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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고난으로 영광을 그리고 있습니다. / 2023년 10월 1일 주일 예배
본문 / 히브리서 12:1-13
오동이는 집 앞의 동산에서 태어난 나무입니다. 오동이를 심은 주인은 나무가 제법 자라자 오동이를 베어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오동이를 삼년이나 밖에 내동댕이쳤습니다. 오동이는 삼년동안 여름에는 더위에 타는 것 같았고 겨울에는 얼어붙는 것 같았습니다. 장마철에는 비에 흠뻑 젖어 썩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오동이는 주인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 나를 장작으로 쓰지 않고 이렇게 괴롭게 하는지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삼년이 지나자 주인은 칼로 오동이를 깎고 파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동이는 주인이 아주 고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장작으로 사용하여 고기라도 구워먹지 나를 무엇에 쓰려고 괴롭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불로 지져대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렇게 주인은 오동이를 깎고 파내고 지져대더니 마침내 음악을 연주하는 가야금이라는 아름다운 악기로 만들어주었습니다.
사람들은 큰 그림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오동나무는 악기를 만드는 장인이 그려가는 큰 그림을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무를 베어내면 장작불로나 사용하지 왜 삼년씩이나 밖에 버려두는지 왜 깎아내고 파내고 심지어 불로 지져대는지 말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악기라는 옷을 입혀주고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게 될 때 주인이 그린 큰 그림을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려 가시는 구원의 큰 그림을 깨닫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성도의 인생에서 고난과 환난의 붓으로 믿음을 그려 구원을 완성해 가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시는 작품의 방향은 언제나 거룩함이며 그 결말은 영혼의 구원입니다. 우리는 내 인생에서 고난과 시련으로 구원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세상에서 현재보다는 미래를, 과정보다 더 좋은 결과를 수확하는 큰 그림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인생들이 기대하는 큰 그림이 정말 좋은 결말일까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큰 그림은 자신의 인생에서 이 세상의 영광이 주렁주렁 열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물질과 영광으로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마음껏 숭배하는 것이 인생들이 그리는 큰 그림입니다.
우리도 그런 그림을 상상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의 돈과 재물로 육신의 영광과 명예와 안전과 평안을 누리는 그림을 말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평안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육신의 평안도 중요하고 감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궁극적으로 이 세상에는 참 평안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이라는 참 평강의 큰 그림을 완성하시는 유일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는 로마인들과 유대인들로부터 핍박과 환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그려 가시는 구원의 큰 그림을 생각해보라고 말씀합니다. 본문 1절에서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말씀합니다.
히브리서가 제시하는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무엇을 증거하고 있습니까?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라합,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과 사무엘과 선지자들, 히브리서는 모든 믿음의 선진들의 이름을 증인으로 나열할 수도 없으며 그들의 믿음에 대해 말하려면 시간이 부족하다고 증언합니다.
이 믿음의 증인들의 믿음에 대해 히브리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이 사람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서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우리는 내 인생에서 하나님이 그리시는 구원의 큰 그림을 믿는다면 믿음의 선진들이 이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믿음으로 받은 고난과 환난과 핍박과 가난과 멸시와 천대는 구원의 큰 그림을 소망하는 성도들에게 결코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말 내 인생에서 하나님이 그려가는 구원의 큰 그림을 믿는다면 믿음의 선진들의 증언은 성도의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성도는 예뻐서 이 세상의 부귀와 영화의 붓으로 구원의 그림을 그리실까요? 세상의 영광으로 하나님의 영광은 결코 완성되지 못합니다. 반드시 다시 살기위해서는 죽음이 있어야 하고 부활은 십자가로만 가능하듯이 구원의 큰 그림은 고난이라는 십자가의 붓으로만 그려지는 것이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히브리서는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께 증거를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받은 증거는 무엇입니까? “이 사람들이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믿음의 선진들에게 이 세상에서는 돌아갈 본향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께 받은 약속은 더 나은 본향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성도들을 위해 영원한 본향을 준비해 놓으신 것을 보고는 육체로 살 동안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기로 작정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삶이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세상이 전부가 아니구나! 어떻게 하면 남들보다 잘 먹고 잘 살까? 더 많이 가질까? 넉넉하게 모아 놓고 편안하게 살까? 세상의 재물과 영광과 육신을 위해 사는 것이 인생이 목적과 방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왜 인생을 주셨는지 정말 알고 있습니까? 담배 피우는 사람 중에 건강을 위해 태우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흡연자들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도 태웁니다. 담배 한 개만 피워도 죽는다고 하면 누가 태우겠습니까? 이 세상을 지배하는 마귀는 사망과 지옥의 큰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고난으로 그리시는 구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마귀가 그려가는 지옥의 큰 그림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애연가들이 담배 한 개비의 위험을 무시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9장 27절에서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영광과 물질을 사랑하며 자기 육체를 위해 사는 성도들은 지금 마귀가 그려가는 사망과 지옥의 큰 그림에 자신도 모르게 협조하는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이 세상은 곧 사라지고 육신은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육체와 세상은 그림자에 불과하며 하나님이 성도들을 위해 예비하신 부활의 신령한 몸과 새 하늘과 새 땅이 내려온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며 오직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약속을 바라보면서 고난과 환난과 가난을 참아내고 시험을 이기며 믿음으로 그 날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본향을 바라볼 때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정말 가치가 없게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한 안식과 즐거움을 알게 된 성도들에게 세상의 영광은 배설물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타락한 이 세상은 하나님 나라와 상관이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음란과 정욕과 탐욕이 지배하는 세상에 속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들은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고 그 타락한 세상에서 나와 거룩한 곳에 따로 있어라 할 때에 세상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로 사는 사람을 세상이 이해할 수 있습니까? 지금 이 성도의 이름을 갖고 있지만 실상은 세상 사람으로 살고 있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받는 고난과 핍박이 없습니다. 원망과 불평만 있고 조롱만 당할 뿐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고 자기 인생에서 하나님이 고난과 환난의 십자가로 그려 가시는 구원과 부활과 영광의 큰 그림을 믿는 성도는 이 세상에서 어리석은 자 같은 것입니다.
히브리서가 증언하는 믿음의 선진들을 보십시오. 이 사람들이 지혜로운 사람들 같습니까?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심한 고문을 받으면서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다.” 말씀하고 베드로는 환난을 당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받으면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증언합니다. 멸시와 천대와 핍박을 받을 때 기뻐하고 가난하고 배고파도 감사하며 그래도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섬긴다면 그 믿음을 세상과 육체로 사는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전 재산인 두 렙돈을 헌금한 가난한 과부를 이해할 수 있습니까? 하루 생활비도 못하나 생각합니까? 내일의 양식이 넉넉해도 걱정과 두려움에 빠져 오늘도 주님께 맡기지 못합니까? 예수님이 돈에 대해 말씀하셨을까요? 주님은 돈이 필요 없습니다. 믿음에 관해 말씀하신 겁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이 세상의 재물로 내일을 준비해놓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척하는 게 아닙니다.
믿음은 내일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지혜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와 복음을 위해 죽으면 살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서 죽이신다는 것 아닙니까? 예수와 함께 말입니다. 믿음은 죽는 것입니다. 이 역사 속에서 불편하고 두렵다고 예수 때어내고 어떻게든 내 힘으로 살려고 하면 저 영원 속에서는 정말 영원히 죽는 자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와 사랑으로 그리시는 구원의 큰 그림에 순종하는 사람이 정말 지혜로운 성도입니다. 그들은 고난을 참아내고 시험을 믿음으로 받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말합니까? 인생의 문제와 고통을 해결해주시 않는 하나님이라면 믿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욥의 아내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닥치자 남편에게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독설을 퍼부으며 떠났습니다. 아마 그 여자도 욥이 고난을 받지 않았으면 신실한 믿음의 여인으로 여겨졌을 것이지만 하나님은 고난으로 그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드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생의 도화지에 고난을 그려보면 반드시 거룩과 성결이 나타나고 믿음으로 그려지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이 역사 속에서 고난의 붓을 사용하여 인생을 그려가고 있습니다. 고난의 붓으로 그려가는 여러분의 인생에서 믿음이 그려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욥의 인생에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강한 고난의 붓을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는 내 고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증언하는 것처럼 믿음의 조상들이 받는 고난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이 여기는 이시다.” 말씀합니다.
환자가 칼을 든 의사를 믿고 자기 몸을 맡깁니다. 그도 불완전한 사람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과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 주신 사랑의 아버지께 내 인생과 영원을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욥은 고난의 칼로 자기 인생을 다 해체하는 것 같은 고통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할렐루야!
하나님은 실수할 수 없다! 하나님은 거짓말 할 수 없다는 이 믿음 때문에 내 인생에서 고난의 붓과 환난의 칼을 사용하여 거룩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을 결코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생들은 이 세상의 영광을 원하고 재물과 물질을 의지하고 인정과 사랑받기 원하며 교만하며 자기 의를 의지하고 다른 사람을 이기고 으뜸이 되려 합니다. 사람을 의존하고 자기 행위를 의지하고 명예와 명성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 타락한 자아숭배의 죄악을 하나님은 환난의 칼로 베어내시고 고난의 붓을 사용하여 거룩함과 성결의 믿음을 그려 구원의 큰 그림을 완성해 가시는 겁니다. 시편 119편 71절에서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말씀합니다.
지금도 고난의 길을 가고 있지만 과거에 고난을 받을 때 듣기 싫었던 말은 하나님이 사랑해서 그런다는 말이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겁니다.
지금 고난의 터널을 지나는 사람들은 공감이 갈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고난으로 영광을, 환난으로 구원의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말하면 짜증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인내하며 조금씩 더 가보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몸을 십자가에서 찢어내어 그 피로 미련한 죄인의 구원을 그려 가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알게 되면 성도는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합니다.
‘내가 걷는 이 길이 혹 굽어 도는 수가 있어도 내 심장이 울렁이고 가슴 아파도 내 마음으로 여전히 기뻐하는 까닭은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심일세, 내가 세운 계획이 혹 빗나갈지 모르며 나의 희망 덧없이 쓰러질 있지만 나 여전히 인도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까닭은 주께서 내가 가야 할 길을 잘아심일세, 지금 내가 볼 수 없는 것 너무 많아서 너무 멀리 가물가물 어른거려도 운명이여 오라 나 두려워아니하리 만사를 주님께 내어 맡기리 차츰 차츰 안개는 걷히고 하나님이 지으신 빛이 뚜렷이 보이라 가는 길이 없고 어둡게만 보여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네.’ 아멘!
우리는 실수하지 않는 하나님을 믿습니까? 지금 고난으로 영광을 그리시는 하나님의 뜻에 인내하며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서 순종하면 구원의 불량품은 나오지 않습니다. 히브리서는 이번에는 성도들에게 예수를 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거룩하신 예수도 십자가로 하늘의 영광을 그리시는 아버지를 믿고 죽기까지 순종하였다고 증언합니다. 본문 2절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는 성도들에게 선포합니다. 여러분은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아십니까? 여러분이 죄에 끌려 사망으로 가는 것을 볼 수 없기에 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결코 버리지도 떠날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 안에서 구원을 시작하신 하나님은 구원의 큰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여러분의 죄를 징계하실 겁니다. 그러나 낙심하시지 마십시오. 어찌 자기 자식의 잘못을 징계하지 않는 아버지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징계를 믿음으로 받을 때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몰론 고난과 징계를 받고 그 자리에서 기뻐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고통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인내하는 것입니다. 고난과 징계를 받는 성도의 믿음도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완성해 가시는 영광의 큰 그림을 믿기 때문입니다.
본문 10절에서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신다.” 말씀하고 11절에서는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선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처럼 믿음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잠시의 고난으로 영원한 영광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선언하고 고린도후서 4장에서는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말씀합니다.
징그러운 애벌레가 변태하여 아름다운 나비가 되는 과정을 보면 정말 신비롭고 놀라울 뿐입니다. 어떻게 징그럽게 기어 다니던 그 애벌레 안에 하늘을 나는 아름다운 나비의 형상이 숨어있는지 말입니다. 병들고 천대 받던 거지 나사로 안에 누가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줄 알았겠습니까? 그러나 나사로는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가난과 질병과 멸시의 십자가로 하나님 나라의 구원과 영광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나방이 되려하고 되었다고 우쭐대는 사람들은 주님이 오실 때 거룩하고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은 내 인생에 찾아오셔서 죽어야 할 죄인이었던 나에게 아무 조건도 없이 십자가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깨닫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나를 주님의 것으로 삼으시고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와 믿음으로 영원한 영광을 그리시는 하나님을 믿고 힘차게 일어나 주님만을 따라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고난을 이기고 소망으로 순종하여 구원의 큰 그림을 완성해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