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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신의 소리가 아니면 아예 입을 열지 말자>의 줄거리:
사람은 본래 신의 소리만 듣고 그렇게 들은 신의 소리만을 입 밖으로 말하여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75억 명이 사는 이 지구 위에서 자기의 소리를 낼 수 있고 내어도 되는 존재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오직 모든 인간은 유일한 신이신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그 들은 바를 말하여야만 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제 각자가 오직 편견을 말하고 듣습니다.
신의 소리가 아니면 아예 입을 열지 말자
(사도행전 12:20~25)
20.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니 그들의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먹는 까닭에 한마음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설득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21.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22.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24.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25.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신의 소리가 아니면 아예 입을 열지 말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신의 소리가 아니면 아예 입을 열지 말자’
본문에서는 헤롯이 대중 앞에서 연설을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리고 연설을 듣던 사람들이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고 칭송합니다. 헤롯은 이러한 말을 듣고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고 벌레에게 먹혀 급살 맞아 죽게 됩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자면 절대 신의 소리를 내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제시하는 내용은 그 반대입니다.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는 오직 신의 소리여야만 한다는 의미입니다.
본문의 중심이 되는 말씀은 25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돌아왔다는 것은 안디옥으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본문 사건의 마지막에 굳이 기록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앞서 11장에서 고넬료와 베드로 사도의 만남을 전해들은 유대인 할례자들이 베드로를 정죄하고 비난했던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교인들 앞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을 설명하였고 그제야 교인들도 이방인 선교가 성령의 역사임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안디옥에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말씀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바로 이어서 아가보라는 제자가 천하에 큰 흉년이 들 것을 예언하고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에 안디옥 교회 교인들은 부조금을 모았고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 예루살렘 교인들에게 전달합니다. 25절에서 부조하는 일을 마쳤다는 것은 이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만 누가는 안디옥 교인들의 부조금을 바나바와 사울이 예루살렘 교인들에게 전달하고 돌아왔다는 과정에 굳이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여러 사건들을 삽입하고 있습니다. 부조금을 전달했다는 단순한 결과 속에 여러 사건들이 괄호로 묶여있는 셈입니다. 여기에는 누가에게 역사하신 성령님의 특별한 의도가 들어있습니다. 헤롯은 야고보 사도를 죽였고 유대인들이 좋아하자 환심을 사기 위해서 베드로 사도마저 옥에 가두고 죽이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제 아침이면 죽게 된 베드로는 깊은 단잠을 자고 있었고, 천사가 와서 때려눕힐 정도로 강하게 쳐서 깨운 후에 출옥을 시킵니다. 그리고 이후에 헤롯이 연설을 하는 일이 있었고 신의 소리라는 칭송을 들은 후에 벌레에게 먹혀 급살 맞아 죽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 모든 사건이 흉년 부조금 사건의 시작과 끝을 괄호로 삼아 하나로 묶여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들을 아우르고 있는 흉년 부조금 사건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흉년 부조금 사건 바로 앞에서는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으로 불리게 됩니다. 누가는 이 사건들을 통해서 바로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선교의 중심지는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안디옥 교회로 옮겨지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를 통하여 베드로 사도와 교회의 편견이 깨어지는 사건이 일어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누가는 다시 한 번 일련의 사건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설명합니다. 야고보 사도가 죽임을 당하고, 베드로 사도가 옥에 갇혔다가 출옥하고, 헤롯이 벌레에게 먹혀 급살 맞아 죽는 이 모든 사건들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나열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드러나는 주제는 여전히 편견을 타파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편견을 깨뜨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한 “신의 소리”라는 말은 편견과 맞서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23절을 보면 헤롯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급살 맞아 죽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24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신의 소리입니다. 헤롯은 신의 소리를 말한다는 칭송을 듣고 급살 맞아 죽었지만 그리스도인들 안에서는 신의 소리가 흥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편견이 깨진 사람이며 신의 소리를 듣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그리스도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편견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이 오늘 본문에서도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야고보 사도의 죽음과 베드로 사도의 출옥 사건이 나란히 언급되는 것도 편견 타파와 관련이 있습니다. 세상은 죽은 야고보 사도는 불행하고 출옥한 베드로는 행복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깨져야 할 편견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감옥에 갇힌 상황이 죽음으로 전개되든지 기적적으로 출옥으로 전개되든지 하나님의 뜻이 다른 모양으로 나타났음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똑같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일어난 일이기에 야고보를 불쌍히 여길 필요도 없고 베드로를 부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마치 다양한 모양의 도넛이 있지만 같은 반죽으로 만들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몸으로 만나는 여러 가지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하고 어떤 사람은 건강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부유하고 어떤 사람은 가난합니다. 어떤 사람은 높은 관직에 있지만 어떤 사람은 실패자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몸이 만나는 상황에는 우열이 없습니다. 몸으로 만나는 상황에서 축복은 구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순교했고 야고보 사도는 칼에 맞아 순교했지만 다윗이나 솔로몬은 왕이 되었습니다. 상황은 다를지언정 주어진 하나님의 뜻에는 우열이 없습니다. 어떤 것이 더 훌륭하지도 않고 어떤 것이 더 안 좋을 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질 뿐입니다.
땅의 상황이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모양만 바뀌어 나타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축복은 하늘에 있는 것이지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땅의 상황을 가지고 축복의 여부나 행불행을 따지는 것은 편견이 만들어낸 고정관념과 가치기준에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입니다. 평생 배워온 세상의 소리가 선입견이 되어 마음 안에 녹음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소리는 편견이 만들어낸 고정관념과 가치기준과 선입견의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마음에서 녹음된 세상의 소리를 듣고 있는 한 신의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야고보 사도가 죽은 것이 불행하다 여겨지고, 베드로 사도가 출옥한 것은 축복이라 여겨지게 됩니다. 그러나 인격 안에 녹음된 세상의 소리는 중단되어야만 합니다. 고정관념과 가치기준과 선입견과 같은 세상의 소리들이 나의 마음을 휘젓고 있는 상태에서는 신의 소리는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감옥에서 깊은 단잠을 잘 수 있었던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가 좌우편 군인들에 의해 쇠사슬로 사지가 묶여있는 상황에서도 단잠에 빠지는 장면은 극단적이기까지 합니다. 베드로의 마음이 그만치 몸이 만나는 상황을 탈출해 있었음을 드러냅니다. 감옥에서 단잠에 빠진 베드로 사도는 몸으로 만나는 상황에서 해야 할 일은 우열을 따지고 축복과 저주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마음이 탈출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음이 몸을 탈출할 때에 편견에 의해 만들어진 고정관념과 가치기준이나 선입견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마음에 대해서 몸은 감옥입니다. 돈이 많이 벌려도 감옥이고 안 벌려도 감옥입니다. 돈이 많이 벌리는 상황을 좋아할 수 없으며, 돈이 안 벌리는 상황을 싫어할 수 없습니다. 몸으로 대하는 돈이라는 상황에서 마음은 무조건 탈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이제 이러한 주제하에서 헤롯이 벌레에게 먹혀 죽은 사건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2~24절을 다시 보면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은 익숙하지만 신의 소리라는 표현이 다소 낯설게 들릴 수 있습니다. 사도들과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이방인들을 만나서 했던 모든 이야기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들로부터 신의 소리가 나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의 소리를 말할 수 있는 자들은 바로 신의 소리를 들은 자들입니다. 이것이 헤롯과 그리스도인의 차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쉽게 이해하기 위해 먼저 헤롯이 군중들 앞에서 연설을 하게 된 배경을 생각해봅니다. 두로와 시돈을 비롯한 지중해 연안 도시들은 고대로부터 해상무역으로 번창하였던 곳들입니다. 솔로몬 시절부터 이 도시들은 곡식을 유대 땅에서 수입하였습니다. 한편 가이사랴는 헤롯 가문이 로마 황제를 기리기 위해 세운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헤롯은 두로와 시돈을 노여워하고 있었고, 가이사랴에서 두로와 시돈에 대한 곡식 수출을 금지합니다. 이에 다급해진 두로와 시돈은 헤롯에게 사절단을 보냈고 블라스도라는 신하에게 헤롯과의 화친을 중재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블라스도는 헤롯의 침소를 관장하던 내시였으리라 여겨집니다. 이 요청이 받아들여져서 헤롯은 두로와 시돈에 대한 노여움을 풀고 수출 재개를 선언하는 연설을 하게 됩니다.
21절에 백성에게 연설한 것은 원문을 직역하면 그들에게 연설하였다는 뜻이 됩니다. 즉, 두로와 시돈의 사절단을 향해 연설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2절에서도 백성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백성은 일반적으로 쓰이는 군중이라는 뜻이 맞습니다. 헤롯이 사절단을 향해 연설을 하고 군중들이 이를 듣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한편 헤롯은 사람들의 관심과 반응을 가장 중요시하는 자였습니다. 야고보 사도를 죽인 후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 사도까지 죽이려 했던 것이 이러한 헤롯의 성향을 잘 드러내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외교를 재개하는 축하연에서의 연설을 위해서도 사람들의 반응을 신경 쓰며 많은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이 연설이 사절단이나 군중들에게도 감동을 주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렇기에 연설을 듣던 군중들이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고 외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를 아첨꾼들의 소리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군중들과 아첨꾼이 하나가 되어 헤롯을 칭송하는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헤롯은 군중들의 반응을 기대하며 연설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군중들은 헤롯의 기대에 부응하듯 반응하였습니다. 훌륭한 연설이었음을 칭찬하다 못해 신의 소리라고 칭송하게 됩니다. 그리고 헤롯은 이러한 군중들의 반응에 만족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원인이 되어 헤롯은 죽게 됩니다. 본문에는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자면 연설로부터 5일 만에 벌레에게 먹혀 복부의 살이 썩어서 죽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헤롯의 모습을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24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헤롯처럼 군중들에게 직접 연설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부 사도들과 제자들의 입을 통해 전해졌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과 말을 할 때는 신의 소리가 전달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의 소리를 듣고 말하는 자들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입을 열 때 신의 소리를 말하는 자들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신의 소리를 할 수 없다면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런 말이 굉장히 낯설게 들리실 수도 있겠지만 사실 창세기의 선악과에 대한 말씀으로부터 이러한 내용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말씀은 판단금지령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판단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한끼 식사를 하려고 해도 판단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일상의 작은 영역에서조차 판단이 없다면 삶은 진행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판단으로 진행되는 삶에 대해 판단을 금지시키셨다는 것은 크고 작은 모든 일에 하나님의 판단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즉 신의 소리를 듣고 살라는 것입니다. 본래 사람은 스스로 말하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신의 소리가 바깥으로 드러나기 위한 스피커와 같은 존재입니다. 스피커는 입력받은 소리를 외부로 출력하는 장치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본래 판단이 금지되었으므로 판단 없이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들여서 말하는 스피커로 존재해야 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신의 소리를 내는 스피커가 되어야 합니다. 배우자를 대할 때에도 신의 소리를 내는 스피커가 되어야지 나의 소리를 내는 스피커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이후로 모든 사람은 세상에서 배운 세상의 소리를 말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소리들은 하나님의 소리처럼 필요할 때마다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녹음이 되듯이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편견에서 비롯된 고정관념이며 선입견이고 가치기준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소리를 듣고 살아온 사람들은 세상의 소리를 말하게 됩니다. 돈이 안 벌리면 “이러다 망하겠는데”라는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세상의 소리가 녹음된 고정관념과 가치기준과 선입견이 마음을 휘저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 걱정 근심 불안 원망 짜증 우울함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가정에서 직장에서 내는 소리들은 모두 세상의 소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소리에 의해 지배를 당하는 줄도 모르고 배우자에게 말하고 자식에게 말하면서 듣기를 요구하며 살아갑니다.
헤롯은 자기가 만든 소리를 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신의 소리라는 칭송을 듣고 만족해합니다. 그러나 헤롯이 고심해서 만든 연설문은 세상으로부터 주어진 편견에서 비롯된 고정관념과 선입견과 가치기준에서 나온 세상의 소리였습니다. 이 세상의 소리를 자기의 소리로 여기며 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헤롯은 벌레에게 먹혀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벌레에 먹혀 죽었다는 것은 곧 헤롯의 인격이 벌레만도 못하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자기가 만들어낸 소리를 다른 사람들이 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벌레만도 못한 인격입니다.
헤롯은 자기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세상에서 배운 편견에서 비롯된 고정관념과 선입견과 가치기준의 혼합물이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헤롯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은 으레 돈은 이렇게 벌어야 한다며 자기 소리를 냅니다. 여기에는 돈이 좋다는 가치기준, 돈이 없다면 패배자라는 선입견, 돈을 벌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이 모두 혼합되어 있습니다. 그 소리를 자녀에게 하고 받아들여지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벌레만도 못한 인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벌레에게 먹혀 죽을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을 보실 때에 하나님의 가치관입니다.
우리는 신의 소리를 듣고 말하는 자들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결혼을 하면 남편이나 아내라는 신분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신분의식조차도 세상의 소리입니다. 그로부터 고정관념과 가치기준과 선입견이 나타나게 됩니다. 남편으로서 이래야 한다, 아내로서 저래야 한다는 등의 모든 말들이 다 세상의 소리일 뿐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대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신의 소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내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세상에 대한 너의 죽음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신의 소리를 듣는다면 남편이고 아내이기 이전에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는 일이 지속될 때에 세상의 모든 소리들은 차단되고 신의 소리만이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합니다.
“너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다.”라는 신의 소리가 유지될 때에 삶의 모든 상황은 타락하기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타락하기 전 아담과 하와가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 살아가던 모습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크고 작은 모든 일들에 신의 소리가 들릴 것이고 들은 신의 소리를 말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신의 소리를 듣고 세상의 소리가 차단된 상태에서 필요한 모든 판단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신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아예 말하지 않는 편이 옳습니다. 내 속에서 나온 소리를 입 밖으로 내고 사람들이 반응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벌레만도 못한 자임을 드러내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너는 십자가에서 나의 아들 예수와 함께 죽은 자다.”라는 신의 소리를 듣는 자들입니다. 이 소리를 듣는 사람은 세상의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신의 소리를 듣는 것을 지속하는 일입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멈출 때 다시 세상의 소리가 들려오게 되고 인격 속에 녹음되어 있던 편견에서 비롯된 고정관념과 선입견과 가치기준이 살아나게 됩니다. 그럴 때 일어나는 일이 유대인 할례자들이 베드로 사도의 이방인 선교를 정죄하고 비난하였던 사건과 같이 편견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중요한 것은 몸이 만나는 상황을 감옥으로 알고 마음이 탈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마음에서 세상의 소리는 들려오지 않게 됩니다. 모든 고정관념과 가치기준과 선입견이라는 녹음된 세상의 소리가 막히고 나면 하나님의 판단으로써의 신의 소리가 들리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유지할 때에 몸으로 대하는 크고 작은 모든 일에 대하여 신의 소리를 듣고 말하는 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신의 소리를 듣고 말할 수 없다면 말하지 않는 편이 옳습니다. 그러한 인격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벌레만도 못해서 벌레에게 먹히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로서 자녀에게 내 소리를 들으라고 요구하는 것, 배우자에게 내 소리를 들으라고 요구하는 것, 사람들이 내 소리를 듣고 반응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신의 소리를 듣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엄격해 보이는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에 전달되어서 그리스도인만이 느낄 수 있는 무한한 자유가 무엇인지를 꼭 느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로 들리는 신의 소리를 끊임없이 듣게 하여 주시옵소서. 삶의 모든 순간에 신의 소리를 듣게 하시며, 신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말하지 않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