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사할(臨濟四喝)
임제선사의 네 가지 할 소리!
임제선사(臨濟禪師)는 황벽선사(黃蘗禪師)의 법을 사승(嗣承)한 법제자(法弟子)다. 전장에서 보듯이 황벽회상(黃蘗會上)에서 수행정진(修行精進)하다가 목주(睦州) 선사 권고를 듣고 황벽선사께 어떤 것이, 불법의 적적한 대의냐고? 세 번 묻고 세 번 몽둥이로 60방을 얻어맞고 황벽의 법좌를 떠나 대우선사를 참문하고 언하 대오하고 다시 황벽선사 회상으로 돌아와서 인가를 받고 할(喝) 가풍(家風) 선풍(禪風)을 일으켰다. 임제사할(臨濟四喝)은 임제선사가 후참(後參) 납자(衲子)를 응접(應接)할 때 할(喝)로 악! 하고 고함을 쳐서 납자미운(衲子迷雲)을 걷어내는 선풍(禪風) 일화에서 유래한 독특한 임제가풍(臨濟家風)이다. 사할(四喝)은 이렇다. 임제선사가 한 수좌에게 물었다. 어떤 때의 할(喝)은 금강왕보검(金剛王寶劍)과 같고, 어떤 때의 할은 웅크리고 앉은 황금빛 사자와 같다. 또 어떤 때의 할은 어부가 고기를 찾기 위해 사용하는 장대와 그림자 풀 같고, 어떤 때의 할의 작용을 하지 않는다. 그대는 어떻게 알고 있는가? 승려가 무엇인가 말을 하려고 하자, 임제는 바로‘할(喝)로 악! 하고 소리쳤다. 여기서 금강왕보검은 금강신왕의 보검으로 교외별전(敎外別傳)의 법을 말하며, 황금빛 사자는 문수보살이 타고 다니는 사자로 선사의 역량을 뜻한다. 또 고기잡이용 장대와 그림자 풀은 선사의 기지와 전략을 의미하며, 작용하지 않는 할은, 할이 필요 없는 깨달음의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곧 사할(四喝)은 번뇌와 망상을 베어버리고 사자차럼 포효하도록 자아를 깨우쳐 견성(見性)을 도와주며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인제선사의 사할(四喝) 선풍(禪風)인 것이다. 이렇게 임제선사는 조실방(祖室房)으로 들어와서 참문(參問)하는 납승(衲僧)을 볼 때 마다 악! 하고 전광석화(電光石火)로 고함을 쳐서 아집(我執)을 쳐부쉈다. 할(喝) 소리는 똑같은 고함! 할(喝) 소리인데, 여기에는 네 가지 할로 나누어서 학인들의 근기에 맞게 할 소리로 후학들을 깨닫게 하였다는 말이다. 임제어록을 보시면 선사의 가풍이 그대로 들어난다. 궁금 하신분들께서는 이 세상 오신 김에 임제어록 한번, 쯤 읽어 보고 가시면 아마 염라대왕도 옷깃을 여미고 고개를 숙일 겁니다. 그러면 임제어록의 사할(四喝)을 보자.
모든 의미의 집착을 절단하는 수단으로서의 할. 금강보검이란 그 예리한 칼날은 대적하기 어려움을 말한다. 만일 발을 묶고 손을 동여맨 넝쿨이 길게 늘어져 분별에 얽매인 견해를 버리지 못하는 학인을 만날, 경우 바로 그 자리에서 절단하여 더, 이상 달라붙을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다. 만일 조금이라도 사유분별에 젖어 들면 이 칼에 목숨을 잃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金剛寶劍者, 言其快利難當. 若遇學人, 纏脚縛手, 葛藤延蔓, 情見不忘, 便與 當頭截斷,不容粘搭.若稍涉思惟,未免喪身失命也) 사자의 포효에 모든 동물들이 달아나듯이 작은 근기와 하찮은 견해를 없애는, 할(喝)은 바닥에 웅크린 사자는 동굴에 살지도 않고, 보금자리에 머물지도 않는다. 위엄 있고 웅장한 모습으로 웅크리고 앉아 있을 뿐 조금도 의지하는 것이 없다. 으르렁거리며 한번 포효하면 뭇 짐승들의 머리가 갈가리 찢어진다. 밀치고 들어갈 빈틈이 없고, 달아날 여지도 없다. 조금이라도 그 앞을 침범하면 이빨과 발톱에 걸려들 것이니 마치 코끼리가 물결을 가르면서 달리면 대적할 상대가 없는 것과 같다. (踞地獅子者, 不居窟穴, 不立窠臼. 威雄蹲踞, 毫無依倚. 一聲哮吼, 羣獸腦裂. 無你挨拶處, 無你廻避處. 稍犯當頭, 便落牙爪, 如香象奔波, 無有當者) 종사가 학인을 점검하며 살피는 수단으로 쓰는 할이다. 물고기를 유인하는 수단(탐간과 영초)이란 하나의 할 중에 두 가지 작용을 갖춘 것이다. 살핀다는 것은 학인의 견지가 어느 정도인지를 점검하는 것으로서 마치 막대기로 물의 깊이를 재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재는 막대기인 탐간이 손안에 있다고 한다. 곧 이 하나의 할은 헤아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본뜰 만한 것도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외에 별도로 갈 수 있는 길을 기대할 수도 없다. 이미 자취를 숨기고 종적을 감추어 거짓으로 도둑 행세를 하므로 ‘영초를 항상 몸에 지니고 있다고 한다.(探竿影草者, 就一喝之中, 具有二用. 探則勘驗學人見地若何, 如以 竿探水之深淺. 故曰, 探竿在手. 卽此一喝, 不容窺測, 無可摹擬, 不待別行一路. 已自隱 跡迷踪, 欺瞞做賊. 故曰, 影草隨身) 네 번째 할은 일정한 형식의 할에 한정되지 않고 모든 형식의 할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그 어느 것에도 머물지 않는 할이다. 할로서의 작용을 하지 않는 할이라는 말은 천 가지만 가지로 변화하지만,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금강왕의 보검이라 해도 되고, 바닥에 웅크린 사자라 해도 되며, 물고기를 유인하는 수단이라 해도 된다.
마치 신령한 용이 출몰하며 자신의 모습을 펼치고 거두는 것이 범상한 현상과 달라서 앞에서 맞이하려 해도 그 머리를 볼 수 없고, 뒤를 따르려 해도 그 꼬리를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부처와 조사일지라도 보기 어렵고, 귀신도 엿보지 못한다. 생각은 비록 하나의 할 속에 있지만, 사실은 하나의 할을 벗어난 것이다. 이 네 가지 할 중에서 가장 깊고 미묘한 뜻을 가진 것이다. 어떤 때’라고 한 말을 잘 살펴야 한다. 이것은 매우 활발한 뜻이 있어 한결같이 이와 같은 작용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와 같다고 한 말도 잘 살펴야 한다. 비슷하여 이와 같다고 한 것에 불과하지만 진실로 이와 같은 명목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뜻 속에서 자유롭게 운신할 수 있어야 비로소 임제가 제시한 할의 작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一喝不作一喝用者, 千變萬化, 無有端倪. 喚作金剛寶劍亦得, 喚作踞地獅子亦得, 喚作探竿影草亦得. 如神龍出沒, 舒卷異常, 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尾. 佛祖難窺, 鬼神莫覰. 意雖在一喝之中, 而實出一喝之外. 此四喝中之最玄最妙者. 須看有時二字, 甚是活潑, 非一向如此用也. 又看如之一字, 不過彷彿如此, 非眞有如此名目也. 向者裏轉得身來, 方見臨濟老人用處.) 임제선사는 학인이 방장실에 들어오는 것을, 볼 때마다 할(喝)을 내질렀다.(臨濟, 凡見僧入門, 便喝) 악! 하고 고함 소리로 어리석은 중생의 미집(迷執)을 타파(打破)했다. 이것이 임제선사(臨濟禪師) 할가풍(喝家風) 임제종(臨濟宗) 선풍(禪風)이다. 간단명료(簡單明瞭)하고 직파직입(直破直入)하게 하는 직절선풍(直截禪風)이다. 그래서 그때 당시 임제선사 회상에는 스님들이 선문답(禪問答)을, 할 때마다 너도나도 악! 악! 고함치는 소리가 절 곳곳에서 요란(擾亂)해서 문제가 많았다고 전한다. 어느 시대나 모방 짝퉁 사이비는 있기 마련이다. 할 뜻도 모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