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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9일 주일설교
시리즈 제목: 땅을 위한 하늘의 대리인들 39
설교 제목: 나의 자유, 너의 자유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19~20
설교를 위한 묵상:
나는 바르게 사는 것일까? 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일까? 나의 양심에 따라 사는 것일까? 아니면 주변에서 칭찬을 들을 정도로 사는 것일까?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될까? 나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범할 수 있을까? 주변에서 다들 한 목소리를 내는 것 같은데 나는 생각이 다르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사람이 나의 자유를 침범할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결혼을 몇 살에 해야 좋을까? 적절한 나이라는 것이 있을까?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은 나쁜 일일까? 잘못된 일일까? 나는 내 마음대로 옷을 입을 수는 없을까? 공적인 자리에 나갈 때 나는 어느 정도까지 옷차림을 맞춰야 할까? 나는 내 마음대로 헤어스타일을 할 수는 없을까? 문신은 어떨까? 어떤 일에 대한 다른 판단을 하고 있다면 나는 공동체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삶을 보면서 자유인으로 사는 것과 종으로 사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 루터가 말한 바 있는데 그 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것이다. 이 설교는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에 대한 올바른 표지판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다.
설교 개요:
1. 나는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가?
2. 나의 자유가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한다면?
3. 마녀사냥이 일어나는 곳
4. 그리스도인의 자유
***
1. 나는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가?
삼십대 중반의 여성이 있습니다. 결혼을 하여 딸을 낳았습니다. 남편은 부동산중개업을 하고 아내인 자신은 골프장에서 근무합니다. 아파트를 장만하고 세식구가 오손도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사업 실패의 충격으로 인생을 포기했습니다. 아직 어린 아이와 덩그러니 남은 여성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렇게 한두해가 지나갔습니다. 아이도 점점 성장하고 여성은 일상에 적응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음씨 착하고 건강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면서 교제를 시작했습니다. SNS에 사진을 공유합니다. 그런데 시댁 식구들이 그 사진을 보았습니다. 이럴 때 시댁 식구들은 잘했다고 말해야 합니까? 아니면 남편을 보낸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남자를 만나는 것이냐고 욕해야 합니까? 이 여성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사람은 혼자는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말은 더불어 사는 존재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동물들은 새끼를 낳을 때가 되면 아무도 없는 곳에 홀로 가서 자리를 잡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경우에는 출산할 때가 되면 반드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 살 때는 지켜야 할 규칙 같은 것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거나 해롭게 하면 안 됩니다. 공동체를 위태롭게 하는 일도 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사는 곳에는 부모나 선배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자리가 있습니다. 그곳은 배움의 자리라고 하겠습니다. 선배나 스승, 그리고 부모로부터 배움을 통해서 인간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왔습니다. 현재는 과거보다 발전했습니다. 학문과 제도 등 사회 전반에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식과 기술을 전수해주는 인간은 다른 모든 짐승들이 이루지 못한 문명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은 어느 정도까지 다른 사람을 의식해야 할까요? 우리의 옷차림은 어디까지 입을 수 있는 걸까요? 헤어스타일은 어떨까요? 우리는 레깅스를 입고 다니는 여성들을 봅니다. 우리는 다양한 색깔로 머리카락을 염색한 사람들도 봅니다. 우리는 몸에 문신을 한 사람들도 봅니다. 저도 눈썹에 문신을 했습니다. 그렇게 개인이 어떤 옷을 입는지 또는 어떤 머리모양을 만드는지, 또는 문신을 하는지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우리는 자유롭게 원하는 옷을 입을 수 있을까요? 최근에 저는 머리카락을 조금 길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가급적 깔끔하고 점잖게 두발을 관리했는데 지금은 왠지 두발을 길러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 보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일까요?
미국 교회에 다녀오신 이장로님이 미국 목회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장로님이 다녀오신 미국 교회에서 설교자는 양복을 입지 않더라고 합니다. 저는 가급적 양복을 입고 강단에 서는데 미국은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그렇게 보면 옷차림이라고 하는 것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미국 목사님이 한국에 와서 설교를 한다면 어떤 옷을 입어야 합니까? 한국의 상황에 따라 양복을 입어야 합니까, 아니면 자신이 늘 하던 대로 복장을 선택할 수 있습니까?
우리 교회의 이웃에 있는 아파트에는 외국인이 살고 있습니다. 그 외국인은 여성인데 키도 크고 옷차림도 독특합니다. 어떤 날은 영화배우처럼 멋진 코트에 정장을 하고 어떤 날은 달라붙는 티를 입고 모델처럼 걷습니다. 그래도 아이를 양육하면서 멋지고 당당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아름답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여성들과는 좀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교회 근처에는 외국인들이 거주하는 게스트하우스가 있는데 그곳의 청춘들도 자기 나라에서 입던 방식으로 복장을 선택합니다.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2. 나의 자유가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한다면?
저는 자녀들을 양육할 때 귀가시간을 엄격하게 지키도록 강제했습니다. 언젠가는 여자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반바지가 너무 짧다고 가위로 잘라 버리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이 염색을 하는 날이면 엄하게 꾸짖었고 화장도 못하게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녀들이 학교에서 나쁜 영향을 받을 것을 우려하여 집에서 가르치는 홈스쿨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 자녀들은 나중에 한 살 어린 후배들과 함께 학창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언 13:24) 말씀을 벽에 붙여 두고 자녀들을 엄하게 훈육하고 또 단속하기에 바빴습니다. 제 마음 속에 있는 부모의 그림은 바로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그런 억압적인 교육방식이 자녀들을 망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저는 당황했습니다. 때로는 잘 몰라서 그랬다고 변명을 해보았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잘 자라준 아이들이 고맙게 느껴집니다. 부모는 어디까지 자녀의 삶에 간섭할 수 있을까요? 부모의 간섭이 자녀에게 유익이 되는 때는 언제일까요, 그리고 그 간섭이 자녀에게 해가 될 때는 언제일까요? 지나간 과거를 생각하면서 이런 저런 반성을 해 봅니다. 그러면서도 다시 나에게 그런 기회가 온다면 나는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제가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바로 지금 제가 다른 사람들과 살면서 때로는 그 사람을 나의 기준으로 판단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의 행동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 동성애에 대한 KBS심야토론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4년 전에 방송된 것입니다. 그 방송에서 방청객으로 참여한 사람 중에는 남성 두 사람이 서로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동성커플이라고 당당하게 밝혔습니다. 그 주제에 대한 토론을 하는 방송을 보면서도 그 동성커플의 발언과 행동을 보았을 때 속으로 조금 놀랐습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는 오늘 금요일, 2024년 9월 27일 저는 독일에서 혼인신고를 마친 여성커플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독일에서는 동성으로 결혼을 하려는 사람들을 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정식 부부로 인정해 준다는 기사였습니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만약 한국에서 관공서에 혼인신고를 하러 간다면 공무원들이 얼마나 난감해할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고 했습니다. 2024년 현재 우리나라와 독일은 이렇게 다릅니다.
영국에서는 손흥민 선수가 축구선수로서 빼어난 활약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속한 토트넘 축구단의 같은 멤버 중에 벤탄쿠르라는 이가 있습니다. 요새 그가 인종차별을 했다는 이유로 영국축구협회로부터 징계를 받을 위기에 있다고 합니다. 인터넷 기사를 보니, 그 사건은 이렇습니다:
벤탄쿠르는 지난 6월 우루과이의 한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손흥민에게 한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큰 비판을 받았다. 프로그램 진행자는 벤탄쿠르에게 손흥민의 유니폼을 줄 수 있냐고 질문했다. 그러자 벤탄쿠르는 “아니면 손흥민의 사촌 유니폼이라도. 그들(아시아인)은 거의 다 똑같이 생겼잖아”라고 말했다. 동양인의 비슷한 생김새를 조롱하는 명백한 인종차별적 발언이었다.
이 사건은 우루과이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벤탄쿠르가 인종차별적인 말을 한 것입니다. ‘아시아인은 거의 다 똑같이 생겼잖아!’ 이 한마디를 했다고 그는 지금 징계의 위기 가운데 있습니다. 손흥민 선수는 동료 선수인 벤탄쿠르의 진심어린 사과를 받았고 용서했지만 그 사건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이것이 2024년 영국과 우리나라의 차이입니다.
한 사람의 발언이 다른 사람에게 차별에 해당하며 그것은 곧 그 사람에 대한 모욕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한 사람이 말로 상처를 받기도 하고 그 말 때문에 살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말로 준 상처도 가볍게 여기지 않는 사회가 더 성숙한 사회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예를 들면, 깡패들의 사회에서 사용하는 일상어가 있습니다. 거기에 인격에 대한 존중이나 배려 같은 것을 찾아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깡패의 세계에 의리는 있을지 몰라도 인권에 대한 존중은 없을 것입니다. 한 사회의 문화와 수준도 그렇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 사회에서 가장 약한 사람이나 존재를 어떻게 대하느냐가 곧 그 사회의 수준이라고 하겠습니다.
건강하고 따뜻한 사회는 타자에 대한 포용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능력이 어느 정도 되느냐에 따라 그 사회가 건강한지 여부와 성숙한지가 드러납니다. 이인성 장로님이 이번에 미국에 다녀오셔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장로님이 매일 산책을 하면서 사람들을 마주치면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어느 날 한 노인이 한글로 된 편지를 전달해 주면서 인사를 하더랍니다. 미국에 가서도 사람을 따뜻하게 대했더니 그런 인사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도 기뻤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역사를 보면 인종갈등이 심했습니다. 그 갈등은 대부분 백인이 흑인을 차별했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영화를 통해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그런 차별이 미국 사회에 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동양인들도 차별을 받는다고 합니다. 지금도 어떤 서양인들이 동양인들의 말과 생김새를 보고 자기들끼리 웃으면서 흉내내면서 놀린다면 그 사람들은 철없는 청소년이거나 못 배운 사람일 것입니다. 실제로 작년 2023년 6월에 손흥민 선수를 향하여 경기장에서 두 손으로 눈을 찢는 행동을 한 관중이 3년간 축구장에 올 수 없다는 징계를 받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왜 그런 행동을 할까요? 그 이유는 아마 자신들과 다르게 생겼기 때문에 자기들보다 못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나와 다르면 틀린 것이고 나보다 못난 것일까요?
3. 마녀사냥이 일어나는 곳
지난 주에 저는 소돔 성의 죄악에 대하여 설교를 했습니다. 소돔 성에 두 천사가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소돔 성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습니다. 소돔 성이 심판을 받은 이유는 그 성에 죄악이 가득 찼기 때문입니다. 소돔 성의 죄악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소돔 성이 동성애라는 죄로 심판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소돔 성이 심판을 받은 이유는 명확합니다. 그들은 자기 마을에 찾아온 이방인을 학대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처럼 이방인을 학대할 때 심판을 받은 경우는 많습니다. 하나님은 나그네와 이방인을 학대하는 백성을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닿을 때 하나님은 그 억울한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심판하셨습니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억울하게 학대를 당할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집트를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어떤 사회는 이방인이나 특정한 그룹의 사람을 학대할까요? 그 이유는 본질적으로 두려움 때문입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이집트인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학대한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
출애굽기 1:9~10
이집트의 왕은 이스라엘 자손이 불어날 때 두려웠습니다. 전쟁이라도 난다면 그들이 이집트를 배신하고 나라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 자손이 위협이 될 뿐 아니라 그들로부터 받아오던 어떤 유익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집트 왕이 이스라엘을 학대한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두려움이 모든 학대의 원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과거에 어떤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 처단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 선생을 공산주의자로 몰아서 불공정한 재판을 통해 사형선고를 내리게 하고 죽였습니다. 그로부터 52년이 지나 2011년 대법원은 재심청구를 받아들여 조봉암 선생의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그때 이승만 정부가 그렇게 정적을 제거한 이유는 자기가 권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공산주의자로 몰아세운 이유는 우리나라가 북한 공산당 정권의 공격을 받아 큰 고통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억울하게 학대를 받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학대하는 사람은 자신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도 1950년대에 소련과 경쟁관계에 있을 때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두려움이 커져갔습니다. 그때 미국 안에 공산주의자들이 암약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들인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그 유명한 매카시즘입니다. 미국의 공화당원 매카시라는 사람이 사회에 만연하고 있던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학대한 사건입니다. 학대는 언제나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서양에서는 종교개혁 이후에 구교라고 부르는 가톨릭교회와 신교라고 부르는 개신교회의 갈등이 극에 달할 때 마녀사냥도 최고조가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정치와 종교가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종교의 갈등은 곧 정치의 불안으로 이어졌으며 사회가 혼란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지역은 가톨릭이 우세하고 어떤 지역은 개신교회가 우세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소수자에 대한 의심과 혐오가 자라나고 그들이 사회를 위태롭게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어떤 사람들은 마녀로 몰려 고문 끝에 화형을 당했습니다. 마녀사냥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의 악행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소돔 성 사람들이 왜 나그네를 학대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동성애에 빠져 집단적으로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이방인들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창세기 14장에는 소돔 지역에서 큰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소돔과 근방의 다섯 왕들은 저 멀리 바벨탑을 세운 시날 땅에 있는 네 왕들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 전쟁은 소돔 지역의 왕들이 12년 동안 조공을 바치다가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강대국들이 연합군을 형성하고 제압하려고 온 전쟁이었습니다. 그 전쟁에서 소돔과 고모라 등 다섯 왕들은 패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잡혀갔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때 조카와 소돔의 포로들을 구출했습니다. 그런 전쟁이 있은 후에 소돔 사람들은 외부에서 온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을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이 지나간 후에 빨갱이에 대한 광풍이 우리 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한 것처럼 소돔 성에도 그렇게 외부인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가 자리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셔서 그 성에서 들려오는 울부짖음이 어떤 것인지를 확인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이 그렇게 외부인에 대하여 학대하는 것을 보시고 그 성을 심판하셨습니다. 성경이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나그네와 이방인, 그리고 약자를 학대하는 나라를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그런데 그 나라와 사회가 그처럼 소수자와 이방인을 학대하는 이유는 그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4. 그리스도인의 자유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에서 벗어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는 사도 바울이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당시의 소수자였던 교회를 어떻게 박해했는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새 사람이 되어서 더 이상 두려움의 종살이를 하지 않고 자유를 얻었음을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무엇을 두려워했고 어떻게 그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이 그 내용을 설명해줍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19~20
사도 바울은 먼저 자신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보기에 어떤 사람은 율법에 대하여 죽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미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합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율법이 말한 대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그 결과 율법이 말한 대로 죄인으로 판결을 받았기에 더 이상 율법 앞에서 살 수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 율법 안에서 의롭게 살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과거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야말로 자기 민족이 살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다릅니다. 율법을 지키는 노력을 하면서 실상은 율법을 어기는 자신을 본 것입니다. 사람이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런 깨달음을 얻게 된 계기는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놀랍게도 사고로 시력을 잃은 후에 비로소 진리에 대하여 눈을 떴습니다. 그는 전에 율법을 생명처럼 지키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는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사람처럼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고 고백합니다. 전에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자신과 타인을 괴롭게 하던 사울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가 그 안에서 사시고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포용하고 축복할 수 있습니다. 그는 두려움에서 벗어났습니다.
우리나라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서 아직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 두려움은 하나님이 소돔성을 멸망하게 하신 것처럼 이 나라를 심판하실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은 이 나라에서 믿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교회가 문을 닫아 기독교회가 이 나라에서 사라지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은 이전에 청년 사울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판결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바로 그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은 목회자인 저의 마음에도 침범했습니다. 특히 개척교회를 운영할 때 그랬고 지금 섬기는 교회에서도 두려움은 귀신 같이 예배당 벽을 뚫고 와서 제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때마다 주님은 제 마음을 붙들어 주시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잠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잠언 29:25
침몰하는 배에서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합니까? 구약성경을 보면 요나가 탄 배가 침몰할 위험에 처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희생양을 찾았습니다. 누구 때문에 이 배가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가를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탄 배도 유라굴로라는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때 침몰하는 배에서 선원들이 달아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들에게 용기와 확신의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다. 우리가 비록 이 배와 화물을 잃겠지만 276명 중에 한 사람도 죽지 않을 것이다(행 27:37).’ 예수님과 제자들도 침몰하는 배에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죽겠다고 아우성이고 예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진정시키시고 바다를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침몰하는 배에 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가정일 수도 있고 우리 교회일 수도 있고, 때로는 우리가 사는 국가나 지구호가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 느낌이 들고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런 두려움이 우리 마음에 몰려올 때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소돔 성처럼 광기에 사로잡혀 악행을 범할 수도 있고 사도 바울이나 예수님처럼 대안이나 해결책을 찾아 제시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신앙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안색을 늘 살핍니다. 교인들은 아마 목회자의 얼굴을 살필 것입니다. 근심이 있는지 아니면 기쁨이 있는지, 밥을 안 먹었는지 오늘 따라 힘이 없어 보이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고, 오늘 두발에 힘을 준 것을 보니 좋은 일이 있나 보구나!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얼굴도 모든 사람에게 숨길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두려움이 있다면 얼굴에 나타나고 기쁨이 있다면 그것도 얼굴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을 관리하는데 실패하면 우리는 누군가 희생양을 찾으려 하거나 나그네와 약자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워 죽이는 악행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바로 그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 두려움에서 벗어난 사람은 비로소 예수님처럼 타자를 수용하고 약자를 포용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처럼 자유를 누린 사람들은 때때로 공동체에서 죄인으로 몰려 고난을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미 자유를 얻은 그들이 그 자유를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도리어 그는 자기가 얻은 자유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종노릇을 기뻐하며 감당할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