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길장편소설 '야망의 계절' 제 4 부 <악마의 불춤>
제 4 편
밖에서 본 매장 내부는 난장판이었다. 빼곡했던 제품은 물론이고 시설물까지 소손되거나 그을린 채 널브러져 있었고, 타나 남은 직원들의 옷가지들이 동물의 주검처럼 누워 있었다.
직원들로부터 상황을 파악한 성수는 아연했다. 보복을 하겠다며 상경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그가 이런 참혹한 일을 저지를 줄 몰라 했다. 한때는 그의 도움으로 취직했고 고마움에 심신을 다해 그를 따랐으며 흑지영수증 일로 처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는데 전혀 엉뚱한 결과에 배신감마저 들었다.
‘아, 아....’
절망을 쏟아내던 성수는 뒷정리를 직원들에게 맡기고 경은과 함께 주차장으로 갔다. 차에 올라 바들바들 떠는 경은에게 자신의 윗도리를 벗어 주고 힘찬 시동을 걸었다.
차가 움직이자 경은이 입을 연다.
“오빠, 어디 가?”
“병원,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야?”
“걱정이 되어 들렀어.”
경은이 나 과장과 만났던 일을 숨겼다.
“다친 곳은 없고?”
“다리가 꼬여 넘어지면서 발목이 조금 아팠는데 지금은 괜찮아, 붓기가 없는 걸 보니 삔 건 아닌 것 같애. 그런데 오빤 어디에 있었어? 난 매장 안에 있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인근 카페에서 사람 좀 만나고 있었어.”
성수는 나 과장과 만났던 일을 말하지 않는 경은처럼 형숙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사람이 누구냐고 캐물으면 모를까, 아버지의 경쟁사 딸인 형숙이 어머니의 지원을 받아 서울 발령을 축하한다며 오랜만에 얼굴이나 한 번 보자는 자리였으므로 떳떳했으나 먼저 밝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경은이 성수가 만난 사람은 당연히 업무상 필요한 고객이었을 것이라고 단정 지었다.
그런데 지금은 무엇보다 나 과장의 상태가 궁금했다. 매장이야 어떻게든 다시 일으킬 수는 있고 겨를이 없어 하지 못한 말들은 나중에 하면 그만이다.
성수가 ‘ㅇ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는 의사가 가위로 그의 옷을 막 자른 후였다. 하지만 더는 아니었다. 간호사의 제지가 있은 후 다가온 의사가 환자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다며 어두운 표정으로 가족을 찾았을 때 성수는 그의 운명을 직감했다.
칸막이 커튼 밖으로 나오면서 심폐소생을 위해 사용한 듯한 전기충격기를 발견하고서야 의사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연락하겠다며 응급실 밖으로 나온 성수는 사장에게 전화를 넣었다.
“사장님, 저 박 과장입니다.”
휴대전화 번호판을 두드려 저쪽에서 반응을 보이자 다급하게 소리쳤다.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는 사장의 화답에 성수는 갑작스런 나 과장의 출현과 있었던 그의 행동, 그리고 지금의 상황을 낱낱이 설명했다.
_뭐라고? 세상에...
저쪽에서 사장의 절망이 쏟아져 나왔다.
_그놈은?
“병원 분위기를 보니 이미 늦은 것 같아 보입니다. 의사가 급히 가족을 찾는 걸 보면 말이죠.”
_그래, 알았다. 내 곧 올라가마!
조금 진정되었는지 사장은 수습의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사장이 부인과 함께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늦은 시간이었다. 나 과장 부인인 듯한 얼굴이 통통한 젊은 여자도 보였다. 겨를이 없었는지 일상 점퍼에 발등을 감싸는 털핏플랍을 신고 있었다.
영안실에서 의사를 만나고 나온 여자는 얼굴을 손수건으로 반쯤 가린 채 비틀거리며 나왔다. 흐느끼며 다가가 기다리고 있던 사장에게 남편이 병원에 도착하자 곧 숨을 거두었다는, 최선을 다했지만 도리가 없었다는 의사의 말을 띄엄띄엄 전했다.
성수의 가슴 저쪽에서 갑자기 싸한 기분이 밀려왔고 이런 기분은 장례를 치르는 사흘 동안 자신의 다음 행동에 깊은 고민을 가져왔다.
사람이 죽었다. 왜, 무엇 때문에 그토록 모진 생명이 꺾였을까. 그가 가고 싶었던 길은 어떤 길이었을까, 자신의 입김으로 독립된 사업체를 운영하고 싶었던 그의 소망의 길에는 안락이라는 문양이 화려하게 아플리케 되어 있을까.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런 인생길에도 낙담과 좌절, 비애와 설음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성수의 기분은 묘하기만 했다.
장례를 치른 여자는 사장과 함께 항공편으로 부산으로 내려갔으나 무슨 일인지 사장 부인은 남았다. 성수는 방화를 막지 못한 문책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책이라면 오히려 사장이 더 어울릴 텐데, 성수는 의아했다.
근처 모텔을 잡아 매일같이 화재 복구에 힘쓰는 일꾼들의 뒷바라지를 하던 그녀가 일이 막바지에 이를 즈음 가만히 성수를 보자고 했다. 자리만 다른 뿐 얼마 전 형숙과 만난 카페였다.
자리에 앉자 그녀가 대뜸 입을 연다.
“과장님은 차림이 여전하시네요. 거래 회사 직원들 보기에도 그렇고 이젠 그 작업복 그만 벗으시고 깔끔하게 차려 입으셔야죠. 힘든 일은 기사 분들께 시키시고요.”
작업복 상의에 청바지를 말했다. 소곤소곤, 가까이에서도 겨우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여전한 어투에 실린 눈치는 싫은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성수는 오랜 만에 만났으니 가볍게 지나는 말 일 것이라 생각했다.
“사모님 별말씀을...아무렴 어떻습니까. 그런데...”
무슨 일이냐는 성수의 눈치에 부인은 작심한 듯 입을 열었다.
“나 과장님은 가지고 싶은 것 다 가지고 가셨네요.”
“...?”
부인은 알 수 없다는 성수의 표정에 말을 이었다.
“비록 자신의 실수로 하늘나라에 갔지만 그토록 원했던 지점을 가지고 가셨으니 원귀가 되어 세상을 떠돌지는 않을 겁니다.”
‘그랬구나.’
그제 서야 성수는 그녀의 뜻을 헤아렸다. 매장은 아니어도 그가 하늘나라로 가면서 수많은 제품들까지 가져갔으니 그렇다는 뜻이다. 긍정의 표정을 짓자 부인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새로 꾸며질 매장은 나 과장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아니겠어요? 힘을 내시고 다시 시작하시는 겁니다.”
절망에 빠진 상대의 기분에 조심스럽게 접근하려는 뉘앙스가 다분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자신을 문책할 것이라는 성수의 짐작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온화한 그녀의 성격으로 보아 직접적인 책임 추궁은 아니어도 에두를 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오히려 눈치를 살피려는 듯한 태도에서 성수는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운영권을 넘겼더라도 소유는 여전히 사장이었으니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할 터인데. 돈이 썩어 들어가도 이건 아니라도 생각했다.
성수의 궁금증은 그녀의 다음 말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일전에도 드렸던 말이지만 저는 과장님만 뵈면 왜 죽은 아들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어요.”
하고 남아 있으라는 남편의 만류를 뿌리치고 올라 왔으며 어려운 걸음인 만큼 하루라도 더 자신과 같이 있기 위해 남아 있었다는 고백에, 상을 치르면서 의논한 것이라며 남아 복구를 돕는 다고 했고, 손실 경비는 보험으로 해결했으므로 결코 부담스러워 하지 말라는 부탁을 덧붙였다.
성수는 부인의 역할을 이해했다.
“막지 못해 죄송합니다, 사모님.”
“괜찮아요. 일을 저지려고 작정한 사람은 누구라도 막을 순 없는 거 아닌가요. 박 과장님이 상하지 않는 것으로도 감사해야지요. 그러니 다시 잘 꾸려보세요.”
마치 자식 대하듯 한 말로 성수를 위로한 그녀는 이쯤에서 부산으로 돌아가겠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음을 카운터 쪽으로 옮겨 계산을 하고 출입문을 열고 나온 그녀가 무슨 생각이 들어선지 잊은 것이 있다며 몸을 돌렸다. 따르던 성수가 멈칫하자 그녀는 화재 이전의 조건을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했다. 수익이든 손실이든 반반으로 나누는 조건으로 매장 운영권을 주었던 지난 일을 기억한 성수는 고마움을 밝혔다. 책임은 아무 것도 묻지 않겠다는 뜻인 셈이다. 그리고는 철로를 이용하겠다며 역까지 차량으로 바래다 줄 것을 부탁했고 그러겠다는 성수의 말을 들은 후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부인을 역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온 성수는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주차장에서 매장으로 향하는 문을 물걸레 청소를 하던 경은이 다가와 만났던 내용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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