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젠가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나는 三無교회에 와 있었습니다. 깨고 나서 돌이켜 보니, 그 즈음 머리 속에 三無교회를 꿈꾸고 있던 것임이 생각났습니다. 밤낮 三無교회에 대해서만 생각이 골똘해 있었으니, 잠을 자면서도 그런 교회를 꿈꾼 것이지요. 三無교회는 건물, 사례비, 직분 … 이렇게 세 가지가 없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어떤 이가 교회 사역을 시작한다고 할 때 가장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이런 것들일 텐데, 이 세 요소가 없는 교회라니 … 분명 어불성설로 들릴 것입니다.
건물이 없는 교회
三無교회는 무엇보다도 먼저 건물이 없는 교회입니다. 어떤 이는 교회가 건물이 없다면 그게 무슨 교회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 이미 상식화되어 있다시피 - 교회는 "믿는 사람들의 무리"이지 건물이나 장소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건물 없는 교회의 개념은 모순도 아니고 비정상적인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에 건물이 없으면 보통 힘든 것이 아닙니다. 정기적으로 모이고 함께 공유하고 운신(運身)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것은 이만 저만 불편한 일이 아닙니다. 가령, 예를 들어, 50명의 회중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들에게 건물이 없다면 예배는 어떻게 드리고, 주일 학교 교육은 어떻게 시키며, 소그룹 성경 공부나 회의 같은 것은 어디서 한다는 말입니까? 최소한의 비품이나 서류 및 장비들은 어딘가에 보관을 해야 하지 않겠으며, 하다 못해 헌금통과 교탁 하나 정도는 둘 데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하지만 건물이 없다는 말이 공간이나 장소조차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三無교회에서 "건물"을 언급할 때, 그것은 영구적이고 고정되어 있고, 자기 회중을 위한 목적에만 충당되는 자기들 소유의 건축물을 의미합니다. 회중이 모일 공간과 최소한의 시설만 있으면 되지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三無교회는 기존의 어떤 건물이나 시설을 빌려 예배와 교제, 교육의 목적으로 충당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교회 간판이 달리고 종탑이 서고 밤이면 빨간 색의 십자가가 빛나는 건물 (임대이든 건축이든)을 회중의 본거지로 삼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물론 실제로는 이러한 공간을 발견하는 것도 또 사용하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어떤 이의 가정에서 모이는 데도 한계가 있고, 학교 강당이나 학원의 강의실을 빌리는 것도 만만찮은 일입니다. 선교 단체의 사무실이나 부속 건물에 신세를 지는 것도 어쩌다 한 두 번이지 지속적으로 그렇게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 그런데도 왜 三無교회는 무건물을 고집합니까? 그것은 오늘날 교회의 삶에 있어서 "건물"이 지나치게 중요한 요인으로 부각되는 것을 안타까와 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건물을 구약 식의 "성전"이라 부릅니다. 목회자는 자체 건물 하나 갖는 것이 평생의 꿈으로 되어 있고, 그렇게 되면 일단 목회가 안정되고 "성공"한 것으로 -그 크기와 위용이 더하면 더할수록- 자타가 공인합니다. 교인들은 그 건물을 신앙의 중심으로 삼고 마치 거기에만 하나님의 계신 양 착각합니다.
건물은 교회의 삶에 필요합니다. 최소한의 공간과 시설이 없이는 모임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건물이 교회 생활의 중심으로 드러나는 것과 개인 및 회중의 건전한 신앙 발전에 도구적 노릇을 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三無교회는 후자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사례비가 없는 교회
三無교회는 또 사역자에게 사례비를 지급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목회자가 사례비를 받지 않기로 한 교회입니다. 이 두 번째 요소는 첫 요소보다 훨씬 더 황당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만일 목회자가 자신이 소속된 교회로부터 사례비를 받지 않는다면, 도대체 호구지책을 어떻게 마련한다는 말인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부처럼 혼자 산다고 해도 기본적인 생활비가 드는 법인데, 개신교의 경우 목회자가 가정을 꾸미고 아이들을 최소 두 명만 키운다고 해도 상당한 정도의 양육비, 교육비 등이 필연적으로 소모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목회자가 사례비를 고사하다니 … 실상 씨도 먹히지 않는 말이 아닌가? … 아마 이런 의문이 줄을 이를 것입니다.
내 머리 속에 있는 三無교회나 그 날 밤 꿈에 등장한 三無교회는 이 점에 대해 구체적인 안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스스로 벌어 놓은 재산이 있다든지, 배우자가 일을 한다든지, 아니면 목회자 자신이 다른 수입원을 가졌다든지, 또 아니면 자기가 돌보는 교회 이외의 후원 그룹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는다든지, 또 아니면 교단의 내지선교부로부터 최소 몇 년 간은 도움을 받기로 했다든지… 대안이 될만한 재정 source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죽하면 사례비 없는 교회를 꿈꾸겠습니까? 목회자가 회중의 헌금에 의존하여 생활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인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올무가 되는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니할 말로 목회자가 교회에서 받는 사례비에 목을 매고 있으면, 그는 모험적이고 과감한 삶을 살지 못하게 됩니다. 재정 줄을 쥔 사람의 눈치를 보게 되고, 마땅히 펼쳐야 할 선지자적인 발언 또한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되며, 소신에 넘치는 목회 철학은 타협 일로로 접어 들게 됩니다.
목회자가 사례비를 받으면서도 그런 제도를 당연시하지도 않고 또 그런 제도가 주는 혜택에 안주하지도 않을 수 있다면, 또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진실하고 소신 있고 일관된 모습으로 사역할 수 있다면, 무엇하러 三無교회처럼 무사례비라는 안을 내놓겠습니까? 하도 그렇지 않은 예가 많다 보니까, 꿈속에까지 끼어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직분이 없는 교회
三無교회의 셋째 요소는 직분이 없는 것입니다. 이 역시 둘째 사항에 못지 않게 비정상적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직분이 없는 교회가 비정상적이라는 것은, 모든 교회에는 마땅히 직분이 있어야 하고 직분자가 임명되어야 정상이라는 뜻이 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신약에 나오는 각종 직분들 -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 장로, 감독, 집사 등 -의 의미와 역할이 무엇이든 간에, 누구나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신약 시대의 교회에 직분이 주어져 있고 또 직분자가 존재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직분이 없는 교회"를 운운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비성경적이고 불신앙적인 - 따라서 비정상적인 - 처사로 여겨지는 것이지요.
역시 이런 성경의 예증과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왜 三無교회는 무직분을 세 번째 조건으로 내세우는 것일까요? 그것은 직분의 당위성과 유용성 뒤에 숨은 세속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악습 때문입니다. 세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첫째, 직분이란 것이 자연스러운 교우들 관계를 갈라 놓는 비인격화의 촉진제 노릇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한국의 일반 문화가 호칭 문화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타인을 부를 때 그의 이름을 거명하지 못 하고, 성(姓) 다음에 무슨 직분 - 사장님, 교수님, 목사님, 장로님 … 마땅한 호칭을 찾지 못하면 최소 "교우님"이라고 해야 함 -을 붙여서 불러야 합니다. 그리고 호칭이란 상대방의 지울 수 없는 신분이나 자격 또는 인격적 면모를 은근히 드러내는 것으로 인식됩니다. 우리는 심지어 직분이 다른 사람끼리는 자연스럽게 섞이지조차 못하는 모습을 봅니다. 우리의 삶이 호칭 때문에 갈라지는 것을 보고 안타까와 했는데, 교회라는 "곳"에는 또 다른 부가적 요인 - 직분 -이 사람들을 갈라놓고 있다니 … 이 어찌 엄청난 비극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둘째, 직분과 은사의 괴리 역시 큰 문제입니다. 공동체 내에서의 직분은 마땅히 그에 상응하는 은사를 보유한 사람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 교회의 실정에서 발견하는 바인즉, 나이가 들고 사회적 지위가 높고 재정적 실력이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으면 이들이 곧 직분자로 발탁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이 직분자로서 공동체와 교인들에게 신앙적 유익을 끼쳐야 마땅하건만, 많은 경우 영적 성숙이 보장되어 있지 않아 교우들에게 마땅한 선한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심지어 있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는 수도 비일비재합니다.
셋째, 직분의 위임을 "승진" 비슷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직분을 획득한 이는 성취감, 자랑, 자기 가치(self-worth)의 실현 등과 연관을 시킵니다. 심지어 어떤 이는 교회의 직분을 명함에 새겨 가지고 다니기도 하고, 무슨 경력 사항의 한 항목으로 부각시킵니다. 반대로 교회의 출석 연한은 오래이고 나이가 꽤 있는데도 최고(?)의 직분 (장로 혹은 권사)에 오르지 않은 이들은 자괴감, 섭섭함, 불만, 수치심, 열등 의식 등에 휩싸여 지내기도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심지어 이것 때문에 교회를 옮기는 경우까지도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점만 없다면야 왜 직분과 직분자를 부정적으로 보겠습니까? 오히려 직분의 제도를 통해 공동체에 건전한 영적 리더쉽이 마련되고, 교우 각 사람이 신앙적 유익을 누리게 되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三無교회는 없다
그러나 三無교회는 내 꿈과 머리 속에만 있어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사회적 환경, 목회적 토양을 고려할 때, 도저히 三無교회는 존재할래야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 점이 나를(또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교회가 정말 올바른 모습으로 존재한다면, 건물, 사례비, 직분은 두말할 나위 없이 마땅하고 필요한 요소입니다. 三無교회니 뭐니 말이 나올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제대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三無교회는 유령처럼 우리의 교회적 이상(理想)을 따라 다닙니다. 이 "유령"은 결코 실체화될 수 없는 비극을 안은 채, 그 슬픈 실존을 우리에게 희끗희끗 보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