 대해 그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리는 것이요, 우리 자신의 불완전함과 과오들을 인정하고 그것들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해 주신 것보다 더 높은 지위를 스스로 탐하지 않고, 우리의 은사들에 불평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소명과 금생에서의 지위에 만족하며, 우리보다 더 좋은 상황에 처한 다른 이들에 대하여 시기하지 않으며, 그들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유익한 도구들이 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겸손과 반대되는 것이 교만입니다. 때로는 가장된 겸손도 있는데, 외식이 그것입니다.
제1계명이 요구하는 순종의 부분으로 일곱 번째가 인내입니다. 인내란 하나님께서 우리가 견디기를 바라시며 우리에게 보내시는 갖가지 악과 역경을 당하는 중에 하나님께 순종하고 굴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내는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와 정의와 선하심을 아는 지식에서 나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지식 때문에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명령에 반하는 일을 하지 않고,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가 우리에게 은혜와 도우심을 주시리라는 소망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슬픔과 고난이 있지만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 그리고 그의 정의와 선하심을 아는 지식으로 우리는 슬픔도 이겨내고 고란도 이겨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내와 반대되는 것이 조급함입니다. 때로는 경솔함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오늘 제1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말씀은 모든 우상숭배를 금하는 말씀입니다. 점술, 마술, 미신, 성인에게나 다른 피조물들에게 간구하는 모든 것을 금하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올바르게 인정하고, 오직 그분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모든 겸손과 인내로 그분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모든 선을 오직 그분에게만 기대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고 경외하고 높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행하기보다는 차라리 모든 피조물들을 버리고 포기하는 것이 제1계명을 통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거슬러 행하기보다는 차라리 모든 피조물들을 버리고 포기하는 것, 여기에는 여러분의 지혜와 지식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분의 재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친구일 수도 있고, 여러분은 부모 혹은 자녀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일 수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버려서라도 하나님 자신만큼은 붙들어야 할 분으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