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문관(無門關) 삼십육칙(三十六則)
노봉달도(路逢達道) 길에서 도인을 만나다.
본칙(本則) 역(譯)
오조가 말했다. 길에서 도에 통달한 사람을 만나면 말이나 침묵으로 대해서는 안된다. 자, 말해 보라. 무엇으로 대해야 하겠는가?” 五祖曰, 路逢達道人, 不將語默對. 且道, 將甚麼對.
평창(評唱) 역(譯)
무문이 말했다. 만약 여기에서 딱 맞게 상대할 수 있다면 참으로 유쾌하지 않겠는가?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모름지기 모든 곳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無門曰】若向者裏, 對得親切, 不妨慶快. 其或未然, 也須一切處著眼.
송(頌) 역(譯)
게송으로 읊다. 길에서 도에 통달한 사람을 만나면 말이나 침묵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 뺨에다 곧장 주먹을 날리니 즉시 알아차리면 곧 깨달으리라. 頌曰 路逢達道人, 不將語默對. 攔腮劈面拳, 直下會便會.
사족(蛇足)
이 공안화두(公案話頭)는 오조법연(五祖法演) 선사의 공안화두(公案話頭)다. 길에서 도를 깨달은 선지식을 만나면 침묵으로도 말로도 대해서는, 안된다고 단언을 짓고 속히 말해 보란다. 어쩌잖은 말인가? 말이 되는 말인가? 말같이 않는 말로 공안화두(公案話頭)로 제시(提示)한 법연선사의 속셈은 무엇일까? 해법을 찾아내는 것이, 화두타파(話頭打破)다. 도(道)의 경지가 같으면 척! 보면 알고 말이 필요 없겠지만, 도의 경지가 다르면 화두공안으로 삼아야 할 판이다. 벽암록(碧巖錄) 백칙(百則) 공안이 다 그렇고, 무문관(無門關) 사십팔칙(四十八則) 공안(公案)도 다 이렇다. 진퇴양난(進退兩難) 입을 열어도 입을 닫아도 꼼짝, 못하게 하는 활구(活句) 화두(話頭)다. 화두참구(話頭參究)는 생각이나 감정이나 선입견(先入見) 지식을 몽땅 버려야 한다. 오로지 화두 공안(話頭公案)에 몰입(沒入) 집중(集中)해야 한다. 자나 깨나 않으나 서나 일상 속에서 화두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의단독로(疑團獨露)가 화두타파(話頭打破) 첩경(捷徑)이다. 혜개선사(慧開禪師)가 평창(評唱)에서 모름지기 모든 곳에서 눈여겨, 보란 말이 (也須一切處著眼) 그것을 이른 말이다. 송에서는 도를 통달한 사람을 만나거든 말이나 침묵으로 대해서는, 안된다고 해 놓고 선지식(善知識) 뺨에다 곧장 주먹을 날리라고 해법을 말했으나 말과 침묵의 갈등 속에 빠지지 않았지만 좀 성글고 거친 해법이다. 혜안(慧眼) 도안(道眼)도 열리지 않는 설익은 수좌가 따라 하면 자구불료한(自救不了漢)이 되고 만다. 화옹(和翁)이 40년 전에 겪은 일이다. 유명한 선지식(善知識)을 모시던 시자승(侍子僧)이 막 참방(參訪)을 한 화옹을 보자마자 아무 말도 없이 목침(木枕) 얼굴에다 던져서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가 눈을 떠보니, 목침을 던졌던 그 어린 시봉이 태연자약(泰然自若) 좌선(坐禪)을, 하고 있었다. 이런 작태가 있나? 쓰러진 사람을 본체만체 이렇게 난폭하게 목침을 던진 것이 선문답(禪問答)이란다.
방 모퉁에 장군 죽비(竹篦)가 있어서 아무 말 없이 30방(棒)을 쳤다. 왜? 때리냐고? 눈 부릅뜨고 달겨든다. 그래서 이것이 법방(法棒)이냐? 식방(識棒)이냐? 다시 30방을 치고 물었더니, 법방(法棒)이란다. 이런 작태(作態)가 있나? 법을 아는 자가 두렵다고(識法者懼) 했다. 어설프게 식광(識狂)이 나면 인생을 망치는 짓만 한다. 도(道) 자리는 말이 없는 자리다. 불교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이다. 공자(孔子)는 오랫동안 온백설자(溫伯雪子)를 만나 보고 싶어 했다. 막상 만나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로(子路)가 말했다. 우리 선생님은 온백설자를 만나고 싶어 하신 지가 오래되었는데 지금 그를 만나 보고 나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공자가 말했다. 그 같은 사람은 한번 보기만 해도 도가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는지라 말로 형용할 수 없다. (仲尼見之而不言 子路曰 吾子 欲見溫伯雪子 久矣 見之而不言 何邪 仲尼曰 若夫人者는 目擊而道存矣라 亦不可以容聲矣) 공자도 도가 같으면 목격도존(目擊道存)이라 했다. 말이 필요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럴까? 공자(孔子)도 침묵 선언을 하자, 자공(子貢)이 묻는 말에 하늘이 어찌 말을 하더냐? 그래도 사시(四時)는 운행하고 만물은 생성된다. 하늘이 어찌 말을 하더냐?(子曰 予欲無言 子貢曰 子如不言 則小子何述焉 子曰 天何言哉 四時行焉 百物生焉 天何言哉) 천리(天理)를 깨우치는 것이나 자성(自性)을 깨우치는 것이나, 똑 같이 말과 생각을 떠난 자리라 몸소 닦아 체득(體得) 길밖에 없다.
화옹송평(和翁頌評) 역(譯),
길에서 도인을 만나면 무슨 법으로 대할꼬? 말로도 침묵도 안된다고 법연선사 공안인데, 눈빛만 봐도 도가 같으면 척! 서로 알지만, 알지 못한 작은 근기라면 화두로 뚫어야 하리. 路逢道人何法對 不將語默法演案 眼光同道相互知 不知小根透話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