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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申庚林)
신응식(申應植) 父:태하(泰夏)祖父:도석(道錫)귀파(龜派)직장공파(直長公派)☜
아주신씨(鵝州申氏)
1. 소개
2. 생애
1936년 4월 6일, 충청북도 충주군(현 충주시) 노은면 연하리 상입장에서 면서기를 지낸 아버지 신태하(申泰夏)의 아들로 태어났다.[1] 충주고등학교, 동국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였고 1955년에 문단에 데뷔하여'낮달', '갈대', '석상' 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데뷔한 이래로 10여년 동안 시를 쓰지 않았으나, 1965년 겨울에 동료 시인이자 절친이었던 김관식의 손에 이끌려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면서 다시 시를 쓰게 되었다. 그러나 한동안 생활 형편이 어려워 동네 학원에서 영어 강사 일을 하면서 끼니를 이어야 할 지경이었다고도 한다.
이후에는 '원격지', '산읍기행', '시제', '농무' 등의 시를 발표하였으며 시학(詩學) 해설서인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를 출간하며 이미 작고한 국내 시인들과 생존해 있는 시인들을 만나기도 하였다.
1973년 만해문학상, 1981년 한국문학작가상을 수상하였다.
이후 동국대학교 석좌교수에 부임했다.
3. 일화
초,중, 고등학교 국어나 문학 교과서에도 이 시인이 지은 몇몇 시들이 수록되었는데, '농무'와 '가난한 사랑 노래', '목계장터' 등이 교과서를 읽은 학생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시인의 1988년작 '가난한 사랑 노래'의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라는 시귀는 본래'탱크 바퀴 굴러가는 소리'였지만 대한민국 제5공화국 군사정부의 검열을 의식한 출판사의 만류로 수정했다고 한다.
한국 문학계의 원로인지라 과거 한국 문단에서 활동했던 여러 유명한 시인과 작가들과는 친분이 두터운 사이로, 그 중에서는 천상병이나 김관식, 조태일, 민병산, 황석영 등이 있다. 특히 천상병이나 김관식 등은 서로 구수한 말을 주고 받을 정도로 친했으며 세 사람이 하나같이 알아주는 주당들이라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여러 에피소드를 남기기도 하였다.
이전에 일제강점기 시기에 겪었던 어린 시절의 일화나 문단에서 사귀었던 여러 문학가들 사이에 있었던 에피소드와 오늘날의 시점으로 봐도 심히 기이한 각종 기행 등을 재미난 입담으로 다룬 수필집을 내어 호평을 받기도 하였다. 이후 수필집과 회고록을 종합하여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2]라는 책으로 엮어 출판하기도 하였는데 신경림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재미있게 볼 수 있다.특히 기행에 있어서는 당대 문단의 1,2위를 다투던 천상병이나 김관식의 일화는 배꼽을 잡게 할정도로 웃기고도 기이하다. 한편 일제 강점기와 해방 직후의 학창시절을 다룬 파트에서는 당시의 어수선한 사회상은 물론이고, 자신이 저질렀던 비행이나 창피스러운 일도 담담하고 솔직하게 소개하고 있어 이 역시 재미있다. 중학생때는 백석의 시를 좋아했다고 한다.
시인 고은과 절친한 사이다.고은이 만든 진보 문학 단체인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고은을 보좌하며 행동대장과 같은 역할을 담당했다.1989년에는 고은과 함께 방북을 추진하여 판문점으로 가다가 경찰에게 저지당하여 미수에 그치기도 했다. 또 '고은 문학의 세계'등의 저서를 통해 고은의 업적을 미화하고 찬양하는 작업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빼도박도 못 하는 신경림의 흑역사.
4. 작품
· 목계 장터
· 농무
[1] 출생지인 470번지에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2] 자신의 시 중 하나인<파장>의 한 구절에서 따온 제목이다.
시인윤중호가 쓰는 '신경림'
눈물 많고 설움 많은 ‘농무의시인’
우리 시대에 후배들을 꾸짖어주고 격려해 줄 참된 어른이 없다고 개탄하는 소리가 들려온 지 오래건만 아직도 소문이 짜하게 고개 숙일만한 어른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잘 따져보면 ‘소문이 짜하게 고개 숙여지는 어른’이정말 계시냐 안 계시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런 어른을 찾을 때까지도 소문이 짜하게 나야 한다고 생각하는우리의 맘보가 더 문제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켠에서 그저 자기 일을 열심히 하면서 소리소문 나지않게, 맑은 사람의 향내를 사방에 뿌리는 어른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우리가 그 분들을 못 알아볼 뿐이다.
이러저러해서 여기다가 죽 존함을 올릴 만한 어르신들이 한두 분이 아닐 터이고, 우리가넙죽 절하고 사람살이를 배워야 할 분들이 어디 한두 분이겠냐마는, 거칠게 말한다 치더라도 당장 우리가안으로 새겨두어야 할 어른들은 천지에 쌔고쌔게 많을 것이다.
말하자면 농사를 지어도 특용작물이니 복합영농이니 종합축산이니 해가며 대처 장사꾼처럼 곁길로 새는 젊은이들을 뒤로 하고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별날 것까지는 없지만 소중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일깨워주며 묵묵하게우리의 곡식인, 돈 안 되는 농사에 매달려서, 가산 죄다탕진하고 알짜배기는 자식놈덜한테 모두 줘버리고 살면서도, 하늘 땅 고마운 줄 아시고 생명 귀한 줄 아시며사는 우리의 어른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거시기도 모르는 것들이 거시기 보고 탱자 탱자 한다’고 우리는 참된 어른을 너무 멀리서너무 쉽게 너무 막연하게만 찾는 것은 아닌가? 우리 눈에 그런 어른들이 보이지 않는 것은 어른들 탓이아니라 우리 탓일지도 모른다. ‘의붓에미 미워하다 의붓에미 닮는다’고우리가 잘못된 사람들의 잘못된 꼴만 배운 건 아니던가? 그래서 겸손하고 낮게 계신 분들을 두리번거려찾지 않고 소문난 잔치에만 기를 쓰고 달려가는, 그런 얄팍한 짓만 되풀이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들기도 한다.
고향집 뒤켠, 올망졸망한 돌담 위에 허허롭게 서 있는 늙은 감나무, 머리 위에는 까치밥을 서너 개 두고 깊어가는 가을하늘보다 더 깊어지는 사람이 있다. 고향 아저씨처럼 눈을 감고 웃으면 너부죽한 얼굴이 그저 편하게 마구 펴져서 보는 사람의 얼굴까지 무사태평하게다림질하는 사람. 그러다가도 일순 ‘뭔 일인디 그려?’ 마뜩찮게 쳐다볼 땐 그 순했던 눈이 꼿꼿하게 올라붙는 것도 참 희한한 일인데, 사람들은 그를 일러 ‘농무(農舞)의 시인 신경림’이라 부른다.
수육보쌈에 참소주를 걸치고 나와도 쉰 열무김치에 막걸리를 자신 것처럼 보이고, 비싼 잠바를금방 사서 걸쳐도 급한 김에 동네 점방주인에게 빌려 입고 나온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서 신경림 시인은오갈 데 없이 눈물 많고 설움 많은 우리 근·현대사의 간난한 증인처럼 보이지 않던가? 그러나 그저 겉모습이 그렇다고 우리 근·현대사의 증인이 되는 것은아니다. 자기 자신을 아프게,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수굿하게내려다볼 수 있는 깨어 있는 마음, 그 많은 슬픔과 설움에 둥둥 떠내려가지 않고서 ‘이것이 도대체 워치케 된 셈판인 겨?’ 되묻는 마음, 그러다가 결국은 눈물 많고 설움 많은 우리 근·현대사의 한켠에 웅크리고있는 자신의 비겁하고 옹색한 모습을 발견하고는, 아프게 주억거리며 눈물 많고 설움 많은 우리의 과거를, 눈물 그렁그렁 속상하게 그러안으며 거기서부터 다시 의연하게 신발끈을 동여매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신경림 시인의 모습이 꼭 그렇다. 터덜터덜 민요기행을 다니며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의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고 그래서 만나자마자 그 사람들이 살아온 얘기 살아갈 얘기, 그 사람들이 살을맞대고 살아온 이 땅의 얘기가 찌들어 있는 민요도 한 가락 풀기도 하고, 그러면서 고단한 인생길의 길동무가되기도 하는 그 힘, 그 힘은 바로 먹물을 먹었으되 먹물 냄새가 아닌 잘 익은 두엄 냄새가 나는 ‘고향 삼춘’만이 가지고 있는 부드럽고 고집 센, 행색은 초라하고 머리는 봉두난발일지 모르지만 마음 하나는 결이 곱기 그지없는‘논배미에 엎드려 사는 농사꾼들’의 힘일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말여. 참 얘기를 좋아하시던 분여. 누가찾아오면 불편한 몸을 일으켜 세우시고 안 돌아가는 입으루 세상 이야기를 하셨단 말여. 어떤 때는 나를붙잡고 세상 얘길 허셨는데, 나는 그때 아버지 생각이 너무 고루해서 들으나마나라고 넘겨짚고선 퉁퉁대기만했지 제대로 못 들어줬어…… 후회스럽지.”
언젠가 신경림 시인은 술에 취해 혼잣말처럼 소년 신경림이 느꼈던 아버지에 대한 불만과 회한 그리고 아쉬움의 끄트머리에 간투사처럼 ‘그 채 못 들어준 아버지의 이야기’를 조심조심 털어놓았다.
그래서 신경림 선생은 남의 말을 잘 들으신다.
“근디 슨상님 말유, 그것이…….” 어쩌구저쩌구뭉기적거리며 말을 시작하면, 저 놈이 또 무슨 잡소린고 하는 표정으로 눈을 반쯤 내리깔고 비죽이 들으시다가, 그런다.
“냅둬.”
1990년대 초에 민족예술인총연합 사무실이 광화문에 있었는데, 인간 송기원 성님하고 출판인지 술판인지 한다고 넘성대다가 기원이 형이 덜컥 잡혀가는 바람에 갈 곳이 난감해진나를 보고, 당시 민예총 사무국장이었던 김용태 성님이 웃으며 말했다.
“봐라, 윤중호 니 우리 사무실에 책상 하나 놓고 있을끼가?”
나는 그저 대답 대신 피식 웃고 말았는데, 인간 김용태 성님이 누구인가? 별명은 ‘국독자’, 국가독점자본주의의줄임말로 당시에 유행하던 말이었는데 용태 성님의 별명인 국독자는 원래 사나운 뜻과는 전혀 상관 없이, 국가에서알아주는 술 중독자란 뜻이었으니 알 만한 인사는 모두 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 국독자의 명성이 얼마나 자자했냐 하면, 내가 나름대로는 입가심에 일가견이 있다고 자타가공인하는 송기원 성님하고 점심 먹다가, 성님 어때요 입주 한잔? 그러면기원이 성이 그런다.
“야, 윤중호 너 용태 불러다주랴?”
바지는 배꼽 위까지 끌어다붙이고 짧게 깎은 밤송이 머리를 연신 박박 쓸어넘기면서 아침 댓바람부터 불콰해진 얼굴로 인사동 길을 팽팽걸어가면, 저 냥반이 그냥 볼일 보러 가는 사람인지 아니면 어디로 한바탕 해붙이러 가는 사람인지 분간이되지 않을 정도로 씩씩하기 짝이 없는 의리의 사나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아무래도 같은 사무실을 쓴다는게 좀 그랬다. 보나마나 아나마나 사람이 아쉬우니까 슬슬 부려먹을 작정이었을 것인데, 사정을 빤하게 아는 처지로 너무 야박하게 딱 하니 자르기가 뭐해서 머뭇머뭇거렸더니, 용태 성님이 빠꼼히 웃으며 내 손을 잡고, 정제되지 않은 경상도사투리로 달랜다는 풍신이,
“여기 직원이 아이고, 작은 방 하나 차고 앉아서 거기다 책상 놓구 저술하시라꼬, 저술…… 됐나?”
되긴 뭐가 돼,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저술은무슨 놈의 저술, 입맛을 다시고 있는데, 옆에서 염무웅 선생과바둑을 두시던 신경림 선생이 비장하게, 비명횡사 직전의 상변 대마에서 손을 빼시며 한마디 거드셨다.
“냅둬유.”
그렇다고 신경림 선생이 아무것이나, 되나 안 되나 그저 냅두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술자리에선가 후배가 술에 취해서 주정을 부렸는데, 주정치고는정말 멋대가리가 없었다.
“민족 민중을 위해 나는 죽을 각오가 돼 있는데 너희들은 뭐 했어.”
어쩌구 하는, 말하자면 1960년대식의 신파극같은, 신파극치고도 아주 저질급의 표절 신파극 같은 주정이어서 술판에 낀 사람들의 기분을 아주 고약하게만드는 치졸한 주정이었는데, 그때 갑자기 ‘쨍그랑’, 소주잔 하나가 획 날아가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야 이 자슥아, 죽고 나서 말햐.”
모두 고개를 돌려보니 신경림 선생이었다. 얼라? 나는선생이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을 처음 보았던 터라 한편으로는 주정하던 인사가 코가 쑥 빠져 있는 게 고소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분위기와는 상관없이 선생이 그 다음에 어떡할까 싶어서 눈을 말똥말똥 뜨고서는 돌아가는 판세를 흥미진진하게 즐기는 편이었다.
그런 편이었는데, 혹시나 박씨나 눈에 바짝 날이 서서 울울창창하던 사나움도 잠시, 그 다음에 쩝쩝 입맛을 몇 번 다시며 이내 눈이 착" 하니깔아지더니 얼굴에, ‘내가 왜 술잔까지 던졌을까. 저 놈도착한 놈인데 저 놈 상처받으면 어떡하지? 저런 주정쯤은 그냥 넘겨야 하는 건데, 어떡하지? 에라 모르겠다. 술이나더 마시자’ 하는 울 듯한 표정이 역력해서 아예 눈을 질끈 감고 벌컥벌컥 술을 마시자, 그게 켕겼든지 아니면 선생의 표정을 잘못 읽었든지 이제까지 엉망으로 취한 척하며 주정하던 인간이 멀쩡하게 깨어나서백배사죄하는 형국으로 돌변하고 말았다.
일부 몰지각한 인간들이 신경림 선생의 그 여린 마음을 가지고 어쩌구저쩌구 씨부렁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그럼 너는 무슨 맘보를 가지려고 그렇게 부잡스럽게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나부대냐?”고묻고 싶은 마음이 된다. 같이 어울려 살고자 하는 마음은 별수 없이 남을 배려해주는 순한 마음일 것이고, 누구를 박살내야 직성이 풀리는 치고 나가는 선두주자의 마음이 아니라 다 버리고 떠난 뒤에도 뒤에 남아서 혹시억울하게 버려진 것이 없나 꼼꼼히 따지고 챙겨주는 뒷설거지꾼의 마음이 아니겠던가?
어떤 자리에서(보나마나 술자리였겠지만) 선생님의친구가 이 얘기 저 얘기 하다가 도리어 면박을 당할 지경에 이르자 쌩뚱맞게도
“아무리 그래도 경림이 너는 근력이 부쳐서 연애두 못 헐껄?” 하며 딴전을 피웠다.
눈이 똥그래진 신경림 선생이 웃기지 말라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그럼 너는 했냐?”
“야, 나는 반 연애결혼 했어.”
“웃기지 마, 나는 두 번씩이나 연애했다. 어쩔래…….”
어쩔 것도 저쩔 것도 없는 게, 도대체 어떤 여자가 ‘고향삼춘’같은 사람이랑 연애할 맘이나 있겠는가? 가려서 들을만한 얘기 한마디 없이, 밤낮 가림 없이 만나기만 하면 곧바로 ‘뼈와살이 타는 밤’식의 육박전만을 벌여놓고도 사랑의 이름을 붙이고 싶어하고, 울어도 우아하게 외제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싶어하는 게 요즘 것들의 천박한 행태 아니던가?
그래서 믿지는 않았지만 선생님의 친구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소곤소곤 여쭤보았다.
“근디 슨상님, 증말루 연애했슈?”
“무슨…… 중매여 중매. 예산 여자였지…….”
오랜만에 후배인 양문규가 전화를 했는데 신경림 선생이랑 충남 금산을 다녀오는 길이란다. 뵌지 한참이 되어서 선생의 안부를 물었더니, 지가 무슨 선생의 가슴에 들어갔다 나온 놈처럼 천연덕스럽게주절거렸다.
“선생님이야 뭔 걱정이 있겄슈. 늙은 어머니가 조금 걸릴 테지만 아직까지 정정허시구 자식들죄다 여의살이 시켰구 벌어먹일 식구가 없으니 돈걱정도 없을 테구 그리고 요즘에는 여기저기 다니시구 강연 다니시구 원고 쓰시구 아마 제 생각으론선생님 평생중에 요즘이 젤로 봄날 아니겄어요? 성님 생각은 어때요? 제생각은 그런디…….”
그놈 참 어정스럽기는, 하지만 내가 막상 따져봐도 언제 그 양반이 깃발 날리며 나를 따르라한 적이 있으며, 언제 죽을 상을 짓고 아픈 내색을 보이며 추레하게 궁상 떤 적이 있던가. 사정은 잘 모르지만 그렇지 않겠다 싶은 것도 없어서 ‘아하, 봄날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만약 내가 선생을 만난 자리에서 “선생님 요즘 봄날이라매요?” 물으면 선생님은 그럴 것이다.
“무슨 봄날?”
“아, 문규헌티 들었는디 요즘 아무런 걱정도 없이 아주 신나신다매요?”
그러면 선생님은, 고향 돌담 위로 허허롭게 솟은 감나무 아래에서 빈 들녘을 바라보며 허허롭게서 계신 고향 삼촌 같은 웃음을 지으며 이럴 것이다.
냅둬.” ●
시인이재무가 쓰는 '신경림'
우리시대의 민족시인
01 거제와 구례에서연하리 상입장까지
02 노은국민학교에입학하다
03 충주사범학교시절
04 충주고등학교시절, 불타는 시심(詩心)
05 서울에서의궁핍한 대학 생활 그리고 하향
06 서울로 재입성, 제 2의 문단시절
시인 신경림의 본명은 신응식(申應植)이다.
신응식과 그의 부인 이강임(李康妊) 사이에는아들 둘 딸 하나를 두고 있다.
큰아들 신병진(25세)은 동국대 산업공학과에재학 중이며, 외동딸 신옥진(23세)은 출판사에 근무 중이고, 둘째 아들 병규(21세)는 홍익대 국문과에 재학 중이다.
그 누구보다도 이 땅의 밑바닥 인생들을 온몸으로 사랑했던 시인 신경림.
그는 결코 목소리를 높여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의 목소리는 그 어떤 소리보다 울림이 크다.
그의 잔잔한 목소리는 강의 하류처럼 부드럽고 섬세하지만 결코 약하지 않다.
그의 글과 말속에서는 언제나 낮게 낮게 봄비가 내린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불의 앞에서는 불꽃이 튄다.
사람의 길이 아니면 그 무엇하고도 타협을 거부하는 시대의 양심.
그의 글을 읽고 있거나 그의 구성진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우리는 어느 사이 자신도 모르게그의 글과 말의 봄비에 흠뻑 젖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대체 그의 그러한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아마도 추측건대 그것은 그의 육화된 인간 사랑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이웃의 고통과 슬픔에 가장 가까이 살을 맞대고 살아온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외유내강의 힘 앞에서 약한 자는 힘을 얻고, 강한 자는 한없이 부드러워지게 마련인 것이다.
세상에서는 그의 글만큼 정직하고 성실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고 아름다운 글이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의 글 못지 않게 정직하고 성실하고 고운 것이 그의 인간성이다.
그를 만나본 사람이면 누구 나가 예외 없이 이 점을 공감할 줄 믿는다.
그만큼 그는 글과 사람됨의 차이가 없는 시인인 것이다.
그의 취미는 바둑두기와 여행이다.
여행이라고 하니까 좀 사치스런 느낌이 없지 않으나 여기서 말하는 그의 여행은 성격이 다른 것이다.
여가를 즐기는 여행이 아니라 이제는 생활의 일부가 되어 버린 그의 여행은, 월 2-3회에 걸쳐 전국 경향 각처를 맨발로 떠돌며 그곳 밑바닥 인생들의 삶의 애환에 기꺼이 동참하는 살신으로서의여행이다.
그의 바둑 실력은 대단치 않지만 바둑 광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바둑두기를 좋아한다.
그의 바둑 상대는 민족예술인총연합 사무총장이면서 화가인 김용태와 문학평론가이면서 영남대 독문과 교수인 염무웅 그리고 역시 평론가이면서수원대 교수인 구중서 등인데, 그는 이들과 더러 만나 종종 내기 바둑을 두곤 한다.
그의 노래 솜씨는 그리 월등한 편은 못 된다.
민요회 회장을 수년간 역임한 이력에 비해 그의 민요 가창력은 그리 신통치가 못하다.
그러나 그는 민요를 자신의 몸처럼 아끼고 사랑한다.
취흥이 올랐을 때 그가 즐겨 부르는 대중 가요는「고향역」과「삼포로 가는 길」등인데, 그의애창곡이라서인지 이 노래들만큼을 2절까지 정확히 가사를 외고 있다.
그가 즐겨 만나는 이들로는 소설가 현기영, 김성동, 희곡작가안종관, 문학평론가 유종호, 염무웅, 시인 민영, 황명걸, 조태일, 이시영, 송기원, 이은봉, 윤중호, 박나연, 이경철, 박철, 양문규 등이다.
또 문단 바깥으로는 그의 스승이자 현재 재야 변호사이신 정춘용, 그의 고교 동창이자 전외교관 출신인 이근호, 현 대전지법원장 이재화 등이다.
생존경쟁에 시달린다는 핑계로 사람들이 하나같이 교언영색으로 자기 보신에 급급한 요즈음, 오십이넘은 나이에 아직도 십오 세 소년의 마음을 지니고 사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남아 있음은 행운을 넘어 큰 복이다.
그래서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누구보다 그를 좋아하고 따른다.
그가 있는 술자리는 언제나 흥겹고 즐겁다
(그는 중학교 시절 처음 배운 술로 지금까지 두주불사의 주량을 유지하고 있는 애주가이다).
자신의 슬픔과 고통에는 한없이 인색하면서 타인의 아픔과 신산은 자신의 일로 챙겨 함께 아파할 줄 아는 민중·민족 시인 신경림의 생애는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다.
01 거제와 구례에서 연하리 상입장까지
시인 신경림은 1935년 4월 6일 충북 충주군(지금의 중원군) 노은면연하리 상입장 470번지에서
4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주 신씨들이 전남 구례와 경남 거제에서 충주군 노은면 보련골로 이주해 터 잡고 집성촌을 이루며 산 지 무려이백여 년 만에 그가 태어난 것이다. (훗날 그는 이것을 근거로, 그의문우나 후배, 제자들과 방담을 나눌 때 아주 신씨는 애당초 지방색이 있을 수가 없었다고 말하고는 하였다).
당시 전남 구례에서 터를 옮겨온 아주 신씨들은 대부분 직계들로서 연하리 보련골에, 일부방계가 연하리 상입장(장터 윗동네)에 무리 지어 살게 되었는데, 그의 가계는 아주 신씨들 가운데 직계 아닌 방계로서 연하리 상입장에 자리잡은 십여 호 가운데 하나였다.
그의 가계의 승계는 일반 가계의 승계와는 좀 다른 특이한 면이 있었다. 조부가 증조부에게양자로, 증조부가 고조부에게 양자로, 고조부께서는 구례 지방에서양자로 들어와 가계를 승계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그의 가계는 양자에서 양자로 대를 이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던 것이 그의 할아버지 대부터 명실공히 순수 혈통만으로 대를 잇게 되었다. 그러므로 시인 신경림은 그 순수 혈통의 3대째를 잇고 있다고 볼수 있다.
조부와 그 형제분들은 본래가 학자들이었는데 그들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거개가 다 개화주의자들이었다.
일찍이 그들은 한글 전용을 주창하였고 농촌계몽운동을 벌이는 등 개화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대단하였다(여담 같지만 훗날에 시인 신경림이 시작(詩作)과 여타의 수려한 산문에서 모국어에 대한 남다른 애착과 노력을 보여 준 것은 어쩌면 이러한 그의 가계사의 유전학적영향과도 무관치는 않을 것이다). 또한, 당시 아주 신씨집안의 향학열은 인근 타성바지들의 부러움과 시샘을 눈 따갑게 받을 정도로 그 열기가 자못 뜨겁고 유난스러웠다고 한다.
예컨대 시인 신경림의 집안 어른들 가운데에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사람만도 여럿 되었고, 국내의유수 대학이나 전문대 정도는 한 집에 한두 명 이상 가가호호 거의 대개가 다니고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이만한학구열은 사실이지 요즘 세상에도 보기가 드문 예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학구열이 여느 타성바지에 비해 뜨겁고 유난스러웠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인즉,그것은아마도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아주 신씨들 특유의 학문적 가풍의 내력 탓이기도 했지만, 당시 전남구례와 경남 일원 등지에서 이주해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씨들에게는 타관 객지나 진배 없는 충주에서의 신산스런 삶 속에서, 타성바지로부터 행여 있을 수 있는 괄시나 냉대를 받지 않겠다는 어떤 심리적 압박감 내지는 오기에 가까운 의지가유형무형으로 작용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어디서 듣도 보도 못했던 타성바지가 이주해 옴으로써 토박이들은 토박이들대로의 위기의식 비슷한 것이 작용하여 텃세와 가시 같은 눈총을보냈을 것이고, 아주 신씨들은 아주 신씨들대로 여간한 신고를 하지 않고서는 객지에서 자신들의 삶의 뿌리를내린다는 것이 생각처럼 그렇게 수월치만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아주 신씨들은 본토박이들에 비해 더욱극성을 부려야 살 수 있게 되었을 것이고, 학구열 또한 그들이 부려 댄 극성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어떻게든 간에 아주 신씨들은 그들 특유의 바지런함과 극성에 가까운 학구열 덕택으로 본토박이들에게서 이렇다 할 해코지나 무시를 당하지않고서도 넉넉히 뿌리를 내려 갈 수 있었다. 구례와 경남 일원에서 이주해 온 그들의 살림살이는 세월의물살이 장단 완급으로 흐르면서 점차 눈에 띄게 불어나갔다. 그만큼의 결실이 있기까지 그들이 바친 신산의노고와 근면이 결코 적지 않았음은 물론이었다.
그의 부친(申泰夏)에서는 충주농업학교를 나와농사를 짓는 한편 면서기, 농협서기 등을 지내다가 후에 동생 신태은(申泰銀, 신경림의 삼촌으로 그는 6·25 발발시 시류에 휩쓸려 희생을 당한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이었고 신경림의 나이 열다섯 살이었다고 한다. 당시소년 신경림은 그의 삼촌의 억울한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았고, 후에 그때 겪은 아픈 경험을 살려 시「폐광」으로옮겨 놓는다)과 함께 광산에서 덕대(광산의 하청업자), 연상(분광주) 등으로일했으며, 금방앗간과 금분석간도 경영하였다. 그러다가 신경림의나이가 열아홉에 이를 즈음에는 논을 판 돈으로 약사와 함께 동업하여 약방을 경영하기도 하였으나 크게 실패하고 말았다.
그의 부친은 일보다는 술과 친구들을 더 좋아하였고(그의 부친은 병이 들어서도 사람을 좋아해서누가 찾아오기라도 하면 불편한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안 돌아가는 입으로 세상의 온갖 얘기를 하고 싶어했다고 한다.훗날 그는 세상사람들의 얘기를 들어 주는 작업에 몰두하게 될 때, 그 당시 아버지의 얘기상대가 되어주지 못한 일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다고 한다), 한때는 마작에도 손을 대는 바람에 가정형편이 좋지 않았다.
시인 신경림이 태어난 이듬해(1936년) 첫째동생(현재 서울공대 졸업 후 워싱턴에서 사업 중)이 태어났고, 그 뒤 이 년, 삼 년 터울로 하여 둘째(현재 충주고를 졸업한 뒤 남해화학 근무), 셋째 (현재 홍익대와 미국 조지아 대학원 졸업 후 영국 뉴캐슬리 대학 동양학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재직) 등이 태어나기 시작하였다. 어느새 신경림은 4남 2녀의 장남이 되어 있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집안일 보다는 바깥으로 더 출입이 잦으신 아버지가 위태롭게 보였다.반면에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산처럼 믿음직스러웠고 신뢰가 갔다. 그의 모친은 곡산 연씨로충북 괴산군 도안면에서 태어나셨는테, 그 당시 외조부께서는 군내에서도 손꼽히는 부자였다. 그러나 독립운동 자금을 대어주다가 몰락하여 뒤에 서울로 쫓기듯 이사를 가게 되는 불행을 겪게 되었다. 본디 상당한 재력가이신데다가 학식과 덕망을 고루 갖춘 외조부의 훈육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모친께서는 일찍이 한학에 밝으셨고 실천궁행에도 빈틈과 소홀함을 보이지 않으셨다고 한다. 요컨대 그의 부친께서는 다소 즉흥적이고 격정적인 면모가 있으셨던 것에 비해 그의 모친께서는 사리가 분명하셨고이지적이셨으며, 인정 또한 후하여 인근에서 칭송이 자자하셨다 한다.
어릴 적 신경림은 자연, 매사에 맺고 끊는 것에 관대하셨던 부친에게서보다는 의지와 정감을속옷과 겉옷으로 적절히 껴입으셨던 모친에게 더 기대어 듣고 보고 배웠다고 한다. 이것으로 보아, 훗날의 신경림의 체질화된 내면의 양면성, 즉 떠돌이 기질의 두루마기속에 감춰져 있는 냉철한 과학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은 아마도 짐작건대 이러한 그의 부친과 모친의 천품을 선험으로 물려받은 데서 온 것이 아니었을까싶다.
신경림에게 음우의 영향을 끼친 분으로는 그의 부모 외에 또 한사람이 있었다. 그의 고향에서는팔방미인으로 널리 재명을 빛낸 분으로, 그와는 가까운 친척뻘 되는 당숙이었다. 피리를 잘 분다 해서 '신퉁수'로도불리었던 그의 당숙께서는 목불식정의 일자무식자였으나, '신언서판' 이라는또 다른 별명에 값을 할 만큼 인물이 좋고 말재간 또한 천의무봉의 솜씨였는지라, 그분 주위에는 언제나된장 주머니가 매달린 저수지 속 소쿠리에 새우떼가 모여들 듯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들끓었다. 사람들의마음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기분에 따라 웃겼다, 울렸다 하는 말솜씨가 가히 금메달감이라 한때는 읍내 악단단장까지 지낼 정도였다.
또한 그분은 인간문화재로 불리었던 제3의 별명이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연극에도 소질을보이었고, 소리에도 능했다. 여기에 그는 그 방면의 재질있는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노름 또한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수준급으로서 건달기가 다분한 타고난 쟁이로서의 낭만주의자였다.
그분은 이러한 기질 탓으로 직업도 다양했다. 한때는 전국을 누비는 장돌뱅이였다가 그것이시들해질 만해서는 뱃사공 노릇과 뗏목도 탔고, 그것 또한 정들만 해지면 광산으로 들어가 광부로 일하는등 어느 한곳에 진득하니 안주하질 못했다. 역마살이 끼었는지 그는 툭하면 떠났고, 떠났는가 싶으면 금세 돌아오고는 하였다.
피의 내림 탓이었을까? 어린 신경림에게는 어른들의 골 깊은 한숨과는 달리 그런 당숙이안돼 보이기는커녕 민들레 풀씨처럼 자유로이 세상을 유영하는 삶이 부러울 뿐이었다. 다만 납득하기 어려웠던것은 그렇게 많이 직업을 옮겨다니고, 재주 또한 출중했던 그분께서 평생을 가난의 족쇄에 묶여 허덕이며사는 모습이었다.
아무튼 어린 신경림은 예(藝)에 능하고 재담이우렁이 넣고 끓인 장국맛 같던 당숙이 좋았다. 어른들 틈에 끼어 귀를 세워 엿들었던 그분의 세상 이야기를, 가슴 깊숙이 달아 놓은 그만의 이야깃주머니에 꽁꽁 다져 챙겨 놓고는 행여나 이야기가 발이 달려 있어서 달아날까봐 노심초사 몇 번이고 조바심으로 열린 앞가슴의 옷섶을 여미었던 기억은, 지금에 와서 떠올려도 낙숫물소리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린 가슴에 어른을 담고 앉아 그가 불어 주는 애조 띤 피리소리를들으며, 볼의 습자지를 촉촉이 적셔 오는 눈물 줄기를 조용히 훔쳐내고는 하였다. 피리의 음향에는 날개가 달려 있었는데, 어린 신경림은 그 날개에자신의 몸피 작은 몸을 얹어 마을 밖 먼 길을 떠나고는 하였다.
어찌 들으면 청승맞고 또 어찌 들으면 한스럽던 그 울음의 마디마디에는, 지금에 와서 생각건대다름 아닌 당숙의 신산스러웠던 삶의 이력과 역정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02 노은국민학교에입학하다
조국이 일제의 사슬에서 벗어나기 이 년 전인 1943년,신경림은 여덟 살의 나이로 노은면의 노은국민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때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본격적인 대륙침략의 계기를 열었던 일본이 중일전쟁과 마침내 태평양전쟁(1941년)을 일으키며 침략의 야욕을 확대시켜나가면서, 철저한 파쇼 군국주의체제로 한반도를 유린시켰던 시기였다. 말하자면 그 시기의 한반도는 민족 구성원 전체가 파쇼 군국주의체제의 희생물이 되어 광란 속에 휩싸여 들어갔던 말 그대로 광기의 시절이었다. 그 세월 속에서 많은지식인들은 절망과 탄식을 넘어 자의로 타의로 굴절되어 갔으며 또 변절하여 갔다.
파쇼 군국체제의 광기 번뜩이는 약탈과 수난이 그가 살고 있는 노은면이라 해서 비켜 갈 리 만무했다.그곳 또한 엄연히 군국체제 본국, 즉 내지의 식민지로서의 하나의 행정 구역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곳 노은면이야말로 군수공업 원료인 광물의 산지였던 까닭으로 다른 그 어느 곳보다도 더 많은 수탈대상 지역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어지러운 혼돈과 무질서의 세월, 암담한 조국의 현실이 어린 신경림에게는 뼈가시리게 인식되지는 않았다. 아직 세상물정을 제대로 이해하기엔 그의 나이가 턱없이 모자란 탓이었다.
어렸을 때 내게 가장 인상이 깊었던 일들은 대개 광산에 관계되는 것들이다. 삼삼오오 짝을지어 집 뒤 언덕길을 지나가던 밤 대거리들의 칸델라 불빛, 장날이면 으레 싸전 뒤 밤나무 아래서 벌어지던광부들의 싸움질, 콩을 팔러 집으로 찾아오던 광부의 아낙네들의 억센 사투리, 어머니를 따라가 들여다본 단칸 움막 속의 흐린 십 촉 전등, 금방앗간에서흘러와 냇물바닥에 깔리던 복대기흙. 행정상으로는 같은 마을이었으나, 광산은우리 집에서 2킬로쯤 산 속으로 더 들어가서 있었다.
나는 가끔 동무들과 어울려 광산엘 갔고, 버력 더미를 기어올라가 시커먼 금점굴을 들여다보기도했다. 그때 온몸에 감기던 공포와 전율을 나는 지금껏 잊지 못하고 있다. 갱구 가까이의 언덕에는 빨간 양철지붕을 한 이층집 광산사무실이 있었는데, 사무실뒤는 일인(日人) 기사들의 관사였고, 그 한 기사의 아내는 우리 학교의 교사였다. 키가 작달막하고 은테안경을 쓴 그 여교사는 매우 상냥했다.
여선생 앞에서 미리 주눅이 들어 주뼛대는 우리들에게 번번이 요깡이니 미루꾸니 하는 귀한 과자들을 나누어주었다. 나는 여선생에게 과자 얻어먹은 얘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이 일로 삼촌에게 매를 맞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 왜 이 상냥한 여선생과 일인 기사들을삼촌은 반드시 죽일 놈들이라는 말로 부르는지 어린 내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마음 속에서 광산이라는 것이 그토록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기실 삼촌으로 해서였다. 전쟁말기에 삼촌은 광산에서 광부로 일했는데, 그 얼마 뒤에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이어 광산은 폐쇄됐다. 해방이 되면서 광산은 전성기를 이루었다. 북으로부터 피난민, 만주 등지로부터의 귀환동포로 광산은 빈민의 소도시로팽창되었다. 다닥다닥 붙은 움막들이 몇백 채에 술집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진종일 청승스러운 유행가 가락이끊이지 않았다.
이르렀고 이때부터 우리 집은 본격적으로 광산과 맺어지기 시작했다. 삼촌은 자본주를 끌어들여덕대로서 분광(分鑛)의 경영에 참가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아버지마저 연상(鉛商)이되어 광산에 손을 대게 되었다. 광산과 우리 집과의 관계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 화약상, 금방앗간, 금분석 등으로 깊이 빠져 들어갔다. 명절이 오면 이십여 명의 광부들이 우리집에 모여 돼지를 잡고 순대를 삶으며 웅성대던 모습이 아직도 즐거운 추억으로남아 있다.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 중 '내 시의 뒷이야기'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학교에 다니는 것이 어린 신경림은 즐거웠다. 그곳에가면 새로 사귄 동무들이 있었고 수선화처럼 청초한 여선생님이 있었다. 신경림은 어깨에서 허리로 비껴맨책보 속 필통 안에서 덜컹대는 몽당연필에 발장단을 맞추며 등하교에 열중하였다. 까까머리 동무들과 함께해찰하면서 반공중으로 한 획 한 획을 흘림체로 흘리듯 나는 기러기떼에 사정없이 돌팔매질을 하기도 하고, 남의집 채마밭에 들어가 무서리도 일삼으며 지내기도 했던 어린 신경림은, 간혹 어느 날에는 그런 동무들로부터일부러 뒤쳐져 저 혼자만이 공상의 언덕에 올라 몸과 마음을 문이기도 하였다.
공상의 팔 할은 바람에 정처없이 날아다니는 검불처럼 목계 강가를 배회하는 거였다. 목계야말로어린 신경림의 마음 속에 깊게 자리잡은 이상향의 마을이었다. 간혹 당숙들과 삼촌들이 주고받는 흥미진진한이야기들을 어깨너머로 훔쳐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들의 말이 과장이 아니라면 그곳은 이 지금껏 가장 아름다운낙원임에 틀림없었다.
또한 그곳에 사는 사람들 역시도 가장 선하고 고운 사람들임에 의심이 있을 수 없었다. 언제든기회만 주어진다면 그곳엘 꼭 가고 말리라. 어린 신경림은 충치로 썩어 가는 어금니를 질끈 깨물고는 하였다. 죄 아닌 선(善)한 바람이깊어서였을까. 그의 간절했던 소망과 기대가 예상보다 훨씬 빨리 이루어졌다. 학교에서 그곳으로 소풍을 갔던 것이다. 하긴 그곳말고는 걸어서 소풍을갈 만한 곳도 달리 없었다.
어린 신경림은 자신의 소원이 뜻하지 않게 금세 이루어진 것이 무척 기뻤다. 생각 같아서는두 손을 번쩍 들어올려 만세라도 불러 대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숫기 없는 그로서는 속으로만 그기쁨을 맛볼 뿐이었다. 본래 잠이 많은 그였지만 소풍 전날은 설렘 탓으로 도통 달아나는 발 빠른 잠을잡을 수가 없었다. 훗날 그는 그곳에서의 인상기를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어린 한 시절을 남한강 가에서 보낸 나로서는 남한강의 삶과 정서를 한 편의 시로 쓰고 싶은 욕망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이다. 한데 나는 남한강 하면 먼저 목계라는 한 강마을이 떠오르고, 목계하면 남한강 전부의 모습이 떠오르니 이상한 일이다. 물론 목계는 남한강에서 더없이 중요한 나루로, 옛날 이곳에서는 해마다 정월에 강운과 강을 끼고 사는 사람들의 안녕을 비는 당제가 열렸으며, 그 무렵 사방 이백 리 안팎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줄다리기를 했다. 더중요한 것은 이 고장이 남한강에서 유일하게 강장이 서던 나루라는 점이다. 서울에서 뱃길을 타고 소금배나 장사배가 오면 으레 목계나루에서 짐을 부렸고, 이곳에서 소금이며 생선이며 하는 물건들은 달구지로옮겨져 새재와 박달재를 넘어 충청도·강원도·경상도 각 지방으로퍼졌으며, 소금배와 장사배는 달구지에 실려 온 내륙 산물들을 바꾸어 싣고 내려갔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강벌에 장이 섰으니 그것이 목계장이다. 이 장은 닷새에 한 번씩 서는 것이 아니라 소금배가 닿는 아무 때나 섰으며, 하루로 끝나지 않고 한 번 서면 닷새씩이레씩 갔으며, 장사꾼들은 장을 끌어 이문을 높이기 위해서 난장을 벌이고 씨름판을 벌였다. 물론 지나간 시대의 일로 지금은 모두 얘기로 만 남아있는 모습이다. 그러나내가 목계에 특별히 집착한 것은 이런 이유들 때문만은 아니다.‥(중략)‥목계로소풍을 갔을 때의 감동도 잊지 못한다. 강에 바짝 다가붙은 이층집들,즐비한 가게, 차와 사람들을 실어 나르던 너벅배, 강가의솔밭‥‥‥, 커서도 나는 종종 목계를 찾아갔었는데, 담배수납철의 떠들썩하던 풍경도 여간 인상적이 아니었다. 집집마다 젓갈 장단에 노래가 끊이지 않았고, 담배를 바치고 돈을 주머니에 넣은 농사꾼들은 호기 있게 술 주정을 했다. 내겐어쩐지 이것이 바로 한강의 삶의 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뽑은 나의 시와 이야기' 중에서
이상 그의 술회에서 보았듯 목계는 어린 신경림의 마음의 천에 아름답고 풍요로운 풍광으로, 나아가사람들의 애환이 씨줄과 날줄로써 섬세히 수놓아진 마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곳은 그가 장년이된 이후에 떠올렸을 때도 마음의 강물 속으로 까닭 모를 설렘이 물결치는 그런 곳임을 알게 되었다. 소풍을다녀온 이후 어린 신경림은 한동안 시도 때도 없이 불쑥 얼굴을 내밀곤 하는 목계의 모습에 시달려야 했다.
강둑을 따라 한여름날의 밤하늘에 핀 별꽃보다도 더 많이 지천으로 핀 풀꽃들의 가녀린 몸짓들이며, 태어나처음 구경한 잘 다듬어진 이층집들이며, 눈요깃감만으로는 너무 벅찼던 가게, 그 이름만으로도 설렘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너벅배, 아침 조례 때의전교 어린이들의 줄서기보다 더 나란히 줄지어 서 있던 소나무들의 행렬, 정선 쪽으로부터 뱃길을 타고내려오는 소금배와 장사배, 그들이 불러 대는 강의 하류처럼 낮고 축축한 가락 등등.
그는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와 비쩍 마른 그의 앞가슴을 헤쳐대는, 집요한 목계에서의 유혹의여러 모습들을 떨쳐 내려 크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댔지만, 이틀째 감지 않은 그의 머리에서 비듬만떨어졌을 뿐 그 모습들과의 싸움에서 번번이 두 손을 드는 것은 그의 의지였다. 그만큼 목계에서 받은인상은 강렬했다. 점차 어린 신경림은 부지불식간에 공책 한구석 여백을 이용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그의 뇌리에 각인된 목계의 풍광을 뜯어 내 공책의 여백 속으로 옮겨 놓는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훗날 우리 문학사에 그 이름자를 굵은 획으로 남길 시인의 시작(詩作)은 이렇게 시작이 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날처럼 몽당연필을 크레용삼아 목계에서의 단상을 치고 있는데 누군가 그의 어깨를 툭 쳐오는 것이었다. 화들짝 놀라 뒤돌아보니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어린 신경림의 손끝에 눌려 있던 공책을 빼어 들었다. 너무도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서 당혹한 신경림이 어쩔 줄 몰라마음을 죄며 그저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데,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선생님은 고함이나 호령 대신 만면에 샘물 같은 미소를 띠며, 은쟁반 같은 손으로 밤송이처럼까슬까슬한 그의 머리를 몇 번이고 쓰다듬는 것이 아닌가.
"얘, 이것 정말 네가 쓴 거니?"
"네."
어린 신경림은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픈 심정이었다.
"야, 너 참 대단한 아이로구나! 제법 잘 쓴 시인데 그래."
선생님은 한 손으로는 계속 어린 신경림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시를받쳐들고 몇 번이고 소리내어 다시 고쳐 읽고 있었다. 아이들의 부러움과 시샘이 섞인 시선이 신경림의얼굴에 따갑게 꽂혀 왔다. 까닭 없이 가슴이 울렁거렸고 눈물 한 움큼이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목울대를치밀어 왔다. 그는 작은 입을 더욱 앙다물고, 찔금 눈을감아 버렸다. 이 일이 있고 난 이후 소리소문 없이 어린 신경림은 교내의 유일한 시인이 되었다.
간혹 짓궂은 아이들이 '이봐, 신 시인 어쩌고' 하면서 그를 놀려대기도 하였지만 그는 아이들의 악의 없는 그런 놀림이 그리 귀에 거슬리지만은 않았다. 막연히 어른이 되면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기도 하였다. 그럴때마다 그는 더욱 악착같이 책을 잡았다. 시인이 되려면 상급학교에 진학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시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높은 공부를 해야만 하는 법은 없었지만 그때는 꼭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어린 신경림은 재능을 인정받은 시 때문에 좌절감에 빠지게 되었다.
도에서 시행하는 어린이 글짓기 대회에 그도 다른 어린이들과 함께 작품을 출품했는데, 그만그를 포함해 그를 아끼던 동무들과 선생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불운하게도 장원을 놓쳐 버린 것이었다.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누구도 그의 장원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그가 그간에 보여 준 시적 재능은 자타가 공인할 만큼 출중한 것이었다. 도교육위원회에서 심사 결과를통보해 오기를 장원이 아무개라는 이름자는 밝히지 않고 장원이 노은국민학교 차지라고만 알려와 그 장원이 다름 아닌 신경림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막상 시상식날 도에서 보내온 봉투를 열어 보니 장원은 그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산지기집 아들이었다. 노은국민학교에서 가장 시 잘 쓰는 어린이 시인으로 통했던 신경림의 장원 낙방으로 동무들과 선생님이 받은 놀라움은컸다.
이때 신경림이 받은 충격은 실로 적지 않았다. 모닥불이 끼얹혀진 듯 얼굴이 달아올랐고, 만취한 어른처럼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렇잖아도 길게만 느껴졌던 아침조례 시간은 그날따라 더욱 길고 아득했고, 그만큼 고통의 길이도 길어졌다. 다시는 시를 쓰지 않으리라 그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러나 그의이러한 단호한 결심은 고등학교에 들어가 장맛비에 흙담이 무너지듯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
국민학교 시절 신경림과 주로 어울렸던 동무들은 하나같이 별볼일 없는 집의 아들들이었다. 아마도그것은 그가 생래적으로 잘나고 똑똑해 뵈는, 또는 그런 것을 장기로 삼는 친구들과는 애당초 뜻이 맞지않았던 성미 탓이었을 것이다. 그와 비교적 가까이 지냈던 친구들은 모두가 사는 게 고만고만한 집의 자식들로서, 이를테면 장터에서 아버지가 잡화점을 하는 강덕식과, 술집 아들 이상옥, 여인숙집 아들 허태순, 국수틀집 아들 김영수 등등이었다. 이들과의 교우는 장성하기까지 굴곡없이 이어지는데 이들 가운데 이상옥은 죽었고,허태순과는 지금까지도 허물없이 만나 어제와 오늘을 넘나들며 술과 이야기를 즐기는 편이다.
신경림은 특히 이상옥과 허태순하고는 혈육처럼 가깝게 어울렸다. 굳이 이들과 더 친했던이유를 들라 하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정 때문이었다. 당시 신경림이 자란 곳은 농사에만 전적으로 생계를의존하는 농촌이 아니었다. 가까운 곳에 금광이 있어 그곳에 생활의 일부를 투자할 수 있었던 그런 농촌이었다. 장이 서면 인근의 농민들로 붐볐지만 주로 큰 손님들은 금광 사람들이었다. 농사에비해 벌이가 좋았던 그들은 그만큼 씀씀이도 헤펐다.
그런데 본래 그가 살던 동네는 장터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는 그의 마을에서좀 떨어진 장터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유달리 호기심이 강했던 그는 장터가 자꾸만 그리워졌다. 그는 장날이면 어떻게든 핑계를 만들어 장터를 쏘다녔다. 쏘다니다지치면 그는 거기에서 주막을 하는 친구 이상옥의 집에 가서 쉬곤 했다. 주막은 언제나 대만원으로 붐볐다. 그는 친구 이상옥과 함께 주막의 마루에 앉아 술꾼들이 순서 없이 털어놓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연애 이야기, 죽음에 관한 이야기, 빨치산 이야기 등속을 들을 수 있었다. 모두가 처음 듣는 흥미진진한 것들이었다.
어린 신경림이 친구 이상옥과 친할 수 있었던 이유로는 이것말고도 또 하나가 더 있었다. 어릴적 신경림은 겁이 많았다. 그런 그가 하루는 이상옥과 사소한 말다툼 끝에 주먹질이 오가게 되었는데, 어린이 깡패로 소문난 이상옥에게 힘이 달린 신경림이 나중에는 일방적으로 맞게 되었다. 분한 마음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 그는 다음 날 이상옥을 불러 내 다시 싸움을 걸었다. 그러나 결과는 어제와 마찬가지였다. 그 다음 날 그는 또다시 이상옥을찾아갔다. 그렇게 엿새째를 찾아가니 그만 이상옥은 질려서 걸음아 나 살려라 달아나기에 바빴다. 수수밭으로 도망가다 넘어진 이상옥은 신경림이 씩씩거리며 다가오자 그 앞에 무릎을 끓었다. 그리고는 두 손을 가슴께로 올려 빌고 빌었다. 어린 신경림의 쇠가죽처럼질긴 투혼이 그만 이상옥을 무릎 꿇게 만든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이상옥은 신경림의 말이라면 죽는 시늉을 하였고, 저 스스로 누구든신경림에게 손찌검을 못 하도록 보호자를 자처하였다. 이렇게 해서 겁 많고 순박했던 신경림은 그들 또래에서가장 힘이 세었던 깡패를 자신의 수족으로 부릴 수 있게 되었다. 또 절친했던 친구로 허태순이 있었는데그 아이는 그의 어머니가 그를 낳은 후 개가를 해서인지 늘 우울과 우수를 얼굴에 달고 다녔다. 또한같은 이유에서였겠지만 다른 또래들에 비해 제법 숙성한 티를 내고 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는 허태순이 자신의 집 모퉁이에서 남몰래 훌쩍거리고 있는 것을 신경림이 보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본 신경림은 왠지 가슴 한구석에 슬픔의 물방울이 괴어오름을 느꼈다.그날 이후로 그는 허태순에게만은 싫은 말 한마디 귀찮은 표정 하나 짓지 않았다. 그렇게해서 둘은 누구보다 서로를 깊이 이해하는 사이로 발전해 갔다. 어릴 적 신경림을 논하는 자리에서 빠뜨릴수 없는 것이 그와 방물장수가 맺은 인연이다.
장사 장사 황아장사
걸머진 게 무엇인가
아기네들 굴레다리
각시네들 낭자댕기
늙으신네 쌈지끈
선비네들 부채끈
도령네들 머리댕기
이 노래는 내 어렸을 적 동네에 황아장수가 들어오면 뒤따라 부르던 노래다. 이 무렵에는일제 당국의 강제와 극심한 물자난으로 장도 폐지되고, 장터에 단 하나 남아 있는 잡화 가게는 배급표가있어야만 드나들게 되어 있었다. 이런 판국인데도 용케 우리 동네에는 종종 찾아오는 황아장수가 있었다. 엄장이 큰 늙은이였는데, 그 엄장에 비해 황아짐은 장난감처럼 작았다. 그 안의 물건도 실로 보잘것없었다. 나무를 깎아 만든 목그릇이며목숟갈, 청올치로 꼰 노끈, 나무열매나 풀잎을 재료로 한가내 제조의 환약, 헌 한지를 누덕누덕 발라 만든 부채, 이런것들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도대체 장사라는 사람을 볼 수 없는 세상이니 그럴 수밖에없기도 했다. 동네에 들어서면 그는 으레 늙은 느티나무 아래 짐을 풀었다. 그리고 입담과 넉살로 아낙네들과 아이들을 불러모았다. 그가 물건을팔아 가지고 가는 것은 돈이 아니라 보리쌀이나 좁쌀이나 콩이었다.
그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해서야 짐을 챙겨 돌아가는 것이었는데, 우리들 아이들은이때 으레 곳집 뒤까지 그를 따라갔다. 거기서 그는 뒤돌아서서 우리를 향해 소리치고는 했다. "야, 이놈들아! 그만들가거라. 어둡는다." 그리고는 그 큰 키를 구부정하게하고서, 더 이상 우리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걸어갔다. 곳집서부터봉곳한 봉우리가 둘로 갈라진 고개까지는 한 오 리는 되었다. 해 는 바로 그 고개로 넘어가고 그 위하늘에는 발갛게 놀이 서려 있었다. 고개까지는 곧은 한길이었다.
황아장수의 새카만 뒷모습은 좀체 사라지지 않은 채 빨간 놀을 배경으로 한길에 박혀 있었다. 까마귀가몇 마리 둔중한 소리로 울면서 황아장수를 따라갈 뿐이었다.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중 '내 시의 뒷이야기'
어린 신경림은 방물장수가 좋아 그를 따라 삼사십 리 이웃장까지 따라다녔다. 그 일 때문에부모님께 꽤나 꾸지람을 듣곤 했지만 좀처럼 그의 바람기를 잠재울 수가 없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그의 동네로 들어오는 여자 방물장수들이 그의 집 앞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노독을 식히고 있으면 그들을그의 집으로 안내해 왔다. 주로 문경이나 영주 쪽에서 참빗, 비누, 대나무 소쿠리 따위를 짊어지고 온 사람들이었다. 할머니나 어머니도마음이 너그러우신 편이라 한번 집에 든 사람을 내치진 않았다.
그들은 밥값이나 잠자리값 대신에 자기들이 가지고 다니는 물건을 주기도 하고 세상에 떠도는 재미있는 얘기도 들려주었으며, 흥이 나면 노래도 부르곤 했다. 어린 신경림은 벌써 이렇게 해서각 지방의 많은 민요를 접할 수가 있었고, 그의 핏속을 흐르는 떠돌이 기질의 싹을 틔워 나갈 수 있었다.
03 충주사범학교 시절
장터에 나가 장꾼들이 들려주는 세상의 온갖 흥미진진하고도 진기한 얘기에 심취하기도 하고, 동무들과어울려 광산의 버력더미에 올라가 시커먼 금점굴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목계로 나가 정선 쪽에서 뗏목을타고 오는 장사꾼들의 민요 가락을 듣는 동안, 어느새 신경림의 장딴지와 팔뚝은
가을날의 알밴 칡뿌리처럼 굵어져 갔고, 목소리도 변해 가는 등 신체적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노은국민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그해 봄, 충주사범 병설 중학교에 시험을 쳐입학생 전체에서 7등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당시의사범학교는 가난한 집 수재들이 꼭 들어가야만 하는 그런 학교였다. 가난한 집 자식들로서는 지긋지긋한생활의 궁핍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곳이 바로 사범학교였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사회적으로 그 구조가 짜여져 있지만, 당시만 해도 교육을통한 계층 상승은 가난한 집 자식들의 공통된 염원이자 꿈이었고, 그것은 또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가능한 일이기도 하였다. 일반 대학보다는 경제적 부담이 덜하였을 뿐 아니라 졸업과 동시에 교사로서의취업이 보장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가난한 집의 수재들이 너도나도 모여든 곳이 다름 아닌 바로당시의 사범학교였다.
그러나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간 충주사범학교를 신경림은 끝내 졸업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것은신경림을 포함해 전교에서 두 명만이 풍금을 칠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주지하다시피 당시 시범학교를 졸업하면졸업과 동시에 국민학교로 발령을 받게 되었는데, 그때 풍금을 칠 줄 모른다면 치명적인 일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악기 다루는 일에 어두운 신경림은, 정말 너무도어처구니없는 이유로 해서 어렵게 다니던 사범학교를 끝내 졸업하지 못하고 말았다.
중학교 시절에 그는 해방과 6·25를 맞았다. 어수선한해방 공간에서의 좌우익의 싸움과 정치적 소용돌이는 그의 마을에도 어김없이 밀려와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해방이되면서 광산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지만 이제 그 광산을 차지한 이들은 그곳 본토박이들이 아니었다. 북에서밀려온 서북 청년들이 본토박이들을 몰아 내고 설쳐대기 시작하였다. 또한 있어서는 안 될 동족상잔의 비극이할퀴고 간 자취는 너무도 비극적인 것들뿐이었다.
해방과 함께 반짝 호황을 누리는가 싶었던 광산도 6·25를 맞아 폐쇄되었고, 그 와중에 광산에서 광부로 일하던 그의 삼촌이 보도연맹사건에 연루되어 젊은 나이로 죽게 되었다.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큰 슬픔이었지만 남은 목숨을 살리기 위해 부득불 그의 식구들은 피난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시 보도연맹사건에 연루된 사람과 가족들은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환영을 못 받는, 말하자면 민족의 비극이 만든 조국의 미아였고 사생아였던 것이다. 그는당시의 끔찍했던 상황을 훗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9·28 수복 후 우리는 너무 성급하게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미처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패잔병을 피해 또 한 번 몸을 숨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버지와 나는 광 산 가까운 산 속에 숨어며칠을 지냈다. 인민군 패잔병이 거의 도망쳤을 것으로 판단되는 어느 날, 한 대의 지프차가 광산 에 들이닥쳤다. 태극기를 꽃은 헌병차였다. 여기저기서 숨어 있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실로 3개월여 만에 보는 태극기라고 자못 감개무량해 했다.
그러나 지프차 위의 헌병 소위는 주민들의 이런 환영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금을 찾기위해 허겁지겁 이곳엘 달려온 것이었다. 몇 갱구를 뒤진 헌병 소위는 굴 속에 숨어 있던 광부 셋을 끌고나왔다. 금을 찾아 내지 못한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빨갱이들이 금을 가지고 도망치려 했다."고 여럿 앞에서 이들을 심문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물론 부인했다. 도망치는 인민군 패 잔병의 행패를 피해 굴속에 숨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내게도 낮이 익은 삼 촌의 친구들이었다. 헌병 소위는 더욱 약이 오른 듯했다. 마침내 참다못해 권총을 꺼내셋 중의 하나를 쏘았다. 또 하나를 쏘았다.
뜻하지 않은 사태에 사람들은 모두 새파랗게 질렸다. 두 사람을 죽이고 나서 그는 사람들에게말했다. 이들이 빨갱이가 아니라고 보증할 수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서라.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앞을 다투어도망치기 시작했다. 아직 총을 맞지 않은 나머지 한 광부도 사람들에 섞여 도망치고 말았는데, 이때 이미 특별히 이 사람을 죽여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지, 헌병도도망치는 그를 내버려두었다.
그 뒤 오랫동안 내 꿈자리는 언제나 뒤숭숭했다. 낙반으로 깔려 죽은 시체, 금 방앗 간을 뒤덮는 도깨비들, 굴속의 귀신들, 이런 것들이 밤마다 나를 괴롭혔다. 나는 광산이 무서워졌고, 그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게 되었다. 이 광산이 아주 폐광이 되고만 것은 바로 그 얼마 뒤였다. 금의 생산량이 생산비를 따라잡지 못하게 되자 회사에서 스스로 문을 닫아버리고 말았다. 광산 마을은 일시에 폐허가 되었다. 그리하여내가 왜 나이가 들어 이곳을 찾아갔을 때는 제대로 서 있는 움막이라고는 불과 다섯 채를 넘지 못했다.
그때 한 움막 속에서 만난 사람은 내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는 우리 마을의 릴레이선수요 마라톤 선수로서 운동대회만 닥치면 온 마을의 기대를 한 몸에 모으던 젊은이였었는데, 낙반사고로전신불수가 되어 누워 있는 터였다. 가령 내게 글 쓸 기회가 주어지면 제일 먼저 광산에 관계되는 것을쓰리라고 생각 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그것이 마치 내게는 의무처럼 느껴졌다.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중 '내 시의 뒷이야기'
결국 그는 훗날에 이때의 의무를 이행하게 되었다. 이름하여 「폐광(廢鑛)」이라는 시가 그것이다. 광기라고밖에더 달리 표현할 길 없었던 그 전란의 세월 속에서도 소년 신경림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머니와 누이동생 외에 이성과 교제를 하게되었다. 전쟁의 포연 속에서도 꽃은 피었다 지는 것. 숫기 없는 그라고 해서사춘기 시절의 로맨스 한 토막 없으란 법은 없었다. 비록 옷깃을 스치는 짧은 인연이긴 했어도 그의 기억속에 오래도록 선명히 남아 있는 그 시절의 로맨스는 다음과 같이 시작이 되고 있었다.
6·25 동란이 발발하던 그 해 겨울을 나는 충북 영동에서 보냈다. 시내와의 사이를 철길이 가로막고 있는 산 아래 마을이었다. 우리를포함한 같은 고향의 세 세대가 각각 방 한 칸씩에 세 들어 있는 집은 대들보가 굵고 기와가 푸른 고가(古家)였다. 넓은 앞뜰에는 사철나무가 흰눈을 이고 바람에 떨며 서 있었고, 뒤뜰에는 이름 모를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를 뻗고 있었다.
이 집에는 다섯 명의 처녀가 있었다. 중학교 졸업반에서 내 나이 또래까지의 서로 비슷비슷한나이의 처녀들이었다. 이 집 딸이 둘, 피난 온 사촌이 하나, 나머지 둘 은 고종이었다. 이 다섯 명의 이른바 말만큼씩이나 한처녀들이 늙은 어머니 한 분 만을 모시고 살고 있었다. 늙은 어머니의 설명에 따르면, 일본서 어느 명문 대학을 나온 이 집 주인은 그해 여름 감옥서 죽고, 하나뿐인아들은 수복 후 군에 입대했다는 것이다. 이럴진대, 이 집에서는청승맞고 구성진 냄새가 나야 옳았다. 한숨과 눈물이 온통 이 집을 에워싸고 있어야 제격이었다.
한데 도시 그러하지를 못했다. 눈을 뜨면 먼저 처녀들의 시끌시끌하고 밝은 웃음소리와 노랫소리가들렸다. 우당탕 문을 밀치고 마루로 뛰어나와 수선을 떨기도 했다. 혹은다섯 처녀가 한데 어울려 줄넘기에 신명이 나 있기도 했다. 이러한 처녀들이 어린 눈에도 철딱서니없는계집애들로 보인 것은 당연했다. 당시 나는 중학교 3학년에지나지 않았지만, 그때까지 내가 겪은 일들이 나로 하여금 전쟁을 혐오하도록 만든데다가, 몇 권 읽은 반전적인 책들이 나를 마치 어른이 다 된 것 같은 착각을 갖게 했기 때문이다. 나는, 저런 철딱서니 없는 계집애들 때문에 전쟁은 점점 진흙탕 속으로빠져 들어가고, 많은 젊은이들이 어처구니없이 죽어 가는 것이라고 마음 속으로 그녀들을 타매했다.
내가 같은 고향에서 함께 피난 온 친구와 거리에서 지까다비를 팔기 시작한 것은 1 월중순경이었다. 많은 피난민들, 특히 다 떨어진 신을 새끼줄로친친 동이고 절뚝거리는 국민방위군을 상대로 한몫 보자는 약삭빠른 상혼은 그 친구의 발상이었다. 이것이제대로 히트를 했는지의 여부는 지금 기억에 없으나, 이 지까다비 장사를 계기로 나는 비로소 다섯 처녀와말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중학교 졸업반의 두 처녀(당시는중학교가 6년제였다)가 생활비 조달을 위해 양키 옷 장사를하기로 한 것도 우리의 장사에서 암시를 얻은 것일뿐더러, 그녀들은 물건을 떼러 대전까지 가기 위해 우리에게서지까다비를 사 신었다. 우리는 이 처녀들에게 단 한 푼의 이 문도 없는 본전으로 팔았다. 그러고 보니 그때까지 나와 그녀들 사이에 교통이 없었던 것은 내가 그녀들을 경멸해서가 아니라 그녀들이 나를꼬마라고 깔보았기 때문인 듯하다.
그 뒤 그녀들은 내가 읽고 있는 책들을 보고는 경탄을 금하지 못했는데, 시장바닥에서 구한암파문고(岩波文庫)의 책들을 나는 자랑스럽게 주머니에 꽂고다녔고, 언제나 이 책들이 우리들 대화의 실마리가 되었다. 책을중심으로 한 대화는 주로 졸업반의 이 집 처녀와 이루어졌다. 그 처녀는 특히 그림에 소양과 취미를 가지고있었고, 아버지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명랑하고 활달했다.
그러나 실상 나의 관심은 이 집 막내딸인 3학년짜리에게 쏠려 있었다. 나와 동갑인데다가 키가 크고 다리가 굵은 매우 건강한 소녀로서, 문학이니예술이니 하는 따위와는 아예 거리가 먼 타입이었으나 긴 머리칼이며 밝은 웃음이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녀와나는 한마디도 서로 말을 건네지 않았던 것 같다. 그 까닭이 어디에 있었는 지는 모르겠으나, 나와 그 다섯 처녀들의 사이는 그 이상 가까워지지 못한 채, 봄이오기 전에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중 '내 시의 뒷이야기'
v 십 년 뒤 신경림은 가을의 어느 일요일, 새재를넘어 상주에 가는 도중 우연히 그 여인을 만났다. 그러나 그는 끝내 아는 체를 하지 않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가 그 여인과 다시 재회한 것은 그 몇 해 뒤 상경해서 홍은동 막바지에 살게 되었을 때였다. 그러나 그 여인은 고생에 너무 찌들어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그여인이 그에게 들려 준 그간에 살아온 신세타령을 다 듣고 난 신경림은 눈시울을 붉혔다. 이렇게 해서씌어진 시가 「서대문구 홍은동 산1번지」였다. 이 작품은발표하면서 시 제목이 「산1번지」로 바뀌었다.
충주사범학교 시절 그가 맺은 인연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당시 27세의 젊고 패기만만한 교사 정춘용 선생과의 귀한 만남이었다. 그선생님이 신경림에게 끼친 영향은 실로 컸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인데다 일찍이 누구보다도 감각이탁월했던 신경림에게 젊은 선생님의 해박한 지식과 세상에 대한 안목은 여러 모로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신경림의담임이었고, 문예반 지도 교사이기도 했던 그분은 신경림한테서 남다른 시적 재능을 발견하고는 그에 대한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벗어나 같은 문학 동호인으로만나 인생과 시에 대해 갑론을박하며 토론을 벌인 것도 신경림만이 누릴 수 있었던 특권이었다. 그분은신경림에게 많은 좋은 서적을 소개해 주기도 하고, 손수 자신의 서가에 꽂힌 책을 꺼내 빌려 주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그분은 신경림에게 충주고등학교에 입학할 것을 권유하였다. 재주가 피기도전에 시들 것을 염려한 충언이었다. 그러나 신경림은 왠지 내키지 않았다. 풍금을 칠 수 없어 더 이상 사범학교도 다니기 싫었지만, 충주고등학교에들어가 높은 공부를 계속하기도 싫었다. 하지만 정춘용 선생님의 설득은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았다. 결국 강요에 가까운 선생님의 설득과 권유에 져 신경림은 충주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지만, 그것 때문에 그 선생님은 신경림의 부친으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만 했다.정춘용 선생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충주고등학교에까지 계속 이어지게 되는데, 그것은그분께서 나중에 충주고등학교에 전근을 오셨기 때문이었다.
04 충주고등학교 시절, 불타는시심(詩心)
충주고등학교에 입학한 신경림은 한동안 그곳 교내 건달패들에게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건달패들은비록 체구는 작으나(그는 반에서 7번 이상을 넘은 적이 없었다고한다) 꼬장꼬장한 신경림이 여간 눈에 거슬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걸핏하면 시비를 걸어오고는 하였다. 그들의 갖은 엄포에도 신경림이 꿈쩍하지 않자 급기야 그들은 공갈협박을 일삼아 왔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주눅들 신경림이 아니었다. 비록가냘픈 몸매이긴 해도 날카로운 눈매가 예사롭지 않은데다 죽기살기의 오기 또한 만만치 않았던 그였다. 수적으로는훨씬 유리한 그들이었지만 결국엔 그들은 신경림의 근성을 당해 내지 못하고 말았다.
학교생활이 시답지 않아서였을까? 신경림은 영 학교에 정을 붙일 수가 없었다. 자연 그는 학교 공부에 게을러졌다. 대신에 그는 목을 한쪽으로 꼬고, 호주머니 깊숙이 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슬슬 남한강 언저리를, 낮바람밤바람을 동무 삼아 배회하는 문제아가 되었다. 그러나 이때 신경림의 문제성은 여느 문제아들의 문제성과는질을 달리하는 방황이 들어 있었다. 문제아 신경림의 방황은 훗날 우리 문학사를 살찌울 밑거름으로서의실존적 역사적 고민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바야흐로 시에 있어서의 신경림의 시대는 이렇게 발원이 되고있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내 고장에 흩어져 있는 많은 얘기와 노래를 들으면서 자랐다. 시를 쓰게되면서 이 얘기와 노래를 시로 만들어 보자는 것이 내 꿈이었다. 얘기와 노래를 수용하자니 장시라는 형식은부득이한 것이었다. 이 시를 구상하면서 나는 서사시라는 서구적 개념의 문학 형식을 무시하기로 했다. 내가 들은 것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이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다.
이 과정에서 나는 내게 가장 많은 얘기와 노래를 들려 주었고 또 가장 감동적이었던 창돌애비라는 반박수의 방법을 크게 참작했다. 그는 얘기 속에 노래를 섞기도 하고 노래 속에 얘기를 섞기도 하면서 줄거리를 이끌어 가는 뛰어난 얘기꾼이요, 노래꾼이었는데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대목대목 청중을 얘기꾼과 노래꾼으로 동원하는 방법이었다.
-장시집「남한강」의 '책 앞에'에서
소년 신경림이 남한강 자락을 오가면서 바꾼 신발의 문수가 모두 몇 번인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하지만그는 결코 짧지 않은 세월과 횟수를 거듭하며 어제오늘 그곳에 붙박고 살아갔던 토착민들의 유장한 삶과 애환과 깊이 모를 비애·분노·좌절·절망 등속을, 또한 희망 ·기다림·그리움등속을 자신의 가슴을 천으로 삼아 아프게 바느질해 가고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훗날에 그는 그만의 특이하면서도 구성진 가락 속에 이것들을 실어 내는데 성공한다. 그의초기 시에서는 남한강 물줄기로 솟구치는 이 땅 천민들의 분노와 절규, 또는 강 밑바닥 깊숙이 자리한그들의 한과 비애 등이 3음보 내지 4음보의 가락 속에 많은부분 무르녹아 있었다. 그것은 읽는 이로 하여금 한없이 감동의 바다에 빠져들게 했었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장년이 된 연후의 그의 노력과 함께 소년 시절 그가 치러냈던 내용 있는 방황 또한크게 한몫을 거들었던 것이다.
각설하고, 학교생활보다는 남한강에 더 정을 붙이던 신경림은 어느 날 기어이 일을 저지르고야만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국어 시험지를 백지로 내고 만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국어 선생님(평론가 유종호 씨의 부친)께서는 신경림을 문책하지 않았다. 대신 시 다섯 편을 써 오면 그가저지른 잘못을 면책해 줌과 동시에 그것으로 점수를 대신해 주겠다는 제의를 하게 되었다. 국어 선생님은그렇게라도 해서 신경림의 시적 재능을 살려 주고 싶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교과 과정에서는 상상조차 하기힘든 사제간의 낭만적인 교감이었다. 그런 국어 선생님의 후덕한 배려 덕택으로 신경림은 자신의 가슴 산맥에광활하게 내장된 시심의 지하자원을 캐 나갈 수 있었다. 그 선생님에 그 제자였던 것이다. 뒷날 신경림은 그때의 선생님들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나에게 문학 쪽으로 영향을 주셨던 선생님 두 분이 계셨어요. 한 분은 유종호씨 부 친이신유촌 선생님(작고)이셨고,또 한 분은 정춘용 선생님(현재 변호사)이라고계 셨어요. 이분들은 나하고 이야기해 보시고는 나를 재미있다고 생각하셨는지 일단 학교생활이 끝나면 사제지간이라는관계를 벗어나서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고‥ ‥‥‥그래서 그분들한테 많은 것을 배웠죠. 그분들이 권하는 책들을 많이 읽었어 요. 지금도 정초에 그분(정춘용 선생님)에게 세배를 가는데‥‥‥‥해마다그 집에 세배 오는 사람들이 세 명 있습니다. 유종호 씨하고 나하고 옛날 우리 친구 중에 깡패가 하나있었는데 그 친구하고‥‥‥‥그 두 분들이 특이하신 분들이라 학교에서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엄격하게하셨지만, 학교 시간이 지나면 똑 같은 글 친구로 생각하셨기 때문에 서로 이야기를 허물없이 주고받곤하였죠.
그런데 그 양반들이 학교생활 내에서는 얼마나 엄격했는지 몰라요.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어느 날 학교에서 장거리 달리기를 하는데, 유종호하고 나하고 한 8킬로미터를 뛰어야 하는데 1킬로미터쯤 뛰다가 돌아와 버렸어요. 반환점을 돌면 팔에 도장이 찍히니까 가짜로 도장을 찍었죠. 그리고중간 등수로 들어 와야 하는데 15, 6등으로 들어와 버렸어요. 그랬더니독일어 담당이신 정춘용 선생님께서 "야, 너희들이그렇게 일찍 들어올 놈들이 아닌데 어디 한번 자세히 보자."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에이, 그거좀 봐 주면 어떻습니까?"했지요. 그랬다가 실컷매를 맞고 다음 날은 운동장을 50바퀴 돌고, 반성문 쓰고, 교실에서 무릎 꿇고 네다 섯 시간 앉아 있었어요. 정춘용 선생님하고는지금도 술을 같이 마시고 친구처럼 지내지요. 그 양반은 나 때문에 인권변호사가 되어 돈도 못 벌고 한 15년 고생을 죽도록 하셨어요.
제자 잘못 둬서 고생한 거죠. 우리 친구들 감옥에 가면 그분이 다 변호하곤 하셨으니까요.
시 다섯 편을 제출한 신경림은 어느 날 일 년 선배의 호출을 받고 몹시 당황하였다. 교내건달들에게 매번 당해 왔던 예전의 불쾌했던 기억들이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를 앙다물고 날카로운눈초리로 노려보는데, 그 일년 선배는 그런 신경림의 심경을 대충 이해하겠다는 투와 표정으로, 하나 조금은 당혹한 듯 "야, 임마. 왜 그래? 시를얘기하자는 건데, 문학 얘기 말야."하고 얼러대고는아직 의심을 다 털어 내지 못해 눈을 치켜 뜬 그를 데리고 나갔다. 그 일 년 선배는 다름 아닌 시다섯 편을 써 오게 했던 국어 선생님의 아들 유종호였다. 이들의 운명적(?)인 만남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훗날 각기 다른 장르에서우리 현대문학사에 우뚝 선 봉우리로 자신들의 존재를 떨친 이들의 만남치고는 좀 싱겁고 객쩍은 면이 없지는 않다.
아무튼 그들이 그날로 해서 맺게 된 인연과 우정은 냇물에서 강물로 열려 나갔고, 한번도우정의 새끼줄 꼬기에 게으른 적이 없었던 탓에, 오늘에 이르러서는 혈육에 가까운 우의를 나누는 사이로관계가 발전되어 갔다. 이 둘의 인연은 앞서 밝힌 것처럼 고교 졸업 이후에는 서울에서의 대학 생활로이어지게 되었다. 유종호는 서울대학교 문리대에, 신경림은동국대학교 영문과에 각각 입학하게 되는데, 이 둘은 한집 한방에서 하숙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신경림은 고교 시절 내내 학과 공부보다는 문학에의 열정에 더 열심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에는 아예 입학시험 공부 대신 일어판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열 권을 독파해 내었고, 그밖에 투르게네프의 소설들과 백석, 이용악, 임화, 오장환, 정지용의시집 등을 읽느라 꼬박 밤을 새우곤 하였다. 그는 또 대한교육연합회 주최 중· 고등학교 문학콩쿨 대회에 시와 산문을 출품하여 산문 부문에서 당선의 영예를 안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시절 교지에 평론 「이형기론」을 발표하여 문예반(그는문예반 활동을 하지 않았다) 학생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그는 고교 시절부터 담배를 하게 되었는데(술은 이미 중학교 시절에 배웠다), 나중에는 그것이 대마초인지도 모르고 그것까지 피워 댔다. 그러다가그의 나이 27세 때 고향에 있는 술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면서 현실을 비판했다 하여 감옥에 들어갔을 당시, 담배가 몹시도 피우고 싶어 쩔쩔매다가 교도관한테 "담배하나 못 참는 놈이 뭐 잘났다고 설쳐 대냐." 하는 핀잔을 받은 이후로 담배를 끊게 되어 지금껏피우지 않고 있다.
술버릇 또한 그 사건 이후로 고쳐져 아무리 많은 양의 술을 마셔도 주법을 어기는 경우가 없다. 고교시절 그와 절친했던 친구들로는 앞서 밝힌 유종호 씨 외에 장성익 씨(현재 중학교 교사), 이근호 씨(전 외교관), 이재화씨(현재 대전 지법원장) 등인데 이들과는 지금까지도 가깝게지내고 있다.
05 서울에서의 궁핍한 대학 생활 그리고 하향
1955년 서울은 전후의 폐허 속에서 실존주의와 허무적 낭만주의가 유행의 큰 물결을 이루고있었다. 해방 후 남한에서 단독 정부의 구축을 이룩한 이승만 정권은 전쟁 이후 반공주의를 빌미로 그의독재체제를 더욱 강화시켜 나갔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수립을 명분으로 각종 정치적 테러를 자행하고, 국민 주권을 탄압하던 이승만 독재 정권은 이미 스스로 존립 명분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기를 맞아 내일에의 전망이 불투명했던 지식인들은 깊은 정치적 허무감과 실존에의 끝없는 물음속으로 한없이 빠져들고 있었다.
이 시기에 있어 청년 신경림 또한 여타의 지식인들과 크게 다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곧 지식인들의 잠처럼 깊었던 그 허무감의 늪에서 발을 빼내 보다 바람직한 내일에의 세계를 꿈꾸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단련시켜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생각처럼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행보를 방해하는크고 작은 난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해(1955년)에 청년이 된 신경림은 고향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서 동국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서울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일년 동안 그는 그의 일 년 선배 유종호와 함께 하숙을 하며 낯선 서울 지리와 문리를 익혀 나갔다. 우선무엇보다 체계적인 학습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가 들어간 곳이 '독서회' 모임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그 동안 말로만 듣던 이론서와 창작물들을읽었다. 예컨대 동대문 고서점을 뒤져, 당시만 해도 책명의거론조차 무시무시했던「공산당 선언」등의 유물사관 철학서들을 원서로 구입하여 다투듯 읽어 내려갔던 것이다. 학문에대한 갈증은 읽으면 읽을수록 더해 갔다.
그러던 어느 날에는 「공산당 선언」을 외었다는 것이 발각되어 경찰서로 연행돼 가기도 하였다. 그시절 신경림이 외경심을 갖고 관심 있게 지켜보았던 정치인은 유일하게 단 한 분, 죽산(竹山) 조봉암 선생이었다. 그분의정치적 신념에 동조를 보낸 신경림은 그분의 한마디 한마디에 눈과 귀를 열어 주목하였다.
그만큼 그분은 민중의 편에 서서 정치적 신념과 행동을 일치시키려 노력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썩은냄새 진동하던 정치 패거리들 가운데 유독 그분만은 빛과 소금 같은 존재로 보였던지라, 그분에 대한 생각만으로도청년 신경림은 첫사랑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죽산 조봉암 선생이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였을 때, 무학여고에 이 백여명(한강 백사장에선 신익희 후보가 20만의 청중을 모아 놓고 연설을 하고있었다)의 청중이 모인 가운데 연설을 한 적이 있었다. 이백여청중 가운데 신경림이 섞여 있었음은 물론이었다.
연설이 끝난 뒤 몇몇 일행과 함께 죽산 선생을 모시고 설렁탕을 먹었던 기억은 지금에 와서 떠올려도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훗날 떠돌이 시절에 그는 죽산 선생이 독재정권의 날조된 조작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비감에젖어 종이쪽지에 써 갈겼다.
그때 씌어진 것이 바로「그날」이라는 시이다. 그가 대학2년에 오르자, 그간 가까스로 유지해 오던 가세가 형편없이 기울어지게 되었다.
자식들이 상급학교로 진학하게 되자 아버지는 쪼들리기 시작했다. 한 둘까지는 견뎌낼 만했으나자식들이 자그마치 여섯이었다. 고등학교까지는 그래도 봉급 타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농사지어 밥 먹는 일이가능했으나 내가 대학에 들어가자 등록 금을 마련하느라 땅을 팔아야 했다. 내 동생까지 대학에 들어가자아버지는 땅을 팔아 가지고도 학비를 댈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나의 아버지 '술과 마작보다 더 좋아한 것'
신경림의 아버지는 그 후 퇴직금을 밑천으로 장사에 손을 대지만 워낙에 장사수완이 없는데다가 경험마저 없었던 터여서, 정성과 성실에도 불구하고 바람에 검불 날리듯 어렵게 마련한 자본금마저 날려 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 6남매 가운데 아래로 셋은 중학교조차 다닐 수가 없게 되었다. 하숙비를 감당할 수 없었던 그는 하숙집을 빠져나왔다. 이른바 동가식서가숙이시작되었던 것이다. 입주 가정교사와, 당시 교지 편집장이었던친구 현재(동국대 교수)의 도움과 배려로 외국 소설들을 번역하여가까스로 학비 및 생활비를 조달할 수 있었다.
그밖에 그에게 음우의 덕을 베푼 친구들이 여럿 있었는데 박희진(시인), 인태성(시인), 강민(출판인) 등이 그들이었다. 대학시절 조그만 위안이 하나 있었다면 그것은 친구 유종호와 임재경(한겨레신문 논설위원)등과 어울려 당시 음악다방으로 유명했던 '르네상스'에 앉아 세상의 고뇌와 잡념을 털어 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좌충우돌식의 서울 생활에 어느 만큼 이력이 붙을 즈음, 청년 신경림은 마침내 이한직 선생의추천으로「문학예술」지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게 되었다. 그때가 1956년 늦가을 무렵이었다. 추천작은「갈대」로서 실존주의적 색채가농후한 작품이었다. 국민학교 시절부터 막연히 품어 왔던 시인의 꿈이 비로소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꿈이 실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갈피 없는 서울생활을 더 이상견뎌내지 못하고 하향을 하고 말았다. 하향을 부채질한 이유 중에는 문단에 대한 불신도 한몫 크게 거들었다. 때는 1957년 봄이었다.
서울을 떠나온 시인 신경림은 그때부터 십 년간 문학적으로는 긴 침묵으로, 생활면에서는갖가지 이력으로 신산의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는 결코 짧지 않은 그 세월 동안 오로지 먹고살기 위해서광부, 농사일, 장사, 공사장인부, 학원 강사, 학교 강사 등 안 해 본 것이 없었다. 예컨대 태창광산(당시 충청북도 일원에서 제일 규모가 크고 남한에서도그 크기가 몇째 안 갔다 한다)에서 고향 친구와 함께 일한 적이 있었고, 공사장에 나가 막일을 한 적도 있었다. 또한 아편장수의 길 안내로(이때의 경험은 훗날「눈길」이라는 시로 씌어졌다) 한겨울을 보낸 적도있었고, 강사로 학교에 재직을 하기도 하였는데, 그 학교에서는교원노조운동을 벌이다가 쫓겨나기도 하였다.
이 일로 해서 그는 당시 충주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문우 유종호한테서 월급날마다 부담 없이 얻어 쓰곤 했던 생활비조차 끊이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경찰에 끌려가 취조를 받던 중에 유종호의 이름을 대는 바람에 유종호가 죄 없이 가택수색을 당하는등 많은 수난을 겪게 되어, 그것을 몹시 미안히 여긴 그가 차마 그를 다시 찾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절에 시인 신경림이 겪었던,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하면, 지금 와서 생각해 봐도 고소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의 나이 스물일곱(1962년 5월)이 되던해였다. 그가 평소 즐겨 찾던 선술집에서 그와 고향 친구들은 취흥에 겨워 생각 없이 막말을 함부로 뇌까렸다. 그 중에서도 그가 당시 극성을 부려 대던 제 3공화국에 대해 가장맹렬하게 헐뜯었는데, 누군가 그것을 다음 날 관청에 고발하였다. 이른바 '막걸리 반공법'에 저촉이 된 것이다.
이 일로 해서 5·16직후 그는 참으로 어처구니없게 지명수배를 받게 되었는데, 이 사실을 알려 온 사람은 그의 중학교 동기생이었던 당시 충주읍 경찰서 정보계장 허탁(13대 민주당 국회의원)이었다. 그는새벽녘 볕보다 먼저 일어나 타고 온 자전거를 담벼락에 아무렇게나 쓰러뜨린 채 신경림의 사립문을 걷어찼다. 지명수배자명단에 신경림이 들어 있으니 어서 도망가라는 것이었다. 아직 눈곱도 다 떼지 못한 그는 너무도 터무니없는일에 기가 막혔으나 일은 이미 벌어진 뒤라서 똥줄이 탔다. 그러나 신경림은 도망가고 싶어도 비용이 없으니마음대로 하라고 버텼다.
적반하장이었다. 허탁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너털웃음을 웃어대고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자신의호주머니를 뒤져 있는 돈 모두를 털어 주었다. 지금의 화폐 가치로 치면 십만 원 돈이었다. 허탁은 절대로 잡혀서는 안 되니 어디든 멀리 도망가라는 신신당부를 잊지 않았다.
친구로 인해 곤란을 겪고 있는 허탁이 신경림은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고 우스워 보이기도 했다.
그는 원주로 해서 인제, 제천 등지로 도피를 계속하다 불과 10여 일 만에 목계에서 잡혀 결국 그렇게 노심초사하던 허탁의 바람도 아랑곳없이 허탁이 있는 경찰서로 연행되어갔다. 그때 허탁이 지은 표정은 말 그대로 오물을 씹은 표정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허탁은 시인 신경림을 자신의 구역내에서 아무런 불편이 없도록 갖은 꾀를 써 뒤를 보아주었다. 그 후 신경림은 감옥으로 넘겨져 기소유예 판결을 받고 29일 만에출소하게 되었다. 이렇듯 그가 겪은 십 년 세월은 산 너머 산이었고 강 건너 강이었다. 당시의 절박했던 상황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50년대 말 60년대 초는 내게 있어 참으로어려운 시기였다. 먹고산다는 일이 얼마나 힘드는 일인가를 이때 비로소 절감한 셈이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고 못 할 것이 없다는 심정이었는데, 그무슨 일도 그다지 쉽사리 내 차례에 돌아오지 않았다‥‥‥이때 내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이 증오심뿐이었다.
이 증오심만이 나를 지탱해 주고 있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을 미워했다. 잘 사는 사람을,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학식 있는 사람을 미워했다. 가난한 사람을 미워하고 무지 한 사람을미워했다. 더욱 미워한 것은 이른바 시인들이었다. 나는 이들의성실성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얘기는 전부가 거짓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이것은 다분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이 이들에 대하여 갖는 질투심에서 연유함은 물론이었다.
나는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다. 광산이나 공사장에서 일하는 친구를 찾아가 얹혀지내기도 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들과 함께 노동을 하고 싶었으나 노동을 감당할 만한 체력이 되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 세상에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주막앞에 자전거를 받쳐 놓고 늦도록 막걸리를 마시는 면서기 친구가 더없이 부러웠다. 그러나 이 떠돌이 생활은내가 스스로 정리할 수 있는 어떤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 무렵에 내가 접촉하게 되었던 많은 사람들은 모두 내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 그들은몇 가지 서로 공통되는 점을 가지고 있었다. 한결같이 가난했고, 세상에대 해서 원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복수심과 체념으로 조금씩 비뚤어져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전혀 그들 탓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로지 역사의 피해자요, 체제적 모순의 산물이었다.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받은 충격은 컸다. 내 속에서 들끓던 중오심은 마침내 어느 한쪽을 향해 집중되었다. 그러자나는 차츰 정신적으로 안정되기 시작했다.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 중 '내 시의이야기'
06 서울로 재입성, 제 2의 문단시절
1965년, 시인 신경림은 호구지책의 한 방편으로충북 충주읍의 어느 사설 학원에 영어 강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충주읍내 거리에서문우 김관식과 조우하게 되었다. 둘은 반갑기도 하고 한편 어이가 없기도 하였다. 너무 뜻밖의 만남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김관식은 읍내에서 한약방을경영하시는 형님을 만나러 와 있던 터였다.
김관식은 신경림의 생활이 자못 궁금했다. 그래서 질문의 핵심을 요리조리 피하는 신경림을닥달하다시피 하여 근황을 캐물었고, 근황을 다 듣기도 전에 지금 당장 서울로 올라가자고 성화를 부려댔다. 그렇잖아도 신경림은 갈피 없는 시골에서의 생활에 어지간히 지쳐있었던 터라 문우 김관식의 억지가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여러 날의 궁리 끝에 그는 서울 홍은동에 위치한 김관식의 집으로 들어가 살기로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내리 3년을 살았다. 그 기간동안신경림 내외가 김관식 내외로부터 입은 은혜는 실로 적지 않았다. 예컨대 신시인 내외가 얻어먹은 김치만도실로 다섯 독이 넘을 정도였다. 주지하다시피 당시 김관식 하면 오지랖이 넓기로 문인 동네에서 널리 소문이나있는 터였다. 3년 후 시인 신경림이 생활의 터를 안양으로 옮겨가자,그 자리에 조태일 시인 내외가 들어가 살았다고 한다. 서울로 거처를 옮기고 난 이후 한동안신경림은 YMCA 입시학원에서 영어 강사를 맡아 그 수입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그러나 배정 받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서 생활을 제대로 꾸려 나갈 수는 없었다. 그 시절 김관식 시인의 배려가 아니었던들 서울에서의 그의 생활은 몇 곱절 더 불편했을 것이다.
1970년 시인 신경림은 오랜 침묵을 깨고 마침내 「창작과비평」에 평론가 유종호의 소개로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재등장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위해 그는 그의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던YMCA 학원 강사직도 그만두었다. 당시 불순한 의도를 내포한채 순수문학 일변도를 고집하던 구태의연한 문학 풍토에 식상해 있던 문단 안팎은 젊은 시인 신경림이 일으킨 시의 새 바람으로 모두가 들떠 있었다. 그것은 너무도 신선한 시의 참맛이었고 보수의 낡은 벽을 강타하는 진보의 승리였다.
그 당시의 신경림을 일컬어 많은 이들이 "시인 신경림이 민중시의 물꼬를 텄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민중시의 개막이 그로 인해 시작되었다."고 했다. 그 평이 어떻든지 간에 아무튼, 삶의 진솔한 이야기가 담긴 그의쉬운 시(쉽게 씌어진 시와는 전혀 별개의 것)가 문단 내외에일대 감동의 파란을 몰아왔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목소리에 감정을 실어 말한다면 그것은 시의 정변이요, 혁명이었다. 그리고 그 정변과 혁명은 성공한 것이었고, 장수가 예고된 것이었다. 그때부터 후배들에게 그의 시는 곧 모범이요, 전범이었고 교과서였다. 이른바 그 동안 식자들이 입으로만 목청을높였던 문학과 현실이 처음으로 하나의 육체로 만난 것은 그의 시를 통해서였다.
바야흐로 신경림의 시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한번 터진 그의 시의 봇물은 바닥을 모르고솟구치고 있었다. 그러나 시에 있어서 이와 같은 화려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생활의 궁핍에서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가난의 굴레는 참으로 집요하게 그를 가두고 억눌러 왔다.
그래서 그가 시작한 것이 민요기행이었다. 그는 충주 근방과 경북 쪽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충주사범학교 동창생들을 찾아다니며 민요를 취재했다. 당시 그가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수단이민요기행이었기 때문이다. 민요를 찾아오면 서울에 있는 친구들이 밥과 술, 차비는 물론 생활비까지도 보조해 주었던지라 그는 그 일에 열심이었다. 이렇게해서 김소월 이후 우리 문학사에 자칫 끊길 뻔했던 전통적인 민요의 맥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역설적인표현으로 그의 곤궁한 생활이 아니었던들 우리 문학사는 그만큼 여위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던 그가 민요기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장시「새재」를 준비하면서부터였다. 그때그는 민요를 두 가지 측면에서 중시했는데, 그 하나는 장시를 지루하지 않게 끌고 나가는 데는 가락으로서의민요가 바람직하다는 생각과 시의 내용이 남한강 일대에 떠도는 얘기를 재구성한 것인 만큼, 내용이나 형식면에서민요가 바탕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남한강 일대와 경북, 충북의 민요를 찾아다니기 시작했고, 직접 발굴한 민요가락을 시에도입하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 「목계장터」,「어허 달구」,「달래강 옛나루에」,「옥대문」같은 시들이 그것들인데, 이 같은 민요 시들은 말 그대로 그의 땀과 피가 씨줄과 날줄로 직조되어 이루어 낸 시의 결정(結晶)이라 할 수 있겠다.
그가 민요에 집착한 또 다른 이유로는 우리 시에 짙게 배어 있는 서구 시와 일본 시의 냄새를 벗겨 내는 데에 민요의 가락과 내용만큼중요한 몫을 해낼 수 있는 것이 달리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근대화 이후 우리 시에 끼친 일본시, 또는 주로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구 시의 절대적 영향력은, 우리것에 대한 자긍심 대신 열등감을 조장한 면이 없지 않았다. 그는 이러한 부정의 풍토를 개선하기 위한방법의 하나로 민요를 생각했고, 그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는 데 열중하셨다. 요컨대 단절된 전통문화의 맥을 잇는 첩경이 민요에 있음을 인식한 그는 민요가 있는 곳이면 원근을 불문하고 찾아다녔던것이다.
그는 점차 인식의 폭을 넓혀 민요 근접 분야인 판소리와 탈춤 등 기층 문화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 관심과 참여를 통해 얻은 경험과 결과물들을 시 속에 되살림으로써 민중의 모습을 더욱 실감나게 그려 낼 수있게 되었다. 그의 이러한 민요에 대한 관심은 사적인 것에서 공적인 것으로 심화 확대되어 갔으니, 광주항쟁 직후에 후배 유해정(본명 유인렬)과 함께 민요연구회(1984년∼1989년)를 만든 것이 그것이다.
이 모임을 만든 목적은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우리 사회를 오염시켰던 미국 문화와일본 문화에 대항하여 건강한 우리 문화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고, 둘째는 80년대의 대 탄압으로 철저하게 봉쇄 당한 사람들의 공간을 확보해 보자는 것이었다. 당시 아직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그의 친구들)이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고, 어떠한 모임도 허용되지 않았던암울한 그 시절에 그렇게라도 해서 모임의 계기를 갖고자 민요연구회 모임을 만들게 되었던 것이었다. 민요연구회의활동은 기대 이상으로 활력이 넘쳐나고 있었다.
각 대학에도 민요 서클이 들어섰고 각 지역 문화운동 단체에도 민요 분과와 민요 단체가 들어서게 되었다.이렇게 이 모임이 본궤도에 올라 제법 활기를 띠어 갈 즈음, 한 월간지에서그에게 제의가 들어왔다. 민요를 찾아 전국적으로 다니는 기행을 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의였다. 민요의 중요성을 종종 역설하는 그에게 말로만 그럴 것이 아니라, 현재민요의 실정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직접 현장에 가서 보고 확인하여 그것을 독자에게 알리는 일을 해 보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의 민요기행은 보다 전문적으로 행해지게 되었는데, 그때그가 채집한 민요 가락을 넣어 쓴 시들이 바로 시집 「달넘세』(1985년)에 들어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는 이 시집을 엮고 난 뒤, 자신의 시에 대해 실망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의 시가 그가 보기에도 민요라는 틀에 너무 얽매여, 살아있는 말을 잃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민요라는 형식과 가락의 매력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시의 탄력성을 잃게 되었다는 자각이 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그의 한계가 더 많은 민요 채집과그것에 이어지는 기층 문화의 접촉, 나아가 민요적인 삶을 살다 보면 자연 극복될 수 있으리란 믿음을포기치 않았다. 월간지의 요구에 따라 민요기행은 15개월로끝났지만 그는 민요기행을 마감할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서 자기 고장에도 중요한 민요가 있으니 다녀가달라는 사람들의 요구가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그로서는 겨우 시작한 민요기행을 시작과 함께 끝낼 수는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간의 결과를 일단 책으로 묶어 내놓고는(「민요기행』 제1권, 한길사, 1985년) 다시 기행을 시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한 지방의 민요연구가의권유로 남원에 가서 그 지방 판소리꾼으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되었다. "20년 가까이 공부를했는데도 영 소리가 안 되는 거요.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공부한것 다 버렸지. 아예 20년 공부를 안 한 것으로 치고 멋대로소리를 내보았지. 그러니까 비로소 소리가 돼 나오더라고." 그말은 너무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는 그 동안 그가 익혔다고 생각한 민요 가락을 잊기로 했다. 그러면 의외로 올바른 민요시가나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는 민요에서 해방된 느낌으로 시를 썼다.요컨대 그는 민요에서 해방됨으로써 오히려 민요를 터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만들어진 것이 그의 다섯 번째 시집 「길」(1990년)이었다. 그는 이 시집으로 제 2회 '이산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그가 이 땅 민중들의 애환을 문학의 거름으로 삼아 우리의 시사(詩史)를 살찌우는 동안, 그의아내 이강임은 시름시름 앓아 눕더니 급기야는 1973년 그의 첫 시집인 「농무」(월간문학사 간 300부 한정판)가채 나오기도 전에 위암으로 판명되어 한 많고 설움 많은 한 생애를 너무도 짧게 마감하고 말았다. 생각하면분하고 원통한 일이었다. 평생을 가난에 치여 호강 한번 못 하고 차마 감기지 않는 두 눈을 감았던 것이다. 그때 첫째 애 신병진이 다섯 살이었고, 둘째 애 신옥진이 세 살, 막내 신병규는 젖도 떼지 않은 한 살이었다. 그리고는 그 후로 계속하여 4년 뒤 그의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채 1년이 되지 일아 중풍으로 누우셨던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그는 이들모두를 선영으로 모셨는데 이때에 겪은 세 죽음을 훗날「어허달구」라는 시로 완성시키게 되었다.
사람이 산다는 일 잡초 같더라 밟히고 잘리고 짓뭉개졌다 한 철이 지나면 세상은 더 어두워
흙먼지 일어 온 하늘을 덮더라 어허 달구 어허 달구
홍은동 김관식의 집에서 나온 그는 1960년대 말과70년대 초를 안양에서 보냈다. 그 당시 그는 이렇다 할 직장도 갖지 못했고, 긴급조치 9호 발동 이후로는 글을 써 달라는 곳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매일을 습관처럼 조반 이후 집에서 나왔다.
도보로 20분쯤 소요되는, 먼지가 뽀얗게 이는비포장도로의 길을 걸어나와 서울로 가는 시내버스를 기다리고는 하였다. 서울에 딱히 볼일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관철동에 있는 기원에 가서 처지가 비슷한 문우들끼리 만나 바둑을 두거나 차 한 잔 술 한 잔을 나눠 마시기위해 서였다. 그때 그와 주로어울린 시인은 후배 조태일이었다. 어떤 날은 안양 근교를 하릴없이 배회하다 집에 들어오기도 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 안양의 하늘은 언제나 누렇게 떠 있었다. 공장에서 뿜어 올린각종 매연과 악취가 끊이지 않았고, 냇물은 폐수로 시커멓게 썩고 있었다. 죽음의 냄새가 곳곳에서 피어오르던 그 도시의 한 방직공장 앞에는 대폿집이 있었는데, 시인 신경림은 어쩌다 그곳에 들러 한두 잔의 술을 마시는 일도 있었다. 그때거기서 죄수복 같은 푸른 작업복을 입은 나이 어린 근로자들의 핏기 없는 얼굴들을 보면서 그는 이 답답한 고장을 한 편의 시로 형상화시켜 보자고맘을 먹었다. 이 결심은 훗날 「오지일기」라는 시로 씌어지게 된다. 오랜빈궁의 실업 끝에 그는「교육평론」지에 편집부원으로, 동아출판공사에 편집장으로 재직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까스로 자리잡은 이 생활도 기관의 사주에 의한 유형무형의 압력 때문에 70년대중반에는 그만두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그때 받은 퇴직금으로 서울시 길음동의 허름한 집 한 채를살 수 있게 되었다. 실로 서울 재입성 이후 처음으로 가져 보는 자신의 집이었다.
그는 고향의 식구들을 불러 올렸다. 길음동 방 두 칸짜리 집에는 신경림의 할머님, 어머님, 중풍으로 누워 계신 아버님, 새로 맞은 사모님, 여동생 등 여덟 명이 기거하고 있었다. 생활이 이처럼 궁핍했지만 시인 신경림은 그 누구에게도 그것을 내색하지 않았다.그는 언제나 작달막한 키에 소박한 미소를 짓고 다녔다. 그 뒤 그는 그 집을 팔아 지금의정릉 집으로 이사를 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
이상에서 주마간산격으로나마 그의 생활을 살펴보았듯이 그의 70년대는 가정적으로 몹시 불행한시기였다. 그러나 그는 그에게 닥친 불행에 결코 패배하지 않았다. 그는불행을 시의 자산으로 승화시켜 나갔던 것이다. 1974년 그는 첫 시집「농무」로 제 1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고, 그 이후 꾸준히 작품을발표하여 1977년에 제2시집「새재」를 간행하였다.
1980년 5월, 역사의 수레바퀴는 고비의 언덕길을 끝내 오르지 못하고 진창으로 한없이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일련의 정치 지향의 군인 세력에 의해 민중에 대한 대량 학살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른바 광주 오월 항쟁이 그것이었다. 가까스로 꽃을 피워 나갔던 민주화는 때아닌 무장군인의 군홧발 아래 무참히 짓밟혀졌고 역사의 물결은 십 년 전으로 되돌아 흘러가고 있었다.
그 시기를 전후하여 많은 양심적 지식인들이 투옥되었다. 그해 7월, 신경림 시인 역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구치소에 수감이 되었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된 문인들로는 고은,송기원, 신경림, 조태일, 구중서 등등인데 고은과 송기원은 형을 받아 징역을 살게 되었고, 신경림, 조태일, 구중서 등은 조사를 받은 후 두 달만에 공소기각으로 풀려나게되었다. 당시 서대문 구치소에는 진보적 지식인들의 간판 격들이 거의 다 모여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더욱 그들의 유대를 강화시켜 나갔다고 한다. 당시의 군사정권은 흩어진불씨들을 모아 더 큰 하나의 불씨를 만든 셈이다. 출옥 후 이들이 보여 준 가열한 민주화의 투쟁 및성과가 그것을 말해준다.
그때 시인 신경림과 평론가 구중서에 얽힌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어 짤막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구치소 생활 마지막 날이었다. 재판에서 공소기각 판결을 받고 나갈 시간을 기다리며 신경림과구중서가 바둑을 두고 있었다.
첫판은 신경림의 승이었다. 그때 교도관이 정리가 다 되었으니 어서 준비해서 나가라고 성화를했다. 그런데 구중서가 나가려는 신경림을 가로막았다. 한판 더 두고 가자는 것이었다.
신경림은 어이가 없었다. 2개월 동안 불편한 구치소 생활에 얼마나 지겨워했던가. 얼마나 밖에 나가고 싶어 안달하였던가. 그런데 지금 공소기각으로풀려나가게 된 마당에 다른 곳도 아닌 구치소 안에서 첫판을 졌다고 다시 한 판을 더 두자고 하다니. 그러나신경림도 지지 않았다. 둘은 구치소 직원의 어서 나가 달라는 성화에도 아랑곳없이 또 한 판의 바둑을다 두고서야 그곳을 나왔다.
문인들이 아니라면 상상키 어려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서대문 형무소(당시에는 구치소와 같이 있었다) 출소 이후라 해서 그의 생활이 특별히달라진 것은 없었다. 1980년대 전반기는 참으로 우울한 나날뿐이었다.광주민중들의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한 군부 쿠데타 세력들은 무소불위의 권능으로 이 땅의 양심 세력들을 괴롭혀댔다.
침묵이 강요된 시대에 시인 신경림은 이곳저곳 그를 부르는 곳이면 원근을 가리지 않고 달려가 어둠의 장막을 찢기 위해 갖은 노력을다했다. 이른바 그의 강연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그의 강연을듣기 위해 전국 각처의 젊은이들이 걸핏하면 그를 불렀고, 그는 그들의 부름을 마다하지 않았다. 몸고생이 여간 심한 게 아니었지만 언제나 마음은 뿌듯했다. 그런어느 날부터인가 그림자처럼 담당 형사가 그를 쫓아다녔다.
그 당시 그는 진문출판사에 기획위원으로 참여하여 간신히 밥줄을 있고 있었는데, 그것마저담당 형사의 집요한 방해 공작으로 인해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담당 형사의 직업 정신(?)은 시인 신경림의 성묘 길에도 따라 나설 정도였다. 참으로 극성맞은찰거머리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시인 신경림이 그를 찾는 모임에 빠진 적은 없었다.
문학과 삶을 끊임없이 일치시키려 노력했던 그는 80년대 내내 어려운 고비마다 재야의 중요한직책을 맡아 그의 재능을 바쳐 왔다. 198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1975년발족한 단체. 그는 그때 초대 간사직을 지냈다)의 고문직을지냈고, 또한 그 해에 민주화청년운동연합 지도위원을 지냈으며, 역시그 해로부터 1989년까지 민요연구회 의장직을, 1985년에서 1987년까지는 민족민주통일운동연합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1987년에는전민련 감사 등을 지낸 것이 바로 그것이다. 1980년대를 살면서 유일한 즐거움이 있었다면 그것은 이주일에 한 번씩 반가운 얼굴들과 함께 북한산에 오르는 것이었다.
성내운 선생(1989년 작고)을 중심으로 신경림, 이부영, 현기영, 정희성, 김종철, 김학민, 임채정, 안종관 등과 함께 '무명' 산악회를만들어 이 주일에 한차례씩 산에 올라 서로가 정담을 나누고, 세상에 대한 팍팍함을 풀다 보면 그 답답한세월이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사회 정치적으로 어둡고 암담한 시절이었지만 문학은 오히려 암울한시대 상황으로 인해 더욱 팔기를 띠어 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광채는 더욱 빛나는 법. 시인 신경림의 시의 광채는 밤하늘의 원광으로 떠밤길을 걷는 이의 좌표가 되어 주기도 하고, 길벗이 되어 주기도 하셨다.
1981년 그는 제8회 한국문학작가상을 수상하게되었다. 그 해에「한국 현대시의 이해」(공저)를 간행하였고, 1983년 산문집『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을 간행하였으며, 1985년에 제 3시집『달넘세」와「민요기행」제 1권을 간행하였다. 그 다음다음 해에는 장시집「남한강』을, 1988년에는 제 4시집『가난한 사랑노래」, 1989년에는「민요기행」제 2권을 간행하는 등 80년대를 창작자로서 그 누구보다 알차게 보냈다.
그는 민족문학작가회의 부회장을 지내다가 1991년 12월 1일 김정한, 고은 씨에 이어 제5대회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사)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 공동의장직을역임하였다.
그간에 맡았던 그 많은 직책에도 불구하고, 그는 젊었을 적 궁핍의 해결 수단으로 시작했던민요기행을 한번도 거른 적이 없었다. 지금도 그는 월 2∼3회에걸쳐 전국 각 지역을 순회하며 그 자신 그 출신이기도 한 밑바닥 인생들의 신산스러운 삶을 귀기울여 듣고 기록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도 시인 신경림은 국토의 한 자락을 밟고 있을 것이다.