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랄까 아침일찍이랄까 7시 정도에 숙소를 나서 부소산성 산책에 나섰다
안개가 자욱하다
여름내내 열대야로 그야말로 푹푹찌는 가마솥이더니 요 며칠사이 급격히 기온이 겨울처럼 이어진다
이번 여름은 너무나 견디기 힘든 날씨였다 그런데 이것이 그나마 나은 날씨로 앞으론 더 심해진다 하니 살기가 더 힘들어질 것 같다
지구도 이제 더이상 인간들의 철부지? 무지몽매한 행태를 봐 줄 수가 없는가 보다
어제 기온이 유난히 내려갔다가 오늘 다시 해가 떠 기온이 오른다하니 이렇게 염무가 오리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자욱하다
부소산성 앞 넓은 주차장에 차에서 내리면 상가들이 둘러쳐져 있고 그 사이를 비집고 매표소를 거쳐야만 입장하던 옛 진입로가 없어지고 이제는 시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모양새로 다소 바뀐 것 같은 입구이다
그래도 입장료 2000원 내는 매표소는 있다
부여 부소산성은 현 부여읍 시가지의 북쪽에 높이 솟아 있는 부소산에 위치한 산성이다.
부소산은 해발 106m의 낮은 산으로 남측을 내려다 보면 사비 도성이 한눈에 조망된다. 부소산의 북쪽과 서쪽은 백마강이 곡류하고, 동쪽은 외곽 성인 부여나성이 연접한다.
보통 삼충사 영일루로 성을 한바퀴 돌 수 있는 구조이나 우리는 낙화암, 고란사만 갔다 오기로 했다
안개도 그렇고 아침 산성의 숲 공기도 그렇고 지난밤 기운이 깰 수 있는 상쾌하고도 약간 서늘한 기온으로 딱 좋았다
먼저 맞는 곳은 사자루이다
부소산에서 가장 높은 표고 106m 지점 사비루(泗沘樓)? 부근에 약 700m 둘레의 테뫼식 산성이 있는데, 여기에는 사비루와 망루지(望樓址)가 남아 있다.
부여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누각으로, 이곳은 달구경을 했다는 송월대가 있던 자리이다.
조선 순조 24년(1824)에 군수 심노승이 임천군 군사리에 세운 것으로, 조선시대 임천의 관아 정문이었던 배산루를 1919년에 이곳으로 옮겨 짓고는 사자루라 이름하였다.
사자루에서 내려와 거목이 된 참나무 군락지를 내려오면 백화정이 나타난다 낙화암 위에 생긴 정자이다
낙화암은 부여군 부소산 북쪽 백마강(금강) 변에 서 있는 바위 절벽이다.
백제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게 점령될 때 수많은 백제 여인들이 꽃잎처럼 백마강에 몸을 던지는 모습이 꽃이 떨어지는 것과 같아 낙화암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전설이 있지만,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낙화암의 기암절벽은 부소산성을 통해 직접 올라가 정자에서 백마강을 바라보는 것도 좋고, 백마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올려다보는 것도 좋다
그런데 왜 경치 좋은 이곳을 누가 낙화암의 슬픈 전설로 1500년 넘게 기억하도록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 민간들에 전래되도록 했을까?
『삼국유사』에 인용된 백제고기(百濟古記)에 의하면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어 아래로는 강물에 임하는데, 모든 후궁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차라리 죽을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고 하고, 서로 이끌고 이곳에 와서 강에 빠져 죽었으므로 이 바위를 타사암(墮死巖)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낙화암의 본래 명칭은 타사암이었는데, 뒷날에 와서 후궁이 삼천궁녀로 와전되었고 이후 궁녀를 꽃에 비유하고 이를 미화하여 붙인 이름이 분명하다.
이 바위와 관련되어 전해오는 전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용담(勇談)이 많은 영주(英主)였는데, 여러 차례 신라의 여러 고을을 쳐서 천하에 그 성세(聲勢)를 높인 뒤로는 정사는 돌보지 않고 날마다 궁성 남쪽의 망해정(望海亭)에서 궁녀들을 데리고 가무주연(歌舞酒宴)의 향락을 일삼았다.
좌평 성충(成忠)은 이를 근심하고 극력 간(諫)하였으나, 왕은 이 말이 귀에 거슬려 그를 옥에 가두어버렸다. 그러자 그는 마음이 아파서 죽고 말았다.
이러할 때 일찍이 백제의 침략을 받아온 신라는 무열왕 및 김유신(金庾信) 등의 영주와 명신(名臣)이 나타나서 나라의 힘을 크게 길러 복수를 하고자 당나라 군사와 힘을 합하여 백제를 치게 되었다.
이에 백제의 용장 계백(階伯)은 5천의 적은 군사로써 황산(黃山)벌에서 신라 군사와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나당연합군의 수많은 군사가 일시에 수륙 양면에서 쳐들어와 왕성(王城)에 육박해오자 왕은 그제야 성충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음을 후회하였다.
왕은 하는 수 없이 해질 때를 기다려 왕자 효(孝)를 데리고 웅진성(熊津城)으로 달아나서 싸웠으나 성문은 부서져 열리고 말았다.
수많은 궁녀들이 슬피 울면서 흉악한 적군에게 죽는 것보다 깨끗하게 죽는 것이 옳다 하여 대왕포(大王浦) 물가 높은 바위 위에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사비수 깊은 물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이러한 일로 인하여 이 바위를 낙화암이라 하였다고 한다.
낙화암에서 내려오면 고란사가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창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백제 때 왕들이 노닐기 위하여 건립한 정자였다는 설과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라는 설이 전하며, 백제의 멸망과 함께 소실된 것을 고려시대에 백제의 후예들이 삼천궁녀를 위로하기 위해서 중창하여 고란사(高蘭寺)라 하였다.
이 사찰은 고란초에 의해 널리 알려져 있는데 법당 뒤편에서 나오는 약수와 함께 이 사찰의 명물을 이루고 있다.
고란사는 백제 멸망과 관련된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하나 정확한 유적이나 유물은 없고, 현재의 고란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는데 현 사찰 건물은 은산 승각사를 이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028년(현종 19)에 중창하였고, 1629년(인조 7)과 1797년(정조 21) 각각 중수하였으며, 1900년 은산면에 있던 숭각사(崇角寺)를 옮겨 중건하였다.
1984년에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인근 낙화암, 백마강 유람선과 함께 둘러보기 좋다.
고란사(고란약수)는 부여 성왕로, 석탑로 등을 통해 부소산성에 진입하여 접근하거나 나루터로를 통해 구드래나루터에서 백마강 유람선을 타고 접근할 수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931년에 지은 것을 1959년 보수, 단장한 정면 7칸, 측면 5칸의 법당과 종각인 영종각 뿐이다.
고란사 주변 백마강 안개가 걷히며 강 건너 살포시 보이는 전경이 아름답다
고란사 주위에는 낙화암 · 조룡대(釣龍臺) · 사비성(泗沘城) 등이 있다.
부소산성 산책을 끝내고 나오는 길엔 어느새 안개가 모두 걷히고 파란 가을 하늘이 드러난다
백제 중흥을 이끌며 백제 수도를 좁은 공주 웅진골에서 넓은 부여 사비골로 옮긴 성왕의 위용이 도시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