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산교회를 겸임하면서부터 사역의 분량이 많아졌다. 월, 화, 수요일은 죽림교회에서 사역을 했다. 주일은 오전 10시에서 11시까지 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곧바로 출발하여 12시부터 1시간 동안 담산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담산교회는 그 역사가 매우 깊다. 몇몇 옛 신자들의 얼굴 주름살이 바로 교회의 역사를 증명하는 것 같았다. 명집사, 박집사, 안집사가 있었는데, 그들의 다정하고 훈훈한 사람됨에서 그리스도의 순수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과거 일제 말엽부터 파란만장한 세월에서도 그리스도의 신자로서 숭고한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환란을 극복하면서 견뎌왔다. 때로는 교회의 문을 폐쇄 당했고, 한국전쟁 때는 교회당을 몰수당했다.
목회초년생으로 개척교회에 부임한 지 2-3개월이 되었을 때 어려운 일이 발생했다. 내가 살던 집 주인이 병석에서 오래 앓다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때 교회를 다니던 그 부인이 나에게 “전도사 선생, 우리 영감 장례식은 교회식으로 해주시오”라고 부탁했다. 막상 장례식을 하려니 경험도 없을 뿐 아니라 아무 대책도 없이 막연했다. 주님 앞에 엎드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기도를 하는데, 지혜가 떠올랐다. 그 길로 동네 이장을 찾아갔다. 교회 형편이 어려우니 상여꾼과 묘일을 동민들에게 부탁하노라고 말했다. 이장이 쾌히 허락하며 주선해주기로 약속했다. 발인예배를 드릴 때 자연히 동네주민들이 많이 모여 장례식과 전도집회를 함께 하게 되었다. 이 일이 교회부흥에도 도움이 되었다.
교회 목회는 사람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직접 하시는 것을 일찍이 알게 되었다. 개척교회 부임 7개월 만에 주일학생을 포함해서 120명의 성도가 모이는 교회로 성장했다. 따라서 나는 더 이상 산에 나무를 하러 올라가지 않아도 되었다. 점점 교회는 생기를 더 하기 시작했다. 주일마다 교회에 변화가 일어났다. 하나님의 축복이 매 주일 임했다. 그러나 교회의 형편상 봉급은 없었다. 아무도 교역자에게 봉급을 주는 사람은 없을 뿐 아니라 초신자들로서 그런 제도를 아는 사람도 없었다.
옛날에 선배목사들의 말에 따르면, 초대 선교사가 교육하기를 아들이 아버지의 일을 하면서 봉급을 받는 것은 합당치 않다면서 심부름을 시킬 때는 노자(路資)를 주는 것이므로 전도인들에게 노자명목으로 매월 얼마씩 보내주었다 한다. 나는 그 생각을 하면서 많은 은혜와 위로를 받았다.
그 때 활약하던 고정식이라는 사람은 그 후 목사가 되었다. 나는 그 때마다 광천교회의 신혁균 목사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고, 그 분의 격려를 받았다. 신목사는 내게 중요한 영향을 끼친 또 한분의 목회자였다. 신목사는 내가 목회 일선에서 처음으로 접촉한 분이었는데, 온화한 성품에 매사에 침착했으며, 남을 이해해주는 덕스러운 분이었다.
나는 그 분의 가족과도 한 가족처럼 다정하게 지냈다. 특히 신목사의 자당이신 이원규 할머니의 말씀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 분은 90세나 되신 노인이지만, 용모도 단정하고 정신도 청명하셨고 매사에 교육적이었다. 만날 때마다 그 분은 이런 말씀을 했다. “사람은 항상 덕을 세워야 해.” 그분의 아들인 신목사가 덕인(德人)인 것도 어머니의 교육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할머니는 나를 볼 때마다 반가워 하셨고, 누구에게든지 “체구는 작아도 김전도사는 훌륭한 청년”이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신목사의 사모는 본 교단 2대 감목이셨던 이종덕 목사의 장녀였는데, 그 분 또한 언행이나 대인관계에서 훌륭한 본을 보였다. 한마디로 “현모양처”의 부덕(婦德)을 갖춘 분이었다. 이원규 할머니는 93세에 별세하셨고, 신목사와 그 사모도 슬하에 3남 2녀를 남기고 소천하셨다. 그의 자손 가운데 뒤를 이어 목회자가 된 사람은 신석태(申錫泰) 목사와 신석환(申錫煥) 목사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의 목회 초년생 시절에 그런 분들을 만나게 된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였다.
내가 잊을 수 없는 또 한 분의 목회자는 김종률(金鐘律) 목사다. 그를 처음 만난 곳은 1947년 공주교회에서 대화회를 개최할 때였다. 그는 광천교회에서 충성하고 있었는데, 언제나 겸손했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나는 충서지방에서 목회할 때 자주 광천을 방문했다. 그 때마다 김목사는 나를 반기며 당신 집으로 초대했다. 나는 늘 그를 고향형님 대하듯 했다. 김목사에게는 동생 종달(鍾達) 집사가 있었는데, 그도 역시 다정다감했다. 김종률 목사의 큰 아들이 김기석 목사다.
어느 날 신혁균 목사가 방문했다. 반갑게 영접했다. 그러나 무슨 일로 돌연히 찾아왔는지 자못 궁금했다. 나는 평소 매주 한 번 광천교회에 들렸다. 담산교회를 가려면 일단 광천읍을 거쳐서 가야 했다. 이렇게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도 일부러 찾아온 것이 왠지 예감이 이상했다. 그러나 나는 최근 우리 교회에서 은혜받고 있는 이야기들로 대화를 이어갔다.
신목사는 잠시 후에 나를 찾아온 목적을 밝혔다. 실은 우리 지방회 안에 내분이 생긴 교회가 있는데, 목회자가 한 편에 가담했다가 결국 목회를 지속하지 못하고 떠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김제홍 집사가 예배를 인도하는데, 이대로 방치하면 안 되겠기에 내가 부임하여 수습을 하면 좋겠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교회의 인사이동이란 이런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즉, 인사권이 본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임명권자인 주님께서 적재적소에 이동을 시키는 것이라는 것과, 주님께서 지방회장을 통하여 임명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승낙하고 신목사에게 부탁하기를 교회 몇 분의 집사들을 불러서 설명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곧 집사들을 소집하여 이런 사실을 타일러 이해를 구했다. 그리고 신목사는 나에게 1개월 후에 홍원(洪元)교회에 부임하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