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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실족함 없는 투트랙의 삶>의 줄거리:
이혼이 기혼자들의 특권(?)이듯이 실족함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믿는 사람들의 불편한 특권입니다. 자녀 되는 권세가 주어져서 구원을 받았으나 결국 그 구원을 이루지 못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 실족함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실족함과 지옥에 던져짐을 곧 바로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실족함 없는 투 트랙 삶을 살펴봐야겠습니다.
실족함 없는 투 트랙의 삶
(마가복음 9:38~50)
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41.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4. (없음)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6. (없음)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실족함 없는 투 트랙의 삶>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실족함 없는 투 트랙의 삶’
트랙은 경로 혹은 한 사람이 걸어갈 때에 남는 발자취를 의미합니다. 실족함이 없는 투 트랙의 삶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제까지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지옥과 사람을 직접 연결시키신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말씀하실 때가 거의 유일한 예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예수님께서는 실족이라는 단어와 연관 지어서 고강도의 경고의 말씀을 해주십니다.
실족(失足)이란 그야말로 발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길에서 발자국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 실족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경우가 있고, 나 스스로가 실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42절을 보면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화를 보면 갱단이나 마피아가 살인을 저지르고 시체에 돌을 매어 바다에 빠뜨립니다. 시체를 찾을 수 없다면 살인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절대로 떠오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몸에 돌을 매다는 정도가 아니라 거대한 연자맷돌을 목에 매여 던져지는 것에 비유하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할 바에야 차라리 죽는 편이 훨씬 유익일 정도로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임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심지어 실족하게 하는 대상은 가장 가까운 대상이기에 가족이나 친척이나 친구일 수 있다는 점이 무서운 일입니다.
이와는 달리 스스로 실족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한 말씀이 43~47절까지 이어집니다. 43절을 보면 손으로 죄를 지어서 실족할 바에는 손을 찍어버리고, 발로 죄를 지어서 실족할 바에는 발을 찍어버리고, 눈으로 죄를 지어서 실족할 바에는 눈을 뽑아버리는 편이 낫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실족이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길에서 발의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는 일입니다. 다른 길로 발걸음을 옮긴 모든 일이 실족이 됩니다. 우리는 그동안 신앙생활을 하며 실족을 예배당과 연관해서만 생각해왔습니다. 예배당에 잘 나오던 사람이 나오지 않게 되면 실족하여 믿음이 떠난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실족은 예배당의 출석과는 사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예배당에 가서도 스스로 실족할 수 있으며 또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예배당에 가지 않는다고 해서 실족하는 것도 아닙니다.
38절을 보면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이 어떤 낯선 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모습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바로 이전 말씀에서 제자들은 귀신들린 소년에게서 귀신을 쫓지 못하였기에 이러한 모습은 대단히 특이한 상황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행동을 저지합니다. 그가 자신들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내면을 살펴보면 세속적인 꿍꿍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다윗 왕국의 재현이 이루어지리라 여겼고, 그 때에 누가 높은 자리에 오를지를 두고 논쟁을 벌이는 등 믿음 없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제자들 내에서도 경쟁이 치열한데 외부에서까지 경쟁자를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름도 모르는 낯선 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신들도 하지 못했던 귀신을 쫓는 일까지 하고 있으니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드는 기분이 들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배타적이고 편협한 선민의식과 같은 마음가짐이 제자들에게서 나타났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의 구원은 모든 인류를 향한 것이었지만 당시의 제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구원의 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을 요한이 대표로 예수님께 사건을 설명합니다만 예수님은 칭찬하시기는커녕 39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의 행동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은 자의 믿음을 실족하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신앙적 관점에서 큰 문제였기에 예수님은 이를 지옥과 직접 연관을 지으시며 강조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심한 꾸중을 들을 줄 몰랐던 제자들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자신들은 잘했다고 여겨서 예수님께 보고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 속 욕심까지 다 아셨고 그것이 다른 사람을 실족시킬 여지가 있음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온유하고 자비하고 사랑이 많으시지만 죄에 대해서만은 너무나도 냉혹하셨습니다. 차라리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죽으라는 말을 제자들의 면전에서 하시는 모습에서 죄에 대한 냉혹함이 잘 드러납니다.
앞서 제자들이 귀신들린 소년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한탄하셨습니다. 제자들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을 향해 “믿음이 없는 세대여”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와 대비되는 인물이 본문에 등장합니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이 낯선 사람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예수님께서 막지 않으셨다는 점에서 이 사람이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삶의 현장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지금 연결을 이루는 마음가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연결될 때에 삶의 현장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능력과 지혜와 주권으로 이끌어 가시게 됩니다. 즉 귀신을 쫓은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에게도 없었던 믿음을 어떻게 가질 수 있었던 것일까요?
아마도 이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던 군중들 중 한 명이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의 믿음이 존경스러운 이유는 예수님이 일으키신 기적을 보고 말씀을 들으면서 진리를 깨달았다는 점입니다. 나사렛 출신의 목수인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계심을 보았던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예수라는 젊은이와 연결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전대미문의 사건들이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예수라는 젊은이와 인격적으로 하나가 되어 계심을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윗 왕국을 재현하실 인물로 생각했던 제자들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하늘과 연결되신 분으로써 예수님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생각하기를 지속하는 동안에 어느덧 이 사람의 마음도 예수님을 통해 하늘과 연결을 이루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의미가 이 사람의 마음에서 실현되었습니다.
반면 제자들은 언제나 몸으로 예수님과 함께 하였고 눈으로는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마음속에서 예수님은 하늘과 연결된 분으로 여겨지기에 앞서 이 땅에서 이루고 싶었던 꿈과 소원을 이루어주는 분으로 여겼습니다. 항상 자신들의 꿈과 연결된 예수님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기에 낯선 사람처럼 귀신을 쫓을 수도 없었고, 예수님으로부터 믿음 없는 세대라고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로부터 우리가 품어야 될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품어야 될 예수님은 하늘과 연결되어 계신 예수님이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마음에 품었기에 이 낯선 사람은 하늘과 연결되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귀신을 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꿈과 비전을 연결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예수님을 마음에 품고 있어도 하늘과 연결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육체로 예수님과 함께 있어도 믿음이 제로일 수 있고, 육체로는 예수님과 떨어져있어도 하늘과 연결된 믿음만 있다면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이 낯선 사람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할 수 없도록 저지한 것이 실족시키는 행동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믿음이란 하늘과 땅이 연결되어진 길에 발자취를 남기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것은 이 길에서 나가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귀신을 쫓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한 점이 죄가 됩니다.
차라리 이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귀신을 쫓았더라면 제자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 낯선 사람에게 금지시켰던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것은 마음에 예수님을 품지 말라는 것이고 곧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길에서 나가라는 경고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크게 책망하신 실족의 의미입니다. 이런 짓을 할 바에는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져 죽는 편이 낫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이 사람은 또 예수님을 만나서 믿음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41절을 보면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는 곧 예수님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계심을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셨는지 요한복음 17장 8절을 보면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연결되어 계심을 알고 믿는 것이 바로 믿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21절을 보면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8절의 말씀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이 세상의 문제해결과 연결시키는 것으로 여겨왔습니다. 또 이 세상에서 이루고 싶고 도달하고 싶은 고지와 예수님을 연결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자 했지만 이것은 믿음이 아니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일 수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한다는 것은 하늘과 연결된 길을 걷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져 죽는 편이 나을 정도로 큰 죄라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손 때문에 하늘과 연결 된 길을 갈 수 없다면 손을 잘라버리고, 발 때문이라면 발을 잘라버리고, 눈 때문이라면 눈을 뽑아서라도 하늘 길을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하늘과의 연결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실족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예를 들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먼저 본문에서 오해해서는 안 되는 점이 있습니다. 43절을 보면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범죄한다는 것은 실족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범죄는 단순히 법에 저촉되는 행동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다시 해석해보자면 “네 손 때문에 하늘과 마음의 연결이 끊어진다면 찍어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제목에서 말씀드렸던 “실족함 없는 투 트랙의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몸에 병이 나면 자연스럽게 건강의 회복에 집중하게 됩니다. 이 자연스러운 마음의 변화가 실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주권자이십니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조차도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관장하십니다. 이러한 주권자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가운데 몸에 병이나 장애가 생겼다면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반드시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 의미를 깨닫는 것이야말로 병이나 장애에 대한 올바른 태도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그 의미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병은 낫고 장애는 회복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과 연결 될 수 없고 하나님의 뜻하신 바는 밝혀질 수 없기에 실족함은 더욱 강화되어 갑니다.
본문 43절을 보면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또 48~49절을 보면 지옥에 대해 묘사하시길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연결에서 벗어나면 이와 같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늘과 세상의 중간에 있습니다. 마음이 하늘과 연결되지 않고 땅과 연결되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육체 때문입니다. 몸이 없으면 마음은 땅과 연결 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땅과 연결되면 하늘과의 연결은 끊어지고 지옥에 가게 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과 마음이 떨어지기를 바라시며 제동을 거십니다. 이때에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가장 보편적인 제동장치가 질병이나 장애입니다.
몸에 괴로움을 주는 질병이나 장애는 더 이상 몸을 생각하지 말고 마음을 하늘과 연결시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몸에 병이 나면 더욱더 몸에 신경을 쓰고자 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세상에 대한 관심의 강도가 오히려 더 강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실족하는 것임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목사님이나 지도자분들이 상담을 할 때에도 주의가 필요합니다. 병에 걸린 교인이 있으면 이 병을 어떻게 고칠 것인가에 대해 집중하여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병을 고치기 위한 방법으로 금식기도를 제안하고 치유의 능력이 있다는 분을 주선합니다. 혹은 보다 적극적으로 무슨 약을 권하거나 병원이나 의사를 추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온 신경이 병이나 장애에 대한 극복에 치우치는 동안 철저하게 하늘과의 연결은 끊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병이나 장애를 주신 의도는 결코 육체에 집착하며 편한 상황을 만들라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문제시 하시는 것은 몸으로 인해 마음과 세상이 연결되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을 깨닫고 병이나 장애를 허락하셨다면 하나님의 의도에 순응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몸이 괴로우니 몸에서 등을 돌려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일까요? 더욱더 몸을 붙잡고 편해질 때까지 씨름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일까요?
하나님의 의도를 모르는 사람은 더욱더 몸을 붙잡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마음이 몸과 밀착되는 것을 문제시할 것입니다. “이대로 놔두었다가는 지옥으로 직행하게 생겼으니 하나님께서 몸에 질병과 장애를 주심으로써 브레이크를 거셨구나. 이제는 더 이상 마음을 몸과 세상에 주지 않고 하늘과 연결을 해야 되겠다.”라고 마음먹는 것이 믿음을 가진 사람의 정상적인 사고입니다.
그런데 병이 나면 몸으로부터 마음을 끊으라는 말이 이상하다고 여겨지시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계신다면 병이나 장애가 우연히 주어질 수 없음에 대해서는 인정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를 놓고 본다면 병이 났을 때에 하나님이 아닌 몸에 몰입한다는 것이야 말로 정신병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주권을 믿는다면 질병이나 장애에도 반드시 이유는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마음을 하늘과 연결시키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몸에 붙고 몸을 통해 만나는 세상에 붙어있는 동안에는 하늘과 연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로부터 돌이키라고 질병과 장애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몸에 더 신경을 쓰기 시작하고, 교인들에게 마음으로 몸을 더 붙들라는 상담을 해준다면 실족하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 기도하고 금식할지라도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설령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할지라도 마음을 몸에 붙이기를 언급한다면 모조리 실족하게 하는 일들입니다. 하늘과의 연결이 끊어짐은 더욱더 심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 자신을 실족하게 하고 타인을 실족하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실족을 피하고 하늘과의 연결을 지속할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이 이른바 “투 트랙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조차 주관하십니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몸을 고치는 방편으로 의학을 허락하셨습니다. 의학의 발전이 하나님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것은 결코 아닙니다.
햇빛과 비가 선인에게도 내리고 악인에게도 내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학은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몸이 아프다면 병원을 찾아가든 약국에 가서 약을 사먹든 아무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의사가 권장하는 치료를 받으시면 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고치신다는 특별한 응답을 받으셨다면 믿음으로 이겨나가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의학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가 몸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반드시 몸과 분리가 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풍랑을 만난 배 위에서 주무셨던 것을 떠올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몸은 풍랑 속에 있지만 마음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평안을 누리셨기에 깊은 잠을 주무실 수 있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는 죽는 순간에도 마음을 하늘로 보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을 원망하기는커녕 그들의 죄가 용서 받기를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몸과 마음을 분리시켰던 것입니다.
몸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마음은 얼마든지 몸과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투 트랙의 삶입니다. 몸과 마음이 다른 트랙을 달리는 것입니다. 마음은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시작하는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트랙을 달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늘과 연결이 되면 마음은 평안을 누리고, 몸은 몸대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속하게 됩니다.
반면 마음을 병든 몸에 붙인다면 반드시 실족하게 됩니다. 몸에 병이 나고 장애가 있는 경우에는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기에는 금싸라기처럼 좋은 기회를 마주한 셈입니다.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지만 얼마든지 십자가를 바라볼 수는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제1트랙을 걸어갑니다. 하늘까지 도달하신 예수님의 죽음과 무덤에 묻히심과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까지의 트랙을 마음으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에 목숨을 걸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트랙 안에서 마음의 기쁨과 만족의 문제를 끝내겠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이 일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돈 벌겠다고 계획하고 실천하는 일들의 만 분의 일도 어렵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기도하는 동안 마음은 주님이 걸어가신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보좌우편에 오르신 길을 따라가게 됩니다. 그럴 때에 몸은 하나님의 주권을 따르게 됩니다. 진료하는 의사가 불교의 수장일지라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습니다.
삶은 투 트랙이 되어야만 합니다. 마음은 십자가로부터 시작된 예수님의 트랙을 따라가고, 몸은 하나님의 주권이 이끄시는 제2트랙에 맡겨야만 합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걱정해야 하는 것은 몸이나 몸으로 대하는 삶의 내용들이 아닙니다. 이러한 걱정은 주제넘은 행동입니다. 이 세상의 삶에 대해서 관여하기 위한 조건은 투 트랙입니다. 마음의 기쁨과 만족의 문제는 십자가의 길을 따라 하나님과의 연결을 이룸으로써 해결되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몸은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을 따라 진행되어 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장갑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투 트랙 삶이 아니고서는 모두가 실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과의 연결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몸의 병과 장애, 삶의 모든 문제가 하나님과의 연결로 대입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오늘은 병과 장애를 중심적으로 말씀드렸지만 돈 문제, 가족문제를 비롯한 삶의 모든 문제에 투 트랙 삶은 적용되어야만 합니다. 마음이 세상의 일들과 분리될 수 없다면 문제가 생길 때마다 더 강하게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의도와는 반대되는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던져지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남을 향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에게 적용될 수밖에 없습니다.
투 트랙 삶은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중에 가장 쉬운 일입니다. 투 트랙 삶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늘 보좌 우편까지 이어지는 길 안에서 마음의 기쁨과 만족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겠다!”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운명입니다.
마음을 하늘과 연결시키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배우자나 자녀와 대화도 하지 않고 사업도 장사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결심과 믿음만으로도 마음은 세상으로부터 90%는 해방되고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머지는 이 믿음이 지속됨으로써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세상에 붙이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은 버려지지 않습니다. 마음이 하나님과의 연결이라는 예수님의 트랙을 달릴 때에, 세상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트랙에 들어가 달리기 시작합니다. 질병이라는 문제, 자녀라는 문제, 돈이라는 문제를 바라보면서 십자가에서 죽을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려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외면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병이 생긴 몸을 외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몸에 생긴 병은 전문가의 의견에 맡겨두고 마음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서 병원도 못 가게 생겼다면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느라고 몸을 외면할 때에 그 몸은 하나님의 주권이 책임져 가실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마음을 예수님의 트랙으로 보낼 때에 마음은 제1트랙을 따라 하나님과 연결됩니다. 그리고 내가 외면한 문제들은 어느덧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제2트랙 안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투 트랙으로 구원을 이루고 실족을 피함으로써 마음은 하늘과 연결되어 평강을 누리고 삶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져 갈 것이며 또한 내세에서도 천국은 보장될 것입니다. 이것을 확인하시는 삶을 사시면서 간증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를 중심으로 마음은 하늘로 이어지는 제1트랙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땅에서의 삶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제2트랙으로 들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투 트랙 삶을 통해 주님이 그토록 염려하시고 강하게 경고하셨던 실족함이 사라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