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퇴직을 약 17년쯤 남겨둔 시점에 우는 아이의 울음도 멈추게 한다는 IMF(국제통화기금) 외환 위기를 겪었다. 아마도 우리나라 건국 이래 처음 당해보는 일종의 굴욕적인 사건이었다.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한국은 IMF로부터 580억 달러의 구제 금융을 받았다. 이로 인해 기업과 금융의 구조 조정으로 많은 국민들이 피부로 느낄 정도로 압박을 받았다.
기업들의 통폐합과 축소 등으로 인하여 많은 직장인들은 물론이고 자영업자들도 줄도산하며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당시 우리나라에 온 IMF 총재는 프랑스인 깡드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내 나이가 갓 40세 정도 되었을 때였는데 그들의 간섭이 극에 달했다. 다행히 우리 국민들은 금 모으기 운동 등 국가 정책에 적극 협조하여 빠른 시일 내에 상환하고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지만 그 후유증은 엄청났다.
그 영향은 예상외로 오래도록 지속되었고 많은 실업자가 거리로 내몰리면서 가정 경제에도 엄청난 풍파가 일어났다. 그때 내가 다니던 직장에서도 많은 직원이 구조 조정으로 명예퇴직을 강요받고 정든 직장을 떠나갔다.
각 부서별로 인원이 할당되어 몇 차례에 걸쳐 명예퇴직 희망자를 모집했다. 다행히 나는 그 풍파를 무사히 넘겼으니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IMF의 간섭에서는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경제 회복은 더디기만 하였다. 언제 또다시 구조 조정의 칼날이 나를 겨눌지 노심초사하며 직장을 다녔지만 퇴직하기까지는 너무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을 했다. 안정적으로 퇴직하려면 스펙을 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구조 조정을 당하지 않으려면 영어 토익 점수를 확보하기로 마음먹고 서면의 파고다 어학원에 등록했다.
영어 공부를 하기엔 적지 않은 나이지만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일정 수준의 토익 점수만 확보하면 어떠한 압력에도 버틸 수 있는 자격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운영 중인 항공기는 미국과 유럽에서 제작되어 정비 매뉴얼이 전부 영어였기에 회사에서 영어 공부에 대한 압박이 많았고, 이참에 회사에서 요구하는 점수를 확보해야겠다는 생각도 작용했다.
운전면허증이 없다고 운전을 못 하는 것은 아니듯, 영어 자격이 없다고 정비를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정비 과정에서 영어 문장을 100% 번역할 필요는 없기에 매뉴얼을 보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토익 점수는 고과 점수에 반영되어 승진 시 상당한 가점이 부여되었고, IMF와 같은 악재로 구조조정을 하게 된다면 영어 자격이 필히 타깃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 후 학원에서 90분 수업 두 강좌를 듣는 생활을 꼬박 1년 반 동안 이어갔다. 매월 1회 시험을 치렀지만 성적은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였음에도 될 때까지 해보자는 오기로 버텼지만, 영어는 오기만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학원을 다니던 도중 토익 시험 제도가 바뀌는 불운도 겪었다. 기존보다 훨씬 어려워지고 문장도 길어진 뉴 토익은 나 같은 하수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다행히 회사에서도 이를 고려해 요구 점수를 많이 낮춰 주어 안심이 되었다. 토익을 쳐본 사람은 알겠지만, 나처럼 늦은 나이에 처음 입문하는 사람에게는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았다.
옛 시조의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다"는 구절을 위안 삼아 1년 정도 노력한 끝에 회사에서 요구하는 점수를 얻었다. 시작한 김에 더 높은 점수를 받고자 6개월을 더 매진했으나 한계를 느끼고 그만두었다.
1년 6개월간 공부한 시간은 학교생활 6년보다 훨씬 많은 실력을 쌓게 해주어 공부한 보람을 충분히 느꼈다. 당시 강사와 친분을 많이 쌓았는데, 강사가 원어민 한 명을 붙여주겠다는 제의를 했으나 여기까지만 하겠다는 마음으로 거절했다.
그때 나는 퇴직이 기껏해야 10년 정도 남았는데, 이것만 해도 회사에서 잘릴 염려는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때 내가 느낀 것이 하나 있었다. "공부에는 절박함이 없으면 안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