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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추수
본문<요4:35~42>
지난 시간 예수님의 양식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창세전에 IX 안에서 영생 얻기로 작정된 자들을 구원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것도 모두가 영생 얻기로 작정 된 자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로선 내려온 산 떡이라고 하시면서, 누구든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영생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떡이란? 예수님의 살과 피를 의미하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했다 혹은 예수를 믿는다는 말입니다.
믿음이란? 예수께서 내 죄를 대신하여 값을 치러 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의 행함을 자랑하지 않고, 예수님 때문에 살아났다는 것을 증거 합니다.
신앙이란?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나로 살게 하신 분을 자랑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은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추수란 구원을 의미합니다.
수가성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은 영생 얻기로 작정된 자였습니다.
창세전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가, 역사 속에서 잃어버린 양으로 있다가 예수님의 찾아가심으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그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일부러 사마리아로 가신 것이지요.
따라서 주님이 사마리아를 가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의지적 발걸음이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 4장 4절과 같습니다.
-> 사마리아로 통행하려야 하겠는지라... (의도와 목적을 내포하는 말임)
그래서 유대인들은 절대로 가지 않는 사마리아로 가신 것입니다. 거기에 ㅎ님의 잃어버린 양이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으니까요...
저는 이 구절, -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를 보면 사명에 충성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수고하심이 느껴져서 감격스럽습니다.
롬8장 말미에 기록되었듯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면서 더 부연하기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XI안에 있는 ㅎ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그 어떤 것도 주님에게 연결된 우리를 끊어낼 수 없다는 것임(이게 믿어는 자는 행복한 자)
제가 자주 인용하는 시139편에서도 주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가 음부에 가 있을지라도, 하늘에 올라갈 있을지라도,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즉 어디에 숨어 있을 지라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붙드시리로다... (반드시 찾아내시는 이게 성도를 향하신 ㅎ님의 사랑입니다)
쉽게 말해서, 나 ㅎ님 싫어요, 나 이대로 살다가 지옥갈래요! 할지라도 불가능하다는 말이지요. ㅎ님의 은혜가 덮쳐오면 아무도 저항 할 수가 없이 사랑의 포로가 되어 예수를 믿게 됨-(이것을 ㅎ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합니다.)-이게 성도의 복(운명임)/ 암9;9(ㅎ님은 ㅎ님의 택한 백성을 관리하시기를 마치 농부가 타작마당에서 곡식을 체질함 같이 하면서도 한 알갱이도 잃지 않고 다 수확하신다고 함) 타작마당(도리깨질, 키질, 체질, 등등..손실이 필연적으로..)
TV에서 자연 다큐를 보면, 지리산 자락에 반달곰 같은 멸종 위기의 동물을 보호하기 위해서 몸에 GPS를 장착시켜 개체수를 관리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눈이 많이 오거나 장마가 길어지면 행여나 먹거리를 못 구해서 죽지는 않나, 병들지는 않았나, 모니터를 통해 개체수를 지켜보면서 필요하면 구제활동을 벌이기도 하듯이, ㅎ님도 택한 자들을 다 지켜보면서 때가 차면 구원시켜서 교회 안으로 모으시는 것이지요.
과학이 발달하면 오히려 성경이 더 잘 이해가 됩니다. 인간이 GPS같은 기구로 안보이는 생물체를 관리하듯이 ㅎ님도 영적이 GPS로 자기백성들을 관장하신다는 이치가 너무도 쉽게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아마존 오지에 사는 자들은 그런 문명기구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GPS는 존재하듯이 ㅎ님의 GPS도 존재한다. 자신이 모른다고 영적이 세계를 부인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일 따름이지요(개미나 벌이 짐을? 페르몬 홀몬 때문). 의학이 발달하니 자연의 신비함이 다 밝혀지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과학이 발전할수록 ㅎ님의 창조가 더욱 분명하게 증명됩니다.
가령 동물들의 염색체는 종마다 다르다는 것이 밝혀졌지요. 그래서 물고기, 양서류, 파충류, 포유류의 염색체가 각각 다 다르기 때문에 진화론에서 주장하듯 물고기가 수억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 양서류가 되고, 양서류가 파충류가 되고..포유류가 되고..포유류 중에서 영장류인 원숭이나 우랑우탄, 고릴라 등이 사람으로 진화된다는 말은 헛소리였구나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핵심은 원숭이가 우랑우탄이나 고릴라도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원숭이는 그냥 영원히 원숭이다. 그런데 원숭이가 사람으로 진화된다고요?(그런 사기가 어디 있나?)
(얼마전에도 언급) 진화론을 쓴 다윈이 죽기전에 자백으로 알게 된 사실
-명성을 얻기 위해 거짓 논문을 게제 했는데 이게 점검도 안 거치고 온 세계가 열광하는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를 자신도 참으로 의아해 했다는 말(ㅎ님을 부정케 하려는 사단의 농간)
-물론 더 큰 이면에는 ㅎ님의 허락하심이 있었음(알곡과 가라지를 분리수거하는 방책)
-학자들의 자주 미혹당함: 명성과 평판을 탐내서 허위 논문을 많이 게제 함(예. 황우석 박사)
인체의 신비함을 보면, 뇌, 신경계, 호르몬계, 혈관관계, 소화기계, 생식기계, 골관절계, 그리고 오장육보 각 기관들, 눈, 코, 귀 등등이 얼마나 정교하고 신비하게 작동되는가?
이게 저절로 진화된다고 생각한다면 아주 어리석은 무식한 발상이지요(그래서 저는 의사가 ㅎ님을 믿지 않는다면 가장 큰 바보라고 여긴다. 인체의 정교함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자들이 생명의 기원을 모른다? 그 신비함에 당연히 창조주가 저절로 떠올려야 된다는 말임)
그래서 롬1:20~ ㅎ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저희가 핑계치 못할 지니라(심판 날에 다 자백할 것임: 일부러 외면했음을..ㅎ님 인정치 않으려고..) 파란 하늘, 바다의 물, 짠맛..
-ㅎ님의 창조 솜씨 중 일부(남자여자 생식기 출산 수정체/위산 강산 1~3.5/염산1 비슷)
ㅎ님의 잃어버린 양을 찾는다는 말을 하다가 ㅎ님의 창조 사역까지 흘러갔습니다만, 아무튼 명명백백하게 ㅎ님의 창조가 분명한데도 ㅎ님을 믿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는 ㅎ님의 GPS가 없기 때문이지요. 즉 믿음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많은 사람들 중에 성도가 된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왜냐구요? 창세전 ㅎ님의 생명책에 녹명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믿음이 생기질 않음)
이처럼 위대하고 기쁜 일이 또 있을까요? 나 같은 엉터리가 영원 전에 ㅎ님의 사랑을 입어 영생 얻기로 작정되었다니, 놀랍고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지요. 구원 얻은 자의 공통점은 자기가 도저히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무가치함 자인 것을 자인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ㅎ님의 은혜가 너무도 감사한 거지요.
<고전1:26~31> 읽으면서
이 사마리아 여인이야말로 천한 자요 멸시 받는 자의 대표였지만 구원 받은 것이지요.
다섯 남자를 갈아치우고도 성이 안차서 여섯 번째 남편을 맞이해서 살던 탐심과 욕망에 불타서 살았지만 마침내 그야말로 인생의 배가 파선된 실패자, 루저였으니까요. 누가 봐도 죄인이었습니다. 창녀와 다름없는 수치와 부끄러움을 안고 사는 처지라서 차마 낯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서 인적이 없는 정오에 물길러 온 여자 아닙니까?
사마리아 여자는 율법의 판단으로 보면 분명하게 저주받아야 합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는 인과응보의 세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세상의 모든 인간이 다 사마리아 여자와 같은 운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래서 율법적 기준으로 보면 사마리아 여자는 사망으로부터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이제 꼼짝 없이 지옥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찾아 오셔서 전혀 다른 세계로 옮겨 버립니다.
인간의 행동으로 인하여 추궁당하는 곳이 아닌 용서하고 덮어주는 곳으로 옮겨 버립니다.
예수님이 옮겨 놓은 곳은 인간의 행동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무조건 용서하고 긍휼을 베풀어 주는 곳입니다.
거기는 인간의 죄 값을 인간에게 추궁하지 않고 예수님에게 추궁하는 이상한 나라입니다.
인간의 죄를 예수님이 대신 져 주는 나라입니다.
이름하여 은혜의 나라이지요.
은혜의 나라에선 인간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용서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잘못한 것을 예수님이 대신 다 담당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죄 값을 반드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더 이상 자기백성들에게 죄를 물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창세전에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신 언약 때문입니다(작정.예정~엡1장에 잘 명시되었음)
-사마리아 여자에게 받아야 할 죄 값을, 예수님께 받기로 계약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약속을 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담보로 약속하셨습니다.
그 값을 십자가에서 이미 다 치렀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일러 줍니다.
앞으로 네가 그 어떤 잘못을 하였다 하여도 내가 다 갚았다고 하나님 앞에서 담대히 말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은 그 어떤 율법적 요구가 있더라도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았다는 것을 내세워야 합니다.
누가 너 그따위로 살아서 천국에 가겠느냐? 라고 하면,
우리 예수님께서 내 죄를 다 담당해 주셨기 때문에 난 당당하게 간다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ㅎ님의 언약을 믿지 않고 자신의 행함을 돌아보며,
제가 잘못 했습니다, 앞으로 잘할게요.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죄를 안타깝게 여기는 것하고 다시는 안 하겠다는 것 하고는 달라요.
죄는 부끄러워하여야지요.
그러나 죄를 안 짓고 살겠다고 하진 말란 말입니다.
우린 죄를 이길 수가 없어요.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피 흘려 죽어주신 것은 우리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잘 할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그 마음대로 살지 못하는 중풍병자들과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면 안 되는데 라고 하면서도 그 짓을 기어이 하고야 마는 죄인들입니다.
우리에게 가능성이 단 0.00001% 라도 남아 있었다면 예수님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을 보내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이게 우리를 향하신 ㅎ님의 사랑의 확증입니다(롬5:8절~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X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ㅎ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IX의 십자가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ㅎ님의 비상수단입니다.
우리가 빼박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내 주셨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망이 없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에게 방점을 둔 옛언약은 끝났고, IX께서 다 이루신 새언약의 시대가 도래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에선 자기에게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은 악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행여나도 목사의 설교가- 여러분도 열심히 하면 될 수 있습니다! 라는 식으로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추기는 것은 악한 설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어떤 말씀이라도 예수님께서 대신 담당해 주신 은혜를 훼손하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 여자는 사람들이 창녀라고 놀려도,
-예! 저는 창녀가 맞습니다.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입니다.
-하지만 저 같은 이런 못난 죄인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피 흘려주셨다고 해야 합니다.
법, 법 하는 사람들은 사마리아 여인의 행동만 가지고 죄인으로 몰아세웁니다.
그러니 사마리아 여자와 같지 아니한 자신들은 의로운 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앞에 간음 중에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죽여야 된다고 참소 하였던 것입니다.
간음 안한 자신들은 의롭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인간은 간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그래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한 것입니다.
참소하던 자들이 다 돌아갔다는 말은 자신들도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역시도 간음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신약에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간음이라고 합니다.
약 4: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에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세상과 벗된 것이 간음이라고 합니다.
아니 세상에 발붙이고 사는 인간이 세상과 벗이 안 되고서 어찌 산단 말입니까?
결국 우리는 입술로 주님, 주님 하면서도 간음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죽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버젓이 살고 있는 것은 모두가 우리 대신 채찍을 맞아 주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신자나 불신자나 똑 같이 세상을 벗 삼아 삽니다.
그럼 둘 다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신자와 불신자를 차별해서 대하십니다.
신자는 용서해 주고 불신자는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자에겐 대신 맞아 주신 분이 계시고 불신자에겐 대신 맞아 주신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함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대신 맞아 줄 분이 있느냐 없느냐로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야! 이제부터 네가 당할 수모를 나 예수가 대신 당해 주겠노라고,,,,
그러니 누가 너를 죄인이라고 하면 내 죄는 예수님께서 대신 담당해 주셨다고 하라고 합니다.
이제 성령이 부어지면, 너 같이 자신은 죄인인데 예수님 때문에 살았다고 하는 자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보라! 밭이 희어져 곡식이 익었다고 하십니다.
희어졌다는 것은 잘 익었다는 말입니다(논~파란 벼가 다 익으면 노랗게 변하고 -희게 변)
곡식이 잘 익었다는 것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안다는 것입니다.
이젠 추수를 할 때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추수꾼으로 보낸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심어 놓은 것들을 추수하라고 하십니다.
이런 사실을 세상에 알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세전에 구원주기로 작정 된 자들을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복음으로 찾아내라는 말입니다.
너희들이 복음을 전하면 성령께서 알아서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들을 불러 모을 것이라고 합니다.
본문<요4:35>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여기서 넉 달 후의 추수란 세상에서 알고 있는 물질적 추수를 말합니다. 농부가 농사를 짓는 곡식의 추수 때는 아직 넉 달이 남았지만, 예수님의 추수는 지금 이라는 말이지요.
-보라 지금이 은혜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로다- 영적인 시간은 내일이 없습니다. 바로 지금이지요.
36절/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뿌리는 자’란 예수님을 말하고, ‘거두는 자란 제자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라고 말합니다. 이 추수에 참여하는 모든 자들이 동일한 기쁨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 주님의 즐거움에 초대된 자들입니다.
앞부분의 거두는 자가 이미 삯을 받았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거듭난 성도가 받은 삯이란 영생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영생을 받은 자가 영생의 열매를 모을 수 있지, 구원받지 못한 자가 구원을 전할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거짓 교회에서는 이런 일 들이 비일비재 합니다(해서, 주님도 바리새인들 보고, 너희도 천국에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는 자도 못 들어가게 막는도다.. 한탄하심)
인간의 열심과 정성을 다해야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는 교회들이 여기에 해당되겠지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니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형국이지요(거긴 복음이 아닌 종교의 세계입니다.)
마24:24절 보면, 말세에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한다고 하시면서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인다고 하십니다(주검: 사망이 있는 곳에 독수리로 비유된 사단의 사자들이 일하고 있다는 말)
<요20:19~23> 읽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만나 처음 하신 말씀이 성령을 받아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성령을 받는 일도 제자들이 무슨 노력을 해서 받는 게 아니라, 택한 자들이기 때문에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할 수 있다는 말은, 복음을 전하여 그가 영접하면 죄사함 받는 이치를 말하는 것이지 제자들에게 죄사함의 권세가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도가 ㅎ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면 그것으로 마침표가 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권고처럼 ㅎ님이 택한 백성들을 찾아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나 구원 받았으니 이제 안심이다. 이제부터는 내 맘대로 살아야지~한다면, 단언컨대 그는 아직 구원이 뭔지를 모르는 예수 밖에 있는 자입니다
-(벧전2:9)~너희는 왕, 제사장, ㅎ님의 소유된 백성,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함/구원목적-IX증인=ㅎ님께 영광 돌림)
성령을 통해 구원을 받으면 심령으로부터 솟구치는 기쁨을 이기지 못해 사마리아 여인처럼 뛰어다니면서 주님을 전하지 않고는 배겨나지를 못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만난 행복과 기쁨이 일을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25:20-21절을 보면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말합니다.
- 주인의 즐거움이란 잃은 양을 찾은 하나님의 즐거움을 말합니다. 이 즐거움에 참여하는 자는 오직 복음 장사하는 자들뿐입니다. 이같이 교회는 새 기쁨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전에는 자기 꿈을 이루어가는 기쁨으로 살았지만, 이제는 주님의 꿈을 이루어드리는 기쁨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기쁨을 누리는 자들이 천국 백성으로 부름 받은 교회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이 기쁨을 누리고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이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복음 장사에 마음을 두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한 달란트 받은 자-저주). 주님의 이 기쁨은 오직 복음 장사하는 사람만이 맛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복음의 실력을 키워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자신 없어 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실력을 갖춘 하나님의 추수꾼으로 준비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요4장37-38절> 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38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 37절의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라는 말에서 심은 한 사람이란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거두는 다른 사람이란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교회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추수에 필요한 모든 일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심으신 생명의 씨앗의 열매를 우리들이 그냥 거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에게 복음을 전하여 생명을 얻게 했다고 해서 그 일을 내가 한 일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 이루어 놓으신 일을 내가 누구에게 알려 주었다고 그 일이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38절에서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추수에 참여한 사람에게 예비된 상급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주님의 기쁨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기쁨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진 자들입니다.
주님의 피로 생명을 얻고 주님의 신부된 교회는 주님을 기쁘게 하는 일로 기쁨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요4:39~42> 39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 자신이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기쁨에 겨워 외치는 사마리아 여인의 말에 호기심이 발동한 동네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기 위해 우물가로 나아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정중히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동네로 가서 거기서 이틀을 거하십니다. 이 이틀 기간 동안 이 동네에 말씀 잔치가 벌어졌을 것입니다.
여인의 인도를 받고 예수에게 나아온 사마리아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기 동네로 초대했던 이틀간의 시간은 이들에게 결코 잊혀질 수 없는 놀람과 감격과 기쁨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마셨던 그 생수를 이들도 동일하게 맛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41절을 보면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라고 말합니다.
예수의 표적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을 듣고 믿은 것입니다. 이 믿음이 생명에 이르게 하는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롬10:17). 오늘날 그리스도의 말씀이 실종된 한국 교회에서 이러한 믿음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42절을 보겠습니다.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그들이 예수님을 초대하여 친히 말씀을 들었던 것이 이들에게 세상의 구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있는 복으로 돌아왔습니다. 친히 듣는 것 즉 자신이 직접 말씀 앞에 서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힘써야 할 일은 성도들을 말씀 앞에 직접 서게 하는 일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이 일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태어나 살고 있는 지금이 하나님의 추수가 이루어지고 있는 때입니다. 이 때가 지나면 인간 세상의 역사는 끝을 맞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이 하나님의 추수에 동역자로 세워진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이 일에 충성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고전3:9~우리는 ㅎ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ㅎ님의 밭이요, ㅎ님의 집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일에 힘쓰십시오. 말씀을 마음에 담고 말씀을 되새김질하여 마침내 그 복음에 충만해져서 이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에 힘쓰십시다. 다른 것에 마음 빼앗기지 마십시다. 오직 주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쓰자구요.
그렇다면 현재보다 더 나은 복음의 증인이 되기를 열망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만이 주님의 즐거움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 기쁨이 허락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러한 준비된 추수꾼들을 찾고 계십니다.
...
*출처: 사랑과 복음교회 |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