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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순례의 향기(10)
2016. 3. 20 (일요일)
◉ 순례 장소 : 계산주교좌 성당➟관덕정 순교성지➟복자성당
➟성모당➟한티순교성지➟신나무골➟신앙고백비-7곳
여명(黎明)을 뚫고 오랜만에 순례의 향기를 맡기 위해 가는 길이
설렘이 가슴가득 차오른다. 회장님께서 시작기도와 함께
오늘은 날씨가 포근하고 좋아 한 달에 두 번 오신 한분과 처음 오신분 4명 오셨다고 하신다. 현재의 야교보 순례단의실적은 5회 100명 6회30명, 현 순례자 80명 인원에 이루어짐은 성령의 힘으로 이끌어 주셨으며 또한 우리가 축복장의미를 되새기며 순례 책에 싸인 도장을 받는 것은 하늘나라 가기위한 증표이며, 도장의미가 중요함의 뜻이며 순례시 정성. 돈. 시간 들여 순례의미가 크다고 하신다.
성주간을 맞이하여 자기의 삶을 돌아보며, 죽음을 맞이하는 날 모든 것을 정리하는 순간 내 삶이 당신 뜻대로 살게 해 주시기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가시라고 하신다.
당신과 함께 순례의 여정의 길로 갈 수 있도록 당신 뜻대로 살고 불러주시고 이끌어 주시고 어려운 길로 각 가정에서 어려운 길은 당신 성지가지에 묻어놓고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라고 하신다.
첫 번째 간 곳
계산 주교좌성당
사적 제290호의 경상도 지역 최초
경상도 지역 최초의 성당이며 현 대구대교구 주교좌성당이다. 1893년 당시 남산동으로 불리던 현재의 계산동에 설립되었다. 경상도 지역 성당이 설립된 것은 개항 직후의 박해가 끝난 지 얼마 안 된 1882년이었고, 이때 그 전담 신부로 임명된 사람은 1877년에 입국하여 서울과 경기도, 강원도 등지에서 활동하던 로베르(Robert, 金保祿, 1853~1922, 바오로) 신부였다. 그러나 그는 즉시 경상도 지역으로 거처를 옮기지 못하고 강원도에 머물며 이곳 신자들을 방문해야만 하였다. 로베르 신부가 강원도를 떠나 경상도 북부의 칠곡 신나무 골에 정착한 것은 1885년이었고, 이때부터 이곳 교우촌은 경상도 지역에 파견되는 선교사들의 거점이 되었다.
1887년에 로베르 신부는 전해에 맞이한 보두네(Baudounet, 尹沙勿, 1859~1915, 하비에르) 보좌 신부에게 신나무 골을 맡기고, 장차 대구읍내로 진출하기 위해 새방골[新坊谷, 현 대구시 서구 죽전동, 상리동]의 대밭골[竹田]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이로써 ‘대구 성당’이 설립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현 계산동 성당의 전신이다.
1897년 현재의 계산동 성당의 대지를 구입하고 그곳에 있던 초가를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며 성당 신축을 계획하여 3년만인 1899년 한국식 목조 십자형의 성당을 신축하였다. 축성식은 같은 해 성탄 첨례 날에 거행하였다. 당시 성당 대지를 물색 중 처음에는 동산(東山)의 구릉지를 내정하였으나 몇몇 사람들의 반대로 대구 시내에서 제일 저지대에 위치하게 되었다. 전국 어느 곳을 막론하고 성당의 위치는 대개 높은 지대에 있어 마을이나 전 시가를 내려다보게 되는데, 대구에서는 시내에서도 제일 저지대인 평지에 위치하게 되었다.
더욱이 어렵게 지은 한국식 목조 십자형은 완공한 지 1년도 못 되어 불에 타고 말았다. 그러나 서상돈, 김종학, 정규옥 등 몇몇 사람의 도움으로 성당 재건 계획을 세워 한국에서 구하지 못하는 자재를 프랑스 혹은 홍콩에서 수입하여 서양식 벽돌 건물을 건축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1902년 5월에는 2개의 종탑을 갖춘 라틴 십자형의 성당이 준공을 보게 되었다. 그 뒤 1911년 대구대목구 설정으로 주교좌성당으로 승격되고 교우 수가 증가함에 따라 증축하지 않을 수 없어 성당 종각을 2배로 높이고 성당 뒤쪽을 확장하여 남북으로 나래를 달아 1918년 완공되었다. 이 성당은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훗날 사적 290호로 지정되었다.▒ 계산동 성당 사적 제290호. 1918년의 증축으로 완성을 본 이 건물은 도심의 평지에 건축된 연건평 3백 평 규모의 벽돌조 건물로, 전주 전동 성당과 쌍벽을 이룬다. 1899년 건축된 목조십자형 기와집 성당이 1900년 화재로 불타버리자, 그 자리에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로베르(金保祿) 신부가 설계하고 프랑스·중국 등지에서 건축 기술자와 도목수·석공 등 30여 명을 초빙, 2년 여 만에 완공하였다. 건물의 평면은 라틴 십자가 삼랑식(三廊式)으로 신자석이 배치되어 있으며, 입면은 서쪽 정면에 종탑(鐘塔) 기능의 2개의 8각형 첨탑을 세워 건축물의 수직성을 강조하고 있다. 창문은 부벽(扶壁) 구조에 아치로 설계하였으며, 정면 현관과 측랑(側廊) 위쪽에 있는 꽃무늬 창은 한국의 건축 양식상 획기적인 것이다.
▒ 김보록(金保祿, Robert, 1863~1922, 바오로) 신부 로베르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원으로 1881년부터 1885년까지 경기도와 강원도의 낭천(狼川), 지평, 부엉골 등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전교 활동을 했는데, 점차 선교사의 수도 늘어나 1886년부터는 경상도 지방을 전담하게 되었고, 신나무 골을 거쳐 1890년 대구 부근 새방골로 갔다. 그 후 대구에서 30년간 천주교의 뿌리를 내리게 하는 데 온갖 정력을 쏟아, 삼남 지방은 1911년 조선교구로부터 분리되어 독립된 교구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병석에 눕게 되자, 요양을 위해 고국인 프랑스로 돌아갔다. 1913년에 건강이 회복되어 다시 한국으로 나와 전교 사업에 종사하다가 1922년 1월 2일 주교관에서 사망, 교구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두 번째 간 곳
관덕정 순교성지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사형 터에 세운 순교자 기념관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사형 터에 세운 순교자 기념관이다. 관덕정에서는 을해박해(1815년), 정해박해(1827년), 기해박해(1839년)와 병인박해(1866년) 등 박해 때마다 수많은 교우들이 온갖 참혹한 방법으로 처형되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관덕정과 옥에서 순교한 신자 수는 44명에 이른다. 아미산 줄기에 위치한 이곳 관덕정은 본래 대구읍성의 남문 밖으로, 조선 후기에는 군관과 별무사를 선발하던 넓은 연병장이 있었고, 그 한쪽은 이전부터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다가 영조 때인 1749년 관찰사 민백상이 이곳에 시험장인 도시청(都試廳)을 건립하고 관덕당이라 이름하였다.관덕정이 천주교와 깊은 연관을 맺기 시작한 것은 바로 연병장 가장자리인 아미산 등마루, 속칭 ‘관덕정 말랭이’로 일컬어지는 현재의 적십자 병원 남쪽 언덕배기 처형장에서부터이다. 이곳은 원래 국사범을 공개 처형하는 곳이었으며, 1864년 3월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崔濟愚, 호 水雲, 1824~1864)가 처형된 곳이다.
천주교인들은 박해 때마다 이곳에서 온갖 참혹한 방법으로 처형되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관덕정에서 순교한 이들은 을해박해 때 7명, 정해 년에 잡혀 사형 언도를 받고도 집행이 안 되어 감옥에 갇혀 있다가 기해년에 참수 치명한 3명, 병인박해 때 4명 등 14명이며, 감옥에서 옥사한 순교자는 을해박해 때 26명, 정해박해 때 3명, 병인박해 때 1명 등 30명이다. 그리하여 대구 감영 옥과 관덕정에서 순교한 신자 수는 44명에 이른다.이곳 순교자들 가운데서 1867년 군문효수형을 받은 이윤일(일명 제헌, 1823~1867, 요한)은 훗날 성인품에 올랐다. 지하 경당에는 이윤일 요한 성인의 유해를 모신 중앙제대와 감실 십자고상, 그리고 이윤일 요한 성인의 초상화가 있다. 지하 경당 안 오른쪽에 위치한 성인 유해 실에 모신 제대는 1902년 대구 본당(현 계산 주교좌 본당) 신자들이 고딕식 성당을 짓고 봉헌한 첫 제대인데, 이 제대는 관덕정으로 옮겨졌다. 이 제대에는 성인과 복자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대부분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에 의해 우리나라에 모셔진 유해들이다.
지하 경당에 있는 성인 유해 실 제대에는 18명 성인의 유해와 18명 복자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18명 성인 유해는 우리나라 첫 사제인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신부, 그리스도교를 탄압하다가 다마스커스에서 회심하여 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도 바오로 등이며, 18명 복자의 유해로는 동남아에서 순교한 파리 외방전교회원 복자들이다. 대구 관덕정 순교 기념관은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제2 주보인 이윤일 요한 성인과 18명 성인의 유해, 18명 복자의 유해까지 총 37명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거룩한 순교 성지다. ◆ 순교 기념관1991년 1월 20일 관덕정 경당 축복 및 이윤일 성인 유해 이전 봉안식이 있었고, 5월 31일 개관을 하였다. 하느님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으시다가 마침내 순교로써 하느님을 증거하신 이윤일(요한) 성인을 찬미하고 기념하고자 건립된 것이 대구 관덕정 순교 기념관이다.이 기념관 건립사업은 대구대교구에서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맞이하여 성지개발의 첫 사업으로 시행된 것이다. 건물 모양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단청 무늬 색체로 된 누각이며 건물 벽은 근세 우리나라에서 외국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하여 축조된 보루와 같이 네모로 된 구멍이 있고 건물 바깥벽에는 순교자를 상징하는 돋음 새김이 있다. 기념관 내부에는 지하층에 경당이 있고 경당을 향하여 오른편에 이윤일(요한) 성인의 유해를 모신 돌 제대와 영정이 모셔진 유해 실이 있다. 경당 맞은편엔 제1전시장 있는데, 여기엔 대구대교구의 발전모습을 담은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지상 1층 로비에 있는 스테인드글래스의 그림은 순교자를 상징하며 바닥에는 조선조 말기 대원군의 쇄국정치를 입증하는 척화비와 조선조 형구인 황새바위가 놓여 있다. 지상 2층에는 제2전시장이 있다. 지상 3층은 제3전시장과 누각이 있다. 이 전시장에는 이윤일(요한) 성인의 일대기와 대구대교구 발전사를 스테인드 글래스에 잘 묘사하고 있으며 드망즈 주교와 서정길 주교의 유품이 있고, 한역서학서를 비롯하여 각종 공과 책이 있다.
세 번째 간 곳
복자 성당
울산 장대 벌 순교자 하느님의 종 허인 백, 김종륜, 이 양등의 현양 기념 성당
대구 신천동 복자 성당에는 1868년 8월 14일 울산 동천 강변 장대 벌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 허인 백(許仁伯, 1822~ 1868, 야고보), 김종륜(金宗倫, 1819~1868, 루카), 이양등(李陽登, ?~1868, 베드로) 3위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병인박해 100주년을 기념하며, 순교자들의 순교 정신을 현양하기 위해서 각 교구별로 기념 성당을 건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해서 대구대교구에 순교자 현양 기념 성당으로서 건립된 성당이 복자 성당이다. 각각 김해, 공주, 서울 태생인 세 순교자는 천주교 신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면서 집과 전답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경상도의 교우촌으로 피난해 온 이들이다. 김해에서 태어난 허인 백 야고보는 1866년 병인박해 초기 포졸들에게 붙잡혔으나 재물에 어두운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 간신히 풀려났다. 식솔을 데리고 길을 떠난 그는 언양 산골에 잠시 머물다가 울산에 있는 한 교우촌으로 피난해 여기에서 이 베드로, 김 루카를 만나 순교의 길을 예비한다. 충청도 공주 태생인 김종륜 루카는 어려서 입교해 뿌리 깊은 신앙을 갖고 있었다. 박해로 충청도 일대가 소란해지자 길을 떠나 경상도 상주군 멍에목의 교우촌으로 피신했던 그는 다시금 울산으로 몸을 숨겼다. 이곳 대재 마을의 회장이었던 이양등 베드로는 본래 서울 사람으로 박해를 피해 멀리 경상도로 내려와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울산 대재 공소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하지만 결국 이들은 1868년 포졸들의 손에 붙잡혀 경주 진영으로 끌려가서 즉시 영장의 심문을 받고 곤장으로 살이 터져 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끝끝내 배교를 거부하고 죽음을 택했다. 경주 진영에서 병마절도사가 있는 울산까지의 80리 길은 죽음의 행진이었다. 돌과 자갈, 가시밭길을 걸어 이틀 만에 도착한 울산 장대벌에서 그들은 1868년 목을 떨군다. 당시 감영으로 잡혀가는 남편을 뒷바라지하러 따라갔던 허 야고보의 부인 박조이(朴召史)는 치명 터에서 가까운 동천강 둑 아래 세 사람의 시신을 가매장하였다고 전한다.그 후 군란(窘難, 박해)이 그치고, 조정에서는 순교자들의 시신을 찾아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따라서 세 교우의 유족들은 이들 순교자들을 치명한 지 19년 만에 정식으로 경주 진목정 앞산에 모셨다가 1932년 5월 29일 대구 월배 감천리 천주교회 묘소로 모셨다. 그리고 1974년 10월 19일 다시 대구 복자 성당으로 모셔 오늘이 이르고 있다.
▒ 조이(召史) ‘조이’는 성(姓)을 나타내는 명사 뒤에 쓰여 과부 또는 나이 많은 여성을 젊잖게 가리키는 이두(吏讀)이다. 한자로는 ‘소사(召史)’라고 쓰지만, 읽을 때는 ‘조이’라고 읽어야 한다. ‘하느님의 종’ 124위 가운데 이렇게 부르는 분이 네 명이다.▒ 경주 진영과 울산 장대벌 경주 진영은 안동, 동래 등의 진영(鎭營)과 함께 울산에 주재하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종2품)에 소속되어 있다. 경주 진영의 책임자(營將)는 정3품의 병마절제사로서 그 예하에 울산, 영천, 흥해 등에 각각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종4품)와 청하, 연일, 장기, 언양 등에 절제도위(節蹄尉, 종6품)를 속관으로 두고 있다. 그러므로 울산 고을에서 잡힌 이양등, 김종륜, 허인백 등은 일단 그 직속상관이 있는 경주 진영으로 끌려와야 했고, 이들이 경주 진영에서도 배교를 거부하므로 당시 관례상 그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던 울산의 병마절도사 영으로 다시 이송되기에 이르러, 그곳에서 병사의 최종 심문 과정을 거쳐 사형이 집행되었던 것이다. 병인박해 때 대원군의 선참 후계령(先斬後啓令)에 의거하여 감영(監營, 觀察使營)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공개적으로 처형한 후 관련 사실을 중앙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병영, 수영이 아닌 그 예하의 일부 진영에서도 간단한 즉결 재판을 거쳐 무수한 신자들을 처형하기도 했다. 이 경우 참수형이나 군문효수형과 같은 공개적인 재판보다는 교수형, 백지사형 등 갖가지 비법적인 방법으로 신자들을 암암리에 처형한 후 상부 기관에 보고조차 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공식 관가 기록에 그 처형자 명단조차 남아있지 않는 수많은 무명 순교자(無名殉敎者)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네 번째 간 곳
성 모 당
대구교구 창설시 성모님께 감사 증거로 남기고자 만든 동굴
대구교구 창설 때 성모님에 대한 감사의 증거로 만든 동굴이다. 1911년 대구교구 초대 교구장 드망즈(Demange, 安世華, 1875~1935, 플로리아노) 주교는 대구대목구를 성모님께 완전히 의탁하는 믿음으로 허원을 드렸다. 교구에 주교관, 성당 증축 등을 다 이룰 수 있다면, 교구의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성모님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성모 당은 루르드 성모 동굴을 본떠 건축한 건물이다. 설계와 모형은 ‘루르드’의 것을 본뜨고 가능한 한 루르드 성모 동굴의 크기와 바위의 세부적인 면까지 흡사하게 하였다.
성모 당은 교구청 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앞쪽으로 넓은 마당을 두고 북향하여 배치된 붉은 벽돌 건물이다. 1917년 7월 착공하여 1918년 8월 15일 완공되었다. 평면은 우측면의 뒤쪽이 안쪽으로 약간 꺾여 들어간 장방형으로 내부는 암굴처럼 꾸미고 그 위에 성모상을 봉안하였다. 외관은 화강석 기초 위에 흑색 벽돌로 각 모서리의 버팀벽과 수평 띠를 구성하고 나머지 벽면에는 붉은 벽돌을 쌓았는데, 각 부의 비례 구성이 아름답고 벽돌 짜임이 정교한 건물로 지금까지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1911년 대구교구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대구대목구를 성모님께 완전히 의탁하는 믿음으로 허원을 드렸다. 성모님의 도움에 힘입어 교구에 주교관, 신학교, 주교좌성당 증축 등을 다 이룰 수 있다면, 교구의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성모님께 봉헌해 그곳에 루르드의 성모 동굴 모형대로 성모 당을 세워서 모든 신자들로 하여금 순례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1913년 주교관을 완공하고, 1914년 신학교를 건립한 후 셋째 청이 이루어지기가 어려워 성모 동굴은 상당히 늦어질 것으로 보였다. 그러던 중 1916년 소세(Saucet, 蘇世德, 1877~1921, 요셉) 신부가 중병으로 임종에 이르렀다는 의사의 선고를 받았다. 소세 신부를 낫게 해 주시면 주교좌성당 증축 전에 성모 동굴을 만들겠다는 약속을 새로 하게 되었고, 성모님은 그를 낫게 하여 주셨다.그리하여 1917년 7월 31일 성모 동굴 정지 작업 공사가 시작되었고 성모님은 해가 바뀌기 전 첫날인 1917년 12월 30일, 이로부터 두 달 안으로 주교좌성당 증축을 결정할 수 있는 방법을 주심으로써 허원의 셋째 청도 들어주셨다.” 드망즈 주교가 성모님께 허원한 주교관, 신학교, 주교좌성당 증축, 성모당 건립을 완성한 후 이의 완성과 그 과정에 대한 증거로 주교가 쓴 글을 통해서 성모당의 설립 배경과 함께 성모당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알 수 있다.동굴 윗면에 있는 ‘1911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 1918’의 1911은 대구교구가 설립된 연도이며, 1918은 드망즈 주교가 교구를 위하여 하느님께 청한 세 가지 소원이 다 이루어진 해를 가리킨다.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바친 서원에서’란 뜻이다. 1990년 12월 15일 대구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되었다.
▒ 드망즈(Demange) 주교
드망즈(1875~1938, 安世華) 주교는 초대 대구교구장으로 1898년 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사제품을 받고, 곧 임지인 한국으로 떠났다. 1899년에 부산 본당 신부로 임명되어 첫 포교 사업에 정진하였다. 그러나 1년도 못되어, 즉 1900년에 서울 용산 신학교 교수직을 맡게 되었다. 1911년 4월 8일. 조선대목구에서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이 분할되어 대구대목구가 신설되는 동시에 드망즈 신부가 대구대목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신설된 대구대목구를 맡아 불과 25년 만에 대구와 전주, 그리고 광주의 3개 주교구로 이를 나누어야할 만큼 크게 성장시키는 데 온갖 정력을 다한 끝에 1938년 2월 9일에 대구에서 선종하였다. 조선에 입국한 지 40년 동안 전교에 힘쓰다가 63세를 일기로 선종하였다.▒ 루르드(Lourdes)의 성모 1858년 2월 11일부터 7월 16일까지 18회에 걸쳐 루르드에 발현하신 성모 마리아. 이 기간 동안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프랑스 루르드에 있는 마사비엘의 동굴 위에서 14세 된 시골 소녀 베르나데트(Bernadette Soubirous)[1933년 12월 8일 성녀 베르나데트로 시성]에게 발현하였다. 마지막 발현 때 성모는 자신을 일컬어 “원죄 없는 잉태”라고 하였다. 이 발현이 있기 4년 전(1854년) 교회의 교도권은 성모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신앙을 교의로 선포한 바 있었다. 발현이 있었던 자리에 샘물이 솟아났으며 이 샘물로 목욕하거나 이곳에서 성체 강복예절을 할 때 질병 치유의 기적이 일어날 뿐 아니라, 영적 생활에 있어서 기적적인 회개와 은총을 체험하는 등 신앙적인 기적이 일어나곤 하였다. 교회는 1862년 이 발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고 발현하신 성모의 요청에 따라 성당을 건립하였는데 이 성당은 남 프랑스의 가장 웅장한 성당의 하나가 되어 있으며 루르드는 유명한 성지가 되어 세계 도처에서 수많은 순례자들이 모여든다. 이 발현을 기념하기 위하여 1891년 루르드의 성모 축일이 제정되고(2월 11일) 1907년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하여 전 교회의 축일로 지내게 되었다.
다섯 번째 간 곳
한티 성지
박해 때 교우들의 피난처이고 처형지이며 유해가 묻혀 있는 완벽한 순교 성지
한티 성지는 대구 천주교회 창립의 주역을 맡았던 신자들이 박해 시대에 이곳으로 피신하여 은거하면서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살던 교우들의 피난처이고 처형지며, 그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곳이다. 대구에서 북쪽 팔공산과 가산 사이 깊은 산간 지대에 자리 잡은 한티는 병인박해 때 순교한 조 가롤로, 최 바르바라, 조아기, 서태순 베드로의 묘와 무명 순교자의 묘 30여 기가 있는 한국 가톨릭의 성지이기도 하다.
한티 마을은 대구 천주교회의 요람지 신나무 골과 함께 대구 천주교회 창립의 주역을 맡았던 신자들이 박해 시대에 이곳으로 피신하여 은거하면서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살던 깊은 산중 취락이었다. 한티에 천주교 신자 취락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으나 1830년대 교우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진 피난지였다.
한티 교우촌의 개척자로는 볼 수 없으나 한티를 오늘의 유명한 교회 유적지로 만든 이는 김현상 요아킴이다. 서울 관철동에 살다가 1837년 낙향하여 처음에는 신나무 골에서 살다가 1838∼1839년 무렵 한티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병인박해가 발생하기 몇 년 전에는 상주 구두실 출신인 조 가롤로 가정, 1865년에는 대구의 이 알로이시오 가정, 1866년에는 서익순(인순) 요한과 서철순 바오로 가정 등이 박해를 피해 이곳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척박한 한티에서 옹기, 사기와 숯을 굽고 화전을 경작하여 생계를 유지하면서 신앙을 지켜 나갔다.
한티 교우 촌에는 박해 기간 동안 믿음을 지키다 순교한 신자들이 적지 않다. 1861년 경상도 지방에 박해가 일어나자 칠곡 신나무 골에 살던 이선이 엘리사벳 가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다가 이 선이와 큰 아들 배 스테파노가 포졸들에게 잡혀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는데, 이들 모자가 한티의 첫 순교자다.
수차례의 박해를 간신히 넘긴 한티 마을은 마침내 1866년 병인년의 대박해로 ‘최후의 날’을 맞는다. 1868년까지 3년에 걸쳐 유례없이 혹독하게 이루어진 병인박해는 평화롭던 마을을 순식간에 피바다로 만들어 버렸고, 수십 명의 신자들이 한자리에서 몰살을 당하는 비극을 남겼다. 1868년 봄, 한티에 포졸들이 들어와 재판 과정도 없이 배교하지 않는 조 가롤로를 비롯하여 부인 최 바르바라, 여동생 조아기 등 30여 명의 신자들을 현장에서 처형하고, 달아나는 신자들은 뒤따라가서 학살하였다고 한다. 동네는 불타 없어지고 온 산 곳곳에 너무 많은 시신이 썩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매장을 하였다고 한다.▒ 한티 성지 순교자들 한티 순교 성지에는 모두 37기의 묘가 있다. 이중 33기는 무명 순교자의 묘지다. 신원이 밝혀진 순교자의 묘는 다음의 4기이다. ○ 조 가롤로(공소 회장) ○ 최 바르바라(조 가롤로의 부인) ○ 조아기(조 가롤로의 누이동생) ○ 서태순 베드로
여섯 번째 간 곳
신 나 무 골
영호남 지방의 선교 요람지로 대구 본당의 첫 본당 터이며 박해 시대의 교우촌
신나무 골은 영호남 지방의 선교 요람지로 대구 성당의 첫 본당 터이며 박해 시대의 교우촌이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한티로 피난을 갔다가, 1868년 그곳에 들이닥친 포졸들에 의해 그곳의 신자들과 함께 30여 명이 현지에서 순교하였다. ‘연화 서당’이라 불리는 신식 학문을 가르치는 학당을 설립하였다.
신나무 골에 언제부터 교우촌이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815년 을해박해로 청송, 진보, 영양에서 체포된 신자들이 대구로 압송되자, 그 가족 및 일부 신자들이 피난지로 알려진 신나무 골로 이주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1837년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1803~1839, 야고보) 신부와 성 홍병주(洪秉周, 1798~1840, 베드로), 성 홍영주(洪永周, 1801~1840, 바오로) 회장 등 역대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과 전교 회장들이 이곳을 왕래하며 전교하였고, 1849년부터 1861년까지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 신부가 경상도 지방 포교 활동을 위해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다.1862년경 달성군 다사면 부곡에서 처음 신앙을 받아들인 이이전(李梨全, 안드레아) 가정이 마을 사람들의 박해로 이곳 신나무골로 이사를 왔으며, 이 무렵 이이전 가정 이외에도 인근의 신자 가정들이 이사를 왔다. 이로 인해 외지에서 온 신자들과 이 지방 신자들이 합하여 큰 신자 촌을 이루게 되었다.그리고 1860년 경상도 지방 박해 때 이곳에서 한티로 피난하여 순교한 이선이(李先伊, ?~1861, 엘리사벳)와 그의 장남 배도령( ?~1861, 스테파노)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한티로 피난을 갔다가, 1868년 그곳에 들이 닥친 포졸들에 의해 신자들과 함께 30여 명이 현지에서 순교하기에 이르렀다.신나무골은 박해 시대의 교우촌으로서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의 선교 거점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로베르(Robert, 金保祿, 1853~1922, 바오로) 신부는 1885년 11월경부터 1887년 3월까지 신나무골에 머물다가 대구의 새방골[新坊谷]로 옮겨 대구 본당을 창설하였고, 보두네(Baudounet, 尹沙勿, 1859~1915, 하비에르) 신부, 죠조(Jozeau, 趙得夏, 1866~1894, 모세) 신부, 파이야스(Pailhasse, 河敬朝, 1868~1903, 가밀로) 신부도 이곳에 머물다가 각 지역 본당을 창설하였다. 따라서 신나무골은 대구, 가실, 전주, 부산 본당의 산실로서, 특히 영남 교회의 선교 요람지라고 할 수 있다. 영남 지방의 복음화에 헌신했던 로베르 신부는 또한 교육 사업에도 큰 관심을 기울여 속칭 ‘연화 서당’이라 불리는 신나무골 학당을 설립했다. 이 학당에서는 1920년 신동에 초등학교가 설립될 때까지 한문을 포함한 천주교 교리와 서양 학문을 가르쳤다. 신나무골 학당은 이 지역에서 신학교를 제외하고 가장 먼저 외국의 학문을 가르친 학당이었다.
▒ 연화 서당 영남 지방의 복음화에 헌신했던 로베르 신부는 교육 사업에도 큰 관심을 기울여 속칭 ‘연화 서당’이라 불리는 신나무골 학당을 설립했다. 1883년 세워진 이 학당은 1920년 신동에 초등학교가 설립될 때까지 신학문과 구학문 그리고 천주교 교리를 함께 가르쳤다. 신나무골 학당은 1855년에 설립된 배론 신학교를 제외하고 1882년 서울에서 설립된 한한학교(인현학교)와 함께 천주교 내에서는 가장 일찍 신학문을 가르쳤던 신식 학교 중의 하나였다.
일 곱 번째 간 곳
신앙 고백비
자기 신앙의 증거를 위해서 돌에 새긴 신앙 고백
한불 조약 이후에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박해가 끝나고 제한적인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기 시작할 무렵 경상도 상주의 김삼록 도미니코는 석단산 아래 현재 청리면 삼괴2리 안 골짝의 쌍바위 중 오른쪽 큰 바위 위에 자기의 믿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신앙 고백비를 건립하였다경북 상주시는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 때 문중 박해로 서울서 낙향한 서광수(徐光修, 1715~1786) 가정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된 이후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를 믿게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를 비롯해서 1827년 정해박해 등 역대 박해 때마다 많은 신자들이 순교를 당했다.청리면 삼괴 2리 부락에는 1866년 병인박해 전부터 김해 김씨 집안의 김복운의 아들 4형제 중에 장남인 삼륙과 차남인 삼록 등 형제들이 열심히 천주교를 믿었다. 그러나 병인박해가 일어남으로써 다른 형제들은 믿음을 중단해 버렸고 둘째인 삼록(1843∼1935) 만이 끝까지 천주교를 믿었다. 그는 박해 중에는 여러 곳으로 피신을 다니다가 1894~1900년 초에 그와 그 집안의 문중들이 살고 있던 석단산 아래 큰 바위 위에 자기의 믿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신앙 고백비를 건립하였다.신앙 고백비의 크기는 높이 127㎝, 폭 39㎝, 두께 22㎝다. 이 신앙 고백비 건립 때 비용은 쌀 5가마와 상당한 금액이 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비석에 비문과 글씨는 자기가 손수 써서 새겼다. 그런데 이 비석 건립 비용들은 거의 다 김삼록 본인이 부담했으며 그때 청리면 삼괴 1리에 살던 이갈방 노인(본명 미상) 등 몇몇 신자들도 합심해서 보태었다고 한다.한편 이 신앙 고백비의 건립 시기는 그의 손자인 김순경 노인의 증언과 신앙 고백비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1894~1900년 초로 추정된다. 김삼록이 이 신앙 고백비를 세운 뒤에도 아직 지방에 사사로운 박해가 있었으므로 이 신앙 고백비를 가리기 위해서 비석 앞에 포플러나무, 미루나무 외 잡나무들을 많이 심어서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잘 보지 못하도록 가려 두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그의 손자인 김순경이 모든 잡목들을 베어 버려서 어느 정도 앞이 트였다.
◆ 신앙 고백비 비문 전면(前面)
第一 天主恐衛咸 첫째는 천주님을 두려운(마음)으로 모신다.
第二 敎化皇衛咸 둘째는 교황님을 받들어 모신다.
第三 主敎衛咸 셋째는 주교님을 받들어 모신다.
第四 神夫衛咸 넷째는 신부님을 받들어 모신다.(*神夫는 神父의 誤字임)第五 敎于衛咸
다섯째는 신자들(교우)을 받들어 모신다.(*敎于는 敎友의 誤字임)奉敎人 金道明告
(천주)교인 김 도명고(도미니코) 제작癸卯年 本 盆成 金(金海) 계묘년(1843)에 출생, 본관은 분성(김해)김이다.
▒ 김삼록 도미니코 김삼록의 가정이 언제부터 천주교를 믿었는지 확실히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 전 이미 형제들이 신앙을 받아들여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박해가 일어나자 맏형 삼륙(三陸) 등은 박해가 무서워서 믿음을 버렸고 오직 둘째 김삼록만은 계속 천주교를 열심히 믿으며 박해를 피해 다녔다. 1866년 한불 조약 후 공식적인 박해가 끝난 후인 1894∼1900년 초에 자기 집뒤인 석단산 아래 큰 바위 위에 이 신앙 고백비를 세웠다. 그는 농촌에서 농사를 짓는 순박한 신자이지만 아마 구한 말부터 의병운동과 독립운동에 가담을 했던 것 같다. 즉 그의 손자인 김순경의 증언에 의하면 1910년 국권 피탈 그 무렵부터 내내 일본 순사들이 그의 뒤를 미행했으며 또한 그를 체포하기 위하여 몇 번이나 집에 찾아왔지만 미리 주위에서 알려 주어서 피신했기 때문에 체포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독립운동은 당시 김문옥 신부를 도와서 문경의 공평 성당과 상주 서문동 성당 전교 회장을 하면서도 민족 사상을 가졌던 최동선 회장과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은가 싶다.
2번째
순례의 향기의 소감의 글은 내 개인 생각은 접어두고
순례지의 특징, 중요성, 순교자의 생애의 글을 중점으로 글을 써 보았다.
여기에 쓴 글과 사진들은 ‘한국의 성지와 사적지’ 및 ‘굿 뉴스 ’에서 따온 글임을 밝히면서 많은 ‘청주교구 사도성 야고보 순례단 ’ 회원님들의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앞으로도 계속 이런 형식의 글을 쓰려고 노력을 할 것 입니다.
2016. 3. 20 . 대구 .안동순례를 마치며
김홍숙 혜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