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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이 좋아? 아까워? 두려워?>의 줄거리 :
하나님이 좋으세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까워 보신 적은 있으세요? 아깝게 느껴본 적이 없다면 아무리 하나님이 좋다고 말을 해도 실제로는 하나님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가진 사람만이 하나님을 아까워합니다. 그리고 이 아까움은 반드시 두려움으로까지 발전합니다. 가진 하나님을 상실함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일이 될 정도로 하나님을 아까워하는 것, 이 상태가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나님을 향하여 가져야만 하는 '경외'입니다.
하나님이 좋아? 아까워? 두려워?
(창세기 22:1~12)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4.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 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 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제가 제목을 정할 때 존댓말을 쓰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홈페이지의 제목을 써넣는 칸이 글자 수가 많아지면 좀 복잡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좋아? 아까워? 두려워?’라는 제목은 일부러 반말을 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시스템상의 고충이 있다는 점을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목을 의도대로 다시 써보자면 ‘하나님이 좋으세요? 하나님이 아까우세요? 하나님이 두려우세요?’라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본문은 무척 유명합니다. 그럼에도 그 유명세에 비하면 사람들이 명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명심하지 않으면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핵심적 본질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믿음의 본질을 까마득하게 잊고 살아갑니다. 제가 답답할 때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지 않았습니까?’라고 이야기하면 듣는 분들이 표정은 그렇지 않아도 은근히 깜짝 놀라는 것 같은 분위기가 보입니다.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 너무 잊고 살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다는 이야기만 툭 던져도 아브라함의 믿음의 상태로부터 얼마나 많이 떨어져 있고 거리가 멀어져 있는지가 한순간에 확 느껴집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립니다. 모리아 산은 솔로몬 성전이 지어지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번제는 구약의 상번제에서 나온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날마다 아침과 저녁으로 성전에서 어린양을 번제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전국에 흩어져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서 아침과 저녁으로 드려지는 상번제를 기억함으로써 내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담고 좋아했던 모든 순간을 회개합니다. 성전에서 죽는 어린양과 함께 내가 죽는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성전의 존재 의미는 바로 상번제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둔 지성소라는 이름에 걸맞은 태도를 지니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지 않는 상태이며 하나님의 좋음만을 추구할 수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서 드려지는 상번제를 떠올림을 통해 이러한 상태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번제에 참여하여 영광의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놓친 내가 어린양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 하는 선민의 일상이며 아브라함 자손의 삶입니다.
성전은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모리아 산에 세워졌습니다. 이삭은 죽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쳤고 마음에서는 이삭을 완전히 죽였습니다. 바로 이 현장에 성전이 세워졌다는 것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본질을 물려받은 아브라함 자손이라면 이삭을 바친 사건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와 연관 지을 수 있어야 하고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사건의 의미에 대해서는 까마득하게 잊고 살아갑니다.
본문 1절을 보면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라고 하셨습니다. 여태까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또한 하나님 앞에서 실수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거듭나지 못한 언어 체계에서 볼 때 아브라함이 실수했다고 여겨지는 여러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질책하시거나 나무라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아브라함의 잘못이라고 보는 것은 거듭나지 못한 언어 체계에서 비롯된 오해입니다. 아브라함은 언제나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행동했던 것이 얼핏 불신앙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처음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 사건이 등장합니다. 시험하신다는 것은 학교에서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보듯이 정말로 시험을 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시험의 내용이란 25년 전에 약속하셨다가 백 세에 주신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삭은 ‘웃음’이라는 뜻으로써 그야말로 ‘웃음이’라고 부를만한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이삭과 하나님 중에서 누구를 더 아까워하는가를 시험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이 사건의 결론이 지어지는 12절을 보면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아낌과 경외함이라는 표현이 동시에 쓰이고 있다는 점이 무척 특별합니다. 아브라함 마음에서 독자 이삭을 아끼지 않음이 하나님을 경외함과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외(敬畏)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공경하며 두려워함’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맞는 말이지만 이렇게만 보면 아브라함의 마음 상태가 확 와닿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경외를 확실히 알기 위해서 또 다른 두려움을 의미하는 공포(恐怖)라는 단어와 비교해 봅니다. 경외와 공포는 모두 두려움을 바탕으로 합니다. 공포의 두려움은 내게 어떤 일이나 사건이 발생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한편 경외의 두려움은 공포의 반대입니다. 내게서 어떤 일이나 대상이 사라질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또한 아까움이란 없어지면 마음의 빈자리가 너무 커서 서운한 상태입니다. 이 아까움에는 정도의 차이가 큽니다. 본문에서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커서 마음에서 두렵기까지 한 상태를 아까움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경외는 하나님이 너무너무 좋아서 단 한시라도 하나님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내게서 잊히는 것이 너무 두려운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한시라도 영광의 하나님을 잊을까 전전긍긍하고 노심초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에게서 드러나는 하나님 경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경외를 외적인 요소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성가대가 웅장하게 찬양하거나 나에게 있는 무엇인가를 헌납하는 것을 경외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 경외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서 하나님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경외입니다. 한편 이삭의 아까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경외가 잠시도 하나님을 잃기 싫을 정도로 아까워함이라면, 독자 이삭에 대한 아까워함은 곧 이삭에 대한 경외가 됩니다. 이삭을 잃는 것이 너무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윗분이시기에 그 아까움을 경외라는 표현으로 사용한 것이고, 이삭은 아랫사람이었기에 경외의 마음을 아까워함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돈 잃는 것을 아까워합니다. 그런데 아까워함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돈이 좋지만 일원이나 십 원을 잃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백 원, 오백 원을 잃는 것도 그렇게까지 아깝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 원, 십만 원을 잃어버렸다고 하면 너무 아깝게 느껴집니다. 어떤 일에 일억 원을 투자했다가 다 잃는다고 생각하면 아까움이 두려움으로 변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까마득하게 잊고 이 세상일에만 신경을 쓰면서 살았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을 잃고 살았음을 아까워하는 마음이 있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잃고서도 아까운 마음이 들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좋다고 말만 할 뿐이지 실제로 하나님 좋음의 양이 일 원어치, 십 원어치, 백 원어치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유적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 좋음을 십억 원어치, 백억 원어치 가졌습니다. 돈 좋아하는 사람이 십억 원, 백억 원 잃는 것을 아까워하다 못해 두려워하듯이, 아브라함은 하나님 잃는 것을 그렇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좋다고 말을 하면서도 아브라함처럼 영광의 하나님을 늘 바라보는 것에 목숨을 걸지 못합니다. 그것을 직업으로 삼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좋음을 많이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졌어도 일 원어치, 십 원어치, 백 원어치밖에 갖지 못했기 때문에 아까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잃는 것을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 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지금 돈 십억을 잃었다고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주식을 십억 원어치 샀는데 어느 날 갑자기 휴지가 되어버린다면 생각만 해도 마음에 두려움이 생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만큼 하나님 잃는 것을 두려워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렇게 간단한 비교를 통해서 우리 믿음의 바닥이 드러납니다.
반대로 ‘나는 하나님을 잃지 않았는데. 왜 두려워하나?’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어떻게 생각해 왔는가를 확인해 봅니다. 우리는 일주일 내내 영광의 하나님은 새까맣게 잊어버린 채 오직 세상일만을 신경 쓰며 살았습니다. 세상일만을 영광 중에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날 예배당에 가서 예배드리고 헌금하고 제직회 참여했으니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잃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비교해 보면 일주일 내내 하나님을 잃고서도 아무도 하나님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 안에 들어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 바깥으로 나왔으면 하나님을 잃은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어야만 영광의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실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실제 효력이 있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지 않으면 전부 말뿐입니다. 전부 교리적이고 이론적이 되고 맙니다. 내가 눈으로 보고 몸으로 접하는 세상에 대해 죽음으로써 마음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만을 보고 있는 상태를 유지해야만 실효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경우에 그러한 시도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아깝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마음에서 잊어버리고 이런 저런 일들에 신경을 씁니다. 영광의 남편을 바라봅니다. 영광의 아내를 바라봅니다. 배우자를 원망하더라도 마음에 담았기 때문에 괘씸한 배우자가 내 마음에서 일등을 하고 영광의 자리를 차지한 것입니다. 자녀가 지독하게 말을 안 들어서 속이 상합니다. 내가 낳은 자식이지만 마음에 안 듭니다. 자녀에 대해 걱정하는 동안 자녀가 내 마음에서 일등으로 영광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었다면 배우자, 자녀, 형제자매, 돈 문제, 건강 문제 등도 내 마음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 올라가 하나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늘로 올라감이 없다면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문제는 잃어버렸다고 생각을 하지 않고, 잃어버렸는데도 아까워하지도 않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좋음을 가져본 적이 없거나 가져봤어도 너무 적게 가졌습니다. 기껏해야 하나님의 좋음을 일 원어치, 십 원어치, 백 원어치 가졌다면 잃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보시고자 처음으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좋음이 얼마어치였고, 이삭의 좋음은 얼마어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보고자 하신 것입니다. 둘 다 좋은 것인데 어느 쪽이 없으면 견딜 수 없는가를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하나님이 없으면 안 되지.’라고 쉽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놓고는 하루 종일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연애할 때도 ‘너 없으면 안 된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면 자나 깨나 생각하고, 밥 먹을 때도 생각하고, 샤워할 때도 생각하고, 길을 갈 때도 생각하고, 앉아있을 때도 생각이 날 것입니다. 사람들은 ‘돈 없으면 못 산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24시간 돈에 대해 생각합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없으면 못 산다.’라고 말한다면 24시간 하나님을 아깝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며 전전긍긍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경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입으로는 돈에 대해 말하지 않아도 마음속으로는 늘 돈에 대해 생각합니다. 대화의 화제가 돈이 아니라서 돈 이야기를 하지 않을 뿐이지 마음에서는 늘 돈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돈을 경외하는 모습입니다. 어떤 부모는 늘 자녀들 이야기만 합니다. 마음에서 늘 아이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이 다 없어져도 아이들만 잘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자녀를 경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기 위하여 이삭을 번제로 바칠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것이 의미 있는 시험이 되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이삭이 하나님만큼이나 좋게 느껴질 수 있는 기간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삭이 청년이 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이삭이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됐는지는 본문의 내용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거주하던 브엘세바에서 모리아 산까지의 거리는 대략 70km 정도로 삼일 길입니다. 이삭이 삼일 길을 걸어 번제를 드리기 위한 장작을 짊어지고 모리아 산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이미 청년의 나이가 되었던 시기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앞서 21장에서 이삭이 젖을 떼고 잔치를 벌였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23장에서는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향년으로 죽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라가 구십 세에 이삭을 낳았다는 점을 떠올려 보자면 이삭이 삼십칠 세에 사라가 죽은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과 번제 때 짐승 한 마리를 완전히 태우기 위한 장작의 양이 상당하였을 것을 염두에 두자면 이삭의 나이가 한창 때였으리라 쉽게 짐작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이삭이 성장하는 동안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대단한 존재였을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헤비급과 라이트급의 경기가 있을 수 없듯이 적어도 이삭의 가치가 하나님의 가치와 시소게임을 이룰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시험의 의미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훌륭하게 성장하여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하나님과 라이벌 관계를 이룰 정도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좋음과 비견될 정도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중량급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기간이 최소한 25년은 필요했으리라 여겨집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낳으리라 약속하시고 25년 뒤에야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았습니다. 다만 아브라함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미래에 태어날 아들을 마음에 두어본 적이 없습니다. 미래에 아들이 태어나고 안 태어나고는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일이라 여겼으며, 지금은 하나님의 주권이 아들을 낳지 못하게 하신다는 사실만을 알고 매듭을 지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미래의 아들을 바라보았던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25년간 매일매일 반복해서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직업으로 삼았고 하나님과 정이 드는 만큼 하나님의 좋음이 쌓이고 쌓였습니다. 그리고 약속으로부터 25년 만에 이삭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웃음’이라는 뜻의 이삭을 낳았다는 역사적 사실은 상징성을 띠고 있습니다. 웃음이 아브라함 바깥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하나님의 좋음이 쌓여 기쁨이 충만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이 25년간 했던 일은 하나님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만큼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까워한다는 것은 말이 됩니다. 가지지 않은 것을 아까워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지지 못했어도 그 좋은 것에 대한 꿈 자체를 아까워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꿈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다만 꿈이든 실제로 가진 것이든 가져야 아까운 마음이 생긴다는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를 더 아까워하느냐의 시험이 의미가 있으려면 가치의 크기가 비슷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25년 동안 하나님을 바라보고 좋아하고 정이 쌓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값어치가 백억 정도 되었다면, 그에 비견될 이삭의 값어치도 백억에 가까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이삭에게도 25년 정도의 시간은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가 적어도 25년은 지나도록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좋은가? 이삭이 좋은가?’의 시험을 하십니다. 누가 더 아까운지 물으셨던 것입니다.
이 시험이 주어진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가능하다면 이러한 시험이 주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다만 그렇지 못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까워할 만큼 가지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까워서 잠시라도 하나님을 안 보면 못 견딜 정도로 하나님을 많이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이미 우리 마음에서는 하나님이 다른 가치에 지셨습니다. 그렇기에 시험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서 영광의 건강, 영광의 재정, 영광의 배우자, 영광의 자녀에게 지고 계십니다. 영광의 하나님 대신 영광의 세상 것을 봅니다. 그 세상 것의 좋음을 마음으로 느끼면서 책정된 값이 하나님보다 큽니다. 하루 종일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살아도 아까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대해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아도 지장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일 원어치, 십 원어치밖에 갖고 있지 못하기에 시험을 하려야 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다 지셨습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은 일 원어치밖에 없는데, 이 세상 것들은 백만 원어치, 천만 원어치씩 잔뜩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까마득하게 망각의 어둠 속에 집어던지고 아까움을 조금도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 잊어버림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에서 에피그노시스(ἐπίγνωσις)에 대한 이야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에피그노시스는 켜 놓는 지식(on Knowledge)입니다. 천국이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을 의식 속에 켜놓아야 하는 이유는 내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 곳이고 주님이 보좌 우편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항상 천국을 우리 마음속에 켜놓고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언제 어디서든 오라 하시면 ‘예!’라고 하며 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그것이 되지 않는 이유는 그 정도로 하나님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게 된 상황이 이전과 다른 점을 예를 들어 생각해 봅니다. 아브라함이 십억을 벌고자 하는 상황이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아들이 태어나기 전까지 25년간은 십억에 도달하기 위해 매달 돈을 모으는 상황입니다. 본문의 시험은 십억을 모은 후에 벌어진 것입니다. 십억이 아깝냐 안 아깝냐를 물어보시는 셈입니다. 십억을 가졌기 때문에 아깝냐 안 아깝냐가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십억이란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가진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까워하는지를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깝지요.’라고 말만 해서는 아까움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정말로 아까울 만한 다른 것을 나란히 세워놓고 어느 것이 더 아까운지를 결정해야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까워함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본문의 시험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삭을 낳기까지 25년 동안은 십억, 백억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좋음에 도달하기 위하여 쌓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삭의 탄생 시점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좋음으로 충만해졌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25년 이상이 더 지나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이삭 중에 어느 좋음이 더 아까운지를 물으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시험을 대하는 태도가 무섭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는데 아브라함은 한 마디 주저하지도 따지지도 않고 즉시 시행합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따졌던 사건을 떠올려 봅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들을 멸망시키겠다고 말씀하실 때 아브라함은 무려 여섯 번을 항변하며 따지고 듭니다. ‘하나님! 정의를 행하셔야 될 것 아닙니까? 의롭게 심판을 하셔야 되지 않습니까?’라고 오십 명, 사십오 명, 사십 명, 삼십 명, 이십 명, 열 명이 될 때까지 반복합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따지지 않습니다. 우리 같으면 따질 말이 많을 것입니다. ‘내가 언제 이삭을 달라고 했습니까? 내가 언제 자손들이 하늘의 별이나 바다의 모래나 땅의 티끌처럼 많기를 바란 적이 있습니까? 나는 아무 소리 안 했는데 하나님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나에게 아들을 주셔놓고는 다 자란 아들을 죽이라고 하니 이게 말이 됩니까?’라고 따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한 마디도 반박하지 않고 곧바로 실행에 옮깁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굉장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강력한 존재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처럼 좋게 여겨지는 존재나 대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물건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고, 건강이나 재산이나 자존심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이삭이 무엇인지 떠올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마음에 지키고 품느라 얼마든지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 있게 하는 커다란 좋음이 무엇입니까?
이 대단한 좋음을 바치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은 아무런 추스름의 과정조차 없이 이행합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가서 ‘하나님이 이삭을 바치라는데 어떻게 해야겠소?’라고 물을 수도 있었습니다. 사라와 함께 주저앉아서 통곡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나서 ‘그래도 하나님을 놓칠 수는 없다.’라고 마음을 추스르고 이삭을 바치러 갔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이래도 대단한 사람이고 엄청난 믿음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마음을 추스를 사이도 없이 그대로 일을 진행합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은 하나님 가지기에 전문가였음이 분명합니다. 동시에 가장 가치 있는 세상 것인 이삭 죽이기의 전문가이기도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음에서 강력하게 좋음을 발산하는 이삭을 날마다 죽여왔을 것입니다. 이것을 고정적으로 행하지 않았다면 마음을 추스르는 시간도 없이 곧바로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이삭을 바치는 일에 착수할 수는 없습니다.
말씀을 정리해 봅니다. 청년이 된 이삭이 25살이었다고 가정해 봅니다. 시험이 공정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좋음을 쌓아 올린 25년과 이삭의 좋음을 느낄 수는 25년이 같아야 의미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25년간 이삭의 좋음을 느낄 수 있는 기간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기간 동안 아브라함은 이삭의 좋음을 마음에서 날마다 죽임으로써 하나님 좋음을 유지합니다. ‘웃음’이라는 이름의 이삭이 태어날 만큼 좋아했던 하나님을 아깝게 여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은 마치 ‘오늘 하나님이 이삭을 죽이라고 하실까? 오늘 하나님이 이삭을 데려가실까?’라고 생각하며 날마다 하나님의 지시를 기다리며 산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이 사람이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막강하게 좋은 대상은 무엇입니까? 없으면 상실감을 견딜 수 없어서 두렵기까지 한 좋음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십자가에서 그 좋음을 버리고 죽임을 통해서만 하나님 사랑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습니다만 이 세상일에 대해서는 아브라함처럼 죽이기의 전문가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장 막강하게 좋고 너무너무 아까워서 없어지면 두렵기까지 한 이삭들을 날마다 죽이고 바침으로써 하나님을 아까워하는 삶을 살 때 이 세상 삶은 하나님이 알아서 끌고 가실 것입니다. 이것을 제가 수없이 반복하여 강조해 왔음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님의 십자가에서 연합하여 어떻게 하든지 주님 안에 머물게 하여 주심으로써 아브라함을 통해 드러난 믿음을 우리도 가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